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이해찬은 1952년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아버지 이인용(李寅鎔)과 어머니 박양순(朴良順)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인용은 해방 이후 청양면장을 지냈으며, 1960년 4.19 혁명 때까지 재직했다. 이해찬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재활 분야 인사였다.
1.1. 학력 및 학생 운동
1965년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해찬은 서울로 상경하여 1968년 덕수중학교를 졸업했다. 1971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이듬해인 197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재입학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계기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유신 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청양에 내려왔던 그는 아버지가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질책하자 바로 상경하여 학생운동 서클에 가입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막노동 등으로 생계와 학비를 마련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어 1년간 복역한 후 출소했다. 이후 무역회사에 다니거나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일했으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상근자로 활동했다. 평소 관심이 많던 출판업을 익히기 위해 범우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난 김정옥과 결혼한 후 광장서적을 설립했다. 출판사 '한마당'과 '평민서당'을 설립했으나 불온서적 출판을 이유로 등록이 취소되자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하여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출판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2년 6개월간 수감된 후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반독재 운동과 출판 활동에 전념했다. 1985년 8월, 입학한 지 14년 만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1987년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6월 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2. 정치 경력
이해찬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배경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후,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 정당 대표 등 주요 공직과 당직을 두루 거치며 한국 정치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2.1. 정계 입문 및 국회 활동
1987년 말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선거구에 평화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제외하고 2016년 총선까지 총 7회 당선되며 '선거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노무현,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며 활약했다. 1988년 5.18 광주청문회 당시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간사에 선출되어 5공 관련자들을 집중 추궁하며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그 해 평화민주당 원내부총무에 선출되었다.
그는 여러 언론에서 의정활동 수위권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1년 초부터 정치 개혁론을 주장하며, 야당부터 쇄신해야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특히 1991년 7월 『신동아』에 "이 야당으로는 정권 교체 못한다"는 글을 기고하며 김대중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잠시 탈당했으나, 야권 통합 이후 다시 입당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2년에는 민주당 당무기획실장, 1993년 민주당 환경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94년에는 국가안전기획부의 사찰과 야당 인사 탄압에 관련된 비밀 장부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1995년 7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조순의 당선에 기여했으며, 이후 1995년 7월 제31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발탁되었다. 5개월 만인 1995년 12월, 당의 부름을 받아 서울시 정무부시장직을 사퇴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을 맡았다.
1995년 9월 김대중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해찬은 입당하여, 1996년 5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 자유민주연합과의 정책 공조를 이끌었다. 1997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선거기획본부 부본부장에 선출되었고, 12월 대선에서 김대중이 이회창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1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간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998년 2월까지 15대 대선기획본부 부본부장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담당 간사로 활동했다.
2.2. 교육부 장관 재임 (1998-1999)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입각하여 1998년 3월 3일부터 1999년 5월 24일까지 제38대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이 시기 그는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2.1. 교육 개혁 정책과 사회적 영향
이해찬은 교육부 장관 재임 기간 동안 주로 고교 평준화 정책의 강행, 연합고사 폐지, 보충수업 폐지 등의 개혁안을 추진했다. 그는 교원들의 촌지 수수 근절 및 뇌물 수수 집중 단속을 통해 교직 사회의 비리 척결을 꾀했으며, 입시 개혁을 추진했다.
대학교 입시 목적으로 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시행되던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고사,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을 전면 폐지하였고, 중학교에서도 1995년 폐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잔존하던 연합고사와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을 폐지했다. 또한 각급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대한 불시 감사를 시행하여 촌지 교사들을 해임, 파면하고 교사들의 성과제를 도입하는 등의 정책은 학생과 학부모 등 교육 수요자에 기반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의 개혁안에 반발하는 일선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들의 반발과 비난 공세가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으나 그는 이를 강행했다. 교원 정년을 만65세에서 만62세로 단축하는 등의 교원 개혁을 추진하고 완료했다. 1999년 정년 단축 조치로 약 2만 명의 교원이 교단에서 퇴임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시대 변화에 알맞게 대처하지 못하는 고령 교사들을 교단에서 내보냈다는 점에서 그의 정책을 지지했다.
