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폴 클로델은 1868년 8월 6일 빌뇌브쉬르페르(Villeneuve-sur-Fère프랑스어)에서 농민과 공무원 가문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는 가족의 잦은 이사와 종교적 경험, 그리고 문학적 각성으로 특징지어진다.
1.1. 출생과 가족
클로델의 아버지 루이-프로스페르(Louis-Prosper)는 저당 및 은행 거래업에 종사했으며, 어머니 루이즈 세르보(Louise Cerveaux)는 샹파뉴 지방의 가톨릭 농민 및 사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특히 유명한 조각가인 누이 카미유 클로델의 남동생이다. 어린 시절을 샹파뉴 지방에서 보냈다.
1.2. 교육 및 종교적 체험
1881년 부모가 파리로 이주하면서 바르르뒤크 리세(Lycée Bar-le-Duc프랑스어)와 리세 루이르그랑(Lycée Louis-le-Grand프랑스어)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884년 바칼로레아에 합격하고 철학반으로 진급하여 동급생인 로맹 롤랑과 함께 콘서트에 다니며 문학을 접했다. 1885년에는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프랑스어)에서 수학했다.
청소년기에는 무신론자였던 클로델은 1886년 크리스마스 날, 18세의 나이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저녁 기도를 듣던 중 극적인 종교적 회심을 경험했다. 그는 이 순간을 "순식간에 내 마음이 감동했고, 나는 믿었다"고 회고하며, 이후 평생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남았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이뤼미나시옹》과 《지옥의 계절》을 접하며 문학적 영감을 얻었고, "서정적이고 극적인 시를 통해 위대한 창조의 설계를 계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887년부터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화요회'에 참석하며 시와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2. 외교관 경력

젊은 시절 수도원 입소를 고려하기도 했던 클로델은 대신 프랑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하여 1893년부터 1936년까지 봉직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국가에 부임하며 프랑스의 외교적 이익을 대변하고 문화 교류에 힘썼다.
2.1. 주요 부임지와 활동
클로델은 1890년 외교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외무부 상무부 전문직원으로 임용되었다. 1893년 4월 뉴욕 부영사로 첫 부임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보스턴에서 영사 업무를 담당했다. 1895년부터 1909년까지 청나라에서 프랑스 영사로 재직하며 상하이 영사(1895년 6월), 푸저우 부영사(1900년 10월), 한커우 부영사 대리, 푸저우 영사, 베이징 공사관 일등 서기관, 톈진 영사관 대리, 톈진 영사(1906-1909) 등을 역임했다. 중국 근무 중이던 1900년에는 잠시 프랑스로 돌아와 리귀제 수도원과 솔렘 수도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베네딕토회 입회를 고려했으나 연기되었다.
1905년에서 1906년 사이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며 결혼했다. 외무부의 필리프 베르틀로의 지원과 후원을 받는 작가 그룹에 속했으며, 이 그룹에는 장 지로두, 폴 모랑, 생존 페르스 등이 있었다. 외교관 신분 때문에 경력 초반에는 익명이나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는 외무부의 출판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09년까지는 작가로서 비교적 무명이었는데, 이는 허가가 거부될까 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 허가를 요청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누벨 르뷔 프랑세즈》(Nouvelle Revue Française프랑스어)의 창립 멤버들, 특히 그의 친구 앙드레 지드는 그의 작품을 인정하고자 했다. 클로델은 창간호에 시 《성체 찬가》(Hymne du Sacre-Sacrement프랑스어)를 보냈고, 지드의 극찬을 받으며 그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출판 허가를 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비난이 쏟아지는 소동이 일었다. 2월에는 그의 종교적 견해에 기반한 비판이 그의 희곡 공연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르틀로는 비평가들을 무시하라고 조언했고, 이 사건은 《누벨 르뷔 프랑세즈》와 클로델의 오랜 협력의 시작이 되었다.
