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루이 베르나르 바로(Jean-Louis Bernard Barrault프랑스어, 1910년 9월 8일 ~ 1994년 1월 22일)는 프랑스의 저명한 배우이자 연출가, 그리고 팬터마임 예술가였다. 그는 연극 무대와 영화 스크린을 넘나들며 활동했으며, 특히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영화 《천국의 아이들》(1945)에서 팬터마임 예술가 바티스트 역을 맡아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부인인 배우 마들렌 르노와 함께 '르노-바로 극단'을 창단하여 프랑스 연극계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전체적 연극'을 주창하며 연극의 예술적 깊이와 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2. 어린 시절과 교육
장루이 바로는 1910년 9월 8일 프랑스 이벨린주 르베지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사망한 부르고뉴 출신의 약사였다. 바로는 1930년까지 샤프탈 고등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에콜 뒤 루브르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그는 아버지의 바람에 반하여 점원이나 중학교 자율학습 감독관 등으로 일하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3. 초기 활동과 예술적 형성
1931년, 장루이 바로는 샤를 뒤랭의 아틀리에 극단에 입단하며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첫 무대 경험은 벤 존슨의 희곡 《볼포네》에서 작은 단역을 맡은 것이었다. 당시 그는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지만, 뒤랭은 그에게 《볼포네》의 무대 위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아틀리에 극단에서 활동하며 바로는 에티엔 드크루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팬터마임을 배우기 시작했다. 드크루와의 만남은 바로의 예술적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1931년 바로는 드크루와 함께 팬터마임 작품 《원시의 삶》(La Vie Primitive)을 창작하기도 했다. 1935년부터 2년간은 아틀리에 극단의 배우 학교에서 드크루에게 팬터마임을 집중적으로 배웠는데, 당시 마르셀 마르소도 이 학교에 다녔다. 1936년에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어머니를 둘러싸고》를 아틀리에 극단에서 연출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루이 지우베와 같은 저명한 연극인들에게도 인정받았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그는 자크 프레베르, 폴 그리모, 클로드 오탕-라라 등이 조직한 아지프로 연극 단체인 '10월 그룹'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이후 앙토냉 아르토를 만나며 전위적인 팬터마임이나 소설 각색을 통한 실험극을 시도하기도 했다.
4. 주요 연극 활동
장루이 바로의 연극 경력은 그의 예술적 성숙과 함께 프랑스 연극계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뤘다. 그는 여러 극단을 거치며 배우와 연출가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4.1. 아틀리에 극단 시기
장루이 바로는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샤를 뒤랭이 이끄는 아틀리에 극단에서 배우이자 연출가로 활동하며 초기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1931년 첫 연극 무대 데뷔작인 벤 존슨의 《볼포네》에서 단역을 맡았다. 이 시기에는 에티엔 드크루와 협력하여 팬터마임 작품 《원시의 삶》(La Vie Primitive)을 선보였다. 또한 바로는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1935년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각색한 《어머니를 둘러싸고》, 1937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누만시아의 포위》, 1939년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등을 연출하며 이름을 알렸다.
4.2. 코메디 프랑세즈 시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소집되었다가 돌아온 장루이 바로는 1940년 임시 지배인 자크 코포의 초청으로 코메디 프랑세즈에 입단했다. 1943년에는 정단원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피에르 코르네유의 《르 시드》에서 주연을 맡는 등 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1943년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기간 중 폴 클로델의 장대한 희곡 《비단 구두》(Le Soulier de satin)를 연출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당시 어려운 시국 속에서 이뤄낸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이외에도 장 라신의 《페드르》(1940),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1945), 알베르 카뮈의 《칼리굴라》(1945),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Les Mal-Aimés, 1945) 등을 연출했다. 이 시기에 그는 배우 마들렌 르노와 결혼했다.
4.3. 르노-바로 극단 시기
장루이 바로는 부인 마들렌 르노와 함께 '르노-바로 극단'을 창단하여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며 프랑스 연극계에 혁신적인 바람을 불어넣었다.
