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윌리엄 루터 피어스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나 학업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며 물리학자로서의 초기 경력을 쌓았다.
1.1. 출생 및 성장 과정

윌리엄 루터 피어스 3세는 1933년 9월 11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윌리엄 루터 피어스 주니어와 마그리트 패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장로교 집안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미국인과 잉글랜드계 미국인 혈통이었다. 피어스의 남동생인 플루어노이 샌더스는 엔지니어였으며, 윌리엄 피어스의 정치 활동을 도왔다.
그의 아버지는 1892년 버지니아주 크리스천스버그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1910년 조지아주 리치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가족은 미국 남부의 귀족 가문으로,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앨라배마주 주지사이자 아메리카 연합국 법무장관을 지낸 토머스 H. 와츠의 후손이었다. 남북 전쟁 이후 그의 어머니 가문은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했지만 명맥은 유지되었다. 피어스의 아버지는 한때 외항 화물선의 정부 대표로 일하며 워싱턴 D.C.에 보고서를 보냈고, 나중에는 보험 대리점의 관리자가 되었으나 1943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망 후, 피어스 가족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로 이사했고, 이후 다시 텍사스주 댈러스로 거처를 옮겼다.
피어스는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며, 고등학교 마지막 2년은 텍사스주 브라이언에 있는 앨런 사관학교에서 보냈다. 십대 시절 그의 취미와 관심사는 모형 로켓, 화학, 라디오, 전자공학이었고, 과학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가 처음 꾸었던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다.
1.2. 학력 및 초기 경력
1951년 군사 학교를 졸업한 피어스는 잠시 유전에서 잡역부로 일했으나, 10 cm 파이프가 손에 떨어지는 사고로 부상을 입어 그해 여름 남은 기간 동안 신발 판매원으로 일했다. 이후 그는 휴스턴의 라이스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1955년 라이스 대학교를 졸업하며 물리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잠시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일했으며,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캠퍼스로 옮겨 1962년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오리건 주립 대학교에서 물리학 조교수로 재직했다.
2. 정치 활동의 시작
피어스는 학계에서의 경력을 뒤로하고 정치 활동에 투신하게 된다. 이는 당시 미국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그의 인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여러 극단주의 단체에 참여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2.1. 사상적 배경 및 초기 활동
오리건 주립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던 시기는 미국 민권 운동과 1960년대 반문화 운동이 부상하던 때였다. 피어스는 이 두 운동을 유대인이 주도하고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며, 이를 미국 백인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1965년, 그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오리건 주립 대학교의 종신 교수직을 그만두고 코네티컷주 노스헤이븐으로 이주하여 항공우주 제조업체인 프랫 & 휘트니의 첨단 재료 연구 개발 연구소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했다.
1962년 그는 잠시 반공주의 단체인 존 버치 소사이어티에 가입했으나, 이 단체가 인종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곧 탈퇴했다. 1966년 워싱턴 D.C.로 이주한 후, 미국 나치당의 창설자인 조지 링컨 로크웰과 교류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국 나치당의 분기별 이념 저널인 『내셔널 소셜리스트 월드』(National Socialist World영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67년 로크웰이 암살된 후, 피어스는 미국 나치당의 후계 조직인 국가사회주의 백인당(National Socialist White People's Party영어, NSWPP)의 주요 구성원 중 한 명이 되었다.
