1. 개요
존 제프리스 프랫 초대 캠든 후작(John Jeffreys Pratt, 1st Marquess Camden영어, 1759년 2월 11일 ~ 1840년 10월 8일)은 영국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귀족이다. 그는 소 피트 내각에서 아일랜드 총독 (1795년 ~ 1798년), 전쟁 및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 (1804년 ~ 1805년), 추밀원 의장 (1805년 ~ 1806년, 1807년 ~ 1812년) 등 주요 공직을 역임했다. 특히 아일랜드의 격동기였던 1798년 아일랜드 반란 당시 총독으로 재임하며 강압적인 정책을 펼쳐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의회 개혁과 가톨릭 해방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나, 말년에는 가톨릭 해방에 찬성하는 등 일부 변화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재무부 출납관으로서 막대한 수입을 포기하고 그 상승분을 국가에 반납한 일은 그의 청렴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또한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양모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캠든 지역에 그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역사적으로는 아일랜드 총독으로서의 무능함과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동시대인들에게도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존 제프리스 프랫은 1759년 2월 11일 런던의 링컨스 인 필즈 34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찰스 프랫 변호사(이후 초대 캠든 백작)와 엘리자베스(니 니콜라스 제프리스)의 외아들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전 영국 대법원장이었던 존 프랫 경이었다. 프랫은 핼리 혜성이 나타난 날 세례를 받았다. 1765년, 그의 아버지 찰스 프랫 경이 영국 보통법원 수석재판관으로 임명된 후 캠든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존 제프리스 프랫은 '존 프랫 경(The Hon. John Pratt)'으로 불리게 되었다.
2.1. 유년 시절과 교육
어린 시절 존 제프리스 프랫은 버킹엄셔주의 포울리에서 교구 목사 토머스 포이스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후 1776년 11월 11일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779년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윌리엄 피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프랫은 1779년 3월 웨스트 켄트 민병대에 보병 소위로 입대했으며, 같은 해 5월 중위로 진급했으나 1782년 6월 민병대에서 사임했다. 그는 7세에 불과했던 1766년 8월, 재무부 출납관 직책에 대한 복귀권을 얻었으며, 1780년 5월 21일 이 직책에 정식으로 취임했다.
3. 정치 경력

존 제프리스 프랫의 정치 경력은 1780년 영국 의회에 입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여러 중요한 정부 직책을 역임하며 영국의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3.1. 하원 의원
1780년, 프랫은 아버지의 지원으로 바스 선거구에서 영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1759년부터 바스 시의 기록관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프랫은 무투표로 당선되었다。의회에 입성한 초기에는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 그의 아버지에 따르면, 프랫은 "새벽 3시쯤 잠들어 11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말을 타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다음은 저녁 식사이고, 밤은 당연히 향락으로 보냈다. 클럽에서는 정치에 대해 약간 이야기하지만, 이 나라의 실태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의원으로서의 책무는 다했다. 노스 내각 시기에는 항상 야당에 동조하여 투표했으며, 1781년 6월 12일 미국 독립 전쟁 중 13개 식민지의 반란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으로 첫 연설을 했으나, 매우 긴장하여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숙했다. 이후 1790년까지는 1782년 5월 6일 단 한 번의 연설 기록만 남아 있다.
셸번 백작 내각에서 1782년 7월 13일부터 1783년 4월 8일까지 해군성 차관보를 역임했으며, 1783년 2월에는 미국 독립 전쟁의 예비 평화 조약에 찬성표를 던졌다. 폭스-노스 연립 내각 시기에는 직책을 맡지 않았으며, 1783년 5월에는 선거법 개정에 찬성했고, 11월에는 찰스 제임스 폭스의 영국 동인도 회사 규제 법안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제1차 소 피트 내각이 수립되자 1783년 12월 30일 해군성 차관보로 복귀했다.
1784년 영국 총선에서 재선을 노렸으나, 바스 선거구에서 또 다른 현직 의원인 아벨 모이지가 연립 내각을 지지하여 소 피트 내각은 두 번째 여당 후보를 물색했다. 결국 소 피트 총리 자신이 출마했으나, 투표일 이전에 소 피트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바스 의석이 필요 없게 되자 적극적인 선거 활동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모이지가 17표로 14표의 소 피트를 제치고 당선되었고, 프랫 자신은 27표로 1위를 차지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1790년 영국 총선에서는 소 피트가 바스 의석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아 프랫은 27표로 손쉽게 재선되었다.
