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이준혁 사범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 안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6형제 중 셋째로, 부친 이인규는 공무원이자 지역 정치인이었으며, 모친 이요순은 주부였다. 그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작은 농장에서 보냈다.
1.1. 유년기 및 교육
이준혁 사범은 1962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의 안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고창에 위치한 오도관 도장을 운영하던 강 사범을 만나 태권도에 입문했다. 강 사범은 그의 첫 번째 태권도 스승이었고, 이준혁은 강 사범의 뛰어난 제자 중 한 명이 되어 13세에 검은 띠를 취득했다.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면서 많은 젊은 한국인 태권도 사범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이준혁의 형인 이현곤도 그중 한 명으로, 버지니아주에 한국 태권도 도장 중 하나를 열었다.
2. 미국 이민 및 초기 활동
이준혁 사범은 서울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하던 중, 1982년에 미국 워싱턴 D.C.의 조지 메이슨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쳤다.
3. 태권도 활동 및 철학
이준혁 사범은 미국 이민 후 태권도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만의 독자적인 태권도 철학을 정립했다.
3.1. 도장 설립 및 확장
이준혁 사범과 그의 형 이현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리서치 트라이앵글 지역이 태권도 도장을 열기에 이상적인 장소라고 보았다. 이 지역은 교육 수준이 높고 중산층 및 상류층 가정이 성장하는 곳으로, 태권도 교육에 대한 관심과 수업료 지불 능력이 높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87년 2월, 이준혁 사범은 버지니아주를 떠나 롤리로 이주했다.
당시 미국은 IOC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태권도 겨루기를 시범 종목으로 지정하고, 영화 가라테 키드The Karate Kid영어가 젊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등 무술 산업이 경이적인 성장을 경험하던 시기였다. 롤리에 도착한 이준혁 사범은 당시 소유하고 있던 에어로스타 밴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지역에 적응했다. 그는 스트립 몰에 위치한 작은 상업 공간을 임대하여 한 달간 직접 리모델링 작업을 진행했다. 봄이 시작될 무렵 리모델링이 완료되었고, 이준혁 사범의 도장이 문을 열었다. 도장은 약 250 m2의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낮에는 주유소, 학교, 지역 박람회 등에서 무료 무술 시범을 선보이며 도장을 홍보했고, 저녁에는 태권도 수업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서서히 늘었지만, 곧 빠르게 증가하여 연말에는 도장의 수용 인원을 초과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에 힘입어 이준혁 사범은 리서치 트라이앵글 지역에 여러 도장을 추가로 개설했고, 형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형제들을 이들 도장의 책임자로 배치했다.
3.2. 교육 철학
이준혁 사범은 태권도가 단순히 발차기와 주먹질을 넘어선 '삶의 방식'임을 깨달았다. 그에게 태권도는 개인과 사회 전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수단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태권도는 도장 밖 지역사회로 확장되어 사범과 학생들이 모든 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도장 내에서 이준혁 사범의 무술 비전은 새로운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한국 무술인 태권도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국 태권도의 일부 요소들이 미국 문화에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을 일찍이 인식했다. 한국인들이 순응을 지향하고 개인주의를 멀리하는 반면, 미국인들은 개성을 추구하고 순응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이준혁 사범은 자신의 가르침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조정해야 했고, 전통 태권도 문화를 보존하면서도 자신만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야 했다.
미국 문화는 이준혁 사범이 태권도에 자신만의 교육 철학을 추가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서울이나 그의 고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도장 이름을 블랙 벨트 월드Black Belt World블랙 벨트 월드영어로 변경하여, 한국의 인간 존중 사상인 홍익인간 정신에 기반한 자신의 교육 철학을 담아냈다. 이준혁 사범은 다음 아홉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자신의 무술 철학을 발전시켰다.
-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준다.
- 부모님을 공경한다.
- 어른을 존경한다.
- 어린이를 돌본다.
- 스승과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한다.
-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 약자에게서 이점을 취하지 않는다.
- 태권도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 시작한 일을 끝까지 완수한다.
이준혁 사범은 모든 사람이 태권도를 수련하고 이러한 자질과 가치를 삶에 적용한다면, 사회가 더 나아질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법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3.3. 그랜드마스터 승단 심사
그동안 5단 이상의 태권도 승단 심사는 비공개로 진행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준혁 사범은 이러한 전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1997년 11월 23일, 그는 학생들과 태권도 그랜드마스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단(7th dan) 심사를 치렀다. 이 심사는 미국에서 세계태권도가 공인한 첫 7단 심사였다. 심사위원으로는 리준구 그랜드마스터, 우진청 그랜드마스터, 김동진 그랜드마스터, 이강성 그랜드마스터, 그리고 이원익 그랜드마스터가 참여했다.
