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및 배경
허정무는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초사리 출신으로, 1955년 1월 13일에 태어났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1953년 12월 19일생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그의 본관은 양천이며, 아버지는 평생을 교육자로 지낸 교장 선생님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누나와 형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동생들도 중학교 입학을 앞둔 상황에서 허정무는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을 고려하여 중학교 졸업 후 1년간 휴학했다. 이후 중동중학교에 재편입하여 축구를 시작했다. 중동중학교를 거쳐 영등포공업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여 대학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대학 시절 고려대학교의 차범근과 자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대학 졸업 후인 1978년, 허정무는 실업 축구단인 한국전력에 입단하며 성인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이행했으며, 해병대와 해군 축구단에서 선수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차범근의 성공적인 유럽 진출 소식은 허정무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그는 유럽 무대 진출에 대한 꿈을 키웠다.
2. 선수 경력
허정무는 국내외 클럽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축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1. 클럽 경력
군 복무를 마친 허정무는 1980년 8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명문 클럽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하며 한국 선수로는 초창기에 유럽 무대에 진출한 사례를 남겼다. 그는 PSV에서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3시즌 동안 77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기록했다. 1980-81 시즌에는 28경기 6골, 1981-82 시즌에는 30경기 4골, 1982-83 시즌에는 19경기 1골을 기록하며 팀에 기여했다. 특히 1982-83 시즌에는 팀의 리그 준우승에 일조했다. 유럽 생활 중 요한 크루이프와 대결하며 그에게 코뼈를 부러뜨리는 부상을 입히는 일화도 있었으며, 빌럼 판 하네헴에게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당하는 등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983년 계약이 만료된 후, 아내의 향수병과 국내 프로 리그(K리그) 창설 소식을 접하며 한국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1984년 K리그의 창단 팀인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여 3년간 활약했다. 현대 호랑이에서는 23경기 3골(1984년), 5경기 1골(1985년), 8경기 0골(1986년)을 기록하며 총 36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넣었다. 그는 1986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클럽 | 시즌 | 리그 | 국내 컵 | 리그컵 | 대륙 대회 | 기타 | 총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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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한국전력 | 1978 | 세미프로 리그 | ? | ? | - | - | - | - | ? | ? | ||||
해군 축구단 (병역의무) | 1978 | 세미프로 리그 | ? | ? | ? | ? | - | - | ? | ? | ? | ? | ||
1979 | 세미프로 리그 | ? | ? | ? | ? | - | - | ? | ? | ? | ? | |||
1980 | 세미프로 리그 | ? | ? | ? | ? | - | - | ? | ? | ? | ? | |||
합계 | ? | ? | ? | ? | - | - | ? | ? | ? | ? | ||||
PSV 에인트호번 | 1980-81 | 에레디비시 | 28 | 6 | ? | ? | - | 4 | 0 | - | 32 | 6 | ||
1981-82 | 에레디비시 | 30 | 4 | ? | ? | - | 2 | 1 | - | 32 | 5 | |||
1982-83 | 에레디비시 | 19 | 1 | ? | ? | - | 1 | 0 | - | 20 | 1 | |||
합계 | 77 | 11 | ? | ? | - | 7 | 1 | - | 84 | 12 | ||||
현대 호랑이 | 1984 | K리그 | 23 | 3 | - | - | - | - | 23 | 3 | ||||
1985 | K리그 | 5 | 1 | - | - | - | - | 5 | 1 | |||||
1986 | K리그 | 8 | 0 | 3 | 1 | - | - | 11 | 1 | |||||
합계 | 36 | 4 | - | 3 | 1 | - | - | 39 | 5 | |||||
경력 총계 | 113 | 15 | ? | ? | 3 | 1 | 7 | 1 | ? | ? | 123 | 17 |
