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헤르베르트 바케는 조지아 (국가)의 바투미에서 은퇴한 프로이센 중위이자 상인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19세기 초 뷔르템베르크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코카서스 독일인 가문 출신이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바케는 1905년부터 트빌리시 김나지움(문법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로이센 시민이었기 때문에 적국인으로 분류되어 억류되었다.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던 경험과 러시아 혁명의 시작을 목격한 것은 바케를 반공주의자로 만들었다.
바케는 러시아 내전 동안 스웨덴 적십자사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이주했다. 독일에서 그는 처음에는 노동자로 일했으며, 1920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농학을 공부하기 위해 등록했다. 학위를 마친 후 잠시 농업 분야에서 일했고, 이후 하노버 공과대학교에서 농업 지리학 조교로 일했다. 1926년, 그는 괴팅겐 대학교에 박사 학위 논문인 Die russische Getreidewirtschaft als Grundlage der Land- und Volkswirtschaft Russlands독일어 (러시아의 곡물 경제가 러시아 농업 및 국민 경제의 기반이 되는 방식)을 제출했으나 거부되었다. 바케의 논문은 사실상 "인종 제국주의를 위한 선언문"이었으며, 독일 점령자들이 현지 "민족적으로 열등한" 인구와 식량 통제를 놓고 싸울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2. 초기 경력 및 활동
바케는 1922년에 돌격대에 가입했고, 1925년 하노버에서 나치당에 입당했다. 남하노버 지역 정치 조직(가우)이 해산된 후, 바케는 당원 자격을 상실했다.
1927년 바케는 포메라니아의 대규모 농장에서 검사관이자 관리자로 일했다. 1928년에는 우르줄라와 결혼했다. 장인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1928년 11월, 그는 알펠트 (라이네) 지역에 약 950 acre 규모의 혼젠 영지를 임차하여 소작농이 되었다. 그는 이 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2. 나치당 및 정부 활동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 바케는 1933년 10월 27일 식량농업부의 국가비서관이 되었고, 같은 달 친위대에 가입했다.
2.1. 나치당 및 친위대(SS) 입당
바케는 1922년 겨울부터 1923년 8월까지 돌격대에 입대하여 활동에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1일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87,882). 1926년 11월 24일 한때 탈당했으나, 농장을 운영하던 1930년경 다시 나치당 활동에 접촉하게 되어 1931년 10월 1일 재입당했다.
1933년 10월 1일, 바케는 친위대 소령(SS-Sturmbannführer독일어) 계급으로 친위대에 들어갔다(대원 번호 22,766). 그는 친위대 내에서 친위대 인종 및 이주 본부에 배속되었다. 이후 친위대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다음과 같은 계급을 달성했다.
- 1933년 10월 1일: 친위대 소령 (SS-Sturmbannführer독일어)
- 1934년 3월 29일: 친위대 중령 (SS-Obersturmbannführer독일어)
- 1934년 4월 20일: 친위대 대령 (SS-Standartenführer독일어)
- 1934년 9월 9일: 친위대 상급대령 (SS-Oberführer독일어)
- 1935년 1월 1일: 친위대 준장 (SS-Brigadeführer독일어)
- 1938년 1월 30일: 친위대 소장 (SS-Gruppenführer독일어)
- 1942년 11월 9일: 친위대 대장 (SS-Obergruppenführer독일어)
2.2. 식량농업부 차관 및 장관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바케는 1933년 10월 27일부터 리하르트 발터 다레 식량장관 밑에서 식량농업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5월 23일, 식량농업부 장관 리하르트 발터 다레가 장기 휴가를 가게 되자, 바케는 명목상 국가비서관으로 남아있었지만 그의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바케는 또한 나치당 국가 지도부에서 다레가 맡고 있던 '국가 농민 지도자' 직책의 책임도 맡았다. 1944년 4월 6일, 히틀러는 마침내 바케를 식량농업부 장관으로 정식 임명했다.
2.3. 기타 주요 직책
바케는 프로이센 국가평의회의 일원이었고, 1936년 10월에는 헤르만 괴링의 4개년 계획에서 농업 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베르너 베스트, 빌헬름 슈투카르트와 같은 나치 체제에서 2차 행정 직책을 맡았던 젊은 세대 기술 관료주의자들의 저명한 일원이었다. 공식적으로 빌헬름 프리크가 이끌었던 내무부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슈투카르트처럼, 바케는 다레 밑에서 공식적으로 직무를 인계받기 전부터 사실상 식량농업부 장관이었다. 그는 "식량 독재자"로 평가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식량 정책을 총괄했다.