1789년 4월 8일 재무부 차관보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7월 6일 해군성 차관보에서 물러났다. 1793년 6월 21일에는 추밀원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1794년 4월 18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캠든 백작 작위를 계승하여 5월 13일 귀족원 의원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5월 재무부 차관보 직책에서도 물러났다. 그는 1793년부터 바스의 기록관으로도 임명되어 1835년까지 재임했다.
3.2. 재무부 출납관
존 제프리스 프랫은 1780년 5월 21일 재무부 출납관 직책에 취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이 직책은 매우 수익성이 높은 자리였으며, 1782년에는 연봉이 2500 GBP였으나 1808년에는 2.30 만 GBP로 크게 상승했다. 그는 1812년 이후 이 직책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수입을 받기를 거부했다. 그가 받지 않은 재무부 출납관의 연봉은 총 25.00 만 GBP 이상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직책은 1834년에 폐지되었으나, 캠든 후작은 사망할 때까지 연봉 2500 GBP를 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3.3. 초기 정부 직책
프랫은 셸번 백작 내각(1782년 ~ 1783년)과 소 피트 내각(1783년 ~ 1789년)에서 해군성 차관보를 역임했다. 이어서 1789년부터 1792년까지는 재무부 차관보로 활동하며 초기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그는 소 피트의 정책을 지지하며 정부의 주요 행정 업무에 참여했다.
4. 아일랜드 총독 재임 (1795-1798)
존 제프리스 프랫은 1795년부터 1798년까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재임하며 아일랜드의 격동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는 아일랜드 반란이 발발하는 등 극심한 사회 불안이 특징이었다.
4.1. 정치적 입장 및 정책
1793년 6월, 프랫은 소 피트가 자신을 아일랜드 총독으로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음을 헨리 애딩턴 하원 의장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7월에 소 피트가 이 생각을 확인하자, 소 피트와 캠든 백작은 총독으로서의 정책을 논의하고 캠든 백작의 총독 임명을 1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아일랜드 총독에는 귀족이 취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프랫은 아버지 생전에 단순히 총독 취임을 위해 귀족이 되는 것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1794년 4월 아버지의 사망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포틀랜드 공작 파벌의 내각 입각으로 캠든 백작의 총독 취임은 더욱 늦어졌고, 1795년 총독 피츠윌리엄 백작이 소환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피츠윌리엄 백작은 성급한 개혁을 추진하여 반발을 샀고, 소 피트가 완전한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인물을 후임으로 찾았기 때문에 캠든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수락하여 1795년 3월 13일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소 피트는 이 임명이 조지 3세 국왕과 포틀랜드 공작의 동의를 얻었으며, 캠든 백작에게는 "우리 우정의 가장 강력한 증명"이라고 편지로 전했다.
캠든 백작은 3월 31일 더블린에 도착했으나, 그가 탄 마차가 더블린성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폭동이었다. 육군이 출동하여 폭동을 진압했으나, 2명이 사망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같은 날, 그는 아일랜드 추밀원의 추밀원 고문관으로 취임했다.
캠든 백작의 재임 초기에는 융화적인 정책이 시도되었으나, 곧 강압적인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융화적인 정책의 한 예로 1795년 메이누스 칼리지법 (메이누스 칼리지 설립 법률)이 있는데, 이는 카톨릭 성직자의 영향력을 낮추고 국왕에게 복종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반면 5월에는 헨리 그래턴이 제출한, 가톨릭 신자들에게 아일랜드 하원 의원이나 고위 관직에 취임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가톨릭 해방의 일환)을 부결시켰다. 그는 의회 개혁과 가톨릭 해방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4.2. 아일랜드 반란과 대응
캠든 백작의 취임 몇 주 후, 혁명가 울프 톤은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가 설립한 연합 아일랜드인 협회는 재편되어 혁명을 목표로 하는 단체가 되었다. 국교회 측도 민간 단체를 결성했고, 민간 단체 간의 항쟁으로 아마 주 등지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특히 아마 주에서는 1795년 9월 디펜더스 운동과 핍 오 데이 보이스 간의 더 다이아몬드 전투가 발발하여, 그 결과 국교회 측에서 오렌지 기사단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여 1796년에 개회한 아일랜드 의회는 소요 진압을 목표로 하는 법안을 가결시켰다. 같은 해 8월, 캠든 백작은 인신보호법 정지를 주장하고, 그동안 반대했던 요먼리 연대의 설립에 찬성하기 시작했다. 한번 폐회했던 아일랜드 의회가 같은 해 10월 다시 개회하자, 프랑스 혁명 전쟁 중 프랑스 총재정부가 아일랜드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의회는 137대 7로 인신보호법 정지를 가결했다.