또한 어린이나 청소년일 때 무심하게 넘어가던 학교폭력을 최초로 단속하기 시작했다. 학교폭력 가해자, 이지메 왕따를 주도한 학생, 학생 조직폭력배인 일진, 불법 폭력 서클을 집중 단속하게 했으며, 이때 단속된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과 폭력 학생들에게 징계와 퇴학 등의 강력한 처벌을 하여 학교폭력을 근절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학교폭력 근절 정책에 대해 교사들과 기성 사회에서는 가해 학생들의 인권도 고려해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그가 교육부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학교폭력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도 주춤하게 되었다.
이해찬은 교원 성과급 제도 역시 도입했다. 그는 교직원에게도 성과급을 적용하여 실력이 있는 교사에게는 성과급을 주는 제도를 추진했다. 성과급 시행에 따라 실력이 있는 교사들은 동기와 1, 2기수 선배들을 제치고 먼저 호봉수가 승급되거나 교감, 교장 등으로 진급하는 일도 나타났고, 공무원에게도 성과급 적용론이 나타났다. 이는 공무원 사회로도 파급 효과를 미쳐 무조건적인 연공서열에 의한 승진을 철폐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하지만 성급한 개혁으로 '이해찬 세대'를 대거 양성하여 그들이 수능에서 낮은 성적을 기록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의 유토리 교육을 흉내 낸 제도라는 비판도 받았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교육부 장관 퇴진 서명운동을 벌였으며, 일부 학부모 단체는 그가 교원들의 기득권 수호의 희생양이 되었다며 그를 동정하기도 했다.
교육부 장관에서 물러난 이후 이해찬은 새천년민주당 남북정상회담지원특위위원장, 국회 한-오스트리아 친선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었으며, '평화적 집회, 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민관 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2001년 5월 28일, 감사원 감사에서 보건복지부의 보험재정 문제점이 드러났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의약 분업 시행 시 추가적인 보험재정 부담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2000년에 2744.00 억 KRW의 적자가 발생했고 2001년에는 7000.00 억 KRW 이상 증가가 예상되었다. 또한 건강보험공단의 방만한 운영으로 정원 초과 인력(1029명)과 2000년 10월 특별 퇴직자에게 258.00 억 KRW의 퇴직보상금이 지급되었으며, 규정보다 많은 유급 노조전담 직원(96명)에게 연간 29.00 억 KRW이 지급된 사실이 밝혀졌다. 임금 인상률도 정부 지침의 3배에 달하는 14.2%였다. 의약 분업 시행으로 3500.00 억 KRW의 약 제조비 절감이 예측되었으나 실제로는 증가했다.
이후 국민 여론에 의해 책임 문제가 대두되자, 정책을 결정한 청와대와 여당은 침묵하며 해당 공무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 사령탑은 보건복지부 담당 이태복 수석, 여당 정책의장은 이해찬 의원, 해당 장관은 차흥봉 장관이었다. 이해찬은 정책 논의 과정에서 의회와 복지부 양측이 책임을 서로 전가하자 원칙을 주장하며 자리를 박차고 퇴장했을 만큼 강한 입장을 보였다.
2.3. 국무총리 재임 (2004-2006)
2004년 6월 30일부터 2006년 3월 15일까지 제36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그의 총리 임명은 과거 교육부 장관으로서의 논란 많은 개혁 이력 때문에 일부 저항에 부딪혔으나, 그는 취임 후 유능한 총리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한국이 본 가장 강력한 총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3.1. 총리로서의 주요 활동

이해찬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국정 전반을 총괄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후 사임하자, 이해찬은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하고 임명되었다.
국무총리 재직 당시, 19년간 미결 과제로 남아있던 원전 폐기물 처리장 설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며, 공공기관 지방 이전안을 발의하고 추진했다. 2005년 8월에는 광복 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매주 열리는 국무회의에 한 달에 한 번꼴로만 참석하여 국무회의 부의장인 이해찬 총리가 의장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는 '실세 총리'라는 평에 걸맞게 노 대통령과 생각이 다를 때는 언쟁도 불사했다. 예를 들어,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에 강하게 반대 의견을 냈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에도 반대 의견을 냈다.
