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폴 앤드루 오닐(Paul Andrew O'Neill폴 앤드루 오닐영어, 1963년 2월 25일 출생)은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출신의 전 야구 우익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에서 17시즌 동안 활약했습니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 (1985-1992)와 뉴욕 양키스 (1993-2001)에서 뛰며 5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오닐은 통산 281개의 홈런, 1,269개의 타점, 2,107개의 안타, 그리고 .288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1994년에는 .359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5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3번의 퍼펙트 게임이 달성된 경기에 승리팀 선수로 참여한 유일한 선수라는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YES 네트워크의 해설자로 활동하며 야구에 대한 깊은 지식과 열정을 팬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2. 어린 시절 및 배경
폴 오닐은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폴 앤드루 오닐은 1963년 2월 25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버지니아는 의료 기술자였고,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폴은 그중 막내였습니다. 아버지 찰스 "칙" 오닐은 개착 사업을 경영했지만, 그의 진정한 열정은 야구였습니다. 전 마이너 리그 투수였던 칙 오닐은 자신의 야구 지식과 애정을 모든 자녀에게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아들들이 최고의 환경에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매주 지역 구장의 잔디를 깎기도 했습니다. 폴의 증조부는 네브래스카주의 자작 농장 소유자였고, 마크 트웨인의 사촌인 메리 클레먼스와 결혼했습니다. 폴의 누나 몰리 오닐(Molly O'Neill몰리 오닐영어, 1952~2019)는 요리사이자 요리책 작가, 그리고 뉴욕 타임스의 음식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습니다.
오닐이 5세 때, 그의 가족은 뒤뜰에 임시 야구장이 완벽하게 조성될 수 있는 더 큰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이 넓고 잔디로 덮인 나무 그늘이 있는 뒤뜰에서 자녀들은 픽업 게임을 하거나 홈런 경쟁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오하이오주에서 자란 오닐은 자연스럽게 신시내티 레즈의 팬이 되었습니다. 1970년 여름, 아버지 칙은 폴을 데리고 신시내티의 크로슬리 필드에서 열린 레즈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어린 오닐은 당시 파이리츠의 우익수이자 4번의 타격왕, 12번의 골드 글러브 수상자였던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오닐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치열한 경쟁자였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야구를 목적을 가지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2.2. 아마추어 경력
14세에 오닐은 콜럼버스에 있는 브룩헤이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야구, 농구, 미식축구를 겸했습니다. 그는 타석과 마운트에서 뛰어난 선수였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콜럼버스 시립 선수권 대회에서 노히트 경기를 펼쳤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야구와 농구 양쪽으로 대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신시내티 레즈의 진 베넷을 포함한 프로 야구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농구에서는 고등학교 4학년이던 1981년에 올스테이트팀에 선정되었고, 센트럴 디스트릭트 올해의 선수로도 뽑혔습니다.
3. 프로 야구 경력
폴 오닐은 신시내티 레즈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를 한 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여 팀의 황금기를 이끌며 여러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3.1. 드래프트 및 마이너 리그 시절
수많은 고민 끝에 오닐은 대학 진학 대신 야구선수의 길을 선택하여 마이너 리그에 입성했습니다. 그의 고향 팀인 신시내티 레즈는 1981년 아마추어 드래프트 4라운드(전체 93순위)에서 오닐을 지명했습니다. 레즈는 그를 파이오니어 리그 소속 루키 팀인 빌링스 머스탱스에 배정했습니다. 18세의 오닐은 66경기에서 7개의 2루타, 2개의 3루타, 3개의 홈런을 치고 29개의 타점과 37개의 득점을 올렸습니다.
이후 오닐은 미드웨스트 리그 소속 레즈의 싱글 A 팀인 세다래피즈 레즈에서 1982년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해 그의 동료 중 한 명은 몇 년 후 오닐이 메이저 리그에서 함께 뛰게 될 당시 20세의 로스앤젤레스 출신 외야수 에릭 데이비스였습니다. 세다래피즈에서 116경기에 출전한 오닐은 8개의 홈런과 71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72의 타율을 올렸습니다。
1983년 시즌을 싱글 A 플로리다 리그의 탬파 타폰스에서 시작했습니다. 데이비스가 더블 A로 승격하는 동안 오닐은 훗날 동료가 될 23세의 왼손 투수 톰 브라우닝을 만났습니다. 오닐은 8개의 홈런과 51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78의 타율을 올렸습니다. 그는 시즌의 남은 기간을 코네티컷주 워터버리에 있는 더블 A 이스턴 리그 소속 워터버리 레즈에서 보냈습니다.
1984년 시즌에는 이스턴 리그의 버몬트 레즈에서 뛰었습니다. 훗날 신시내티 레즈에서 함께 뛰게 될 크리스 사보와 캘 대니얼스도 버몬트 팀의 동료였습니다. 오닐은 31개의 2루타, 5개의 3루타, 16개의 홈런, 76개의 타점, 그리고 29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65의 타율을 올렸습니다. 버몬트 레즈는 75승 65패로 이스턴 리그에서 4위를 차지했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 그해 12월 29일, 21세의 오닐은 고향에서 어린 시절 연인이었던 네벌리 데이비스와 결혼했습니다.
1985년, 신시내티 레즈는 오닐을 서부 지구의 트리플 A 팀인 콜로라도주 덴버 제퍼스로 승격시켰습니다. 이는 그에게 있어 전환점이 된 시즌이었습니다. 137경기에 출전한 오닐은 타율 .305를 기록하며 안타(155개)와 2루타(32개) 부문에서 리그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또한 7개의 홈런을 쳤고 74개의 득점을 올렸습니다.
3.2. 신시내티 레즈 (1985-1992)
트리플 A에서의 큰 성공으로 레즈는 시즌 후반 그를 메이저 리그로 승격시켰고, 1985년 9월 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8회 초, 데이브 밴고더를 대신해 대타자로 나선 그는 1사 1루 상황에서 우익수 방향 1루타를 쳐 주자 데이브 콘셉시온을 3루까지 진루시켰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론 오스터가 병살타를 치면서 이닝이 종료되었습니다.