프랑스의 침공은 루이 라자르 오슈 장군이 이끄는 원정 형태로 실제로 이루어졌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사회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고, 1797년 1월부터 2월까지 얼스터의 여러 주에서, 3월에는 얼스터 전체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내무장관 포틀랜드 공작은 선거법 개정이나 가톨릭 해방에 양보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캠든 백작은 그럴 경우 사임하겠다고 밝히며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 유용한 한, 잉글랜드의 정당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의견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현 상황에서 대중적인 수단으로 아일랜드를 통치하는 것은 극히 위험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의견에 대해 『영국 인명사전』은 캠든 백작이 소 피트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의 연합 구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1797년 5월, 캠든 백작은 상황 악화로 군사력으로만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임을 제안하고, 후임으로 군인인 초대 콘월리스 후작 찰스 콘월리스를 추천했다. 그러나 콘월리스는 아일랜드 정책에 반대하며 외국의 침공 직전이 아니라면 취임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이후 같은 해 여름의 1797년 아일랜드 총선은 특별한 문제 없이 치러졌다. 같은 해 11월 랄프 애버크롬비가 아일랜드 주둔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자 캠든 백작은 유능한 애버크롬비의 취임에 기뻐했으나, 애버크롬비가 육군 재건을 강행한 결과 클레어 백작과 포스터의 불만을 사서, 두 사람의 압력으로 애버크롬비는 사임했다.
캠든 백작은 1798년 3월에도 소 피트에게 주둔군 총사령관과 총독을 겸임할 수 있는 인물(즉, 군인)의 임명을 요청했다. 이때는 대규모 반란 직전의 상황이었으며, 『아일랜드 인명사전』은 캠든 백작에게 위기관리 능력이 전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1798년 5월 23일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이 발발하자 소 피트는 이전부터의 연합 구상 추진을 결정하고, 6월 15일 콘월리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한편 캠든 백작은 공황 상태에 빠져, 휘하의 군세 8만으로는 반란군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포틀랜드 공작에게 증원을 요청하고, 가족을 급히 잉글랜드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소 피트의 결정을 알게 되자 연합을 지켜보지 못하고 퇴임해야 하는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인명사전』은 캠든 백작의 가톨릭 해방 반대가 유임될 수 없는 요인이었으며, 그 자신의 말을 빌려 "편견이 심한 잉글랜드인"이라고 평가했다. 콘월리스는 6월 20일 더블린에 도착했지만, 이때는 반란이 거의 종식되어 가는 시점이었고, 동시기 팸플릿에서는 "반란군을 제압할 필요도 없이 반란을 끝냈다"고 야유를 받기도 했다.
5. 주요 공직 및 활동
아일랜드 총독 재임 이후, 존 제프리스 프랫은 영국 내각의 주요 직책들을 역임하며 다양한 공적 활동을 펼쳤다.
런던으로 돌아온 캠든 백작은 반란 발발의 책임을 지는 희생양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무임소 장관으로서 내각에 머물렀다. 1799년 8월 14일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소 피트의 연합 구상에 찬성했으며, 클레어 백작 등은 콘월리스보다 캠든이 연합을 지켜볼 총독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가톨릭 해방에 대해서도 연합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양보해도 좋다고 생각했으며, 1801년 가톨릭 해방 문제로 소 피트가 사임하자 캠든 백작도 무임소 장관직을 사임했다. 1802년 2월 11일에는 런던 고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5.1. 전쟁 및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
1804년 5월 26일, 캠든 백작은 전쟁 및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으로 취임하여 1805년 7월까지 재임했다. 그는 "고된 일을 하는 관료"로 여겨졌으며, 더 중요한 사안들은 소 피트 총리가 직접 담당했다.