한편으로는 제1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난하며 국회 파행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문제없이 총리직을 수행하며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재임했다.
2.3.2. 골프 파문과 사퇴
2006년 3월 1일 한국철도 노동조합과 서울지하철 노조가 동시에 파업에 돌입하여 전국적인 교통 혼란, 특히 교통이 지하철에 크게 의존하는 서울 지역의 경제 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국무총리로서 상황을 지휘하고 파업을 중재해야 할 이해찬은 삼일절 기념식에도 불참한 채 부산 지역 상공인들과 골프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는 불법 정치자금 제공 의혹이 있는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을 가중시켰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고, 정부와 국민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 사건은 당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의 성추문 사건과 이명박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를 공격하던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이해찬의 3.1절 골프 파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역공을 펼친 결과였다. 결국 이해찬은 3월 5일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으며, 3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이 그의 총리직 사의를 수용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공직사회 일부의 반발이 있었으나, 접대성 골프뿐만 아니라 친척을 제외한 모든 직무 관련자와는 골프를 할 수 없도록 규제 조항이 신설되기도 했다.
2.4. 정당 지도부 활동
총리 퇴임 이후 이해찬은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열린우리당 위원장 등을 지냈다. 2007년 6월 19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으나, 대통합민주신당의 당내 경선에서 정동영, 손학규에 이어 3위에 그쳤다. 2008년 4월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 제3대 회장에 선출됐다.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했다. 2009년 시민주권 상임대표, 2011년 12월 시민통합당 창당을 주도했다. 2011년 12월 21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됐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로 돌아왔다. 2012년 6월 9일 열린 민주통합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경쟁 상대인 김한길 후보를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대표 수락 연설에서 이해찬은 "이제 정권 교체를 향한 대장정이 시작됐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과 당원의 뜻을 하나로 모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매카시즘에는 단호히 맞서서 싸우겠다. 종북주의, 매카시즘 대신 정책 경쟁하는 그런 선거로 임해줄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신 매카시즘 논란이 불기도 했다. 이후 제18대 대통령 선거 관련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총사퇴를 결의하고 민주통합당 대표직을 사퇴했다.
2.5.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 시기 활동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5년 7월부터 12월까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했으며, 1996년 5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 당의 주요 정책을 조율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간사로 활동하며 새 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는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교육 개혁을 주도했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다시 맡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반에서 활동했으며, 2003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 준비에 가담하여 열린우리당 창당기획단 단장이 되었다.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중국 특사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4년 6월부터 2006년 3월까지는 제36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서 국정 전반을 이끌었다. 2006년 10월 27일에는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에 기용되었고, 2007년 3월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회담하기도 했다.
2.6. 문재인 정부 시기 활동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18일 중국 특사로 임명되어 중국을 방문했으나, 홍콩 행정장관과 동급의 대우를 받아 '냉대'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18년 7월 20일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튼튼하게 뒷받침하겠다"며 더불어민주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고, 8월 25일 42.88%의 득표율로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그는 2020년 4월 제21대 총선에 불출마했으나, 당 대표로서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2020년 8월 24일 임기 만료와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이낙연에게 당 대표 자리를 넘겼다.
3. 사상 및 이념
이해찬은 학생 운동과 재야 운동을 통해 민주화에 기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보적이고 사회자유주의적인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강조해왔으며, 이는 그의 정책과 발언에 깊이 반영되었다. 특히 교육 개혁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려 했으며, 공공기관 지방 이전 등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등 사회 전체의 균형 발전과 사회적 약자 보호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민주당계 정당의 핵심적인 진보 노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저서 및 출판물
이해찬은 직접 저술하거나 공저한 서적, 기고문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정치적 비전을 대중과 공유했다.
- 저서
- 《광주민주항쟁》, 돌베개, (공저), 1988.
- 《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 함께사는 세상, 1989.
- 《열두 편의 가슴시린 편지》, 행복공작소, (공저), 2005.
- 《청양 이 면장 댁 셋째 아들 이해찬》, 푸른나무, 2007.
-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오마이북, (공저), 2010.
- 《광장에서 길을 묻다》, 동녁, (공저), 2011.