이준혁 사범은 품새, 겨루기, 격파, 시범 등 다양한 태권도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을 선보였다. 심사의 하이라이트는 그가 루이빌 슬러거Louisville Slugger루이빌 슬러거영어 야구방망이를 격파한 것과 검 시범이었다. 특수 콘크리트 스탠드에 고정된 야구방망이를 이준혁 사범은 단 한 번의 발차기로 부러뜨렸다. 또한, 눈을 가린 채로 제자의 배 위에 놓인 사과를 전통 한국 검으로 잘라내는 시범을 보여 관중을 놀라게 했다.

4. 블랙 벨트 월드
블랙 벨트 월드Black Belt World블랙 벨트 월드영어는 이준혁 그랜드마스터가 설립한 국기원 공인 자기계발 교육 기관이다. 이 기관은 노스캐롤라이나주와 버지니아주 등 미국 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지점을 두고 있다. 이준혁 사범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태권도 수련을 통해 개인의 성장과 사회 기여를 목표로 한다.
5. 주요 사회 활동 및 기여
이준혁 사범은 태권도 분야를 넘어 지역 사회와 국제 사회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 왔다.
5.1. 정치 활동
2011년, 이준혁 사범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나이트데일 시장 선거에 현직 러셀 킬렌Russell Killen영어 시장에 맞서 출마했다. 민주당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직 정당을 '정치 마피아'처럼 여기는 시각이 강한 나이트데일에서 인기 있는 현직 시장을 상대로 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의 출마는 지역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신념에서 비롯되었으며, 교육 개혁이 주요 공약이었다. 그는 도시의 미관 개선 및 도시 개발과 교육 개혁을 두고 현직 시장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이준혁 사범은 선거에서 46%의 득표율을 얻으며 아쉽게 패배했지만, 그의 정치 참여는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5.2. 기타 봉사 및 기록
이준혁 사범은 국제 태권도 자선 봉사 단체인 '국제 건강 및 좋은 친구 연합'(International Coalition of Good Health and Good Friends, ICG국제 건강 및 좋은 친구 연합 (ICG)영어)의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미국 태권도 위원회의 전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우석대학교 태권도학과 초빙 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7시간 만에 5,000개의 판자를 격파하는 비공식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마셜 아츠 월드'Martial Arts World마셜 아츠 월드영어 잡지에 의해 미국 내 10대 무술 마스터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5.3. 한반도 통일 노력
이준혁 그랜드마스터는 2002년부터 북한을 방문하며 한반도 통일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그는 언젠가 남북한이 통일되어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국가가 되기를 희망하며, 현재는 자신의 관대함, 태권도, 그리고 자유에 대한 사랑을 통해 남북한 간의 다리를 놓는 데 힘쓰고 있다.
6. 개인 생활
이준혁 사범은 6형제 중 셋째로, 유년기를 대한민국의 작은 농장에서 보냈다. 그의 형 이현곤은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하여 태권도 도장을 개설했으며, 이준혁 사범 또한 이후 형제들을 자신의 태권도 도장 확장 사업에 참여시키며 가족과의 유대를 이어갔다.
7. 평가 및 유산
이준혁 사범은 태권도 분야의 혁신가이자 교육자로서, 그리고 사회 활동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업적과 철학은 미국 사회와 한국 태권도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7.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이준혁 사범은 태권도를 단순한 무술을 넘어 개인의 자기계발과 사회 기여의 도구로 승화시킨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국의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미국 문화에 맞는 태권도 교육 철학을 정립하여, 9가지 핵심 원칙을 통해 제자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 공경, 연장자 존중, 약자 배려 등 보편적인 가치를 함양하도록 지도했다.
특히 1997년 대중 앞에서 진행된 7단 그랜드마스터 승단 심사는 태권도계의 오랜 비공개 관례를 깨고 투명성을 확보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심사에서 보여준 야구방망이 격파나 눈을 가린 채 진행한 검 시범은 그의 뛰어난 기량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설립한 블랙 벨트 월드Black Belt World블랙 벨트 월드영어는 국기원 공인 교육 기관으로서 미국 전역과 해외로 확장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며 태권도 세계화에 기여했다. 이준혁 사범은 7시간 만에 5,000개의 판자를 격파하는 세계 기록을 세웠고, '마셜 아츠 월드'Martial Arts World마셜 아츠 월드영어 잡지에 의해 미국 내 10대 무술 마스터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등 무술가로서의 탁월함도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국제 건강 및 좋은 친구 연합International Coalition of Good Health and Good Friends국제 건강 및 좋은 친구 연합영어 회장, 미국 태권도 위원회 사무총장, 우석대학교 태권도학과 초빙 교수 등 다양한 사회적 직책을 수행하며 지역 사회와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특히 2002년부터 시작된 북한 방문과 한반도 통일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은 그의 평화주의적 신념과 실천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는 태권도와 자유에 대한 사랑을 통해 남북한 간의 화합을 도모하며,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하고자 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활동은 이준혁 사범이 단순히 무술가를 넘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8. 같이 보기
- 태권도
- 그랜드마스터 (무술)
- 국기원
- 홍익인간
- 한국계 미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