2.2. 국가대표팀 경력
허정무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대한민국 U20 대표팀에 선발되어 1973년과 1974년 AFC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이후 1974년부터 1986년까지 성인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1978년 방콕과 1986년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축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6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여 조별 리그에서 세계적인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허정무는 마라도나를 끈질기게 마크하며 그라운드에서 거친 몸싸움을 벌였고, 한 장면에서는 마라도나를 발로 걷어차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어 '태권 축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터프한 플레이는 당시 강력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한국 축구의 투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어 조별리그 3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득점을 기록하며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골을 넣는 영광을 누렸다. 허정무는 국가대표팀에서 총 104번의 국제 A매치에 출전하여 30골을 기록했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대한민국 | 1974 | 5 | 1 |
1975 | 8 | 1 | |
1976 | 9 | 1 | |
1977 | 24 | 11 | |
1978 | 19 | 4 | |
1979 | 6 | 5 | |
1980 | 8 | 2 | |
1984 | 9 | 0 | |
1985 | 7 | 4 | |
1986 | 9 | 1 | |
경력 총계 | 104 | 30 |
대회 | 출전 | 득점 |
---|---|---|
친선 경기 | 11 | 5 |
마이너 대회 | 33 | 14 |
아시안 게임 | 12 | 1 |
AFC 아시안컵 예선 | 10 | 2 |
AFC 아시안컵 | 4 | 0 |
하계 올림픽 예선 | 12 | 2 |
FIFA 월드컵 예선 | 19 | 5 |
FIFA 월드컵 본선 | 3 | 1 |
총계 | 104 | 30 |
2.3. 플레이 스타일
허정무는 다재다능한 선수로, 공격수,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풀백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는 경쟁심이 강하고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바탕으로 넓은 활동량을 자랑했다. 그의 끈질기고 에너지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그의 고향인 진도군에서 유래한 사냥개 품종인 '진돗개'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그는 대인 마크에 능하여, PSV 에인트호번 시절에는 요한 크루이프와 같은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자주 맞대결을 펼쳤다.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영리한 움직임을 통해 효과적인 드리블을 구사했다.
3. 지도자 경력
허정무는 선수 은퇴 후 코치와 감독으로서 한국 축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초기 감독 경력
허정무는 선수 은퇴 후인 1989년부터 1990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트레이너를 역임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91년에는 포항 제철 아톰즈의 코치로 부임하여 프로 축구 무대에 복귀했으며, 1990년 FIFA 월드컵과 1994년 FIFA 월드컵에서는 각각 트레이너와 코치로 국가대표팀과 함께했다.
1993년에는 포항 아톰즈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그 해 아디다스컵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로서의 첫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995년 시즌 도중에는 잠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6년 6월, 정병탁 감독이 사임한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K리그에 복귀했다. 전남 드래곤즈를 이끌고 1997년 K리그 준우승과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1998년 1998년 FIFA 월드컵 도중 경질된 차범근 감독의 후임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다시 선임되었고, 2000년 하계 올림픽 대표팀 감독직도 겸임하게 되었다.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국가대표팀을 이끌었으나, 조별 리그 첫 상대인 투르크메니스탄에게 2-3으로 역전패를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후 일본,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를 물리치고 8강에 진출했으나, 8강전에서 2명이 퇴장당한 태국을 상대로 1-2로 역전패하며 탈락했다.