- 역서
- 《사회학적 상상력》, 돌베개, C. 라이트 밀즈 저.
- 《세계환경정치(한국어판)》.
- 《돔 헬더 까마라 - 정의와 평화의 사도》, 한길사, 조 세드 브루키르 저, 1979.
5. 개인적인 삶
이해찬은 1978년 김정옥과 결혼하여 슬하에 딸 이현주(1979년생)를 두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아버지 이인용(1922~1999년), 어머니 박양순(1923~2017년), 형 이해진(1946년생), 이해명(1948년생), 동생 이해만(1957년생) 등이 있다. 그는 의친왕의 아들인 이구 전 황세손과도 친척 관계에 있다. 그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6. 논란 및 비판
이해찬의 공직 및 정치 활동 전반에 걸쳐 여러 논란과 비판, 의혹이 제기되었다.
6.1. 교육 개혁 관련 비판
교육부 장관 재임 시 추진했던 교육 정책들은 사회적 논쟁을 야기했다. 고교 평준화의 강행을 놓고 보수 단체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들의 '바보 평준화'라는 비난,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들의 항의와 반발이 거셌으나 이해찬은 이를 밀어붙였다. 또한 비리 교원 색출, 교원 정년을 만65세에서 만62세로 단축시키면서 교직원들의 항의 시위와 퇴진 운동 등 집단 반발을 사기도 했다.
특히 야간 자율학습을 없애고 월간 모의고사를 축소하면서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겠다"고 선포하여 고교 학습이 전반적으로 느슨해졌고, 이로 인해 학력 저하 시비가 일었다. 이로 인해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낮은 성적을 기록한 학생들을 일컬어 '이해찬 세대'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평준화 정책 강행 이후 학교 간 그리고 학생 성적의 긍정적, 부정적 변동과 영향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6.2. 기타 논란
- 상습 폭행 의혹
- 1995년 12월 18일, 이해찬이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의 형이 구입한 약 7.80 억 KRW 상당의 부동산의 소유권 이전 등기 과정에서 송파구 직원이 토지·건물 가액 총액을 잘못 기재하여 법원에서 등기가 반려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안 이해찬은 송파구 공무원 네 명을 부시장실로 불러 "네가 뭔데, 얼마 받아먹으려고 그렇게 지시했어"라며 반말로 고함을 치고, 책이나 서류를 집어던지며 손찌검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실무 직원들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으나, 이해찬은 말리는 서울시 감사관에게 "내일 당장 송파구 특별감사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 이해찬 총리에 대한 인사청문회 당시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이 "민통련 간부로 재직하던 재야 시절 잘못된 기사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모 중앙지 취재기자의 뺨을 때린 적이 있느냐"고 질의하자, 이해찬은 "1987년경으로 기억합니다만, 당시 민주화운동과 양김 단일화를 위해 노력하시던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 모 언론에서 『문 목사가 대통령에 출마하려 한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재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잘못된 보도에 대해 항의하고 언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라고 답변하며 뺨을 때린 사실을 인정했다.
- 1995년 서울시 정무부시장 재직 당시 이해찬 딸의 학급에서 성희롱이 있자 서울특별시 교육청 장학관이 이해찬에게 달려왔는데, 목격자는 이해찬이 따귀를 때렸다고 주장했으나, 이해찬은 따귀를 때린 사실은 부인하고 욕설을 한 사실은 인정했다.
- 물컵 투척
- 1990년대 초 국회의원 시절, 의견 충돌이 있던 관악구청장에게 물컵을 집어 던졌다는 논란이 있었다.
- 골프 파문
- 2004년 9월 3일 경기도 포천의 한 군부대에서 대전차포 오발 사고로 국군 14명이 사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틀 뒤인 9월 5일 희생자 조문을 가기 직전 이해찬이 남서울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하고 조문을 했던 것이 뒤늦게 밝혀져 유가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 2005년 4월 5일 식목일 행사를 마친 후 강원도 양양군과 고성군에 산불이 발생했을 당시, 이해찬은 국무조정실 직원들을 대동하고 포천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당시 야당은 물론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도 대변인 성명을 통해 총리직 사퇴를 촉구했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 참석을 마치고 4월 11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공식 사과했다. 같은 해 7월 2일 남부지방에 호우경보가 발령되어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국무위원들과 경제단체장들이 만나서 골프를 치면서 정·재계 현안을 논하는 이른바 '골프회동'이 자주 이어지기도 했다.