5.1.1.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기여
캠든은 전쟁 및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 재임 중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양모 산업의 선구자인 존 매카서가 왕실 소유의 메리노종 양을 식민지로 가져가는 것을 허가했다. 또한 뉴사우스웨일스 총독 필립 기들리 킹에게 명령하여 매카서에게 광대한 방목지를 제공하도록 했다. 킹의 후임으로 윌리엄 블라이를 임명한 사람도 캠든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양모 산업에 대한 그의 공로로 현재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있는 캠든이라는 도시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2. 추밀원 의장
캠든 백작은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추밀원 의장을 역임했다. 첫 번째 임기는 1805년 7월 10일부터 1806년 2월 5일까지였으며, 이 시기에는 주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거국인재 내각의 성립으로 퇴임했으나, 소 피트 파에 속하면서도 공공연히 야당 활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두 번째 임기는 제2차 포틀랜드 공작 내각이 성립되면서 1807년 3월 26일에 시작되었고, 이어진 스펜서 퍼시벌 내각에서도 유임되어 1812년 6월 11일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캠든이 내각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1812년에는 조지 캐닝이 캠든을 "내각의 쓸모없는 잡동사니"라고 혹평했고, 캠든 또한 캐닝의 내각 입각에 반대했다. 퇴임 후에도 1812년 말까지 무임소 장관으로서 각료로 남아 있었다.
5.3. 켄트 주지사
캠든 후작은 1808년 6월 켄트 주지사로 임명되어 1840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1809년 5월 16일 크랜브룩 및 우즈게이트 민병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809년 12월 7일부터 1816년 6월 10일까지 트리니티 하우스의 마스터를 지냈으며, 1811년 4월 29일에는 차터하우스 스쿨 이사로 임명되었다.
5.4. 캠브리지 대학교 총장
1832년, 캠든 후작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34년 12월 12일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1840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6. 작위 및 귀족원 활동
존 제프리스 프랫은 1794년 4월 18일 아버지의 사망으로 캠든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이후 1812년 9월 7일 영국 연합 왕국 귀족 작위인 브렉녹 주 백작과 캠든 후작에 서임되었다. 이 서임은 스펜서 퍼시벌 총리가 1812년 2월에 동의했던 것으로, 후임인 리버풀 백작 재임 중에 실현되었다.
후작이 된 캠든은 귀족원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812년 7월 가톨릭 해방에 대한 입장을 반대에서 찬성으로 전환했다. 1817년에는 인신보호법 정지에 찬성했으며, 1829년 로마 가톨릭 신자 구제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1831년부터 1832년에 걸쳐 제1차 선거법 개정에는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1826년에는 영국 박물관 이사로 취임하여 1840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7. 개인 생활 및 가족

캠든 경은 1785년 윌리엄 몰스워스의 딸인 프랜시스와 결혼했다. 프랜시스는 1766년 2월 27일 이전에 태어나 1829년 7월 7일 서식스주 베이엄 애비에서 사망했다. 캠든 경은 그녀보다 11년을 더 살았으며, 1840년 10월 8일 서리주 실의 더 와일더니스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일한 아들인 조지가 작위를 계승했다.
부부는 1남 3녀를 두었다:
- 프랜시스 앤 (1787년 11월 21일 ~ 1822년 7월 9일)
- 조지아나 엘리자베스 (1791년 7월 4일 ~ 1855년 8월 8일)
- 캐롤라인 (1794년 7월 21일 ~ 1827년 10월 7일) - 1825년 7월 28일 알렉산더 로버트 스튜어트(1850년 3월 24일 사망)와 결혼
- 조지 찰스 (1799년 5월 2일 ~ 1866년 8월 6일) - 제2대 캠든 후작
가족은 런던 중심부 웨스트민스터 시티의 세인트 제임스 지역 알링턴 스트리트 22번지에 위치한 윔본 하우스를 소유하고 거주했다. 이 집은 더 리츠 런던 호텔과 인접해 있다. 그는 사망하던 해인 1840년에 이 집을 제7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싯에게 매각했다.
8. 이념 및 사회적 관점
존 제프리스 프랫은 대체로 보수적인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대의 주요 사회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보였다.