2.2. 민족 동맹 창설
1968년, 피어스는 NSWPP를 탈퇴하고 당시 앨라배마주 주지사이자 미국 독립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지 월리스의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조직인 월리스 청년단(Youth for Wallace영어)에 합류했다. 1970년, 그는 윌리스 카토와 함께 월리스 청년단을 내셔널 유스 얼라이언스(National Youth Alliance영어, NYA)로 재편성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두 사람 사이에 복잡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1971년경 피어스와 카토는 공개적으로 다투기 시작했고, 카토는 피어스를 리버티 로비(Liberty Lobby영어)의 메일링 리스트를 훔쳤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NYA는 분열되었고, 1974년 피어스의 파벌은 민족 동맹(National Alliance영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민족 동맹 이사회 창립 멤버 중에는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의 고전학 교수였던 레빌로 P. 올리버가 있었는데, 그는 피어스의 삶에 조언자이자 친구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
3. 민족 동맹 활동
피어스가 창설하고 이끈 민족 동맹은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 분리를 핵심 이념으로 삼아 다양한 미디어와 출판 활동을 통해 사상을 전파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3.1. 조직 및 이념

민족 동맹은 1974년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피어스는 이 조직을 궁극적으로 미국 연방 정부를 백인 민족주의적으로 전복시키기 위한 전위대로 삼으려 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보냈다. 이 곳에서 그는 1991년부터 주간 라디오 쇼 『미국 반체제 목소리』(American Dissident Voices영어)를 진행했으며, 내부 뉴스레터 『민족 동맹 게시판』(National Alliance Bulletin영어, 이전 명칭은 『액션』(Action영어))을 발행하고, 『내셔널 뱅가드』(National Vanguard영어, 원래 명칭은 『어택!』(Attack!영어)), 『자유 연설』(Free Speech영어), 『저항』(Resistance영어) 등의 잡지를 감독했다. 또한 그의 출판사인 내셔널 뱅가드 북스(National Vanguard Books, Inc.영어)를 통해 책들을 출판했으며, 백인 우월주의 음악 레이블인 레지스탕스 레코드(Resistance Records영어)를 1993년경부터 지원하다가 1999년에는 완전히 인수했다.
민족 동맹의 핵심 이념은 백인 우월주의, 인종 분리, 반유대주의, 반이민주의 등이었다. 피어스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사망자 수가 과장되었고 많은 세부 사항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인 인종이 생존하려면 백인들만의 생활 공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미국에 백인들만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2. 미디어 및 출판 활동
피어스와 민족 동맹은 다양한 미디어와 출판 활동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조직 운영을 위한 자금을 조달했다. 주간 라디오 쇼 『미국 반체제 목소리』는 1991년부터 시작되어 그의 주요 사상 전파 통로가 되었다. 내부 뉴스레터인 『민족 동맹 게시판』과 잡지 『내셔널 뱅가드』, 『자유 연설』, 『저항』 등은 조직의 이념을 회원들에게 확산시키고 외부 대중에게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내셔널 뱅가드 북스 출판사는 그의 소설 외에도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포함한 다양한 백인 우월주의 서적들을 출판했다. 또한 백인 우월주의 음악 레이블인 레지스탕스 레코드를 통해 '백인 파워' 음악을 제작하고 유통하며 젊은 층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3.3. 재정 및 세금 면제 시도
1978년, 피어스는 민족 동맹이 교육 조직이라고 주장하며 미국 국세청에 세금 면제를 신청했으나 거부되었다. 피어스는 항소했지만, 항소 법원은 국세청의 결정을 지지했다.
1985년, 피어스는 버지니아주 알링턴군에 있던 조직의 본부를 웨스트버지니아주 밀 포인트의 346 acre 부지로 이전했는데, 이 부지를 현금 9.50 만 USD에 매입했다. 이 곳에 그는 코스모테이스트 커뮤니티 교회를 설립했다. 1986년, 이 교회는 연방, 주, 지방 정부로부터 세금 면제를 성공적으로 획득했다. 그러나 이후 재심사에서 286 acre의 부지는 민족 동맹 본부와 내셔널 뱅가드 북스 사업 및 창고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종교적 목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주 세금 면제 자격을 상실했고, 오직 60 acre만이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어 세금 면제가 유지되었다.
피어스는 반시오니즘 활동도 벌였다. 욤 키푸르 전쟁 중에는 맥도널 더글러스 주식을 매입하여 주주 총회에서 이스라엘에 무기를 보내는 군사 계약을 취소하도록 강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 안건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에 무기 공급을 계속했다. 피어스의 『미국 반체제 목소리』에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관한 일부 연설은 레바논 시아파 이슬람주의 단체인 헤즈볼라를 포함한 무슬림 출판물과 웹사이트에 재인쇄되기도 했다.