클로델은 중국에 대해 광범위하게 글을 썼으며, 그의 저서 《동방에 대한 인식》(Connaissance de l'Est프랑스어)의 최종판은 1914년 조르주 크레스와 빅토르 세갈렌에 의해 출판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유럽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는데, 프라하 영사(1909년 12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총영사(1911년 10월), 함부르크 총영사(1913년 10월)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그는 헬러라우 연극 축제와 자크 코포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로마에서 경제 특사로 활동했으며,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2등 전권 공사로 재직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남미에서 프랑스로의 식량 공급을 감독했다. 브라질 임무 중 그의 비서 중에는 다리우스 미요가 있었는데, 미요는 클로델의 여러 희곡에 부수 음악을 작곡했다. 이 시기에 발레 뤼스의 공연을 관람하고 바츨라프 니진스키와 협상하여 미요가 작곡한 발레 《남자들의 욕망》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이후 코펜하겐 대사(1920), 도쿄 대사(1921-1927), 워싱턴 D.C. 대사(1928-1933, 1933년에는 외교단장), 브뤼셀 대사(1933-1936)를 역임했다.
2.2. 일본 대사 재임 시기

클로델이 주일본 프랑스 대사로 재임했던 1921년 11월 19일부터 1927년 2월 17일까지의 시기는 일본과 프랑스 사이에 큰 현안이 적었던 시기였다. 그는 동아시아의 이권 확대를 놓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고립되어 가는 일본에 동정적이었으며, 일본의 대중국 이권 확대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이권 확대를 서로 인정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주력 군함이 제한된 일본이 항공 전력을 증강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프랑스 비행기 판매를 추진하는 등 국제적인 상업적 수완도 발휘했다.
누이 카미유의 자포니즘 감화로 일본 미술을 좋아했던 클로델은 공무 외 시간을 활용하여 일본 각지를 적극적으로 견문했으며, 1898년 상하이 근무 중 휴가로 약 한 달간 일본을 관광하기도 했다. 도쿄,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기도 했다. 그는 《가료빈가》, 《나소리》 등의 무악, 분라쿠, 《가나데혼 주신구라》, 《이시키리 가지와라》 등의 가부키, 《도조지》, 《오키나》, 《스미다가와》, 《기누타》 등의 노를 관람했다. 또한 다이토쿠지, 다이가쿠지, 료안지, 하세데라, 니조성, 산젠인, 나고야성 등을 방문하고 가노파의 병풍 그림을 감상했다. 화가 도미타 게이센, 야마모토 슌쿄, 다케우치 세이호,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후쿠스케 5세, 나가우타의 기네야 사키치 4세 등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일본 잡지 《가이조》에 두 번, 《신초》에 한 번 프랑스어 기사를 일본어 번역과 함께 기고했다. 일본 서점에서 프랑스어 시집 《성녀 주네비에브》, 도미타 게이센의 그림이 삽입된 시화집 《사풍첩》, 그 2판인 《치교집》, 3판인 《백선첩》을 출판했다. 무용시극 《여인과 그림자》를 집필했으며, 이 작품은 제국극장에서 마쓰모토 고시로 7세, 나카무라 후쿠스케 5세 등에 의해 공연되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재난을 겪으면서도 구호 활동을 지휘하고 임시 병원과 탁아소를 설치했다. 그는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는 일본인들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놀라움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재해민들을 수용하는 거대한 야영지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나는 불평하는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나 사람을 해치는 감정의 폭발로 주변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거나 폐를 끼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마치 같은 작은 배에 탄 사람들처럼 모두가 조용히 머물러 있는 듯했다."
1924년 3월 7일,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협력하여 일불회관을 발족시켰다. 1925년에는 대작 《비단 구두》를 완성했다. 1926년에는 이나바타 가쓰타로와 함께 간사이 일불학관(Institut français du Japon - Kansai프랑스어)의 설립을 추진했으나, 1927년 10월 22일 개관 당시 그는 이미 주미 대사로서 미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 있었다.
앙리 몽도르에 따르면, 후년인 1943년 11월 23일 열린 한 공작부인의 야회에서 클로델은 일본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제가 결코 분쇄되어서는 안 된다고 바라는 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민족입니다. 그토록 흥미로운 고대의 문명이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그 놀라운 발전이 일본보다 당연한 민족은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가난하지만,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귀합니다."
