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헨리 윌리엄 파제트(Henry William Paget, 1st Marquess of Anglesey, 1768년 5월 17일 ~ 1854년 4월 29일)는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784년부터 1812년까지는 파제트 경(Lord Paget)으로, 1812년부터 1815년까지는 억스브리지 백작(Earl of Uxbridge)으로 불렸다. 그는 영국 육군 장교로서 프랑스 혁명 전쟁의 플랑드르 전역과 반도 전쟁에 참전하여 기병 부대를 지휘하며 프랑스군에 대한 뛰어난 전술적 우위를 입증했다. 특히 사하군 전투와 베나벤테 전투에서 그의 기병대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백일천하 기간 중 워털루 전투에서는 영국 중기병을 이끌고 프랑스군에 대한 결정적인 돌격을 감행했으나, 전투 막바지에 포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외다리'(One-Leg)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으며, 그가 사용한 관절형 의족은 '앵글시의 다리'(Anglesey leg)로 불리며 의족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워털루에서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그는 1815년 앵글시 후작(Marquess of Anglesey) 작위를 수여받았다.
군 경력 이후에는 정치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두 차례 병기총감을 역임했으며, 특히 두 차례에 걸쳐 아일랜드 총독으로 재임하며 가톨릭 해방을 지지하고 대니얼 오코넬의 합동법 폐지 운동에 맞서는 등 아일랜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국가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여 40만 명의 아일랜드 아동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사생활은 첫 번째 결혼의 파경과 불륜, 그리고 결투로 이어지는 스캔들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였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헨리 윌리엄 파제트는 1768년 5월 17일, 초대 억스브리지 백작 헨리 베일리-파제트와 그의 아내 제인 Champagné샹파뉴프랑스어(Jane Champagné, 아일랜드 클론맥노이즈 학장 아서 샹파뉴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770년에 파제트(Paget)라는 성을 채택했다.
그는 1777년부터 1784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고, 1784년 10월 14일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1786년 6월 28일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786년부터 1788년까지 유럽 대륙을 여행했으며, 1790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는 해군에 입대하기를 희망했으나, 1788년 실레시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군사 훈련을 참관한 후 기병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3. 정치 경력
파제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790년 총선에서 카나번의 국회의원으로 무투표 당선되어 의회에 입성했다. 그는 1796년까지 이 자리를 지켰으며, 이후 그의 동생 에드워드 파제트가 그를 대신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는 밀본 포트를 1796년부터 1804년까지 대표했으며, 이 선거구에서 당선되기 위해 1500 GBP 이상을 지출했다. 1804년에는 왕실 사무관으로 임명되면서 의원직을 사임했다. 이후 1806년 총선에서 다시 밀본 포트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810년 1월 개인적인 이혼 문제로 인해 다시 왕실 사무관에 임명되는 형태로 의원직을 사임했다.
파제트 경은 의회에서 소 피트 내각을 지지했으며, 1791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심사법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793년 이후로는 군무로 인해 자주 의회를 비웠다. 1803년경에는 왕태자 조지 (훗날 조지 4세)의 친구가 되어 왕태자의 채무 관련 표결에서 그를 지지했다. 1804년 애딩턴 내각이 들어서자 그의 아버지는 내각을 지지했으나, 파제트 경이 소 피트의 야당을 지지하자 아버지는 그를 낙선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제트 경은 소 피트 지지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1806년부터 1807년까지의 '모든 재능 내각'(Ministry of All the Talents)을 싫어했고, 그의 아버지 또한 이 내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해방을 지지했으며, 이 문제로 내각이 무너졌을 때 조지 3세를 "항복하느니 왕좌에서 죽음을 택하겠다"고 비판했다. 또한 새로운 제2차 포틀랜드 공작 내각 (1807년 ~ 1809년)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 1808년에서 1809년 사이에는 반도 전쟁과 발체렌 전역 참전으로 의회를 비웠으며, 발체렌 전역 이후 그 해 크리스마스까지 정권 교체가 있을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파제트 경은 의원으로서 단 한 번도 연설하지 않을 정도로 의회 활동이 저조했으며, 그의 진정한 정치 경력은 1827년에 시작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밀본 포트와 앵글시 선거구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군사 경력
4.1. 초기 군 복무 및 진급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파제트는 스태퍼드셔에서 자원병 연대를 모집했으며, 1793년 12월에는 임시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제80보병연대로 정규군에 편입되었고, 파제트의 지휘 아래 1794년 플랑드르 전역에 참전했다.
