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유년기 군사 교육과 학업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인으로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전후에는 법학 연구를 통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작센 왕가의 수장으로서 활동하며 폴란드 왕위 제안을 받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인도주의적 활동과 더불어 작센 역사 및 문화 연구 그룹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1. 유년기와 교육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독일 드레스덴에서 작센의 마지막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와 그의 아내 루이제 폰 외스터라이히 토스카나 대공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베틴가의 오랜 가풍에 따라 10세의 어린 나이에 제1 작센 왕립 라이프-척탄병 연대 100호의 중위로 임명되었다. 1913년에는 드레스덴에 위치한 군사학교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초기 교육은 그가 장차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2. 군 경력과 외교 임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독일 제국의 참모본부 소속으로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그는 전쟁 중 여러 차례 용감한 행동으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뛰어난 언어적 재능을 지녔던 그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5세,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카를 1세에게 파견되는 등 여러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918년에는 단명했던 리투아니아 왕국의 왕위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13일,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부친은 퇴위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이후 벨기에와 프랑스에 주둔했던 작센 군을 이끌고 독일로 귀환하여 풀다에서 군을 해체시켰다.
1.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학업과 가족 생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학업에 전념하여 쾰른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브로츠와프 대학교, 그리고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는 중세 후기 교회법 발전에 크게 기여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였다. 브레슬라우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가톨릭 학생 조합 `Cartellverband der katholischen deutschen Studentenverbindungen카르텔페어반트 데어 카톨리셴 도이첸 슈투덴텐페어빈둥엔독일어`(KDSt.V.) 소속의 빈프리디아(Winfridia) 지부 회원이었으나, 1928년 또는 1929년에 '실질적인 이견'으로 인해 탈퇴했다.
1920년 2월 9일, 그는 뷔르츠부르크의 KDSt.V. 튀링기아(Thuringia) 지부에 가입했다. 이곳에서 그는 투른 운트 탁시스 8세 공작 알베르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르가레테 클레멘티네의 딸인 엘리자베트 헬레네 폰 투른 운트 탁시스 공녀(1903년-1976년)를 만났다. 엘리자베트 헬레네는 당시 튀링기아 여학생 연맹의 명예 의장이었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1923년 6월 16일 레겐스부르크에서 그녀와 결혼했다.
박사 학위를 마친 후 그는 미술사의 개인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그의 부친은 그에게 작센과 슐레지엔에 있는 가문의 자산 관리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1.4. 작센 왕가의 수장
1923년, 그의 형인 게오르크 폰 작센 왕세자가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그리고 1932년 2월 12일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작센 왕가의 수장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마이센 변경백`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5. 폴란드 왕위 제안
1933년, 폴란드 정부는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에게 폴란드 왕국의 왕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이는 18세기 작센 선제후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동군연합을 맺었던 역사적 관계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부상, 그리고 이후의 제2차 세계 대전과 폴란드의 공산화로 인해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을 왕으로 맞이하려는 폴란드 왕국 재건의 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1.6. 만년의 삶과 활동
1937년, 그의 가족은 드레스덴-바흐비츠에 위치한 바흐비츠성으로 이주하여 1945년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바흐비츠성은 1945년 드레스덴 폭격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수많은 생존자들을 성에 수용하며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했다. 같은 해 말, 가족은 호프와 레겐스부르크를 거쳐 브레겐츠로 이주했는데, 그의 두 막내 자녀는 1940년부터 이미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당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활용하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스위스로 이주하는 것을 돕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55년,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의 친척들의 도움으로 가족은 뮌헨의 하를라힝 지역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곳에서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그의 아들들인 마리아 에마누엘 폰 작센과 알베르트와 함께, 성 하인리히 군사훈장의 지부, 드레스덴 주민 협회, 그리고 뮌헨의 `Heimatvertriebene하이마트페어트리베네독일어`(추방민) 협회 지부와 협력하여 `Studiengruppe für Sächsische Geschichte und Kultur e.V.작센 역사 및 문화 연구 그룹독일어`을 설립했다. 이 연구 그룹은 이후 서독에서 가장 큰 역사 학회 중 하나로 성장했다. 만약 그가 작센의 국왕이었다면, 그는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1세`로 불렸을 것이다.