3.4. 국제적 연대
민족 동맹의 지도자로서 피어스는 독일 국가민주당, 영국 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영어, BNP), 그리스의 황금새벽당(Golden Dawn영어) 등 유럽의 다른 민족주의 단체들과 접촉을 구축했다. 그는 또한 BNP 지도자 존 틴달과도 관계를 맺었다. 일본의 국가사회주의 일본 노동자당도 1999년 말 피어스에게 일본 강연을 요청했으나, 그의 바쁜 일정과 건강 악화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피어스는 또한 51분짜리 정보 영상 『미국은 변화하는 나라다』(America is a Changing Country영어)를 제작했는데, 이 영상은 반세계화를 주제로 했다. 그는 반세계화 행동 네트워크(Anti-Globalization Action Network영어)라는 반세계화 단체를 결성하여 2002년 6월 캐나다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항의하기도 했다.
4. 저술 및 사상
피어스는 '앤드루 맥도널드'라는 필명으로 두 편의 소설 『터너의 일기』와 『헌터』(Hunter영어)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 그의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4.1. 소설 『터너의 일기』
1978년, 피어스는 앤드루 맥도널드라는 필명으로 소설 『터너의 일기』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티머시 맥베이가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를 감행하는 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지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인종 전쟁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세계 대전과 비백인 인종의 절멸을 다룬다. 특히 "밧줄의 날"(Day of the Rope영어)이라는 장면에서는 로스앤젤레스의 공공 거리에서 많은 "인종 배신자"(특히 유대인과 인종 간 결혼 관계에 있는 자들)가 대량으로 교수형에 처해지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며, 이후 도시 전체, 나아가 전 세계의 체계적인 인종 청소가 이어진다. 이러한 폭력과 살인은 작중에서 "끔찍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묘사된다. 이야기는 비밀 조직인 "질서"(The Order영어, 재편성된 SS)가 이끄는 백인 혁명 지하 저항 조직 "조직"(The Organization영어)의 활동적인 구성원인 얼 터너(Earl Turner영어)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맥베이 사건과 가장 관련이 깊은 부분은 초반부에 주인공이 FBI 본부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는 장면이다. 작중 폭파와 1995년 4월 19일 앨프리드 P. 뮤라 연방 건물을 파괴하고 168명을 살해한 실제 오클라호마 시티 폭탄 테러 사이의 유사성이 지적되었다. 맥베이가 그날 체포되었을 때, 그의 차에서 이 책의 여러 페이지가 발견되었는데,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든 공격의 진정한 가치는 즉각적인 사상자가 아니라 심리적 영향에 있다"와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찾아 죽일 수 있다"와 같은 문구들이 강조되어 있었다.
『터너의 일기』는 또한 1980년대 초 스스로를 침묵의 형제단(Silent Brotherhood영어) 또는 단순히 더 오더라고 부른 백인 혁명 민족주의자 집단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더 오더는 아리안 네이션스의 파생 단체로, 단순히 "안락의자 혁명가"로 머무는 것에 지쳐있었다. 더 오더는 위조 및 은행 강도를 포함한 수많은 범죄와 연루되었으며, 민족 동맹에 자금을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더 오더의 지도자 로버트 제이 매튜스는 워싱턴주 휘드비섬에서 경찰과 연방 요원들과의 대치 중 경찰이 그의 은신처에 조명탄을 발사하여 화재가 발생하자 사망했다. 데이비드 레인을 포함한 다른 더 오더 구성원들은 체포되어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6년 피어스는 『터너의 일기』의 판권을 유대인 출판업자 라일 스튜어트에게 판매했다.
1996년 5월 19일, 피어스는 CBS의 『60분』(60 Minutes영어)에 출연하여 마이크 월리스로부터 오클라호마 시티 폭탄 테러를 승인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여러 번 말했지만, 오클라호마 시티 폭탄 테러를 승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아직 혁명적 상황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1년 전 『워싱턴 포스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오클라호마 시티 폭탄 테러는 정치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테러는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언젠가는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계획에 따라 조직된 진정한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4.2. 소설 『헌터』
1989년, 피어스는 다시 앤드루 맥도널드라는 필명으로 또 다른 소설 『헌터』(Hunter영어)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인 오스카 예거(Oscar Yeager영어)라는 남자가 여러 인종 간 커플을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이어서 워싱턴 D.C. 지역의 진보적인 언론인, 정치인, 관료들을 암살한다. 인터뷰에서 피어스는 『헌터』가 『터너의 일기』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으며, 이 소설을 쓴 이유를 독자들에게 "교육적 과정"을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헌터』의 내용은 여러 백인 우월주의 및 네오나치 단체에 소속되었던 연쇄 살인범 조지프 프랭클린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3. 주요 사상 및 신념
피어스의 사상은 백인 우월주의, 인종 분리, 반유대주의, 홀로코스트 부정, 반세계화 등 극단적인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체계적으로 포함한다. 그는 백인 인종이 생존하려면 백인들만의 생활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미국에 백인들만이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많은 저작물과 독일에서 시행된 프로그램 및 정책들을 존경했지만, 맹목적으로 다른 이의 정책을 모방하지 않고 미국이 직면한 상황에 맞춰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수립했다고 말했다.