그는 1795년 4월 14일 제7보병연대의 중위로 정식 임관했으며, 같은 날 제23보병연대의 대위로, 1795년 5월 19일 제65보병연대의 소령으로, 1795년 5월 30일 제80보병연대의 중령으로 빠르게 진급했다. 1795년 6월 15일에는 제16경기병연대 지휘관으로 전보되었고, 1796년 5월 3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797년 4월 6일에는 제7경기병연대의 지휘권을 맡았다. 그는 제7경기병연대의 군기를 엄격히 확립하는 데 힘썼으며, 휘하 기병대를 철저히 훈련시켜 훗날 상관인 존 무어 경으로부터 "우리 기병대는 프랑스의 모든 기병대보다 우수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파제트 휘하에서는 군복의 품질도 높게 유지되었으며, 그는 빅토리아 시대에도 연대의 군복인 '파제트 블루 코트'(Paget blue coat)를 계속 착용했다. 1799년 10월 영국-러시아의 홀란트 침공 당시 카스트리쿰 전투에서 기병 여단을 지휘했다. 이 원정 초기에는 기병이 활약할 기회가 적었으나, 10월 2일 알크마르 전투에서 기병을 이끌고 성공적인 돌격을 감행했다. 전투는 패배로 끝났지만, 파제트 경은 후방 부대를 지휘하여 철수를 지원하고 프랑스 기병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10월 6일 카스트리쿰 전투에서도 영국 기병대는 활약했다.
1801년 5월 16일 제7경기병연대의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802년 5월 11일 소장으로, 1808년 5월 7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4.2. 반도 전쟁

반도 전쟁이 한창이던 1808년 말, 파제트는 2개의 기병 여단을 이끌고 데이비드 베어드 경 휘하의 육군 사단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아 코루냐에 상륙한 후 베어드와의 합류에 성공했다. 당시 존 무어 경이 이끄는 2만 명의 병력이 리스본에서 진군하고 있었고, 베어드와 무어는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파죽지세로 진군해오자 베어드와 무어는 각각 아 코루냐와 리스본으로 철수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영국군의 전면 철수로 판단하고 마드리드로 진군했으며, 스페인 북서부에는 술트 원수 휘하의 1만 8천 명의 병력만 남겨두었다. 영국군의 철수 과정에서 피해가 증가하는 가운데, 파제트 경은 12월 사하군 전투에서 1개 연대를 이끌고 프랑스 기병 여단에 돌격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 전투에서 그의 기병대는 프랑스군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으며, 프랑스 중령 2명을 포로로 잡고 프랑스 샤쇠르 부대를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파제트의 지원 덕분에 12월 20일 베어드와 무어는 술트에게 발각되지 않은 채 마요르가에서 합류했으나, 나폴레옹이 12월 22일 마드리드를 함락시키고 20만 대군을 이끌고 영국군 소탕에 나서자 영국군은 다시 철수를 시작했다. 12월 29일, 파제트는 베나벤테 전투에서 샤를 르페브르-데누에트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와 맞섰다. 당시 에슬라강의 다리가 폭파되어 프랑스군이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을 찾고 있었는데, 파제트는 초병 부대로 프랑스군을 유인한 뒤, 프랑스 기병대가 초병 부대를 향해 돌격하자 측면에서 제10후사르 연대를 돌격시켜 격파하고 르페브르-데누에트를 포로로 잡았다. 영국군이 갈리시아 산악 지대까지 철수하자 후위는 보병이 맡게 되었고, 파제트 또한 병에 걸려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는 1809년 1월 아 코루냐 전투에서 무어 장군의 전사 소식을 배 위에서 들었다.