2. 개인 생활과 가족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엘리자베트 헬레네 폰 투른 운트 탁시스 공녀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으며, 작센 왕가의 혈통을 이어갔다.
2.1. 결혼과 자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1923년 6월 16일 레겐스부르크에서 투른 운트 탁시스 8세 공작 알베르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르가레테 클레멘티네의 딸인 엘리자베트 헬레네 폰 투른 운트 탁시스 공녀(1903년-1976년)와 결혼했다. 그들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 마리아 에마누엘 폰 작센 (1926년-2012년): 1962년 안할트 공주 아나스타샤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마리아 요제파 폰 작센 공주 (1928년-2018년): 미혼으로, 딸이 한 명 있었다.
- 안나 폰 작센 공주 (1929년-2012년): 1952년 로베르토 데 아피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며, 작센-게사페가의 시조가 되었다.
- 알베르트 폰 작센 (1934년-2012년): 1980년 엘미라 헨케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마틸데 폰 작센 공주 (1936년-2018년): 1968년 요하네스 하인리히 폰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공자와 결혼하여 1993년 이혼했고, 아들 한 명을 두었으나 현재는 사망했다.
2.2. 혈통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혈통은 다음과 같다.
- 1.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폰 작센 변경백
- 2. 부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작센 국왕)
- 3. 모친: 루이제 폰 외스터라이히 토스카나 대공녀
- 4. 조부: 게오르크 (작센 국왕)
- 5. 조모: 마리아 안나 폰 포르투갈 인판타
- 6. 외조부: 페르디난도 4세 디 토스카나 대공
- 7. 외조모: 알리체 디 부르보네 파르마 공주
- 8. 증조부: 요한 (작센 국왕)
- 9. 증조모: 아말리에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 왕녀
- 10. 외증조부: 페르난두 2세 (포르투갈 국왕)
- 11. 외증조모: 마리아 2세 (포르투갈 여왕)
- 12. 외외조부: 레오폴도 2세 디 토스카나 대공
- 13. 외외조모: 마리아 안토니아 디 양시칠리아 왕녀
- 14. 외외외조부: 카를로 3세 디 파르마 공작
- 15. 외외외조모: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
3. 사망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1968년 8월 9일 스위스 자메단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티롤 북부 카뢰스텐에 위치한 쾨니히스카펠레 왕실 예배당 밖에 안장되었다.
4. 유산과 평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작센 왕가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지역 사회와 문화 보존에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4.1. 베틴가 수장으로서의 역할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그의 형이 계승권을 포기하고 부친이 사망한 후, 작센 왕가의 수장직을 계승하며 베틴가의 알베르틴 분가를 이끌었다. 1932년 2월 18일부터 1968년 8월 9일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명목상 작센 국왕이자 왕가의 수장으로서 왕실의 전통과 권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운향화관훈장의 대단장으로서 왕실의 주요 훈장을 관리했다.
4.2. 작센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기여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작센의 역사와 문화 보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뮌헨에서 그가 설립한 `Studiengruppe für Sächsische Geschichte und Kultur e.V.작센 역사 및 문화 연구 그룹독일어`은 서독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역사 학회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작센의 풍부한 유산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45년 드레스덴 폭격 이후, 그는 자신이 거주하던 바흐비츠성에 수많은 전쟁 생존자들을 수용하며 인도주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단순히 왕가의 수장으로서의 의무를 넘어,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그의 인품과 사회적 책임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스위스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운 것도 그의 영향력을 활용한 긍정적인 활동으로 기억된다.
4.3. 비판과 논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생애와 관련하여 대중적으로 알려진 큰 비판이나 논란은 많지 않다. 다만, 학창 시절 가톨릭 학생 조합 `KDSt.V. Winfridia`에서 '실질적인 이견'으로 인해 탈퇴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그의 개인적인 신념이나 견해 차이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5. 같이 보기
- 작센 왕국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작센)
- 베틴가
- 폴란드 왕국
- 제1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 드레스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