피어스는 사회 진화론적 관점에서 적자생존에 의해 계층 사회가 자연의 본질적 원칙으로 형성된다고 믿었다. 그는 백인 인종이 인류 진화의 정점에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다른 모든 인종과 분리되어야 하고 지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에 따라 그는 유럽과 북미에서 인종 청소, 즉 대규모 추방을 포함한 사회정치적 계획의 실행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5. 종교 및 철학 (코스모테이즘)
1970년대에 피어스는 독일 낭만주의, 다윈의 자연 선택 개념, 그리고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인간과 초인』에 대한 피어스 자신의 해석을 혼합한 종교 철학인 코스모테이즘을 채택했다. 명예훼손방지연맹과 남부빈곤법률센터는 모두 피어스가 이전에 실패했던 민족 동맹의 세금 면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코스모테이즘을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남부빈곤법률센터는 이를 "가짜 종교"라고 지칭했다.
코스모테이즘은 범재신론의 일종으로 간주되며, 그 교리 중 한 구절은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은 모든 것 안에 있다"고 명시한다. 피어스가 제창한 코스모테이즘에서는 현실의 본질을 바탕으로 존재를 변화시켜 완전한 "보편적 의식" 또는 신성(godhood영어)을 향해 함께 진화해야 한다고 본다. 코스모스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를 의미하며, 즉 신성한 것은 완전한 시스템의 불가분의 부분인 의식과 현실과 함께 존재한다고 이해된다.
『우리의 대의』(Our Cause영어)라는 연설에서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은 여러분이 제가 여기서 설명한 단순하지만 위대한 진리에 대한 헌신을 우리와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창조주의 창조물 전체의 일부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신의 목적, 인류의 목적, 그리고 모든 창조물의 목적이 창조주의 목적임을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즉, 우리의 삶의 룬 문자로 상징되는 창조의 길, 우리의 삶의 길은 끝없는 상승이며, 이 길은 창조주의 자기 실현을 향해 끊임없이 위로 뻗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르는 자들의 운명은 신성입니다."
피어스는 "이전보다 훨씬 높은 자기 의식 상태가 우주의 진화를 가져온다"는 사상을 범재신론에 통합하여 코스모테이즘을 창조했다. 그의 정치 사상은 백인을 최초의 초인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인종적 순수성과 우생학을 중심으로 했으며, 나중에 코스모테이즘에 기반한 개별 신성에 대한 사상이 추가되었다. 피어스는 또한 계층 사회가 자연의 본질적인 원칙인 적자생존에 의해 형성된다고 믿었으며, 인류 진화의 정점에 있어야 할 백인들은 다른 모든 인종과 분리되어야 하고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사상에 따라 그는 유럽과 북미에서 인종 청소, 즉 대규모 추방을 포함한 사회정치적 계획의 실행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2001년, 피어스는 당시 민족 동맹의 최고 직원이었던 빌리 로퍼의 코스모테이스트 결혼식을 주례하기도 했다.
6. 개인 생활
윌리엄 루터 피어스는 다섯 차례 결혼했으며, 그의 가족 관계는 특히 아들의 폭로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6.1. 결혼 및 자녀
피어스는 평생 다섯 번 결혼했다. 그의 첫 결혼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재학 중 만난 수학자 패트리샤 존스(Patricia Jones영어)와였다. 그들은 1957년에 결혼하여 1960년에 쌍둥이 아들 켈빈(Kelvin영어)과 에릭(Erik영어)을 낳았다. 켈빈은 항공우주 엔지니어가 되었고, 에릭은 컴퓨터 과학자가 되었다.