이 전투가 그의 반도 전쟁에서의 마지막 경력이 되었다. 이는 그가 헨리 웰즐리 (웰링턴의 동생)의 아내인 레이디 샬럿 웰즐리와 불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웰링턴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809년부터 1815년까지 그의 유일한 전시는 보병 사단을 지휘했던 1809년의 재앙적인 발체렌 전역이었다. 1810년 그는 이혼하고 레이디 샬럿과 결혼했다. 1812년 3월 아버지의 사망으로 억스브리지 백작 작위를 상속받았고, 1815년 1월 4일 바스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GCB)를 수여받았다.
4.3. 워털루 전투와 부상

백일천하 기간 중, 파제트는 벨기에 주둔 기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여전히 웰링턴의 불쾌한 시선을 받았다. 그는 1815년 6월 16일 카트르 브라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틀 후 워털루 전투에서는 장바티스트 드루에 백작의 부대에 대한 영국 중기병의 장엄한 돌격을 이끌어 프랑스군을 저지하고 일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9판과 제11판은 억스브리지 백작의 전공을 웰링턴 공작 다음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날 발사된 마지막 포탄 중 하나가 파제트의 오른쪽 다리를 강타하여, 그날 밤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일화에 따르면, 그가 다리를 맞았을 때 웰링턴과 가까이 있었는데, 파제트가 "맙소사, 경, 제 다리를 잃었습니다!"라고 외치자 웰링턴은 "맙소사, 경, 정말 그렇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가장 초기의 기록은 1818년 12월 8일 J. W. 크로커의 일기에 실린 것으로, 억스브리지 옆에 있다가 부상당한 장군을 옮기는 것을 도왔던 호러스 시모어의 말을 인용하며 "호러스 시모어와 함께 말을 탔다. 그가 억스브리지 경 옆에 있을 때 총에 맞았다. 억스브리지 경은 '드디어 맞았군'이라고 외쳤고, 웰링턴 공작은 '아니? 맙소사, 정말인가?'라고만 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수행관이었던 토마스 와일드만에 따르면, 다리 절단 수술 중 파제트는 미소를 지으며 "나는 꽤 오랫동안 잘 살았다. 47년 동안 멋진 남자였으니, 더 이상 젊은이들을 앞지르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파제트의 절단된 다리는 '억스브리지 경의 다리'로 불리며 벨기에 워털루 마을의 관광 명소가 되었고, 나중에 그곳에 매장되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앵글시 후작은 관절형 의족을 착용했으며, 제임스 포츠에게 의뢰한 이 의족은 '앵글시의 다리'(Anglesey legs)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는 이 스타일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외다리'(One-Leg)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훗날 앵글시 후작은 자신의 다리 절단 수술이 이루어졌던 사령부 건물을 방문하여, 수술대였던 테이블에서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4.4. 군 경력의 정점 및 영예

워털루에서의 전공과 한쪽 다리를 잃은 희생으로, 영국 의회는 억스브리지 백작에게 연금 1200 GBP를 지급하기로 가결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했다. 대신 그는 1815년 7월 4일 연합 왕국 귀족인 앵글시 후작으로 서임되었다. 8월 21일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1816년에는 로열 구엘프 훈장을 수여받았다. 1818년 3월 13일에는 가터 훈장 기사로 임명되었고, 1819년 8월 12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846년 11월 9일에는 육군 원수로 진급했으며, 그는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고위 장교 중 웰링턴 공작보다 오래 산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을 기리기 위해 1816년 토머스 해리슨이 설계한 높이 27 m의 앵글시 후작의 원주가 앵글시의 스란바이어푸스그윈기스고게리흐위른드로부스스란티실리오곡오곡오흐에 세워졌고, 1859년에는 매튜 노블이 제작한 앵글시 후작의 동상이 원주 위에 추가되었다.
그는 또한 1812년부터 1854년까지 북 웨일스 해군 차관 및 카마던셔 해군 차관을 역임했다. 1801년부터 1842년까지 제7경기병연대의 명예 연대장을, 1842년부터 1854년 사망 시까지 왕립 근위 기마 연대의 명예 연대장을 지냈다.