또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2승 1패를 기록했지만, 첫 경기였던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0-3으로 패배한 후유증으로 인해 8강 진출에 실패했다. 같은 해 레바논에서 열린 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준결승전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패배하여 3위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2000년 10월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퇴했고, 이후 거스 히딩크 감독이 후임으로 취임하며 약 7년간의 외국인 감독 체제가 시작되었다. 당시 허정무 감독이 발탁했던 이름 없는 어린 선수들, 예를 들어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은 훗날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하며 허정무의 선수 선발 안목이 재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단, 그의 첫 국가대표팀 감독 임기(1998-2000) 당시에는 팀의 세대교체를 시도하며 과감하게 젊은 선수들을 기용했으나, 단기간 내에 국제 대회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8강 탈락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8강 진출 실패, 그리고 2000년 AFC 아시안컵 3위라는 성적은 당시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3.2. 전남 드래곤즈 재직 (두 번째)
국가대표팀 감독 사퇴 후 허정무는 2005년에 다시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복귀하여 2007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그는 복귀 후 팀을 안정화시키며 2006년과 2007년 FA컵에서 2년 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2006년 FA컵에서는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며 지도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전남 드래곤즈에서의 성공적인 행보는 그가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두 번째 임기)
2007년 12월, 허정무는 핌 페르베이크 감독의 후임으로 다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며 약 7년 만에 한국인 감독 체제를 부활시켰다. 그는 "축구 인생을 걸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목표로 대장정을 시작했다.
3.3.1.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두 번째 국가대표팀 감독 취임 후 첫 평가전인 칠레전에서 0-1로 패배했으나, 이후 201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과 최종 예선에서 승승장구했다.
3차 예선 첫 경기인 투르크메니스탄전을 4-0 승리로 장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북한과의 원정 경기에서 0-0 무승부, 요르단과의 홈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이후 요르단, 투르크메니스탄 원정에서 각각 1-0, 3-1 승리를 거두고 북한과의 홈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3승 3무로 조 1위를 차지해 최종 예선에 진출했다.
2008년 6월 27일 발표된 최종 예선 조 편성은 매우 험난했다. 대한민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북한, 아랍에미리트(UAE)와 함께 '죽음의 조'로 불리는 B조에 편성되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게는 1989년 이후 19년간 승리한 적이 없었고, 이란 역시 상대 전적에서 팽팽한 까다로운 상대였으며, 북한과는 3차 예선에서 두 경기 연속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한 터라 본선 진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최종 예선 첫 경기는 북한과의 원정 경기였다. 전반을 득점 없이 마친 후 후반 20분 북한의 홍영조에게 페널티킥을 내주며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허정무 감독이 발탁한 신예 기성용이 불과 4분 만에 동점골을 터뜨려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후 UAE와의 홈 경기에서는 4-1 대승을 거두었고, 어려운 경기로 예상되었던 사우디아라비아 원정에서는 후반 32분 이근호의 선제골과 후반 46분 박주영의 쐐기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19년간의 무승 징크스를 깨고 2승 1무로 조 1위를 질주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원정의 성공적인 마무리에 이어, 2009년 2월 11일 이란 테헤란 원정 경기를 치렀다. '원정 팀의 지옥'으로 불리는 테헤란에서 전반에 잘 싸웠으나 후반 15분 자바드 네쿠남에게 프리킥 골을 허용했다. 하지만 21분 뒤인 후반 36분 박지성의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귀중한 승점 1점을 챙겼다. 이후 북한과의 홈 경기에서 김치우의 후반 42분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무승부 사슬을 끊었고, 6월 6일 UAE와의 원정 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달성했으며,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B조 1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허정무호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홈 경기에서 0-0 무승부, 이란과의 홈 경기에서 후반 6분 마수드 쇼자에이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후반 36분 박지성의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허정무호는 최종 예선에서 4승 4무를 기록하며 무패로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09년 11월에는 AFC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27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기록했다.
3.3.2.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
2009년 12월,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 조 추첨에서 대한민국은 유로 2004 챔피언인 그리스,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와 함께 B조에 편성되었다.
월드컵 본선에 앞서 2010년 2월 10일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컵 2차전에서 중국에게 0-3으로 패배하며 큰 위기를 맞았다. 이 패배는 32년간 이어져 온 한국 축구의 '공한증'을 마감시킨 경기였으며, 동시에 허정무 감독에게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중국에게 진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겼다.