오닐은 그 달에 3경기 더 출전했습니다. 12타석에서 4개의 안타, 1개의 2루타, 1개의 타점, 1개의 득점을 기록하며 타율 .333, 장타율 .417을 기록했습니다.
1986년에는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를 오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덴버 제퍼스에서 55경기를 뛰었고, 메이저 리그에서는 3경기에서 2타석 무안타를 기록했습니다.
1987년은 오닐의 메이저 리그 첫 풀타임 시즌이었습니다. 주로 대타자로 출전한 그는 시즌 전반기 36경기 42타석에서 2홈런 6타점을 기록하며 타율 .143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기에는 레즈의 감독 피트 로즈가 오닐의 출전 시간을 늘렸고, 그는 후반기 48경기 중 29경기에 선발 출전했습니다. 꾸준한 출전 기회를 통해 오닐은 타석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12개의 2루타, 5개의 홈런, 22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타율 .297을 올렸습니다.
1988년, 오닐은 드디어 전업 메이저 리그 선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레즈의 선발 라인업에는 전 마이너 리그 동료인 에릭 데이비스, 캘 대니얼스, 크리스 사보, 그리고 9월 16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톰 브라우닝이 포함되었습니다.
피트 로즈가 감독을 맡은 4년 연속 시즌 동안 레즈는 2위를 차지했습니다. 유망한 젊은 핵심 선수들과 경쟁력 있는 타자, 투수들로 인해 레즈의 미래는 밝아 보였고, 1989년 시즌 시작과 함께 신시내티의 기대는 매우 높았습니다. 하지만 레즈의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8월 24일, 로즈 감독은 도박 문제로 인해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었습니다.
오프시즌에 레즈는 루 피니엘라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습니다. 로즈처럼 피니엘라도 뛰어난 야구 지식과 강렬한 투지를 가진 경쟁자였습니다. 레즈는 새 감독에게 반응하여 91승을 거두며 10년 만에 처음으로 페넌트를 우승, 시즌 내내 1위를 유지했습니다.
오닐의 1990년 시즌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7월 29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나왔습니다.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 스콧 개럴츠는 9회 초 2아웃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오닐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 그는 초구와 2구를 파울로 날렸고, 이후 노히트를 깨는 중전 1루타를 쳤습니다. 공격적으로 오닐은 또 다른 견고한 시즌을 보내며 16홈런, 78타점을 기록했고 타율은 .270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최고의 우익수 수비를 펼쳐 수비율(.993)과 외야 보살(13개)에서 내셔널 리그 우익수들을 이끌었습니다.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레즈는 11년 전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겼던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맞붙었습니다. 포스트시즌 첫 타석에서 오닐은 2루타를 치며 1회 초 에릭 데이비스를 불러들여 레즈가 3대0으로 앞서게 했습니다. 뜨거운 시작에도 불구하고 파이리츠는 레즈의 리드를 쪼개며 4대3으로 승리했습니다.
2차전에서 파이리츠 선발 더그 드래벡은 8이닝 동안 8탈삼진을 기록하며 5안타만을 허용하는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습니다. 오닐은 험 위닝햄의 득점으로 1회 말에 스트라이크아웃되었습니다. 위닝햄이 2루에 있고 2아웃인 상황에서 오닐이 5회 말에 타석에 들어섰을 때 점수는 동점이었고 긴장은 고조되었습니다. 오닐은 좌익수 깊은 곳으로 2루타를 날려 위닝햄을 다시 불러들였고, 레즈는 2대1로 앞서게 되었습니다.
오닐은 레즈가 6대3으로 승리한 3차전에서는 벤치에 있었지만, 4차전에서는 복귀하여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4회 초 오닐이 밥 워크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파이리츠가 1대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그는 우익수 깊은 곳으로 즉시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 홈런은 레즈가 5대3으로 승리하는 불꽃을 지폈습니다.
드래벡이 3대2로 파이리츠의 승리를 이끈 5차전에서 레즈가 패한 후, 팀은 다음날 다시 일어서 2대1로 승리하며 1976년 이후 첫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차지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오닐은 3개의 2루타와 1개의 홈런을 포함하여 .417의 타율과 4개의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1.324의 OPS는 양 팀 통틀어 최고였습니다. 롭 디블과 랜디 마이어스가 NLCS MVP를 수상했지만, 오닐은 분명히 이 시리즈의 스타 타자였습니다.
레즈는 월드 시리즈에서 전년도 챔피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맞붙었습니다. 시리즈 MVP 호세 리호의 두 차례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레즈는 애슬레틱스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빠르고 쉽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오닐은 타석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며 12타석에서 단 1개의 1루타만을 기록하며 타율 .083에 그쳤습니다. 그는 5번이나 출루했지만, 1타점과 1득점만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었습니다.
1991년, 오닐은 타율 .256에 그쳤지만, 자신의 경력에서 최고의 장타력을 선보였습니다. 28개의 홈런과 91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장타형 타자로 변모했습니다. 레즈 구단은 이제 홈런 타자로 비춰지는 오닐에게 더 큰 장타력 수치와 함께 더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오닐은 자신을 직구 타자로 보았고, 1992년 시즌 첫 두 달 동안 29타점을 기록하며 타율 .361을 기록한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 4개의 홈런만을 쳤습니다.
