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장 드 뒤누아는 사생아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으며, 그의 가족사는 그의 초기 생애와 정치적 역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 및 부모
장 드 뒤누아는 1402년 11월 23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샤를 5세의 아들이자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루이 1세였고, 어머니는 루이 1세의 정부였던 마리에트 앙갱이었다. 그는 사생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를레앙의 서자'(bâtard d'Orléans바타르 도를레앙프랑스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가 왕의 사촌이자 오를레앙가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높은 신분의 표식이었다.
1407년, 그의 아버지 루이 1세는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에게 암살당했다. 8년 후인 1415년, 그의 이복형이자 오를레앙 공작위를 계승했던 샤를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포로로 잡혀 무려 25년간 구금되었다. 이로 인해 장은 오를레앙가에서 유일하게 성인 남성으로서 가문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의 다른 이복형인 앙굴렘 백작 장 도를레앙 또한 1412년에 잉글랜드로 호송되어 포로 생활을 했다.

1.2. 양육 및 초기 활동
아버지를 잃고 이복형들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 장 드 뒤누아는 궁정으로 거두어져 당시 1세 연하의 사촌이자 왕세자였던 샤를(훗날 샤를 7세)과 함께 양육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왕실과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샤를 6세의 치세 동안 프랑스 내전에서 아르마냐크파의 일원으로 참전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418년에는 부르고뉴파에게 붙잡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1420년에 석방된 후에는 왕세자 샤를의 휘하에 들어가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2. 군사 경력
장 드 뒤누아는 백년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의 주요 군사 지도자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잔 다르크와의 협력은 그의 군사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평가된다.
2.1. 백년 전쟁에서의 역할
장 드 뒤누아는 백년 전쟁 내내 프랑스 왕세자 샤를(훗날 샤를 7세)을 충실히 섬기며 잉글랜드에 맞서 싸웠다. 그는 프랑스군에서 중요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활약하며 프랑스의 영토를 수복하고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421년 보제 전투에서는 라 이르와 함께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27년에는 라 이르와 에티엔 드 비뇰과 함께 몽타르지 공방전에서 워릭 백작 리처드 보챔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포위를 풀도록 강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인 1428년 니신의 전투에서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2.2. 주요 캠페인 및 잔 다르크와의 관계
1428년 10월부터 장 드 뒤누아는 오를레앙 공략전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생트라유 등과 함께 오를레앙에 입성하여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 전투는 길어졌고, 1429년 2월 12일에는 잉글랜드 보급 부대를 공격하려다가 오히려 패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에 입성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장 드 뒤누아는 잔 다르크와 협력하여 잉글랜드군의 요새들을 함락시켰고, 5월에는 마침내 오를레앙의 포위를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 이후 장 드 뒤누아는 잔 다르크와 행동을 함께하며 그녀의 휘하에서 계속 싸웠다. 그는 알랑송 공작 장 2세, 앙드레 드 라발, 질 드 레,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 등 다른 주요 지휘관들과 합류하여 1429년 6월 18일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잔 다르크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의 옆에서 싸움을 이어갔다.
잔 다르크의 처형 이후에도 장 드 뒤누아는 리슈몽 대원수를 따라 군사 활동을 계속했다. 1429년 7월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1432년에는 샤르트르를 탈환했다. 1436년에는 파리를 잉글랜드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년 전쟁의 마지막 시기에는 기옌과 노르망디 정복에 크게 기여했다. 1449년에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노르망디 대부분을 정복하고 루앙을 함락시켰다.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리슈몽 대원수가 잉글랜드군을 격퇴한 후, 장 드 뒤누아는 그와 합류하여 노르망디를 완전히 평정했다. 1451년에는 보르도를 포함한 기옌 지역까지 점령했으며,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기옌 탈환 시도를 좌절시키며 백년 전쟁의 종결을 이끌었다.
3. 정치 활동
장 드 뒤누아는 백년 전쟁에서의 군사적 업적 외에도 프랑스 내부의 정치적 혼란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때로는 왕실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왕권과 화해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했다.
3.1. 내부 분쟁 참여
1439년, 샤를 7세가 군제 개혁과 귀족에 대한 과세 등 중앙집권화 정책을 발표하자, 장 드 뒤누아는 이에 반발했다。이듬해인 1440년, 그는 알랑송 공작 장 2세와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등과 함께 왕세자 루이(훗날 루이 11세)를 옹립하여 플라그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리슈몽 대원수에 의해 진압되었고, 장 드 뒤누아는 다시 샤를 7세를 섬기게 되었다.
백년 전쟁 종결 후에는 한때 전우였던 알랑송 공작 장 2세를 체포하기도 했다(죄목은 불명). 샤를 7세 사후, 그의 후계자인 루이 11세에게 불만을 품은 장 드 뒤누아는 1465년 공익 동맹에 참여하여 루이 11세에 대항했다.
3.2. 왕실 봉사 및 화해
장 드 뒤누아는 플라그리 반란 이후에도 샤를 7세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대립교황 펠릭스 5세의 퇴위 협상을 담당하기도 했다. 공익 동맹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루이 11세와 화해하여 오를레앙-롱그빌가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매번 왕실의 총애를 되찾았다. 이를 통해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
4. 작위 및 영예
장 드 뒤누아는 생애 동안 다양한 작위와 칭호를 보유했다.
- 프랑스 대시종 (1403년 ~ 1468년): 1세 때부터 이 칭호를 보유했다.
- 발보네 영주 (1421년 ~ 1468년)
- 모르탱 백작 (1424년 ~ 1425년)
- 생소뵈르 자작
- 페리고르 백작 (1430년 ~ 1439년)
- 뒤누아 백작 (1439년 ~ 1468년)
- 롱그빌 백작 (1443년 ~ 1468년)
- 가시멧돼지 기사단 기사
- 클레 영주
5. 개인적인 삶
장 드 뒤누아의 개인적인 삶은 두 번의 결혼과 그를 통해 얻은 자녀들로 특징지어진다.
5.1. 결혼 및 자녀
장 드 뒤누아는 두 차례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422년 4월 부르주에서 마리 루베(Marie Louvet, 1426년 사망)와 이루어졌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두 번째 결혼은 1439년 10월 26일 마리 다르쿠르(Marie of Harcourt, 1464년 사망)와 이루어졌다. 마리 다르쿠르는 파르트네의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 장 (Jean, 1443년 ~ 1453년)
- 프랑수아 1세 도를레앙-롱그빌 (François I d'Orléans-Longueville, 1447년 ~ 1491년): 뒤누아 백작, 탕카르빌 백작, 롱그빌 백작, 몽고메리 백작 등을 역임했다. 1466년 7월 2일 아녜스 드 사부아와 결혼했으며, 그들의 자녀 중 한 명은 루이 1세 도를레앙-롱그빌이었다.
- 마리 (Marie, 1440년 ~ ?): 1466년 파사방과 모르타뉴의 영주인 루이 드 라 에이와 결혼했다.
- 카트린 도를레앙 (Catherine d'Orléans, 1449년 ~ 1501년): 1468년 5월 14일 루시 백작 장 7세 (요한 폰 자르브뤼켄-코메르시, 1430년 ~ 1492년)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6. 사망
장 드 뒤누아는 1468년 11월 24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장남 프랑수아가 뒤누아 백작위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