2.3. 외교관으로서의 견해
클로델은 구시대의 보수주의자였으며, 보수적인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공유했다. 그는 1940년 프랑스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필리프 페탱 원수가 프랑스의 부서지고 상처 입은 몸을 수습하고 구원한 것을 칭찬하는 시 "원수에게 보내는 말"(Paroles au Maréchal프랑스어)을 썼다. 가톨릭 신자로서 그는 반성직자주의적인 프랑스 제3공화국의 몰락에 만족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일기는 나치즘에 대한 일관된 경멸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이미 1930년에 나치즘을 "악마적"이며 "사탄과 결합된 것"이라고 비난했고,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곡과 마곡"에 비유했다. 1935년에는 세계 유대인 회의에 공개 서한을 보내 뉘른베르크법을 "가증스럽고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샤를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에 대한 그의 지지는 1944년 파리 해방 시 드골에게 바친 승리의 송가에서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클로델은 알제리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에 봉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고 브랑그로 돌아왔다. 그는 비시 정권을 지지했지만, 알프레드 보드리야르 추기경의 나치 독일과의 협력 정책에는 반대했다. 그의 집은 비시 당국에 의해 수색당하고 감시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에는 이사야 슈바르츠에게 편지를 보내 비시 정권이 제정한 유대인 법령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3. 문학 활동 및 작품
클로델의 문학 세계는 그의 깊은 가톨릭 신앙과 독자적인 문체, 그리고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방대한 작품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시, 희곡, 비평, 기행문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20세기 프랑스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문학 세계와 영향
클로델은 종종 스테판 말라르메를 자신의 스승으로 자주 언급했다. 그의 시학은 세계를 계시적인 종교적 텍스트로 보는 관점을 더한 말라르메의 시학으로 평가된다. 그는 전통적인 운율학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자유시 형태인 '클로델적 시형'(verset claudelien프랑스어)을 개발했다. 이는 월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실험의 일환으로, 샤를 페기와 앙드레 스피르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베르세'를 연구했다. 장 그로장은 라틴어 불가타역의 영향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했다.
클로델은 자신의 침대 옆 책이 성경이라고 말했으며, 그의 모든 창작물이 하나의 새로운 성경을 이룬다고 보았다. 그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설교자의 역할로, 그는 월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자유시와 성경적 문체의 산문을 통해 인간의 심장 박동과 호흡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20세기 마지막 인상주의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3.2. 주요 희곡
클로델의 희곡은 복잡한 구조와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종교적 주제로 인해 초기에는 관객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어려웠다. 그의 희곡이 연극적 진가를 인정받게 된 것은 비교적 근년에 이르러서이며, 오늘날에는 20세기 연극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 《황금의 머리》(Tête d'or프랑스어, 1890년 초고, 1901년 재고): 1924년 '예술과 행동 그룹'에 의해 초연되었고, 1959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장루이 바로 연출로 상연되었다.
- 《도시》(La Ville프랑스어, 1893년 초고, 1901년 재고): 1955년 아비뇽 연극제에서 장 빌라르 연출로 초연되었다.
- 《교환》(L'Échange프랑스어, 1901년): 1914년 비유 콜롱비에 극장에서 자크 코포 연출로 초연되었다. 1951년 재고가 집필되어 같은 해 '르노-바로 극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 《칠일째의 휴일》(Le Repos du septième jour프랑스어, 1901년): 1928년 바르샤바에서 초연되었고, 1965년 프랑스에서 초연되었다.
- 《한낮에 나눈다》(Partage de midi프랑스어, 1906년): 1921년 '예술과 행동 그룹'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실제 연애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 《인질》(L'Otage프랑스어, 1911년): 1914년 '제작좌'에서 초연되었다.
- 《마리아에게의 고지》(L'Annonce faite à Marie프랑스어, 1910년): 희곡 《처녀 비올렌》(La Jeune Fille Violaine프랑스어)의 개작으로, 희생, 헌납, 성화의 주제를 다루며, 중세 프랑스 농촌 여인이 나병에 걸리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1912년 '제작좌'에서 초연되었다.
- 《비단 구두》(Le Soulier de Satin프랑스어, 1931년): 16세기 스페인 제국을 배경으로 인간적 사랑과 신성한 사랑, 그리고 갈망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1943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연되었다. 그의 실제 연애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되었으며, 1987년 아비뇽 연극제에서 앙투안 비테즈 연출로 완전판이 초연되었다.
- 《화형대 위의 잔 다르크》(Jeanne d'Arc au Bûcher프랑스어, 1939년): 아르튀르 오네게르가 작곡한 오라토리오이다. 이 작품은 1934년 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쓰였다.
