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계 및 출신
유정회는 대대로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계는 멀리 한나라 시기 흉노의 왕족인 거비의 후예로 이어진다.
1.1. 조상 및 가계
유정회의 가계는 흉노의 독고부 추장이었던 유라진의 자손인 유만령의 후예이다. 그의 조부 유환준은 북제 시대에 중서시랑을 지었으며, 유환준의 동생인 유사준 또한 저명한 인물이었다. 유정회의 부친은 유탄으로, 수나라 때 대리시의 사관을 지냈다. 이처럼 유정회는 대대로 중국 왕조의 고위 관직을 역임한 명문 출신이었다.
1.2. 출생지와 가족
유정회는 활주 좌성현(현재 허난성 신샹시 옌진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였다. 그의 조부는 북제의 중서시랑을 지낸 유환준이며, 부친은 수나라의 대리시정 유탄이었다.
2. 수나라 시대의 경력
유정회는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관직에 나아가 활동했으며, 이후 이연의 거병에 합류하며 당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2.1. 수나라에서의 관직
수나라 대업 연간에 유정회는 태원 응양부의 사마로 재직했다. 당시 그는 당국공 이연의 휘하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 수나라의 통치는 점차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고, 이는 유정회가 이연의 거병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2.2. 이연의 거병 참여
617년 대업 13년, 이연이 태원에서 수 양제에 대항하여 거병할 계획을 세우자, 유정회는 이연이 거병을 실행하기에 앞서 공헌했다. 그는 당시 이연을 감시하기 위해 수 양제가 파견한 감찰관이었던 왕위와 고군아를 사로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체포는 이연이 군사를 일으키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고 명분을 확보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로써 유정회는 당나라 건국 초기부터 이연의 핵심 측근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3. 당나라 건국에 대한 기여
유정회는 당나라 건국 과정에서 단순히 이연의 휘하 장군에 머무르지 않고, 전략적 식견과 용맹함을 겸비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3.1. 주요 활약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한 후, 대장군부가 수립되자 유정회는 호조참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장안이 평정되자 그는 승상부연으로 발탁되었으며, 이는 그의 행정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618년 당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위위소경에 임명되었고, 당나라의 발상지이자 중요 거점인 태원의 부재를 겸하며 이 지역의 안정과 방어를 책임졌다. 그의 이러한 초기 활약은 당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3.2. 유무주에게 포로가 되다
619년 무덕 2년, 당시 북산시를 거점으로 삼던 경쟁 군벌 유무주가 병주를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했을 때, 유정회는 태원에서 그에게 포로로 잡히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유무주의 군사적 역량과 전략적 약점, 전황 등 중요한 정보를 이연에게 밀서로 보냈다. 이 밀서는 이후 이세민이 유무주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620년 무덕 3년, 유무주가 이세민에 의해 패배하자 유정회는 구출되었고, 그의 관직과 작위는 모두 복원되었다. 이는 당나라가 유정회의 충성심과 뛰어난 정보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4. 당나라에서의 경력
당나라 건국 이후 유정회는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황실의 신임을 얻었고, 당나라 초기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4.1. 주요 관직
구출 후 유정회는 형부상서와 광록경을 역임하며 당나라의 법률 및 내무 행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627년 정관 원년에는 홍주도독으로 전임되어 후베이성 우한시 일대인 홍주 지역의 군정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홍주도독으로서 그는 지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힘썼으며, 이 직책을 통해 그는 300호의 식읍을 하사받기도 했다.
4.2. 봉작 및 칭호
유정회는 당나라 건국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형국공에 봉해졌다. 그의 작위는 이후 유국공으로 변경되었다. 그는 당 태종에 의해 능연각 24공신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그 초상이 그려져 능연각에 걸렸으며, 이는 그가 당나라 건국과 초기 통치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록이다. 그의 공신으로서의 위상은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5. 사망 및 추증
유정회는 63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에 대해 당 태종은 지대한 애도를 표하고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5.1. 사망
유정회는 63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직접 조서를 내려 "거병하던 날, 진실로 남다른 공훈이 있었다. 장례는 마땅히 융숭하게 치러야 한다"고 밝히며 그의 생전 공적을 높이 기렸다. 이는 태종이 유정회의 공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5.2. 추증 및 시호
사망 후 유정회는 민부상서로 추증되었고, '양(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민부상서는 당시 국가의 재정과 호구를 담당하는 중요 직책으로, 그의 행정 능력을 사후에도 인정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봉작은 추후 유국공으로 추봉되었다.
6. 가족 및 후손
유정회는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후손들 또한 당나라 시대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가문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6.1. 자녀
유정회에게는 세 아들인 유현의, 유현상, 유현육이 있었다.
- 유현의: 유정회의 장남으로, 그의 유국공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당 태종의 셋째 딸인 남평공주와 결혼하여 부마도위가 되었다. 당 고종 대에는 여주자사를 지냈다.
- 유현상: 주객랑중을 역임했다.
- 유현육: 역주자사를 역임했다.
6.2. 후손
유정회의 후손들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 유기: 유현의의 아들로, 유정회의 손자이다. 장수 2년(693년)에 천관시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측천무후의 명을 받은 혹리들에게 모함당하여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 유순: 유기의 동생으로, 금오장군을 지냈다.
- 유방평: 유정회의 4세손으로, 유명한 당나라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 유숭망: 유정회의 7세손으로, 당 소종 재위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 그는 진사 급제 후 검남동천절도사 겸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다.
7. 평가 및 기념
유정회는 당나라 건국에 대한 핵심적인 기여와 이후 보여준 충성심으로 인해 당나라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7.1. 능연각 24공신
유정회는 당 태종이 당나라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공신들을 기리기 위해 능연각에 그 초상을 그린 24인 중 한 명이다. 이는 그가 이세민의 초기 집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능연각 공신으로서 그의 위상은 당나라의 개국 정신과 충의를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능연각 24공신은 다음과 같다:
- 장손무기
- 이효공
- 두여회
- 위징
- 방현령
- 고사렴
- 울지경덕
- 이정
- 소우
- 단지현
- 유홍기
- 굴돌통
- 은개산
- 시소
- 장손순덕
- 장량
- 후군집
- 장공근
- 정지절
- 우세남
- 유정회
- 당검
- 이세적
- 진경

7.2. 역사적 평가
유정회는 수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이연의 태원 거병에 합류하여 왕위와 고군아를 제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는 이연이 순조롭게 거병하고 장안으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유무주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적진에서 중요 정보를 보내 이세민이 유무주를 토벌하는 데 기여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정보력과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당나라 건국 후에도 다양한 관직을 수행하며 초기 통치 안정에 기여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통해 유정회는 당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공신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