3.3. 뉴욕 양키스 (1993-2001)
폴 오닐은 뉴욕 양키스에서의 전성기 동안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3.3.1. 초창기 및 타격왕 (1993-1995)
1992년 11월 3일, 신시내티 레즈는 중견수 로베르토 켈리와 마이너 리그 선수 조 드베리를 받고 오닐을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당시 이 트레이드는 일종의 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켈리는 10년 일찍이 아마추어 계약을 맺은 이래 최고의 유망주였고, 그는 자신의 첫 올스타 팀에 선정된 시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닐은 이 소식에 낙담했습니다. 그는 항상 뛰었던 유일한 야구팀, 자신의 고향 팀으로부터 멀리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욕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오닐의 초기 감정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상은 오닐이 1993년 스프링 캠프 첫날 만난 양키스의 1루수 돈 매팅리를 포함했습니다. 오닐은 매팅리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양키스에서의 오닐의 첫 시즌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수비 외에도 그는 20개의 홈런과 75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311의 타율을 올렸습니다. 또한 양키스에게도 좋은 한 해였는데, 88승을 거두며 최종 월드 시리즈 챔피언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밀려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에서 2위를 차지했습니다. 단 한 시즌 만에 오닐의 열정과 성과는 그를 뉴욕 팬들의 총아와 팀의 리더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지위는 1994년 시즌에 더욱 커졌고, 그의 프로 경력 중 가장 실망스러운 시즌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즌은 4월 1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2개의 홈런과 5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시작된 8경기 연속 안타 행진으로 강조되었습니다. 4월 말까지 오닐은 6개의 홈런과 23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타율 .448을 기록했습니다. 5월에도 그는 8개의 2루타, 4개의 홈런, 12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타율 .410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타율은 6월 17일까지 .400 이상을 유지했으며, 7월에는 두 번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습니다. 오닐은 그 경기에서 한 번 타격했고, 8회에 자이언츠의 구원 투수 로드 벡을 상대로 아메리칸 리그의 8대7 패배로 물러났습니다.
그 당시 양키스는 1970년대 이후 최고의 야구를 펼치며 70승 43패의 기록을 쌓았고, 8월 12일 2위였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큰 리드를 벌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71번째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오닐과 나머지 메이저 리그 선수 협회는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처음에는 오닐은 양측이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몇 주 안에 양측이 시즌을 살릴 시간 안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9월 14일, 커미셔너 버드 셀리그는 정규 시즌의 남은 경기, 플레이오프, 월드 시리즈를 취소한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불완전했던 1994년 시즌 동안 오닐의 활약은 뛰어났습니다. 그는 경력 최고 타율인 .359로 아메리칸 리그 타율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1985년 돈 매팅리가 우승한 이래 양키스를 위한 첫 번째 타격 타이틀이었습니다. 오닐은 또한 출루율(.461)에서 2위, 장타율(.603)과 OPS(1.064)에서 4위를 기록했습니다. 거칠게 말해 시즌의 3분의 2 동안 그는 21개의 홈런을 치고 25개의 2루타와 83개의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MVP 투표에서 5위를 차지했습니다.
오닐은 뛰어난 시즌을 보상받아 양키스와 1900.00 만 USD에 4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오닐의 대리인은 뉴욕 타임스에 이 계약이 공개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선수 파업은 결국 1995년 4월 2일에 끝났고, 지연되었던 시즌은 마침내 4월 25일에 시작되었습니다. 늦은 시작으로 인해 정규 시즌은 162경기에서 144경기로 단축되었습니다. 1994년의 뛰어난 활약을 이어 1995년 오닐은 전반기에 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올스타 휴식 전 52경기에서 그는 11개의 홈런, 39개의 타점, 1.42의 OPS를 기록하며 .346의 타율을 올렸습니다.
후반기가 시작되자 전 타격왕은 심하게 부진했습니다. 8월 30일까지 그의 타율은 .303으로 떨어졌습니다. 오닐처럼 양키스도 8월에 고전하여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1위인 보스턴 레드삭스에 15경기 차이로 뒤처졌습니다. 그러나 팀은 올해의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텍사스 레인저스에 단 2.5경기 차이였습니다.
후반기 들어 오닐은 2명의 주자를 두고 타석에 들어섰을 때 다시 살아났습니다. 5회 말, 오닐은 그날 자신의 3번째 홈런을 쳤습니다. 그는 후에 타점 1루타를 추가하여 11대6 승리에서 8타점으로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그것은 팀의 3연속 승리였고, 그들은 마지막 31경기 중 25승을 거두며 마지막 날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를 확보했습니다. 한 해 동안 오닐은 22개의 홈런과 96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300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3.3.2. 황금기 및 월드 시리즈 우승 (1996-2000)
14년 만에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한 양키스는 강타자들로 가득 찬 아메리칸 리그 서부 챔피언 시애틀 매리너스와 맞붙었습니다. 매리너스 팀에는 켄 그리피, 티노 마르티네스, 에드가 마르티네스, 그리고 전 양키스 유망주 제이 부너가 있었습니다.
양키스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첫 두 경기를 승리했습니다. 2차전은 15회 연장전의 좌절감 속에서 오닐이 전 레즈 동료 놈 찰턴을 상대로 7회 솔로 홈런을 쳐 동점을 만드는 극적인 경기였습니다. 양키스는 결국 짐 라이리츠의 끝내기 홈런으로 경기를 승리했습니다.
매리너스는 다음 두 경기를 가져가며 5차전 승부를 결정지었습니다. 4회 초 양키스는 1대0으로 뒤지고 있었는데, 오닐이 주자 버니 윌리엄스가 1루에 있는 상황에서 앤디 베네스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다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오닐은 우익수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2점 홈런을 날려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6회에는 돈 매팅리의 타구로 득점하여 양키스를 4대2로 앞서게 했습니다.
경기는 또 다른 공포로 변했고, 아마도 2차전보다 더 흥미진진했습니다. 매리너스는 에드가르 마르티네스가 조이 코라와 켄 그리피 주니어에게 2루타를 날리면서 11회 말 결국 승리했습니다. 비록 그의 팀이 시리즈에서 패했지만, 오닐은 3개의 홈런과 6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오프시즌은 뉴욕에서 여러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오랜 등 부상으로 고통받던 매팅리는 34세의 나이로 은퇴했습니다. 그를 1루에서 대체한 선수는 양키스가 오프시즌 트레이드로 영입한 매리너스의 티노 마르티네스였습니다.