2010년 6월 12일에 열린 월드컵 본선 첫 경기 그리스전에서는 전반 7분 만에 기성용의 프리킥을 이정수가 받아 선제골을 기록했고, 후반에는 박지성이 상대 수비수의 공을 가로채 쐐기골을 넣으며 2-0 완승을 거두었다. 이는 사상 최초로 한국인 감독이 월드컵 본선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그러나 6월 17일 아르헨티나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수비 위주의 전술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2골을 내주었고, 전반 종료 직전 이청용이 상대 수비수의 공을 가로채 만회골을 넣으며 1-2로 추격했다. 하지만 후반에 2골을 추가로 허용하며 결국 1-4로 대패했다. 다행히 대한민국에 패했던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둔 덕분에 B조는 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 양강 구도를 면했고, 대한민국의 16강 진출 여부는 나이지리아와의 최종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2010년 6월 23일, 16강 진출 운명을 결정지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열렸다. 전반 초반 수비 실책으로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첫 경기 그리스전 선제골의 주인공 이정수가 또다시 기성용의 프리킥을 받아 동점골을 기록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박주영의 멋진 프리킥 역전골이 터지면서 16강 진출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교체 투입된 김남일의 무리한 태클로 페널티킥 동점골을 허용했고, 이후 여러 차례 위기 상황이 있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며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같은 시간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2-0으로 꺾은 덕분에 대한민국은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그리스(1승 2패)와 나이지리아(1무 2패)를 제치고 B조 2위를 기록, 사상 최초로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6월 26일에 펼쳐진 16강전의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특히 허정무 감독이 20년 전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있을 때 당했던 0-1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전반 초반 루이스 알베르토 수아레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끌려갔고, 후반 중반 이청용의 헤딩 동점골로 분위기를 반전시켰으나, 다시 루이스 알베르토 수아레스에게 골을 허용하며 1-2로 뒤졌다. 결국 우루과이에 1-2로 패배하며 대한민국 대표팀은 16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월드컵 대장정을 마친 후 허정무 감독은 2010년 7월 2일, 휴식을 갖기 위해 연임을 포기하고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3.4.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및 기술자문
2010년 월드컵을 마친 허정무는 2010년 8월 22일, 시즌 중 팀을 떠난 일리야 페트코비치 감독의 뒤를 이어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맡았다. 2011년 시즌 중에는 수비 중심의 전략으로 성적 부진을 겪으면서 구단 팬들로부터 '청문회'를 당하는 등 팬들과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는 2011년의 부진한 성적에 대해 팬들의 비난을 받자 "2012시즌에 성적을 내지 못하면 옷을 벗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2012년에도 팀의 성적 부진이 이어지자 결국 약속대로 2012년 4월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인천 유나이티드 사퇴 이후 2014년에는 대전 시티즌의 기술자문위원으로 취임하여 활동했다.
4. 행정가 경력
허정무는 감독직 외에 한국 축구 행정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013년 1월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에서 정몽규가 선출된 후, 2013년 3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4년 7월 10일 부회장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2015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를 역임하며 한국 프로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2019년부터는 재단법인 하나금융축구단 이사장직을 맡아 2023년까지 대전 하나 시티즌의 이사장을 지냈다. 2024년 11월 25일에는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현재 회장인 정몽규와 또 다른 후보인 신문선과 함께 3파전 구도를 형성했다.
5. 기타 활동
5.1. 정치 활동
2016년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후보자(32번)로 등록했으나, 당선권 밖에 있어 최종적으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못했다.
5.2. 축구 해설 및 홍보대사
허정무는 1996년부터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SBS의 축구 해설을 맡았다. 2001년 초에는 KBS의 축구 해설위원이 되어, 이듬해 한일 월드컵 당시 KBS의 주요 경기 해설을 담당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부터는 현재까지 MBC의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해설도 맡았다.
또한 2005년에는 자신의 고향이 있는 전라남도의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지역 홍보에도 힘썼다.
6. 평가 및 논란
허정무는 한국 축구의 역사에서 선수와 감독, 행정가로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행보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몇몇 논란이 존재한다.