4.3.1. 마리니 극단 및 초기 순회 공연
1946년, 장루이 바로는 코메디 프랑세즈의 개혁 조치에 불만을 품고 마들렌 르노와 함께 극단을 떠나 '르노-바로 극단'을 창단했다. 극단은 오랫동안 자크 오펜바흐가 극장으로 사용했던 파리의 마리니 극장과 10년 계약을 맺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앙드레 지드의 번역으로 선보인 《햄릿》을 시작으로, 장 라신의 고전부터 프란츠 카프카의 현대 작품까지, 몰리에르의 희극부터 마르셀 아샤르, 장 지로두, 장폴 사르트르의 현대극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한 작품들을 상연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바로는 폴 클로델의 《크리스토프 콜롱의 서》(Le Livre de Christophe Colomb)를 연출하면서 '전체적 연극'(Théâtre total)을 주창하기도 했다. 1956년 마리니 극단과의 계약이 만료된 후, 르노-바로 극단은 프랑스 지방 도시와 해외를 순회하며 활발한 공연을 이어갔으며, 남아메리카 등지에서도 공연을 펼쳤다. 특히 1960년, 1977년, 1979년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4.3.2. 프랑스 극장(오데옹) 감독 및 국제 교류
1959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장루이 바로를 오데옹 극장의 감독으로 초빙했다. 오데옹 극장은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분리되어 '프랑스 극장'(Théâtre de France)으로 개칭되었고, 르노-바로 극단에게 운영이 맡겨졌다. 바로는 이곳에서 이전의 성공작들을 재연출하는 한편, 외젠 이오네스코의 《코뿔소》(1960)나 사뮈엘 베케트의 《행복한 날들》(1963) 등 아방가르드 연극들을 과감하게 무대에 올렸다. 또한 연극에 대한 사상이나 관점이 다른 신진 연출가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하며 프랑스 연극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제국민 연극제'(Théâtre des Nations)를 개최하여 국제 연극 교류를 활발히 추진했으며, 미국의 리빙 시어터와 같은 해외 극단들을 초청하는 등 세계 연극에 문을 개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4.3.3. 1968년 이후 활동
1968년 5월 혁명 당시 장루이 바로는 오데옹 극장의 학생 점거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그해 말 극단이 오데옹 극장에서 퇴출되는 결과를 맞았다. 극단은 1968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경기장 형태의 엘리제 몽마르트르에서 《라블레》(Rabelais, 1968), 《언덕 위의 자리》(Jarry sur la butte, 1970) 등을 연출하며 임시적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1974년부터 1980년까지는 옛 오르세역 내의 가설극장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974), 미시마 유키오의 《사드 후작 부인》(1976), 《천일야화》(1978) 등을 공연했다. 마침내 1981년, 당시 문화부 장관 장-필리프 르카의 도움으로 롱 포앵 극장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아풀레이우스, 장 드 라 퐁텐, 몰리에르의 작품을 편집한 바로의 쇼 《사랑의 사랑》(L'Amour de l'amour, 1981), 조르주 쿨롱의 《스트라우스 일가》(Les Strauss, 1982) 등을 선보이며 연극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990년 연극계에서 은퇴했다.