5. 후기 경력 및 공직
5.1. 아일랜드 총독
캐닝 내각이 수립되면서, 파제트는 1827년 4월 30일 병기총감으로 임명되어 내각의 일원이자 추밀고문관이 되었다. 1828년 1월 웰링턴 내각이 들어서자, 그는 같은 해 2월 27일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앵글시 후작은 아일랜드에 작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영국인명사전에 따르면, 아일랜드 총독 임명은 새 내각이 구성되기 전에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앵글시 후작이 가톨릭 해방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해방에 반대했던 수상 웰링턴 공작과 내무장관 로버트 필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대니얼 오코넬이 이끄는 가톨릭 협회가 가톨릭 해방 문제 해결을 압박하고 있었다. 조지 4세는 아일랜드로 떠나기 전 앵글시 후작에게 "진정한 프로테스탄트임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앵글시 후작은 "나는 프로테스탄트나 가톨릭으로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일랜드에 가서 양측 사이에서 공정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고 답했다. 1828년 7월, 그는 가톨릭에 대한 양보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조지 4세는 8월에 이미 앵글시 후작의 소환을 원했으나, 웰링턴 공작은 여론이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소환하지 않고 11월 11일 서신으로 앵글시 후작의 가톨릭 협회에 대한 융화적인 태도에 항의하는 데 그쳤다.
앵글시 후작은 아일랜드 총독으로서 경제 발전을 위한 제안들을 내놓았으나, 대부분 무시되었다. 더욱이 그는 내각의 의도와 달리 1828년 12월 서신에서 가톨릭 해방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이로 인해 1829년 1월 초 정부에 의해 소환되었다. 그는 1월 19일 아일랜드를 떠났다. 반면, 옥스퍼드 인명사전은 그의 소환이 1828년 12월 30일에 이미 결정되었으며, 서신은 단지 그의 출발을 앞당겼을 뿐이라고 기록했다. 가톨릭 해방에 대한 지지 덕분에 아일랜드에서의 그의 인기는 매우 높았으며, 그의 소환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아쉬움을 샀다. 아일랜드인명사전에 따르면, 앵글시 후작은 소환 사건으로 인해 아일랜드에서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 해방이 멀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웰링턴 공작이 국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4월 13일 1829년 로마 가톨릭 신도 구제법이 통과되었다.
1830년 11월, 그레이 백작 내각이 수립되면서 앵글시 후작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휘하 수석 비서관이었던 스탠리 경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는 내각에 참여한 반면, 앵글시 후작은 내각 바깥의 장관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가톨릭 해방이 이루어진 상태였고, 앵글시 후작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대니얼 오코넬의 합동법 폐지 운동에 직면했다. 앵글시 후작은 내각의 지지를 받아 강경책을 취했으며, 1831년 1월 14일 오코넬이 은행의 뱅크 런을 유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자 오코넬을 체포하는 조치를 취하며 "아일랜드를 통치하는 것은 그(오코넬)인가, 아니면 나인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1831년 3월 1일, 상황은 급변했다. 내각이 제1차 선거법 개혁 계획을 제출했고, 오코넬은 폐지 운동을 잠시 중단하고 선거법 개혁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앵글시 후작 또한 선거법 개혁을 지지했으며, 십일조 문제 해결을 주장했으나, 후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31년 10월에 제출된 선거법 개혁 제2차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아일랜드의 치안 유지를 위해 강압법(Coercion Act)의 통과를 요구하여 인기를 잃었으나, 옥스퍼드 인명사전에 따르면 앵글시 후작은 강압법을 통과시킨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으며, 실제로 이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강압법 외에도 교육 위원회(Board of Education) 설립에 기여했으며, 특히 국립 초등 교육 제도 설립에 성공하여 1843년에는 아일랜드에서 40만 명의 아동이 국립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반면, 구빈법 개혁은 진전되지 못했다. 1833년 7월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앵글시 후작도 같은 해 9월 아일랜드 총독직을 사임했다.