3. 사상 및 '기아 계획'
3.1. 사상적 배경
바케는 교조적인 인종주의 이데올로그였으며, 리하르트 발터 다레의 오랜 동료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개인적인 친구였다. 그는 기술 관료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며, 다레가 주창한 '피와 흙' 이데올로기를 경멸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인종 제국주의를 위한 선언문"으로 평가받았으며, 독일 점령자들이 현지 "민족적으로 열등한" 인구와 식량 통제를 놓고 싸울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3.2. '기아 계획' (Hunger Plan)

바케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동부 점령지 국가장관에 의해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비서관으로 지명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급진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정책인 '기아 계획'(Der Hungerplan독일어, 또는 Der Backe-Plan독일어)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 계획의 목표는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본토 인구와 국방군을 위해 모든 식량 공급을 전용함으로써, 독일 점령 하의 슬라브족 민간인들에게 의도적인 대규모 기아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바케의 가장 중요한 공범은 동부 경제 참모부의 농업 부문을 이끌었던 한스요아힘 리케였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에 따르면, 바케의 계획의 결과로 "1941년부터 1944년까지 420만 명의 소련 시민(주로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이 독일 점령자들에 의해 굶어 죽었다." 1941년, 바케는 독일에 식량 부족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아돌프 히틀러 총통에게 진언했으며, 5월에는 4개년 계획청과 함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전쟁 수행을 위해 소련 점령지에서 식량을 수탈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 수백만 명의 슬라브족이 굶어 죽을 것이라는 예측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의 식량 확보가 최우선이며 슬라브족의 아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이러한 생각은 헤르만 괴링이나 하인리히 힘러와 같은 나치 고위 관리들도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및 말년
4.1. 전쟁 중 역할
바케는 '기아 계획'의 실행을 포함하여 전쟁 수행을 위한 식량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식량농업부 장관으로서 독일의 식량 공급을 확보하고, 점령지에서 식량을 수탈하여 독일 본토와 군대에 공급하는 정책을 주도했다.
4.2. 체포 및 재판
바케는 아돌프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식량농업부 장관으로 유임되었고, 카를 되니츠가 이끄는 단명한 플렌스부르크 정부에서 1945년 5월 23일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독일의 항복 후, 바케는 율리우스 도르프뮐러와 함께 연합군에 의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랭스에 있는 최고사령부로 비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식량 문제 전문가로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포에 놀랐다. 바케는 아이젠하워 장군과의 예상되는 대화에 대비했다. 1946년 1월 31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치즘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 중 하나로 옹호했으며, "국가사회주의 농업 정책에서 가장 강력한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연합군에 구금된 상태에서 바케는 1947년 2월 21일과 3월 14일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심문을 받았다. 뉘른베르크 전범 수용소의 감방에서 바케는 두 편의 논문, 즉 자신의 삶과 나치즘에 대한 소위 '대보고서'와 1946년 1월 31일 아내 우르줄라와 네 자녀를 위한 유언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소련으로 인도될 것을 두려워하여 1947년 4월 6일 자신의 감방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일부 자료에는 사망 날짜가 1947년 4월 7일로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5. 사망
헤르베르트 바케는 1947년 4월 6일, 수감 중이던 뉘른베르크 형무소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6. 평가 및 논란
바케는 리하르트 발터 다레의 후임으로 식량농업부 장관이 된 후, 독일 식량 정책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그의 핵심 정책인 '기아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 점령지에서 수백만 명의 슬라브족과 유대인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굶겨 죽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독일 본토와 군대의 식량 확보를 위해 점령지의 식량을 수탈하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대규모 아사를 용인한 반인륜적인 정책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바케의 이러한 정책이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대량 학살을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한다. 그는 단순히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긴 핵심 인물로 지목된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부터 드러난 "인종 제국주의" 사상은 그의 정책 결정에 깊이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기아 계획'의 잔혹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바케의 행적은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의 전형적인 사례로 남아 있으며, 그의 이름은 나치 정권의 잔혹한 식량 정책과 그로 인한 인도주의적 재앙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7. 개인적인 삶
바케는 1928년 10월 26일 우르줄라 칼(Ursula Kahl독일어)과 결혼하여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키는 175 cm였다. 종교는 원래 개신교였으나, 1942년 친위대의 방침에 따라 기독교 교회를 떠났다.
8. 서훈 및 계급
8.1. 친위대 계급
헤르베르트 바케는 친위대 입대 후 다음과 같은 계급으로 승진했다.
- 1933년 10월 1일: 친위대 소령(SS-Sturmbannführer독일어)
- 1934년 3월 29일: 친위대 중령(SS-Obersturmbannführer독일어)
- 1934년 4월 20일: 친위대 대령(SS-Standartenführer독일어)
- 1934년 9월 9일: 친위대 상급대령(SS-Oberführer독일어)
- 1935년 1월 1일: 친위대 준장(SS-Brigadeführer독일어)
- 1938년 1월 30일: 친위대 소장(SS-Gruppenführer독일어)
- 1942년 11월 9일: 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ührer독일어)
8.2. 주요 훈장 및 표창
바케는 나치 독일 및 기타 국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 전공십자훈장
- 2급 (검 없음)
- 1급 (검 없음)
- 황금 나치당원 배지 (1938년 1월 30일)
- 나치당 장기근속장
- 동장
- 은장
- 친위대 장기근속장
- 친위대 전국지도자 명예의 단검 (1937년 12월 1일)
- 친위대 해골 반지 (1936년)
- 친위대 민간 휘장 (번호 45,853)
- 율라이히터 (1935년 12월 16일)
- 구참모대원 명예 쉐브론
- 1938년 3월 13일 기념 메달
- 1938년 10월 1일 기념 메달
- 돌격대 스포츠 휘장
- 동장
- 올림픽 명예 훈장
- 1급 올림픽 명예 훈장 (1936년 수훈)
- 이탈리아 왕관 훈장(이탈리아 왕국 훈장)
- 대장교장
-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훈장(이탈리아 왕국 훈장)
- 대장교장
- 불가리아 시민 공로 훈장 대십자장
- 핀란드 사자 훈장 대십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