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교육
전희철은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에 걸쳐 농구 선수로서의 기틀을 다졌으며, 특히 고려대학교 재학 중에는 대학 농구의 황금기를 이끄는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전희철은 1973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권유로 우연히 초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농구 선수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농구 명문으로 알려진 삼선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고려대학교에 스카우트되었다. 그는 삼선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를 거치며 훗날 농구대잔치에서 라이벌이자 국가대표팀 동료가 될 우지원과 동창으로 인연을 이어갔다.
1.2. 대학 생활
전희철은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학하며 농구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농구팀은 '호랑이 군단'으로 불리며 현주엽, 신기성, 김병철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함께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 전희철은 대학교 4학년 때 당시 대학 농구의 주요 대회 중 하나였던 농구대잔치 대학부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은 흔히 국내 대학 농구의 '황금기'로 회자된다. 전희철과 그의 팀 동료들은 물론,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연세대학교의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등은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아이돌 가수나 톱스타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언론으로부터 통칭 '오빠부대'라는 별명을 얻으며 농구 코트 밖에서도 대중문화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2. 선수 경력
전희철은 대학 농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후 프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만개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파워 포워드로 자리매김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국제 대회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업적을 달성했다.
2.1. 대학 농구 경력
전희철은 고려대학교 농구팀 '호랑이 군단'의 주축 선수로서 현주엽, 신기성, 김병철 등과 함께 활약하며 대학 농구 최강팀의 명성을 이끌었다. 특히 대학교 4학년 시절, 농구대잔치 대학부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팀의 주역으로서 능력을 입증했다. 그의 재학 기간은 대학 농구의 전성기로 불리며, 그는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으로 연세대학교의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등과 함께 '오빠부대'의 핵심 멤버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2.2. 프로 농구 경력
전희철은 프로 리그가 창설되기 1년 전인 1996년에 실업 농구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마지막 세대 중 한 명이다. 그는 대학 동기 김병철과 함께 새로 창단된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전신인 동양제과 아마추어 팀에 입단했다. 이 팀은 이후 고양 오리온으로 재편되었다. 동양제과에서 그는 기아, 삼성전자, 현대 등 기존의 강호들을 꺾고 마지막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기아의 독주 시대를 마무리하는 데 기여했다.
KBL이 창설된 후에도 전희철은 계속 동양 오리온스에서 활약했다. 그는 KBL 첫 시즌에 경기당 평균 23.10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더 크고 강한 체격의 외국인 선수들이 리그에 진출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선수로서는 전례 없는 높은 득점 기록이었다.
1998년, 전희철은 군 복무를 위해 입대했다. 당시 많은 농구 선수들과 달리 그는 상무 농구단이 아닌 사회복무요원으로 배치되었다. 그는 산림청에서의 일상 업무 외 시간에 가장 가까운 체육관에서 아마추어 선수들과 함께 개인 훈련을 지속했다. 전희철과 김병철을 비롯한 몇몇 핵심 선수들이 동시에 입대한 탓에 동양 오리온스는 적절한 대체 선수를 찾지 못했고, 그 결과 1998-99 시즌 최하위로 떨어졌다. 전희철은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제대했으며, 사회복무요원으로서의 배치는 그가 상무 농구단에 입대한 동료들보다 일찍 제대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 전희철은 전주 KCC 이지스로 이적했지만, 시즌이 끝난 후 방출되었다. KCC에서의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서울 삼성 썬더스와의 1월 경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가장 많이 회자된다. 이 경기에서 박성훈에게 의도적으로 얼굴을 가격당했으나 심판은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고, 박성훈은 곧바로 레이업 득점을 성공시켰다. 전희철의 얼굴이 피로 얼룩졌음에도 심판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팀 동료 정재근은 박성훈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여 이빨이 부러지고 턱뼈가 손상되어 들것에 실려 나가는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정재근은 더 심각한 비신사적인 파울이 아닌 테크니컬 파울만 선언받았다.
2003년, 전희철은 서울 SK 나이츠에 입단했다. 2007-08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대부분 벤치를 지키거나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그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되자 그는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재계약하는 대신 은퇴를 선택했다. SK 나이츠는 그의 공로를 기려 등번호 1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3. 국가대표 경력
전희철의 다재다능함 덕분에 그는 여러 국제 대회에서 센터나 포워드 등 다양한 포지션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의 일원이었으며, 1997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 우승팀의 핵심 멤버로서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군 복무 중이던 1998년에는 우지원과 함께 1998년 아시안 게임에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대한민국농구협회의 요청이 이들의 복무를 감독하는 정부 기관에 의해 거절되었다.
전희철은 2002년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다시 소집되었으며, 당시 서장훈과 신인 김주성이 주전 센터로 기용되면서 포워드로 뛰었다. 야오밍이 이끄는 강력한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그와 현주엽은 모두 20점 이상을 득점하며 접전 끝에 '중국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 대표팀은 연장전에서 102 대 100으로 승리하며 20년 만에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을 획득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전희철은 곧바로 서울 SK 나이츠에 남아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선수 경기력 분석관으로 일했으며, 오랜 동료였던 문경은 감독 체제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2020-21 시즌이 종료된 후, 구단은 문경은 감독이 기술 자문 역할로 이동하고 전희철이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한다고 발표했다. 전희철은 2021-22 시즌에 감독으로서 팀을 정규리그 및 챔피언결정전 통합 우승으로 이끄는 큰 성과를 달성했다.
4. 개인 생활
전희철은 2003년 전직 항공 승무원이었던 권정은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004년에 첫째 딸, 2006년에 둘째 딸이 태어나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5. 기타 활동
전희철은 농구 선수 및 지도자 활동 외에도 대중 매체를 통해 다양한 광고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삼성물산 브이네스, TG삼보컴퓨터, 성우종합상운 바이킹, 서광모드 행텐 등의 광고 모델로 출연하며 농구 팬들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6. 평가 및 유산
전희철은 대한민국 농구 역사에서 선수와 지도자 모두로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활약은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6.1. 주요 성과 및 수상
전희철은 선수와 지도자로서 다음과 같은 주요 성과와 수상을 기록했다.
대회 | 메달 | 종목 |
---|---|---|
1993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 (자카르타) | 동메달 | 남자 농구 |
1995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 (서울) | 은메달 | 남자 농구 |
1997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 (리야드) | 금메달 | 남자 농구 |
1994년 아시안 게임 (히로시마) | 은메달 | 남자 농구 |
2002년 아시안 게임 (부산) | 금메달 | 남자 농구 |
- 선수
- KBL 챔피언 (2002)
- KBL 정규리그 챔피언 (2002)
- KBL 역대 레전드 12인 선정
- 서울 SK 나이츠 등번호 13번 영구 결번
- 1997년 FIBA 아시아 챔피언십 MVP
- 지도자
- KBL 챔피언 (2018, 코치)
- KBL 챔피언 (2022, 감독)
- KBL 정규리그 챔피언 (2013, 코치)
- KBL 정규리그 챔피언 (2022, 감독)
6.2. 비판 및 논란
전희철의 선수 생활 중에는 몇 가지 논란이 있었다. 특히 2003년 1월 전주 KCC 이지스 소속 당시 서울 삼성 썬더스와의 경기에서 발생한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경기 중 상대 선수인 박성훈에게 얼굴을 가격당했지만 심판이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팀 동료 정재근이 박성훈에게 보복성 파울을 가해 박성훈이 큰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심판의 오심과 선수 간의 폭력 행위로 인해 당시 KBL의 심판 판정 및 선수 관리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