- 《크리스토프 콜롱의 서》(Le Livre de Christophe Colomb프랑스어, 1929년): 막스 라인하르트의 의뢰로 쓰였으며, 미요가 작곡했다. 1930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 《토비와 사라의 이야기》(L'Histoire de Tobie et de Sara프랑스어, 1942년 초고, 1953년 재고): 1947년 아비뇽 연극제에서 장 빌라르에 의해 초연되었다.
그의 희곡들은 낭만적으로 먼 시대, 중세 프랑스나 16세기 스페인령 남미를 배경으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열정적이고 강박적인 인간의 사랑 장면을 사용했다.
3.3. 시와 시집
클로델은 운문극 외에도 서정시를 많이 썼다.
- 《동방에 대한 인식》(Connaissance de l'Est프랑스어, 1900년 초판, 1907년 개정판, 1952년 증보판): 중국에 대한 그의 광범위한 글쓰기를 담고 있다.
- 《다섯 개의 위대한 송가》(Cinq Grandes Odes프랑스어, 1907년): 그의 주요 시집 중 하나이다. 보슈티안 마르코 투르크의 박사 논문은 이 시집에 나타난 중세 철학의 영향을 다루었다.
- 《세 목소리의 칸타타》(La Cantate à trois voix프랑스어, 1913년)
- 《성녀 주네비에브》(Sainte Geneviève프랑스어, 신초샤 출판, 도미타 게이센 그림): 1000부 한정 특장판이 있었고, 12부 한정으로 칠기가 입혀진 호화판은 일본 황실과 당시 프랑스 대통령에게 각각 2부씩 증정되었다.
- 《사풍첩》(Souffle des quatre souffles프랑스어, 1926년): 하이카이(俳諧)적 시집으로, 도미타 게이센의 그림이 삽입되었다.
- 《백선첩》(Cent phrases pour éventails프랑스어, 1927년): 역시 하이카이적 시집으로, 도미타 게이센의 그림과 아리시마 이쿠마의 글씨가 담겼다.
3.4. 기타 저술
클로델은 희곡과 시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저술 활동을 펼쳤다.
- 비평문: 《시법》(Art poétique프랑스어, 1907년), 《아르튀르 랭보 작품집 서문》(Préface aux Œuvres D'Arthur Rimbaud프랑스어, 1912년), 《입장과 제안》(Positions et propositions프랑스어, 1928년, 1934년), 《네덜란드 회화 서설》(L'Introduction à la peinture hollandaise프랑스어, 1935년), 《눈은 듣는다》(L'Œil écoute프랑스어, 1946년) 등이 있다.
- 기행문: 《떠오르는 태양 속의 검은 새》(L'Oiseau noir dans le soleil levant프랑스어, 1927년): 일본 인상기이다.
- 일기: 1904년부터 1955년까지의 일기가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 서간집: 앙드레 지드, 자크 리비에르, 앙드레 쉬아레스, 가브리엘 프리조, 프랑시스 잠, 다리우스 미요, 장루이 바로, 로맹 롤랑 등 당대 주요 문인 및 예술가들과의 방대한 서간집이 사후에 공개되었다.
- 성경 주해: 《아가》, 《엠마오》, 《이사야 복음서》, 《요한 묵시록》 등에 대한 주해를 남겼다.
- 외교 서한집: 《외교 서한집 도쿄 (1921-1927년)》와 《외교 서한집 미국 (1927-1932년)》이 출판되어 그의 외교 활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4. 사상 및 철학
클로델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깊은 가톨릭 신앙과 보수적인 사회 정치적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 세계와 개인적인 삶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4.1. 가톨릭 신앙과 예술
클로델의 예술관과 작품 세계는 그의 깊은 가톨릭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8세에 겪은 극적인 회심 이후, 그는 평생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신을 찬미하는 노래라고 보았으며, 시작과 마찬가지로 양식이나 제재에 있어서도 일상적인 척도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는 성경을 자신의 침대 옆 책으로 삼았고, 자신의 모든 창작물이 하나의 새로운 성경을 이룬다고 말할 정도로 신앙이 그의 문학적 영감의 핵심이었다. 클로델에게 예술은 창조의 위대한 설계를 시적, 극적으로 계시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인간이 "누구인가"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 가졌으며, 이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구원과 성화의 주제와 연결된다.