8.1. 의회 개혁 반대
프랫은 의회 개혁 요구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1831년부터 1832년에 걸쳐 진행된 제1차 선거법 개정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는 당시의 선거 제도가 지닌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거나, 급진적인 변화가 사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보수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8.2. 가톨릭 해방 반대
초기에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1795년 아일랜드 총독 재임 시 헨리 그래턴이 제출한 가톨릭 해방 법안을 부결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아일랜드 총독으로서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 유용한 한, 잉글랜드의 정당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적 권리 확대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801년 연합과 동시에 가톨릭 해방이 이루어진다면 양보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1829년 로마 가톨릭 신자 구제법에 찬성표를 던지는 등 점진적으로 입장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9. 평가 및 영향
존 제프리스 프랫의 경력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여러 논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공존한다.
9.1. 긍정적 평가
하원 의원으로서의 초기 영향력은 미미했지만, 1795년 아일랜드 총독 임명 이후부터는 비로소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의 성격 덕분에 아일랜드의 유력 인사들에게 호감을 얻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재무부 출납관으로서 1812년 이후 급증한 연봉 수입(총 25.00 만 GBP 이상)을 받기를 자진하여 거부한 것은 그의 청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이 직책이 1834년 폐지될 때까지도 그는 이전에 받던 연봉인 2500 GBP만 받았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양모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재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있는 캠든이라는 도시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기도 했다.
9.2. 비판 및 논란
캠든 백작의 아일랜드 총독 재임 기간은 "폭동으로 시작하여 반란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21세기 초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아일랜드 상황을 변화시키기에는 "무력한 인물"이었다. 재임 초기에는 융화적인 정책을 시도했으나, 곧 강압적인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윌리엄 오어 사건(의심스러운 증인의 증언으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오어의 사면을 거부한 사건)은 대중의 큰 분노를 샀다. 그는 인신보호법을 정지시키고 연합 아일랜드인 협회를 해체하기 위해 무자비한 계엄령 캠페인을 펼쳤다.
『아일랜드 인명사전』은 그에게 위기관리 능력이 전혀 부족했다고 평가했으며, 그의 가톨릭 해방 반대 입장을 두고 "편견이 심한 잉글랜드인"이라고 비판했다. 1798년 반란 발발 당시 그는 공황 상태에 빠져 증원을 요청하고 가족을 급히 잉글랜드로 돌려보내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아일랜드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반란 발발의 책임을 지는 희생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전쟁 및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보잘것없다"고 평가받았으며, 더 중요한 사안들은 소 피트 총리가 직접 처리했다. 1812년에는 조지 캐닝으로부터 "내각의 쓸모없는 잡동사니"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의 누이의 의붓아들이자 그와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캐슬레이 자작의 해임 계획을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그에게 경고하지 않아 격렬한 가족 불화를 초래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캐슬레이 자신은 캠든을 적이 아닌 "약한 친구"로 여겼고 결국 화해했지만, 스튜어트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은 캠든의 불충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동시대의 조나 배링턴 경은 총독으로서의 캠든 백작에게 동정적이었으나, 아일랜드 남부의 유력 인사였던 제2대 섀넌 백작 리처드 보일은 반란에 직면하여 캠든 백작이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10. 말년
캠든 후작은 말년에도 귀족원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812년 7월 가톨릭 해방에 대한 입장을 반대에서 찬성으로 전환했으며, 1817년에는 인신보호법 정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1829년 로마 가톨릭 신자 구제법에도 찬성표를 던졌으나, 1831년부터 1832년에 걸쳐 제1차 선거법 개정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1826년에는 영국 박물관 이사로 취임하여 1840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183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1834년 12월 12일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1840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그는 런던의 알링턴 스트리트 22번지에 위치한 윔본 하우스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사망하던 해인 1840년에 제7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싯에게 매각했다.
11. 사망
존 제프리스 프랫 초대 캠든 후작은 1840년 10월 8일 켄트주 실에 위치한 그의 영지인 더 와일더니스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그의 유일한 아들인 조지가 그의 작위를 계승했다.
12. 관련 항목
- 찰스 프랫 (초대 캠든 백작)
- 윌리엄 피트 소피트
- 아일랜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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