5. 영화 활동
장루이 바로는 1935년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나날들》(Les Beaux Jours)에서 첫 영화 배역을 맡았다. 그는 배우로서 경력 동안 약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영화 출연작은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영화 《천국의 아이들》(Les Enfants du Paradis, 1945)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팬터마임 예술가 장-가스파르 드뷔로를 모델로 한 바티스트 역을 연기했으며, 이 역할로 인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천국의 아이들》의 촬영은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6. 예술 철학과 영향
장루이 바로는 '전체적 연극'을 주창하며 연극의 모든 요소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려는 깊이 있는 예술 철학을 지녔다. 그는 연극이 단순한 대사 전달을 넘어 신체 표현, 무대 장치, 음악 등 모든 예술적 요소가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관객에게 깊은 경험을 선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그는 소설의 각색이나 팬터마임 등 다양한 실험적인 연출 방식을 시도하며 연극의 경계를 확장하려 했다. 바로는 폴 클로델의 작품들을 연출하며 그의 철학을 구현했으며, 《크리스토프 콜롱의 서》 연출에서 '전체적 연극'의 개념을 명확히 제시했다. 그가 오데옹 극장의 프랑스 극장 감독 시절 외젠 이오네스코나 사뮈엘 베케트와 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을 과감히 수용한 것은 프랑스 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제국민 연극제'를 통해 해외 극단들을 초청하고 다양한 연극관을 가진 신진 연출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는 프랑스 연극계를 국제적인 흐름과 연결하고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중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프랑스 연극의 현대화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 개인 생활
장루이 바로는 1940년 배우 마들렌 르노와 결혼하여 평생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협력자로 함께했다. 그들은 함께 여러 극단을 창단하고 폭넓은 공연 활동을 펼쳤으며, 남아메리카 등 해외 순회 공연도 동행했다. 바로의 조카는 배우 마리-크리스틴 바로이며, 그는 또한 영국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바로와 르노는 죽어서도 함께하여, 파리의 파시 공동묘지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8. 사망
장루이 바로는 1994년 1월 22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그는 부인 마들렌 르노와 함께 파리 파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9. 유산과 평가
장루이 바로는 배우, 연출가, 극단 주재자로서 프랑스 연극사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생애와 예술 활동은 다양한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일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9.1. 긍정적 평가 및 기여
바로의 연극적 혁신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배우로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연출가로서도 독창적인 시도를 거듭했다. 특히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폴 클로델의 《비단 구두》를 성공적으로 연출한 것은 그의 예술적 역량과 뚝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전체적 연극'이라는 철학을 주창하며 연극의 다양한 요소를 통합하려 한 시도는 프랑스 연극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데옹 극장을 '프랑스 극장'으로 개칭한 후 외젠 이오네스코나 사뮈엘 베케트 등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제국민 연극제'를 통해 국제 연극 교류를 활성화한 것은 그가 현대 프랑스 연극 발전에 기여한 구체적인 공헌으로 꼽힌다.
9.2. 비판과 논란
장루이 바로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1968년 5월 혁명 당시 오데옹 극장의 학생 점거를 허용했던 일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그는 문화계와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결국 극단이 오데옹 극장에서 퇴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그의 예술적 이상과 현실 정치적 상황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10. 주요 작품
장루이 바로가 참여했거나 연출한 주요 연극 및 영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10.1. 주요 연극 작품
장루이 바로가 연출하거나 출연한 대표적인 연극 작품 목록은 극단 및 시기별로 분류할 수 있다.