팀은 또한 감독을 교체했으며, 성공적인 지도에도 불구하고 벅 쇼월터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그의 후임으로 조 토리를 선임했습니다. 오닐은 토리를 좋아했으며, 그가 양키스의 우익수 리더라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양키스는 4월 30일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1위로 올라섰고, 그 리드를 놓치지 않으며 결국 92승을 거두며 16년 만에 첫 온전한 시즌 지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오닐은 개인적으로 또 다른 강한 시즌을 보냈는데, 35개의 2루타, 19개의 홈런, 91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타율 .302를 올렸습니다. 그는 또한 102번이나 볼넷을 얻어 출루율을 .411로 끌어올렸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텍사스 레인저스를 3대1로 꺾었습니다. 오닐은 시리즈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며 타점이나 득점 없이 타율 .133을 기록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양키스가 4경기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시리즈에 복수하려는 오리올스와 맞붙었습니다. 오닐은 1차전 승리한 양키스 경기에서 3타수 무안타였으며, 버니 윌리엄스의 11회 끝내기 홈런으로 극적인 경기가 끝났습니다. 2차전에서 양키스는 패했고 오닐은 3타석에서 1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3차전에서는 벤치에 있었지만, 4차전에서 돌아와 8대4로 승리한 경기에서 양키스를 5대2로 앞서게 하는 홈런을 로키 코핑거에게서 쳤습니다. 양키스는 5차전도 승리하며 1981년 이후 첫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가져갔습니다.
월드 시리즈에서 그들의 상대는 96승을 거두고 3명의 사이 영 상 수상자들인 그레그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를 포함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였습니다.
1차전과 2차전은 홈 구장에서 12대1과 4대0으로 패한 양키스에게 악몽이었습니다. 그러나 양키스는 어려움 속에서도 3차전과 4차전을 승리했습니다. 오닐은 이 두 경기에서 대릴 스트로베리를 대신해 벤치에 앉았습니다.
결정적인 6차전에서 오닐은 선발 출전하여 우익수 방향 2루타를 날려 3회 말 양키스의 3득점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1아웃 후 그는 양키스 포수 조 지라디의 1루타에 득점했습니다. 9회에 2아웃 상황에서 마크 렘케가 3루수 찰리 헤이스에게 땅볼을 쳐 18년 만에 처음으로 양키스는 야구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1997년 양키스는 아메리칸 동부에서 오리올스에 2경기 차이로 뒤쳐졌지만, 와일드카드를 획득했습니다. 오닐은 42개의 2루타, 21개의 홈런, 117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324의 타율을 기록하는 훌륭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는 또한 네 번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12위를 차지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인디언스와 맞붙었고, 5회에 팀 레인스, 데릭 지터, 오닐의 연속 홈런에 힘입어 8대6으로 1차전을 승리했습니다. 양키스는 2차전을 7대5로 패했습니다.
오닐은 3차전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베이스가 가득 차고 양키스가 4회 초 2대1로 앞선 상황에서 오닐은 인디언스 구원 투수 채드 오지아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양키스 선발 투수 데이비드 웰스가 던진 방향과 함께 나온 안타는 경기를 승리권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닐은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두 번 더 파울을 쳤습니다. 그리고 타석의 8번째 투구에 오닐은 오지아의 투구를 그랜드 슬램 홈런으로 날렸습니다. 양키스는 6대1의 리드를 잡았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두 경기를 패했습니다. 오닐은 2개의 2루타와 2개의 홈런을 포함하여 7개의 타점과 .421의 타율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양키스는 결국 시즌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1998년 시즌 시작 초반 부진 후, 양키스는 8연승을 거두었고, 31경기 중 26승을 올렸습니다. 5월 17일 아침까지 그들은 보스턴 레드삭스에 3.5경기 차로 앞섰습니다. 그날 오후 데이비드 웰스가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면서 상황은 더욱 좋아졌습니다. 오닐은 4타수 무안타였지만, 마지막 아웃을 잡아냈습니다. 이는 오닐이 출전한 두 번째 퍼펙트 게임이었습니다.
양키스는 여름 내내 승승장구하며 당시 아메리칸 리그 기록인 114승을 거두었고, 지구 우승을 22경기 차이로 따냈습니다.
오닐은 6년 연속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며 .317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또한 24개의 홈런과 40개의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레인저스를 스윕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인디언스와 맞붙었는데, 이는 1년 전 자신들을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시킨 팀에 대한 복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1차전 1회 말, 오닐은 척 노블로크에게 득점을 안겨주는 타점으로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두 타석 후 그는 거친 투구에 3루타를 쳐 양키스에 득점을 안겼습니다. 양키스는 리드를 놓치지 않고 결국 7대2로 승리했습니다. 오닐은 7회 2루타를 추가하며 5타수 2안타, 1타점, 2득점으로 하루를 마쳤습니다.
2차전과 3차전은 인디언스에게 넘어갔고, 클리블랜드에서 중요한 4차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양키스 패배는 그들을 3대1로 뒤처지게 하는 시나리오였고, 오닐과 팀은 절망적으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1회에 오닐은 양키스를 1대0으로 앞서게 하는 홈런을 우익수 방향으로 날리면서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4회에는 도루에 성공하여 양키스를 결국 4대0 승리로 이끈 칠리 데이비스의 1루타에 득점했습니다.
양키스는 5차전 1회에 3득점을 올리며 반격했습니다. 오닐은 2루타와 득점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는 2회에 1타점 1루타를 추가하여 양키스를 4대2로 앞서게 한 후, 양키스는 5대3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6차전에서도 승리하며 3년 만에 두 번째로 양키스를 월드 시리즈에 진출시키는 9대5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오닐은 2개의 2루타와 1개의 홈런을 포함하여 .280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맞붙었습니다. 1차전은 공포의 9회였습니다. 양키스는 7회 말 7득점 대반격으로 경기를 이끌었으며, 결국 9대6으로 승리했습니다.
2차전은 오닐이 5타수 1득점을 기록한 9대3의 압승이었습니다. 3차전에서 양키스는 7회 중반까지 3대0으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스콧 브로시어스의 솔로 홈런과 파드리스의 실책으로 득점을 허용하여 점수 차는 3대2로 좁혀졌습니다. 8회에 오닐은 브로시어스의 그날 두 번째 홈런에 득점했습니다.