5.2. 병기총감

1842년 12월 20일, 그는 제7경기병연대 연대장에서 왕립 근위 기마 연대 명예 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제1차 러셀 내각이 수립되면서, 앵글시 후작은 1846년 7월 8일 다시 병기총감으로 임명되어 1852년 2월 27일까지 재직했다. 이 임명 또한 내각 바깥의 장관으로서였다. 1846년 11월 9일, 그는 육군 원수로 진급했다. 앵글시 후작은 병기총감으로서 웰링턴 공작과 협력하여 영국 해안 방어의 취약성을 정부와 여론에 알리려 노력했으며, 두 사람은 함께 여러 해안 방어 시설을 시찰했다. 프랑스 셰르부르를 시찰했을 때는 "견고하게 방어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이 시기에는 앵글시와 웰링턴 모두 청력이 저하되어 있었고, 두 사람이 공적 및 사적으로 자주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귀가 먼 두 노인 귀족이 서로에게 소리 지르는" 광경이 자주 목격되었다. 그는 1852년 3월 정부에서 최종적으로 은퇴했다.
1849년 1월 31일, 스태퍼드셔 주지사에 임명되었다.
1854년 4월 29일, 그는 뇌졸중으로 런던의 억스브리지 하우스에서 사망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뜻에 따라 국장이 거행되었고, 5월 6일 리치필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작위는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장남 헨리가 계승했다.
6. 개인 생활
6.1. 첫 번째 결혼, 자녀 및 이혼
파제트는 1795년 7월 5일 런던에서 캐롤라인 엘리자베스 빌리어스 (1774년 12월 16일 ~ 1835년 6월 16일, 제4대 저지 백작 조지 빌리어스의 딸)와 결혼하여 3남 5녀를 두었다.
- 레이디 캐롤라인 파제트 (1796년 6월 6일 ~ 1874년 3월 12일) - 1817년 4월 10일 제5대 리치먼드 공작 찰스 고든-레녹스와 결혼.
- 헨리 파제트 (1797년 7월 6일 ~ 1869년 2월 6일) - 제2대 앵글시 후작.
- 레이디 제인 파제트 (1798년 10월 13일 ~ 1876년 1월 28일) - 1824년 4월 24일 제2대 커닝엄 후작 프랜시스 커닝엄과 결혼.
- 레이디 조지아나 파제트 (1800년 8월 29일 ~ 1875년 11월 9일) - 1833년 10월 19일 제2대 크로프턴 남작 에드워드 크로프턴과 결혼.
- 레이디 오거스타 파제트 (1802년 1월 26일 ~ 1872년 6월 6일) - 1820년 7월 27일 초대 템플모어 남작 아서 치체스터와 결혼.
- 윌리엄 파제트 경 (1803년 3월 1일 ~ 1873년 5월 17일) - 해군 장교. 1827년 1월 22일 프랜시스 드 로텐부르크와 결혼.
- 레이디 아그네스 파제트 (1804년 2월 11일 ~ 1845년 10월 9일) - 1829년 3월 7일 제2대 스트래퍼드 백작 조지 빙과 결혼.
- 로드 아서 파제트 (1805년 1월 31일 ~ 1825년 12월 28일).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으며, 파제트는 마지막 자녀가 태어난 후부터 아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그는 아내와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식탁에 앉으며 같은 사람들과 어울렸지만, 아내를 차갑게 대하고 무시했으며, 부부 관계를 거부하고 항상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파제트는 샬럿 웰즐리 (1781년 ~ 1853년, 헨리 웰즐리 (웰링턴 공작의 동생)의 아내이자 초대 카도건 백작 찰스 카도건의 딸)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 1808년 11월 파제트는 반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으나, 귀국 후 레이디 샬럿과 다시 불륜 관계를 이어갔고, 1809년 3월에는 스캔들을 일으키며 함께 살기 시작했다. 1809년 3월 28일, 레이디 샬럿의 오빠인 헨리 카도건은 파제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는 5월 30일 아침 윔블던 커먼에서 허시 비비안이 파제트 경의 대리인으로, 매켄지 대위가 카도건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두 사람 모두 권총을 발사했으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명예는 만족되었다. 파제트는 의도적으로 빗나갔다고 알려졌다. 헨리 웰즐리는 1810년 사적 의회법을 통해 결혼을 해소하고 파제트 경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2.40 만 GBP를 받아냈다.