- 아틀리에 극단 시기
- 《원시의 삶》(La Vie Primitive, 1931, 팬터마임, 에티엔 드크루 공동 창작)
- 《어머니를 둘러싸고》(1935, 연출)
- 《누만시아의 포위》(La Numance, 1937, 연출)
- 《굶주림》(Faim, 1939, 연출)
- 코메디 프랑세즈 시기
- 《페드르》(Phèdre, 1940, 연출)
- 《르 시드》(Le Cid, 1940, 출연 및 연출)
- 《햄릿》(Hamlet, 1941, 출연)
- 《탄원하는 여인들》(Les Suppliantes, 1941, 스타드 롤랑 가로스 공연, 예술 감독)
- 《비단 구두》(Le Soulier de satin, 1943, 연출)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 1945, 연출)
- 《칼리굴라》(Caligula, 1945, 연출)
-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Les Mal-Aimés, 1945, 연출)
- 마리니 극장 시기
- 《햄릿》(Hamlet, 1946, 연출)
- 《거짓 고백》(Les Fausses Confidences, 1946)
- 《분노의 밤》(Les nuits de la colère, 1946)
- 《심판》(Le Procès, 1946)
- 《암피트리옹》(Amphitryon, 1947)
- 《벚꽃 동산》(La Cerisaie, 1947)
- 《아멜리에에 몰두하라》(Occupe-toi d'Amélie, 1948)
- 《계엄령》(L'État de siège, 1948)
- 《정오에 나눔》(Partage de midi, 1948)
- 《스카팽의 간계》(Les Fourberies de Scapin, 1949)
- 《리허설, 혹은 벌받은 사랑》(La répétition ou l'amour puni, 1950)
- 《말라테스타》(Malatesta, 1950)
- 《라자르》(Lazare, 1951)
- 《바쿠스》(Bacchus, 1951)
- 《지크프리트》(Siegfried, 1952)
- 《루크레스를 위하여》(Pour Lucrèce, 1953)
- 《크리스토프 콜롱의 서》(Le Livre de Christophe Colomb, 1953)
- 《격언의 밤》(La Soirée des proverbes, 1954)
- 《오레스테이아》(L'Orestie, 1955)
- 《죄수의 꿈》(A Sleep Of Prisoners, 1955)
- 《싸우는 인물》(Le Personnage comattant, 1956)
- 《바스코의 이야기》(Histoire de Vasco, 1957)
- 《뤼 블라스》(Ruy Blas, 1957)
- 오데옹 극장(프랑스 극장) 시기
- 《황금의 머리》(La Tête d'or, 1959)
- 《코뿔소》(Rhinocéros, 1960)
- 《유디트》(Judith, 1961)
- 《하지만, 벌거벗고 걷지 마라》(Mais, n'te promène donc pas toute nue, 1961)
- 《여행》(Le Voyage, 1961)
- 《루크레스의 능욕》(Le Viol de Lucrèce, 1961)
- 《안드로마크》(Andromaque, 1962)
- 《공중 보행자》(Le Piéton de l'air, 1963)
- 《행복한 날들》(Oh les beaux jours, 1963, 로저 블린 연출)
- 《구름 속을 지나야 한다》(Il faut passer par les nuages, 1964)
- 《숲 속의 나날》(Des journées entières dans les arbres, 1965)
- 《병풍》(Les Paravents, 1966, 로저 블린 연출)
- 《헨리 4세》(Henry IV, 1966)
- 《성 앙투안의 유혹》(La Tentation de Saint Antoine, 1967, 모리스 베자르 연출)
- 《미묘한 균형》(A Delicate Balance, 1967)
- 《침묵》(Le Silence, 1967)
- 《거짓말》(Le Mensonge, 1967)
- 임시 극장 및 롱 포앵 극장 시기
- 《라블레》(Rabelais, 1968, 연출)
- 《언덕 위의 자리》(Jarry sur la butte, 1970, 연출)
- 《부르주아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1973, 코메디 프랑세즈, 연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insi parlait Zarathoustra, 1974)
- 《사드 후작 부인》(Madame de Sade, 1976)
- 《신세계》(Le Nouveau Monde, 1977)
- 《천일야화》(Les Mille et une Nuits, 1978, 대마법 서커스단 공동 공연)