양키스는 다음날 밤 스윕을 완성하며 3대0으로 승리했습니다. 오닐은 결정타에서 2루타, 1루타, 그리고 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19타수에서 4개의 안타만을 쳤고 홈런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3개의 득점을 기록하며 화려한 수비를 펼쳤습니다. 오닐은 경력에서 세 번째로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오닐은 1999년에 강한 시즌을 보내며 4월에 4개의 홈런과 20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타율 .297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5월에 부진했습니다. 5월 25일까지 그의 타율은 .244로 떨어졌습니다. 그날 그는 4타수 3안타로 부진에서 벗어났고, 다음날 5타수 2안타를 기록했습니다. 6월에는 .334를 기록하며 20개의 득점을 올렸습니다. 7월에는 뜨거운 타격감을 이어가 10개의 2루타, 5개의 홈런, 19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305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7월 18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오닐은 자신의 경력에서 세 번째 퍼펙트 게임을 경험했습니다. 톰 브라우닝, 데이비드 웰스, 데이비드 콘의 세 차례 퍼펙트 게임 승리에 연루되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양키스는 98승으로 정규 시즌을 마쳤고, 4년 만에 세 번째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오닐은 39개의 2루타, 19개의 홈런, 110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85의 타율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10월 2일 그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레인저스를 스윕했지만, 오닐은 갈비뼈 부상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출전했습니다. 그는 2경기에서 8타수 2루타 2개를 기록했지만 타점은 없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레드삭스와 맞붙었습니다. 오닐은 다소 나은 활약을 보였지만, 분명히 스윙에 힘이 없었으며, 1타점과 함께 타율 .286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오닐은 갈비뼈 부상보다 더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6월에 심근 경색을 겪었고, 플레이오프가 시작될 때 칙 오닐은 뉴욕의 레녹스 힐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양키스가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오닐은 보통 아버지의 병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월드 시리즈가 시작되기 직전, 아버지가 폐렴과 포도상구균 감염에 걸리자 그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폴 오닐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1999년 월드 시리즈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차전은 오를란도 에르난데스와 그레그 매덕스 사이의 투수전이었습니다. 경기가 1대1 동점인 상황에서 오닐은 베이스가 가득 찬 채로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브레이브스는 왼손 마무리 투수 존 로커를 투입했습니다. 오닐은 안타를 쳐 양키스를 3대1 리드로 이끌었고, 결국 4대1로 승리했습니다.
팀이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오닐의 아버지는 거의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폴 오닐은 3차전이 열리기 전날 밤, 병원에서 아버지 곁을 지키다가 경기장을 향해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1회에 경기를 동점으로 만드는 1루타를 기록했습니다. 양키스는 결국 채드 커티스의 10회 끝내기 홈런으로 6대5로 승리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지 몇 시간 후, 오닐의 아버지는 폐와 신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오닐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를 가족과 함께 보냈고, 4차전에는 출전하지 않으려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양키스가 필드로 나설 때, 감정적으로 지쳐있고 갈비뼈 부상으로 끊임없는 고통을 겪고 있던 오닐은 자신의 평소 위치인 우익수로 당당히 나섰습니다.
양키스는 세 번째 월드 시리즈 타이틀을 우승했고, 이는 오닐의 경력에서 네 번째 우승이었습니다. 월드 시리즈 후 잠시 은퇴를 고려했지만, 양키스가 그의 650.00 만 USD 옵션을 실행하자 오닐은 돌아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양키스는 다시 지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오닐은 18개의 홈런과 100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83의 타율을 올리는 또 다른 좋은 한 해를 보냈습니다.
포스트시즌 첫 두 라운드에서 애슬레틱스와 매리너스를 통과한 후, 양키스는 2000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메츠와 맞붙었습니다. 이는 44년 만에 첫 "서브웨이 시리즈"였습니다.
1차전 9회 말, 양키스가 3대2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1아웃 상황에서 오닐은 몸집이 크고 까다로운 우완 투수 아르만도 베니테스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루이스 폴로니아와 호세 비스카이노의 연속 1루타가 터진 후, 척 노블로크는 좌익수 방향 희생플라이를 쳐 오닐을 홈으로 불러들여 3대3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10회에 오닐은 만루 상황에 1아웃으로 타석에 들어섰지만, 초구를 스윙하여 이닝을 끝내는 병살타를 쳤습니다. 양키스는 12회에 4대3으로 경기를 승리했습니다.
양키스는 2차전도 승리했고, 오닐은 6대5의 치열한 승리에서 4타수 3안타 1타점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3차전에도 출전하여 4타수 3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그 경기 4회에 1대1 동점인 상황에서 오닐은 1타점 3루타를 날려 양키스를 리드로 이끌었습니다. 양키스는 4대2로 패했습니다. 이 패배로 14경기 월드 시리즈 연속 승리 행진이 깨졌고, 메츠가 시리즈를 따라붙었습니다.
4차전 2회에 오닐은 3루타를 쳤지만, 양키스는 4대2로 패했습니다. 그들은 5차전도 승리했고, 9회 초 루이스 소호가 2아웃 2루타를 치며 승리했습니다. 이는 양키스의 3년 연속 타이틀이었습니다. 오닐은 2개의 2루타와 2개의 3루타를 포함하여 .474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정규 시즌 동안에는 3루타를 치지 못했습니다.
3.3.3. 마지막 시즌 및 은퇴 (2001)
시즌이 끝날 무렵, 2001년 시즌에 대한 오닐의 입지는 불확실했습니다. 그의 계약은 만료되었고, 37세였던 그는 8월에 겪은 고질적인 부상으로 인해 힘든 후반기와 포스트시즌을 보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은퇴하거나 고향 근처의 다른 팀에서 뛰는 것을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 11월 16일, 오닐은 725.00 만 USD에 1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여름 동안 그는 이 시즌 후에 은퇴하기로 결정했다는 양키스 내부의 몇몇 보고를 들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계획이 팀에 방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시즌이 끝날 때까지 공식 발표를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9월 2일 펜웨이 파크에서 오닐은 자신의 네 번째 퍼펙트 게임에서 스트라이크 한 개 차이로 실패하는 순간을 지켜봤습니다. 양키스 선발 투수 마이크 무시나는 8⅔이닝 동안 레드삭스를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13명의 타자를 삼진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레드삭스의 칼 에버렛은 무시나의 퍼펙트 게임 시도를 깨는 중전 1루타를 쳤습니다.