이 무렵 캐롤라인 파제트 부인 또한 제6대 아르가일 공작 조지 캠벨과 사랑에 빠져 파제트 경과의 이혼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법은 간통을 이유로 한 이혼 소송을 남편에게만 허용했으며, 아내가 이혼하려면 간통 외에 "생명을 위협하는 잔혹 행위"가 동반되어야 했다. 이에 파제트 부부는 스코틀랜드 법을 이용하여 신속한 이혼을 진행했다. 파제트 경과 (이미 임신 중이었던) 레이디 샬럿은 에든버러와 퍼스셔의 호텔에 함께 머물렀고, 하녀들이 그들이 함께 침대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법에 따라 레이디 샬럿의 신원이 밝혀지면 파제트 경과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레이디 샬럿의 신원을 숨겼고, 목격자들은 파제트 경과 함께 있던 여인의 신원을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레이디 샬럿은 "검은 베일을 쓰고 먹고 마시고 잠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혼은 스코틀랜드에서 허가되었고, 파제트 경과 레이디 샬럿은 1810년 11월 15일 에든버러에서 결혼했다。
6.2. 두 번째 결혼 및 자녀
파제트와 샬럿은 6남 4녀를 두었으며, 이 중 6명이 유아기를 넘겨 생존했다.
- 레이디 에밀리 파제트 (1810년 3월 4일 ~ 1893년 3월 6일) - 1832년 8월 4일 초대 시드니 백작 존 타운젠드와 결혼.
- 클라렌스 에드워드 파제트 경 (1811년 6월 7일 ~ 1895년 3월 22일) - 해군 장교, 국회의원. 1852년 4월 7일 마사 스튜어트 오트웨이와 결혼.
- 레이디 메리 파제트 (1812년 6월 16일 ~ 1859년 2월 20일) - 1838년 9월 6일 제7대 샌드위치 백작 존 윌리엄 몬태규와 결혼.
- 알프레드 파제트 (1815년 5월 4일 ~ 1815년 5월 17일) - 유아기에 사망.
- 알프레드 헨리 파제트 경 (1816년 6월 29일 ~ 1888년 8월 24일) - 육군 장교, 국회의원. 1847년 4월 8일 세실리아 윈덤과 결혼.
- 조지 어거스터스 프레데릭 파제트 경 (1818년 3월 16일 ~ 1880년 6월 30일) - 육군 장교, 국회의원. 1854년 2월 27일 아그네스 샬럿 파제트와 결혼, 1861년 2월 6일 루이사 엘리자베스 헤니지와 재혼.
- 레이디 아델레이드 파제트 (1820년 1월 ~ 1890년 8월 21일) - 1851년 11월 29일 프레데릭 윌리엄 카도건과 결혼. 빅토리아 여왕의 1838년 대관식에서 기차 운반자를 맡았으며, 영어로 된 최초의 페이션스 게임 책을 포함한 여러 책과 희곡을 썼다.
- 로드 앨버트 어거스터스 윌리엄 파제트 (1821년 12월 ~ 1822년 4월) - 유아기에 사망.
- 로드 앨버트 아서 파제트 (1823년 5월 29일 ~ ?) - 유아기에 사망.
- 레이디 앨리스 파제트 (1825년 5월 21일 ~ ?) - 유아기에 사망.
앵글시 후작의 현존하는 서신들을 통해 그가 앵글시와 카나번셔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두 카운티의 많은 주민들이 그의 후원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7. 작위 및 칭호
헨리 윌리엄 파제트는 생애 동안 다음과 같은 작위와 칭호를 받았다.