4.2. 사회 및 정치적 견해
클로델은 구시대의 보수주의자였으며, 당시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공유했다. 그는 1940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필리프 페탱 원수를 칭찬하는 시를 썼고, 반성직자주의적이었던 프랑스 제3공화국의 몰락에 만족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는 나치즘에 대한 일관된 경멸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이미 1930년에 나치즘을 "악마적"이며 "사탄과 결합된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곡과 마곡"에 비유했다.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법을 "가증스럽고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공개 서한을 쓰기도 했다. 비시 정권의 유대인 법령에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초기에는 비시 정권을 지지했지만, 나치 독일과의 협력 정책에는 반대했으며, 결국 샤를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을 지지했다. 1944년 파리 해방 시에는 드골에게 승리의 송가를 바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복합적인 정치적 입장은 당시 격동하던 프랑스 사회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고뇌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보수적 신념과 인류애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5. 개인적인 삶
클로델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외교관 경력과 문학 활동만큼이나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측면을 포함한다. 특히 그의 결혼 생활과 누이 카미유 클로델과의 관계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5.1. 결혼과 자녀
클로델은 1906년 3월 15일 렌 생트마리 페랭(Reine Sainte-Marie Perrin프랑스어, 1880-1973)과 결혼했다. 그녀는 리옹의 건축가이자 푸르비에르 노트르담 대성당 완공으로 알려진 루이 생트마리 페랭(Louis Sainte-Marie Perrin, 1835-1917)의 딸이었다. 그들은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결혼 전, 클로델은 중국에서 근무하던 중 로잘리 베치(Rosalie Vetch프랑스어, 1871-1951)라는 폴란드계 벨기에인 여성과 오랜 관계를 맺었다. 로잘리는 벨기에인 사업가 프란시스 베치(Francis Vetch, 1862-1944)의 아내이자 해밀턴 베치의 손녀였다. 클로델은 1900년 마르세유에서 홍콩으로 가는 배에서 로잘리를 처음 만났다. 로잘리는 이미 네 자녀를 두고 있었으며, 1905년 2월 클로델과의 관계가 끝날 무렵 클로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1905년 독일 국경의 한 기차역에서 프란시스 베치와 클로델이 로잘리를 만났을 때, 로잘리는 클로델과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렸다. 1907년 로잘리는 얀 빌렘 린트너와 결혼했다. 1905년 브뤼셀에서 태어난 루이즈 마리 아녜스 베치(Louise Marie Agnes Vetch, 1905-1996)는 로잘리가 클로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5.2. 누이 카미유 클로델과의 관계

폴 클로델과 그의 누이이자 저명한 조각가인 카미유 클로델의 관계는 복잡하고 비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 클로델은 1913년 3월 누이 카미유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카미유는 이후 30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폴은 이 30년 동안 누이를 단 일곱 번만 방문했다. 클로델은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었던 누이 카미유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나, 카미유가 로댕과 헤어진 후 정신병을 앓게 되자 상하이 근무로 인해 만남의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기록에 따르면 카미유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예술 작업을 할 때는 명료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의사들은 가족에게 그녀가 정신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려 했으나, 가족은 그녀를 계속 병원에 두었다. 이러한 폴 클로델의 결정과 역할은 후대에 많은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 이야기는 2004년 미셸 데보르드의 소설 《파란 드레스》(La Robe bleue프랑스어)의 주제가 되었으며, 장샤를 드 카스텔바자크는 2010년 마레바 갈랑테르를 위해 "폴의 누이"(La soeur de Paul프랑스어)라는 노래를 쓰기도 했다.
6. 말년 및 은퇴
1935년 외교관직에서 은퇴한 클로델은 1927년에 구입한 도피네 지방 브랑그의 샤토(château프랑스어)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겨울에는 파리에서 지냈다. 1936년에는 심장병을 앓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프랑스 전투 이후, 그는 알제리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에 봉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고 브랑그로 돌아왔다. 그는 비시 정권을 지지했지만, 알프레드 보드리야르 추기경의 나치 독일과의 협력 정책에는 반대했다. 1940년 10월, 그의 사돈인 폴-루이 베일러가 비시 정부에 의해 체포되자, 클로델은 그를 위해 비시로 가서 중재를 시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베일러는 탈출하여 뉴욕으로 도피했는데, 당국은 클로델의 도움을 의심했다. 클로델은 1941년 12월 이사야 슈바르츠에게 편지를 보내 비시 정권이 제정한 유대인 법령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비시 당국은 클로델의 집은 수색당하고 그를 감시했다. 1940년에는 그의 저서 《접촉과 환경》이 출판 직후 독일 점령군에 의해 폐기 처분되기도 했다.