9월 7일, 오닐은 왼발에 피로골절을 입어 부상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4일 후, 뉴욕은 2대의 상업 항공기가 세계 무역 센터에 충돌하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오닐을 포함한 양키스 선수단은 그라운드 제로와 병기를 방문하여 근로자들과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었습니다.
9월 18일 야구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오닐은 10월 3일까지 부상자 명단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 그가 라인업에 복귀했을 때, 그는 4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2개의 홈런을 쳤고, 플레이오프 로스터에 포함되었습니다.
25경기를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세의 오닐은 인상적인 통계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33개의 2루타, 21개의 홈런, 70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67의 타율을 올렸습니다. 그는 또한 22개의 도루를 성공시켜 한 시즌에 최소 20홈런과 20도루를 기록한 역사상 최고령 선수가 되었습니다. 양키스는 네 번째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애슬레틱스에게 첫 두 경기를 패했습니다. 오닐은 그 경기들에서 8타석 무안타에 그쳤습니다. 오닐은 그가 2루타를 친 9대2로 승리한 4차전에만 출전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정규 시즌 116승으로 기록을 세운 시애틀 매리너스와 맞붙었습니다. 오닐은 양키스가 4대2로 승리한 1차전에서 2개의 홈런을 쳤습니다. 양키스는 또한 오닐이 3타석에서 1안타를 기록한 3대2 승리를 거둔 2차전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매리너스는 3차전에서 양키스를 크게 눌렀지만, 양키스는 다음 두 경기를 가져갔습니다. 오닐은 양키스가 12대3으로 승리한 5차전에서 홈런과 1루타를 쳤습니다. 이는 그들의 네 번째 연속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였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오닐은 2개의 홈런과 3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417의 타율을 올렸습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하며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비록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오닐의 은퇴 계획 소문이 언론에 유출되었고, 양키스 팬들은 오닐이 자신의 마지막 몇 경기를 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이아몬드백스는 1차전과 2차전을 쉽게 가져갔지만, 양키스는 3차전을 가져갔습니다。 4차전에서 양키스는 7이닝 동안 단 1실점으로 팀을 막아낸 다이아몬드백스 선발 투수 커트 실링을 상대로 거의 득점하지 못했습니다. 8회에는 구원 투수 김병현이 연속 삼진을 잡았습니다.
9회에 1아웃 상황에서 3대1로 뒤지던 오닐은 좌익수 방향으로 1루타를 날렸습니다. 그 후 버니 윌리엄스가 삼진을 당하며 2아웃 상황에서 티노 마르티네스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1아웃만 남은 상황에서 월드 시리즈는 양키스에게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마르티네스는 아웃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김병현의 초구를 중견수 담장으로 날렸습니다. 오닐과 5만6천 명의 팬들은 그와 마르티네스가 홈을 밟는 순간 열광했습니다. 1이닝 후 데릭 지터는 끝내기 홈런을 쳐 시리즈를 이어갔습니다.
5차전은 4차전의 사실상 복사판이었습니다. 양키스는 그 경기 9회 초까지 2대0으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오닐이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뛰고 있다는 것을 아는 팬들은 그를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9회 말, 스콧 브로시어스는 각각 2아웃 상황에서 동점을 만드는 홈런을 쳐 3대3을 만들었습니다. 양키스는 12회에 경기를 승리하며 시리즈를 3대2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4연속 우승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6차전에서 다이아몬드백스가 양키스를 압도했고, 7차전에서는 9회 말 마리아노 리베라를 상대로 2득점을 올리며 3대2로 승리했습니다. 이는 오닐에게 씁쓸한 끝이었습니다.
4. 플레이 스타일 및 성격
오닐은 경기장에서 그의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과 감정적인 태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고, 자신의 성과에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었으며, 경기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실망감이나 심판의 판정에 대한 불만으로 워터 쿨러를 공격하거나 배트를 그라운드에 내동댕이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격정적인 모습은 언론과 팬들로부터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은 팬들로부터 "워리어(Warrior워리어영어)" 또는 "히트 앤 소울(ヒート・アンド・ソウル히트 앤 소울일본어)"이라는 애칭을 얻었습니다. 그는 1989년 7월 5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우익수 앞 땅볼 타구를 잡지 않고 발로 차서 1루로 "송구"한 기이한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1996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포수 존 마르자노와의 벤치 클리어링에 연루되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닐은 드러머로서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키스 시절에는 버니 윌리엄스나 존 웨테랜드와 함께 클럽하우스에서 즉석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5. 선수 은퇴 후 경력
선수 은퇴 후, 오닐은 야구계에 남아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5.1. 해설자 경력
2001년 야구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오닐은 YES 네트워크에서 뉴욕 양키스의 경기 전후 쇼 분석가와 색채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 그는 가족과 함께 오하이오 주로 돌아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7일, 오닐은 뉴욕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이는 월터 오맬리, 빈 스컬리, 스티브 가비, 짐 조이스 심판, 그리고 시각장애 스포츠 기자 에드 루카스와 함께였습니다.