- 장애인 비하 발언
- 2018년 12월 더불어민주당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 축하 자리에서 장애인 비하 발언을 했다. 이해찬은 "신체 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은..."이라며 발언했다가 "아, 말을 잘못했다"며 수정했으나, 다시 "정치권에는 저게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 장애인들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이 대표의 발언에 대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장애인을) '정확하게 비하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2020년 1월, 더불어민주당 공식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여 인재 영입 1호이자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척수 장애를 가진 최혜영 강동대 교수를 만난 일을 언급하며 "선천적인 장애인은 어려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나와서 의지가 약하다"고 발언하여 또다시 장애인 비하 발언 논란을 일으켰다.
7. 평가 및 영향
이해찬은 한국 정치, 특히 민주당계 정당의 발전과 노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7.1. 정치적 영향력
이해찬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며 민주주의 정착에 기여했다. 7선 국회의원으로서 오랜 기간 의정 활동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입법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핵심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 깊이 관여하며 국정 운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무총리 재임 시절에는 '실세 총리'로서 원전 폐기물 처리장 설치, 공공기관 지방 이전 등 난제 해결에 기여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는 민주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를 역임하며 당의 노선과 전략을 수립하고 주요 선거를 지휘하는 등 정당 민주주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당 대표로서 당의 압승을 이끈 것은 그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서 친노, 친문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진보 진영의 정치적 결집과 확장에 기여했다.
7.2. 사회적 평가
이해찬은 교육부 장관 시절 추진한 고교 평준화 정책과 입시 제도 개혁으로 '이해찬 세대'라는 용어를 낳으며 사회적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교육 개혁은 학력 저하를 야기했다는 비판과 함께, 촌지 근절 및 학교폭력 단속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총리 재임 중 발생한 골프 파문은 공직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야기하며 그의 정치적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으나,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며 한국 정치의 주요 목소리 중 하나로 활동했다. 그의 직설적이고 때로는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은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는 그에 대한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그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국면에 참여하며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온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8. 수상 경력
이해찬은 정치인으로서, 공직자로서 받은 주요 훈장과 상을 통해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 환경기자클럽 올해의 환경인상
- 환경운동연합 녹색정치인상
- 1996년 6월 13일 황조근정훈장
- 2003년 청조근정훈장
- 2002년 7월 명예제주도민증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정 공로)
9.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지역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결과 | 비고 |
---|---|---|---|---|---|---|---|---|---|---|
1988년 | 총선 | 13대 | 국회의원 | 서울 관악구 을 | 평화민주당 | 39,950 표 | 31.18% | 1위 | 당선 | 초선 |
1992년 | 총선 | 14대 | 국회의원 | 서울 관악구 을 | 민주당 | 64,035 표 | 44.69% | 1위 | 당선 | 재선 |
1996년 | 총선 | 15대 | 국회의원 | 서울 관악구 을 | 새정치국민회의 | 54,049 표 | 44.75% | 1위 | 당선 | 3선 |
2000년 | 총선 | 16대 | 국회의원 | 서울 관악구 을 | 새천년민주당 | 48,751 표 | 47.48% | 1위 | 당선 | 4선 |
2004년 | 총선 | 17대 | 국회의원 | 서울 관악구 을 | 열린우리당 | 49,673 표 | 41.12% | 1위 | 당선 | 5선 |
2012년 | 총선 | 19대 | 국회의원 | 세종특별자치시 | 민주통합당 | 22,192 표 | 47.88% | 1위 | 당선 | 6선 |
2016년 | 총선 | 20대 | 국회의원 | 세종특별자치시 | 무소속 | 46,187 표 | 43.72% | 1위 | 당선 | 7선 |
10. 관련 항목
- 대한민국의 정치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 대한민국의 교육부 장관
- 서울특별시 부시장
-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 서울 관악구의 국회의원
- 세종특별자치시의 국회의원
- 관악구 을
-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