6.1. 긍정적 평가
선수로서 허정무는 뛰어난 다재다능함과 강인한 정신력, 넓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진돗개' 같은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한국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유럽 무대 진출은 그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감독으로서의 가장 큰 업적은 단연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사상 첫 원정 16강으로 이끈 것이다. 당시 많은 이들이 한국의 16강 진출을 회의적으로 보았으나, 허정무는 뚝심 있는 리더십으로 이를 달성하며 한국 축구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또한, 그의 첫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1998-2000) 당시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을 발탁하고 기회를 주어 훗날 이들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점은 그의 안목과 육성 능력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평가 요소로 꼽힌다. 이 외에도 포항 스틸러스와 전남 드래곤즈에서 리그컵과 FA컵 우승을 이끌며 클럽 감독으로서의 역량도 충분히 증명했다. 특히 전남에서 FA컵 2연패를 달성한 것은 그의 전술적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6.2. 비판 및 주요 논란
허정무 선수 시절의 대표적인 논란은 1986년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거칠게 마크하며 발로 걷어차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어 '태권 축구'라는 비판을 받았던 사건이다. 마라도나 역시 이 일에 대해 "그는 태권도로 나에게 도전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도자 경력에서는 여러 논란이 있었다. 첫 번째 국가대표팀 감독 임기(1998-2000) 때는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면서 젊은 선수 위주의 과감한 세대교체가 국제 대회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0년 FIFA 월드컵 직전 2010년 동아시아컵에서 중국에게 0-3으로 패배하며 32년간 이어져 온 한국 축구의 공한증을 종식시킨 '불명예스러운' 감독으로 기록된 점도 주요 논란 중 하나이다. 이 패배는 월드컵을 앞두고 팬들의 우려를 크게 증폭시켰다.
또한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시절에는 수비 중심의 전술과 성적 부진으로 인해 팬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특히 2011년 팬들이 감독의 전술과 리더십에 대해 공개적으로 해명을 요구하는 '허정무 청문회' 사태까지 발생하며 구단과 팬들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그는 결국 2012년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행정가 경력 중에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에서 사퇴한 일도 있었다.
7. 수상 내역
허정무는 선수 및 감독으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하며 다수의 개인 및 팀 수상 기록을 남겼다.
7.1. 개인 수상
- 한국 내셔널 축구 선수권 대회 득점왕: 1974
- 대한축구협회 베스트 XI: 1974, 1977, 1978, 1979, 1984, 1985, 1986
- 대통령배 전국 축구대회 최우수 선수상: 1979
- 대한축구협회 최우수 선수상: 1984
- K리그 베스트 XI: 1984
- K리그 '80년대 올스타팀: 2003
- 체육훈장 백마장: 1979년 3월 9일
- 체육훈장 거상장: 1986년 10월 6일
- 프로축구 빅스포상: 1997
- FA컵 지도자상: 1997
- AFC 선정 2월의 감독: 1999년 2월
- FA컵 최우수 지도자상: 2006, 2007
-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감독상: 2007
- AFC 올해의 감독상: 2009
7.2. 클럽 및 국가대표팀 수상 (선수)
- 연세대학교
- 한국 내셔널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74
- 해군 축구단
- 대통령배 전국 축구대회 우승: 1979
- PSV 에인트호번
- 에레디비시 준우승: 1982-83
- 현대 호랑이
- 프로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986
- 대한민국 U20
- AFC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3위: 1973, 1974
- 대한민국
-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78, 1986
7.3. 클럽 및 국가대표팀 수상 (감독)
- 포항 아톰즈
- 리그컵 우승: 1993
- 전남 드래곤즈
- K리그 준우승: 1997
- FA컵 우승: 1997, 2006, 2007
- 리그컵 준우승: 1997
- 대한민국
- AFC 아시안컵 3위: 2000
- 동아시아컵 우승: 2008
- 동아시아컵 준우승: 2010
- FIFA 월드컵 16강: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