- 《사랑의 사랑》(L'Amour de l'amour, 1981)
- 《스트라우스 일가》(Les Strauss, 1982)
10.2. 주요 영화 작품
장루이 바로가 출연한 주요 영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35 | 《아름다운 나날들》 | 르네 | |
1936 | 《제니》 | 르 드로마데르 | |
1936 | 《서구인의 눈으로》 | 할딘 | |
1936 | 《헬레네》 | 피에르 레니에 | |
1936 | 《베토벤의 위대한 사랑》 | 카를 판 베토벤 | |
1937 | 《두 사람에게, 마담 라 비》 | 폴 브리앙송 | |
1937 | 《경찰 세상》 | 스코파 | |
1937 | 《그림자 거리》 | 미친 손님 | |
1937 | 《왕관의 진주》 | 젊은 나폴레옹 / 장 마르탱 / 프랑수아 1세 / 폴 바라스 | |
1937 | 《이상한 드라마》 | 윌리엄 크램프스 | |
1938 | 《폭풍》 | 아프리카인 | |
1938 | 《청교도》 | 프란시스 페리터 | |
1938 | 《나는 고발한다!》 | ||
1938 | 《신기루》 | 피에르 봉베 | |
1938 | 《고도 3.200》 | 아르망 | |
1938 | 《남부의 흔적》 | 올컷 | |
1939 | 《파리네, 혹은 산 속의 금》 | 모리스 파리네 | |
1941 | 《일곱 밤의 퍼레이드》 | 뤼시앵 아르두앙 | |
1941 | 《세느강의 몽마르트르》 | 미셸 쿠르탱 | |
1942 | 《환상 교향곡》 | 엑토르 베를리오즈 | |
1942 | 《데지레 클라리의 환상적인 운명》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
1944 | 《밤의 천사》 | 자크 마르탱 | |
1945 | 《천국의 아이들》 | 바티스트 드뷔로 | |
1945 | 《어둠의 몫》 | 미셸 크레메르 | |
1947 | 《웅장한 바람둥이》 | 브루노 | |
1948 | 《인간 대 인간》 | 앙리 뒤낭 | |
1950 | 《상상의 방랑자들》 | 내레이터 | 목소리 (《취한 배》 부분) |
1950 | 《윤무》 | 시인 로베르 쿠렌캄프 | |
1951 | 《침과 영원의 논고》 | 본인 | |
1954 | 《만일 베르사유에서 내게 이야기했더라면》 | 페넬롱 | |
1959 | 《코르들리에 박사의 유언》 | 코르들리에 박사 / 오팔 | 텔레비전 영화 |
1960 |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 미메 | |
1961 | 《늑대의 기적》 | 루이 11세 | |
1962 | 《지상 최대의 작전》 | 루이 롤랑 신부 | |
1964 | 《큰 공포》 | 두브 | |
1966 | 《차팍과》 | 브누아 박사 | |
1977 | 《자크 프레베르》 | 본인 | |
1980 | 《연인의 망명》 | 소개자 | |
1982 | 《바렌느의 밤》 | 니콜라 에드메 레티프 드 라 브르통 | |
1988 | 《호수의 빛》 | 노인 |
11. 저서 및 출판물
장루이 바로는 자신의 연극 철학과 삶의 경험을 담은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1951년에 출간된 회고록 《연극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Theatre)과 1972년에 출간된 《내일을 위한 추억》(Souvenirs pour demain)이 있다. 《내일을 위한 추억》은 한국어로 《내일의 선물: 장루이 바로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루이 지우베, 가스통 바티와 함께 《프랑스 배우론》이라는 공저를 남겼다.
12. 추모 및 기념
장루이 바로는 파리의 파시 공동묘지에 그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부인인 마들렌 르노와 함께 안장되어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13. 같이 보기
- 마들렌 르노
- 에티엔 드크루
- 샤를 뒤랭
- 마르셀 카르네
- 앙드레 말로
- 리빙 시어터
- 앙토냉 아르토
14. 더 읽어보기
- 이와세 다카시 외, 《프랑스 연극사 개설 (증보판)》, 와세다대학 출판부, 1995.
- 와타나베 준, 《파리 개막》, 마루젠 북스 072, 1998.
- 나카다 코지, 《루이 지우베와 그 시대》, 사쿠힌샤, 2000.
- 우메다 하루오 편역, 《프랑스 배우론》 (루이 지우베, 가스통 바티와 공저), 미래사 테스피스 총서, 1955.
- 이시자와 슈지 역, 《내일의 선물: 장루이 바로 자서전》 (Souvenirs pour demain 1972), 신초샤,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