1928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9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로마 교황 피우스 12세의 즉위식에 프랑스 정부 대표로 참석했으며, 어린 시절 친구인 로맹 롤랑과의 교류를 다시 시작했다.
1942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친독일 성향으로 오염되었다는 이유로 입회 권유를 거절했으나, 1946년 4월 4일 루이 질레의 후임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1935년 클로드 파레르가 선호되어 낙선했던 과거의 논란을 뒤집는 결과였다. 그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여섯 차례나 지명되었다. 1947년에는 심장마비를 겪었다. 1948년에는 샤를 드골의 요청으로 국가평의회 회원이 되었다.
말년에 그는 쇠약해지는 와중에도 집필, 여행,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 1951년 10월 17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7. 평가 및 유산
폴 클로델은 20세기 전반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그의 문학적 업적은 물론 복합적인 사회적 영향과 논란 또한 그의 유산의 일부를 이룬다.
7.1. 문학적 평가
클로델은 종종 스테판 말라르메를 자신의 스승으로 언급했으며, 그의 시는 세계를 계시적인 종교적 텍스트로 보는 말라르메의 시학에 기반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전통적인 운율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자유시 형태인 '클로델적 시형'을 개발했다.
영국의 시인 W. H. 오든은 1939년 자신의 시 "W. B. 예이츠를 추모하며"에서 폴 클로델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시간은 이 이상한 변명으로 키플링의 견해를 용서했고, 폴 클로델을 용서할 것이며, 그가 글을 잘 썼기 때문에 그를 용서한다"고 썼다.
조지 스타이너는 저서 《비극의 죽음》에서 클로델을 20세기 3대 "드라마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희곡들은 복잡성, 구조, 규모 때문에 관객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희곡은 연극의 사명, 전체 연극의 발상, 제전(祭典)을 위한 상연 등과 연결되어 20세기 연극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로 지목된다.
7.2. 사회적 영향
클로델의 작품과 사상은 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깊은 가톨릭 신앙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독창적인 문체와 극작술은 프랑스 연극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그의 일본 대사 재임 기간 동안의 활동은 프랑스와 일본 간의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함께 일불회관 설립을 주도하고, 간사이 일불학관 설립을 추진하는 등 양국 간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했다.
7.3. 비판과 논란
클로델의 보수적 성향과 반유대주의적 태도는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는 비시 정권을 지지하고 필리프 페탱 원수를 칭찬하는 시를 쓴 바 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명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또한 누이 카미유 클로델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이후 거의 방문하지 않은 그의 행동은 가족 관계와 정신 질환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태도, 그리고 개인의 책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의사들이 카미유가 정신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진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그녀를 계속 병원에 두었다는 사실은 폴 클로델의 결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강화한다.
8. 사망
폴 클로델은 1955년 2월 23일 파리 자택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4일 전까지도 희곡 《마리아에게의 고지》의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에 관여할 정도로 말년까지 문학 활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1955년 2월 28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국장이 엄수되었다. 같은 해 9월 4일, 그는 자신이 말년을 보냈던 브랑그의 샤토 한켠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에도 저작 및 작품집 출판이 계속되었으며, 유작 공연도 이어졌다. 1955년 7월에는 연출가 장 빌라르에 의해 아비뇽 연극제에서 희곡 《도시》의 제2고가 초연되었다. 1987년 아비뇽 연극제에서는 앙투안 비테즈 연출의 《비단 구두》 완전판이 초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매년 여름, 브랑그의 샤토에서는 폴 클로델 협회 주최로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9. 관련 항목
- 카미유 클로델
- 일불회관
- 간사이 일불학관
- 시부사와 클로델상
- 생존 페르스
- 다리우스 미요
- 아르튀르 오네게르
- 장루이 바로
- 앙드레 지드
- 스테판 말라르메
- 아르튀르 랭보
- 월트 휘트먼
- 샤를 드골
- 필리프 베르틀로
- 자크 코포
- 장 빌라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