패트리샤 존스와의 첫 결혼은 1982년에 이혼으로 끝났다. 같은 해, 피어스는 알링턴에 있는 민족 동맹 사무실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프로스텔(Elizabeth Prostel영어)과 재혼했다. 이 결혼은 1985년에 끝났고, 피어스는 본부를 웨스트버지니아주 남부로 옮겼다. 그는 동유럽 출신 이민자 여성을 선호했으며, 1986년에는 헝가리 여성 올가 스케르레츠(Olga Skerlecz영어)와 결혼했다. 그녀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총독을 지낸 이반 스케르레츠의 친척이었다. 이 결혼은 1990년까지 지속되었고, 올가는 이혼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피어스는 1991년 초에 또 다른 헝가리 여성인 주자나(Zsuzsannah영어)와 결혼했다. 그들은 피어스가 헝가리 여성 잡지에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광고를 낸 것을 통해 만났다. 주자나는 1996년 여름에 그를 떠나 플로리다로 이주했다. 1997년에 한 그의 마지막 결혼은 "이레나"(Irena영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또 다른 헝가리 여성과였으며, 이 결혼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레나와 피어스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그는 "날카롭고 거만"하여 이레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6.2. 가족 관계 및 논란
켈빈 피어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정서적, 신체적으로 학대적이었다고 한다. 2020년, 켈빈은 『내 아버지의 죄: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백인 우월주의자와 함께 자라다』(Sins of My Father: Growing Up with America's Most Dangerous White Supremacist영어)를 공동 저술하여 아버지와의 경험을 기록했다. 한편, 피어스는 198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샴고양이 해들리(Hadley영어)를 키웠다.
7. 사망
윌리엄 루터 피어스는 2002년 7월 23일 웨스트버지니아주 힐스보로에 있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3주 전 암이 온몸에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민족 동맹은 연간 100.00 만 USD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1,500명 이상의 회원과 17명의 상근 직원을 두고 있었으며,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시기였다. 그러나 피어스의 사망 이후 조직은 내부 갈등과 쇠퇴기를 맞았다.
8. 평가 및 영향
윌리엄 루터 피어스의 활동과 사상은 백인 우월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사회 전반의 비판과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8.1. 백인 우월주의 운동에 미친 영향
윌리엄 루터 피어스는 30년 이상 미국 백인 민족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 『터너의 일기』와 『헌터』(Hunter영어)는 미국 네오나치들에게 "성경"으로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터너의 일기』는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의 주범인 티머시 맥베이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1980년대 초 백인 혁명 민족주의자 집단인 더 오더(The Order영어)의 결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오더는 위조 및 은행 강도 등 여러 범죄에 연루되기도 했다.
피어스는 자신이 네오나치라는 꼬리표를 개인적으로 거부했지만, 언론에서는 그를 자주 네오나치로 묘사했다. 『60분』 인터뷰에서 마이크 월리스가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피어스는 그 용어를 비방이라고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아돌프 히틀러가 쓴 많은 것, 그가 독일에서 시행한 많은 프로그램과 정책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미국에서 직면한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만의 프로그램을 수립했습니다."
그의 저작물과 연설 비디오는 여전히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백인 우월주의 운동의 지속적인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8.2. 비판 및 논란
피어스의 활동과 이념은 사회 전반에서 강한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인권 침해, 테러리즘, 증오범죄와의 연관성 때문에 비난받았다. 명예훼손방지연맹과 남부빈곤법률센터는 그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비판했다. 그의 소설 『터너의 일기』가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와 같은 실제 폭력 사건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는 점은 그의 사상이 사회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9. 작품 목록
윌리엄 루터 피어스 명의
- 『우리는 누구인가』(Who We Are영어) (2012년)
- 『코스모테이즘: 인간에서 초인으로의 신성한 아리안 의식』(Cosmotheism: Divine Aryan Consciousness from Man to Super-Man영어) (2013년, 프레드 스트리드, 케빈 앨프리드 스트롬 공저)
앤드루 맥도널드 명의
- 『터너의 일기』(The Turner Diaries영어) (1978년)
- 『헌터』(Hunter영어) (1984년)
만화책 각본
- 『신세계 질서 코믹스 #1: 백인 윌의 사가!!』(New World Order Comix #1: The Saga of White Will!!영어) (1993년, 각본: 피어스, 삽화: 대니얼 "립" 라우시, 채색: 윌리엄 화이트 윌리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