2020년과 2021년 시즌 동안 코로나19 범유행 관련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으로 인해, 오닐은 오하이오 자택의 지하 스튜디오(별명 "스튜디오 21")에서 양키스 경기를 원격으로 중계했습니다. 2022년 시즌에도 양키스 구단이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닐은 여전히 스튜디오 21에서 원격으로 경기를 중계했습니다. 이는 그가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뉴욕 포스트는 보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8월 그의 등번호 영구 결번식에는 직접 참석했습니다. 2023년 시즌에는 YES 네트워크가 백신 접종 요건을 완화하면서 오닐은 방송 부스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5.2. 저술 활동
선수 생활 은퇴 후, 오닐은 나와 나의 아빠: 야구 회고록(Me and My Dad: A Baseball Memoir미 앤 마이 대드: 어 베이스볼 메모어영어)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그에게 야구에 대한 사랑을 심어준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2022년에는 잭 커리와 함께 스윙과 히트: 야구가 내게 가르쳐 준 아홉 이닝(Swing and a Hit: Nine Innings of What Baseball Taught Me스윙 앤 어 히트: 나인 이닝스 오브 왓 베이스볼 토트 미영어)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5.3. 기타 대외 활동
1995년, 양키스 선수로 활동하던 중 오닐은 NBC 시트콤 사인펠드의 에피소드 "윙크"(The Wink더 윙크영어)에 카메오로 출연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코스모 크레이머는 양키스 라커룸에서 오닐에게 다가가 아픈 어린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다음 경기에서 두 개의 홈런을 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후 경기에서 오닐은 홈런 한 개와 내야 안타로 인해 3루타로 기록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달성합니다. 그는 또한 프렌즈의 에피소드 "레이첼의 큰 키스"(The One with Rachel's Big Kiss더 원 위드 레이첼스 빅 키스영어)에서도 언급됩니다. 2016년 3월, 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닐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6. 유산 및 영예
폴 오닐은 뉴욕 양키스 팬들에게 단순한 선수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그의 투지와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6.1. "워리어" 별명
뉴욕 양키스의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오닐을 "워리어(Warrior워리어영어)"라고 불렀습니다. 이 별명은 그가 경기에 대한 열정과 사랑,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투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그의 감정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경기 중 보여주는 강렬한 모습은 양키스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6.2. 모뉴먼트 파크 헌액 및 영구 결번


2001년 월드 시리즈 이후 은퇴한 오닐의 등번호 21번은 이후 단 한 번만 착용되었습니다. 2008년 시즌 초 구원 투수 라트로이 호킨스가 잠시 이 번호를 사용했으나, 많은 양키스 팬들의 비판에 직면하자 2008년 4월 16일 22번으로 등번호를 변경했습니다.
양키스는 2014년 8월 9일 양키 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 오닐의 공로를 기리는 명판을 헌정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2월 22일,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 21번이 구단 역사상 23번째로 영구 결번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2022년 8월 21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경기에서 "폴 오닐 데이"를 맞아 성대한 영구 결번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구단의 방역 수칙을 준수하기 위해 행사에 일부 변경이 있었습니다. 현역 양키스 선수들은 오닐과 함께 필드에 나가지 않았고, 그는 경기 중 방송 부스를 방문하지도 못했습니다.
7. 개인 생활
오닐은 아내 네벌리 데이비스와 함께 콜럼버스에서 이웃으로 지냈습니다. 그들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현재 오하이오주 몽고메리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의 조카 마이클 오닐도 양키스 구단에서 야구를 했습니다. 2016년 3월 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닐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후보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8. 주요 기록 및 수상
- 아메리칸 리그 수위 타자: 1회 (1994년)
- MLB 올스타전 선정: 5회 (1991년, 1994년, 1995년, 1997년, 1998년)
- 월드 시리즈 우승: 5회 (1990년 신시내티 레즈, 1996, 1998, 1999, 2000년 뉴욕 양키스)
- 3번의 퍼펙트 게임 경기에 승리팀 선수로 참여한 유일한 선수 (1988년 톰 브라우닝, 1998년 데이비드 웰스, 1999년 데이비드 콘)
- 1999년 6월 12일 경기에서 MLB 통산 200,000번째 홈런 기록
- 20홈런-20도루 달성 MLB 최고령 기록 보유자 (2001년, 38세)
- 뉴욕 양키스 등번호 21번 영구 결번
9. 경력 통계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몸에맞는볼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5 | CIN | 5 | 12 | 12 | 1 | 4 | 1 | 0 | 0 | 5 | 1 | 0 | 0 | 0 | 0 | 0 | 0 | 0 | 2 | 0 | .333 | .333 | .417 | .750 |
1986 | 3 | 3 | 2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0 | 1 | 0 | .000 | .333 | .000 | .333 | |
1987 | 84 | 178 | 160 | 24 | 41 | 14 | 1 | 7 | 78 | 28 | 2 | 1 | 0 | 0 | 18 | 1 | 0 | 29 | 3 | .256 | .331 | .488 | .819 | |
1988 | 145 | 533 | 485 | 58 | 122 | 25 | 3 | 16 | 201 | 73 | 8 | 6 | 3 | 5 | 38 | 5 | 2 | 65 | 7 | .252 | .306 | .414 | .720 | |
1989 | 117 | 480 | 428 | 49 | 118 | 24 | 2 | 15 | 191 | 74 | 20 | 5 | 0 | 4 | 46 | 8 | 2 | 64 | 7 | .276 | .346 | .446 | .792 | |
1990 | 145 | 564 | 503 | 59 | 136 | 28 | 0 | 16 | 212 | 78 | 13 | 11 | 1 | 5 | 53 | 13 | 2 | 103 | 12 | .270 | .339 | .421 | .760 | |