- 파제트 경 (Lord Paget, 1784년 ~ 1812년)
- 억스브리지 백작 (Earl of Uxbridge, 1812년 ~ 1815년)
- 앵글시 후작 (Marquess of Anglesey, 1815년 ~ 1854년)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영예와 명예직을 역임했다.
- 바스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GCB, 1815년 1월 4일)
- 가터 훈장 기사(KG, 1818년 3월 13일)
- 로열 구엘프 훈장(GCH, 1816년)
- 추밀고문관(PC, 1827년)
- 잉글랜드 최고 궁내경 (1821년 7월, 조지 4세 대관식에서)
- 카우스 성의 성주 (1826년 3월 25일)
- 앵글시 주지사 (1812년 ~ 1854년)
- 북 웨일스 해군 차관 및 카마던셔 해군 차관 (1812년 ~ 1854년)
- 스태퍼드셔 주지사 (1849년 1월 31일)
- 제7경기병연대 명예 연대장 (1801년 ~ 1842년)
- 왕립 근위 기마 연대 명예 연대장 (1842년 ~ 1854년)
8. 평가 및 유산
8.1. 긍정적 평가
헨리 윌리엄 파제트는 뛰어난 기병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 존 무어 경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사하군 전투, 베나벤테 전투, 그리고 워털루 전투에서 그의 기병 전술은 탁월함을 입증했다. 특히 워털루 전투에서는 웰링턴 공작의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중기병 돌격을 이끌어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전투 중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그의 회복력과 기지는 높이 평가되며, 그가 사용하고 대중화시킨 '앵글시의 다리' 의족은 의족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헌신적인 공직자로서, 특히 두 번째 아일랜드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사회적 기여를 했다。 그는 대니얼 오코넬의 합동법 폐지 운동에 강경하게 맞서면서도, 아일랜드의 초등 교육 시스템을 개혁하여 40만 명의 아동에게 국가 지원 교육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워털루 전투 이후 의회에서 제안된 연금을 거절한 것도 그의 청렴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또한, 앵글시와 카나번셔 지역의 발전에 기여하여 많은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8.2. 비판과 논란
파제트의 정치 경력은 비판적인 시각을 받기도 했다.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의회 활동이 매우 저조했으며, 단 한 번도 연설을 하지 않았다. 조지 4세의 왕비 캐롤라인에 대한 '고통과 처벌 법안'(Pains and Penalties Bill)을 지지하여 한때 대중의 비난을 받았으며, 군중에게 "당신들의 아내도 모두 그녀와 같기를 바란다"고 비꼬는 발언을 한 것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사생활 또한 큰 스캔들의 원인이 되었다. 레이디 샬럿 웰즐리와의 불륜 관계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이혼 소송과 헨리 카도건과의 결투는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아일랜드 총독 재임 시 대니얼 오코넬의 합동법 폐지 운동에 대한 그의 강경한 대응, 특히 오코넬의 체포와 강압법 추진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비록 그가 강압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9. 기념물 및 추모

앵글시 후작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다. 1816년 앵글시의 스란바이어푸스그윈기스고게리흐위른드로부스스란티실리오곡오곡오흐에는 그의 영웅적인 활약을 기리는 높이 27 m의 앵글시 후작의 원주가 세워졌으며, 1859년에는 매튜 노블이 제작한 그의 청동상이 원주 위에 추가되었다.
워털루 전투에서 절단된 그의 다리는 '억스브리지 경의 다리'로 불리며 벨기에 워털루 마을에서 관광 명소가 되었고, 나중에 그곳에 '매장'되었다. 그가 사용했던 혁신적인 관절형 의족은 '앵글시의 다리'(Anglesey legs)로 알려지며 의족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파제트는 1854년 4월 29일 런던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뜻에 따라 국장이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5월 6일 리치필드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그곳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10. 관련 항목
- 플랑드르 전역
- 반도 전쟁
- 워털루 전투
- 아일랜드 총독
- 병기총감
- 가톨릭 해방
- 대니얼 오코넬
- 아서 웰즐리 (초대 웰링턴 공작)
- 억스브리지 경의 다리
- 앵글시 후작의 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