1991 | 152 | 607 | 532 | 71 | 136 | 36 | 0 | 28 | 256 | 91 | 12 | 7 | 0 | 1 | 73 | 14 | 1 | 107 | 8 | .256 | .346 | .481 | .827 | |
1992 | 148 | 584 | 496 | 59 | 122 | 19 | 1 | 14 | 185 | 66 | 6 | 3 | 3 | 6 | 77 | 15 | 2 | 85 | 10 | .246 | .346 | .373 | .719 | |
1993 | NYY | 141 | 547 | 498 | 71 | 155 | 34 | 1 | 20 | 251 | 75 | 2 | 4 | 0 | 3 | 44 | 5 | 2 | 69 | 13 | .311 | .367 | .504 | .871 |
1994 | 103 | 443 | 368 | 68 | 132 | 25 | 1 | 21 | 222 | 83 | 5 | 4 | 0 | 3 | 72 | 13 | 0 | 56 | 16 | .359 | .460 | .603 | 1.063 | |
1995 | 127 | 543 | 460 | 82 | 138 | 30 | 4 | 22 | 242 | 96 | 1 | 2 | 0 | 11 | 71 | 8 | 1 | 76 | 25 | .300 | .387 | .526 | .913 | |
1996 | 150 | 660 | 546 | 89 | 165 | 35 | 1 | 19 | 259 | 91 | 0 | 1 | 0 | 8 | 102 | 8 | 4 | 76 | 21 | .302 | .411 | .474 | .885 | |
1997 | 149 | 637 | 553 | 89 | 179 | 42 | 0 | 21 | 284 | 117 | 10 | 7 | 0 | 9 | 75 | 8 | 0 | 92 | 16 | .324 | .399 | .514 | .913 | |
1998 | 152 | 672 | 602 | 95 | 191 | 40 | 2 | 24 | 307 | 116 | 15 | 1 | 0 | 11 | 57 | 2 | 2 | 103 | 22 | .317 | .372 | .510 | .882 | |
1999 | 153 | 675 | 597 | 70 | 170 | 39 | 4 | 19 | 274 | 110 | 11 | 9 | 0 | 10 | 66 | 1 | 2 | 89 | 24 | .285 | .353 | .459 | .812 | |
2000 | 142 | 628 | 566 | 79 | 160 | 26 | 0 | 18 | 240 | 100 | 14 | 9 | 0 | 11 | 51 | 2 | 0 | 90 | 17 | .283 | .336 | .424 | .760 | |
2001 | 137 | 563 | 510 | 77 | 136 | 33 | 1 | 21 | 234 | 70 | 22 | 3 | 0 | 3 | 48 | 4 | 2 | 59 | 20 | .267 | .330 | .459 | .789 | |
통산: 17년 | 2053 | 8329 | 7318 | 1041 | 2105 | 451 | 21 | 281 | 3441 | 1269 | 141 | 73 | 7 | 90 | 892 | 107 | 22 | 1166 | 221 | .288 | .363 | .470 | .833 |
; 투수 경력 통계
연도 | 소속 | 경기 | 승리 | 패배 | 세이브 | 홀드 | 완투 | 완봉 | 무실점선발 | 선발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몸에맞는볼 | 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이닝당출루허용률 |
---|---|---|---|---|---|---|---|---|---|---|---|---|---|---|---|---|---|---|---|---|---|---|---|
1987 | CIN | 1 | 0 | 0 | 0 | 0 | 0 | 0 | 0 | 0 | 2.0 이닝 | 2 | 1 | 4 | 0 | 0 | 2 | 0 | 0 | 3 | 3 | 13.50 | 3.00 |
통산: 1년 | 1 | 0 | 0 | 0 | 0 | 0 | 0 | 0 | 0 | 2.0 이닝 | 2 | 1 | 4 | 0 | 0 | 2 | 0 | 0 | 3 | 3 | 13.50 | 3.00 |
; 수비 경력 통계
연도 | 소속 | 투수 (P) | 1루수 (1B) | 좌익수 (LF) | 중견수 (CF) | 우익수 (RF) | |||||||||||||||||||||||||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87 | CIN | 1 | 0 | 0 | 0 | 0 | ---- | 2 | 17 | 0 | 0 | 2 | 1.000 | 14 | 30 | 0 | 2 | 0 | .938 | 10 | 16 | 0 | 0 | 0 | 1.000 | 22 | 27 | 2 | 2 | 0 | .935 |
1988 | CIN | - | - | - | - | - | - | 21 | 173 | 8 | 2 | 14 | .989 | - | - | - | - | - | - | 8 | 18 | 0 | 0 | 0 | 1.000 | 114 | 218 | 5 | 4 | 0 | .982 |
1989 | CIN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 | 8 | 0 | 0 | 0 | 1.000 | 115 | 214 | 7 | 4 | 1 | .982 |
1990 | CIN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 | 0 | 0 | 0 | 0 | - | 141 | 273 | 13 | 2 | 0 | .993 |
1991 | CIN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0 | 302 | 13 | 2 | 2 | .994 |
1992 | CIN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3 | 291 | 12 | 1 | 2 | .997 |
1993 | NYY | - | - | - | - | - | - | - | - | - | - | - | - | 46 | 65 | 3 | 0 | 0 | 1.000 | - | - | - | - | - | - | 103 | 164 | 4 | 2 | 0 | .988 |
1994 | - | - | - | - | - | - | - | - | - | - | - | - | 12 | 13 | 1 | 0 | 0 | 1.000 | - | - | - | - | - | - | 90 | 190 | 6 | 1 | 0 | .995 | |
1995 | - | - | - | - | - | - | - | - | - | - | - | - | 25 | 29 | 1 | 0 | 0 | 1.000 | - | - | - | - | - | - | 107 | 190 | 2 | 3 | 0 | .985 | |
1996 | NYY | - | - | - | - | - | - | 1 | 0 | 0 | 0 | 0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6 | 295 | 7 | 0 | 3 | 1.000 |
1997 | NYY | - | - | - | - | - | - | 2 | 1 | 0 | 0 | 0 | 1.000 | - | - | - | - | - | - | - | - | - | - | - | - | 146 | 291 | 7 | 5 | 0 | .983 |
1998 | NYY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0 | 295 | 11 | 4 | 6 | .987 |
1999 | NYY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1 | 291 | 10 | 8 | 3 | .974 |
2000 | NYY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0 | 293 | 5 | 2 | 3 | .993 |
2001 | NYY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30 | 210 | 1 | 4 | 0 | .981 |
통산 | 1 | 0 | 0 | 0 | 0 | ---- | 26 | 191 | 8 | 2 | 16 | .990 | 99 | 140 | 6 | 2 | 0 | .986 | 23 | 42 | 0 | 0 | 0 | 1.000 | 1848 | 3544 | 105 | 44 | 20 | .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