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올레흐 랴슈코는 1972년 12월 3일 체르니히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두 살 때 헤어졌고, 어머니는 그를 고아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랴슈코는 야블루니우스카, 코마로우스카, 보르즈니안스카 등 세 곳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는 프로그레스 집단 농장에서 목동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부터 1988년 여름 동안 목동으로 일하며 여름마다 루블로 최대 300 RUB를 벌었다고 밝혔다. 중등 교육을 마친 후에는 대학에서 트랙터 운전 기술을 공부했다. 1998년에는 흐리호리 스코보로다 하르키우 국립 교육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2. 언론인 경력
정치에 입문하기 전, 랴슈코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키이우에 본사를 둔 신문사 '영 가드'의 특파원 겸 편집장을 지냈다. 1992년에는 우크라이나 대외경제관계부의 '커머스 헤럴드' 편집자가 되었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신문 '폴리티카'와 '프라우다 우크라이나'의 편집자로 근무했다. 1996년 8월에는 '폴리티카'의 편집장이 되었으나, 1999년 이 신문은 "국가 기밀 누설"을 이유로 키이우 모스크바 지방법원의 결정에 따라 폐간되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는 '프리덤' 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2. 정치 경력

랴슈코의 정치 경력은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의회 활동과 정당 리더십을 포함한다.
2.1. 의회 활동
랴슈코는 2006년 총선에서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소속으로 최고 라다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의회 규정, 윤리 및 의회 유지에 관한 의회 위원회 조직 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7년 총선에서도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소속으로 재선되었고, 의회 예산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2010년 10월 18일, 그는 "다수 연합과의 협력"을 이유로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에서 제명되었다. 2012년 총선에서는 체르니히우주 제208 단일 선거구에서 급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55.57%의 득표율로 최고 라다에 재선되었다. 이 임기 동안 그는 의회 재정 및 은행 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의회 내 어떤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2012년 11월 중순, 랴슈코는 율리야 티모셴코의 투옥에 대한 연대와 2012년 총선 결과 인정을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당시, 그는 "러시아 합류를 위한 분리주의 집회" 참가자와 군인 및 군사 장비 이동을 방해하는 자들을 사보타주범 및 점령군 공범으로 분류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군사적 침략" 시 이들에게 사형을 적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러시아와의 비자 제도 도입, 러시아와의 협정 파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및 지역당 금지, 유럽 연합에 러시아 여권을 소지한 크림 주민의 입국 금지 등을 요구했다.
2.2. 정당 활동 및 리더십
2011년 8월 8일, 랴슈코는 제3차 당 대회에서 우크라이나 급진 민주당의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당은 이름을 올레흐 랴슈코의 급진당으로 변경했다. 이 당은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2.3. 주요 선거 출마
랴슈코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선거에 여러 차례 출마하며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시험했다.
2.3.1. 대통령 선거
랴슈코는 201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급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8.32%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 그는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5.48%의 득표율로 7위에 그쳤다.

2.3.2. 총선 및 지방선거
2014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랴슈코는 자신이 이끄는 급진당을 22석으로 이끌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한 2014년 키이우 시의회 선거에서 당 명단을 이끌어 당이 3석을 얻는 데 기여했지만, 시의회 의원직을 맡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2019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는 급진당이 5%의 선거 문턱을 넘지 못하고 약 1%의 득표율에 그치면서 모든 의석을 잃었고, 랴슈코 자신도 의원직을 상실했다. 2020년 10월 25일, 2020년 우크라이나 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최고 라다 추가 선거(체르니히우)에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31.78%의 득표율을 얻었지만, 경쟁자인 국민의 종 소속 아나톨리 훈코가 34.10%로 승리했다.
3. 사상 및 이념
랴슈코는 강력한 반분리주의 및 반러시아 입장을 표명해왔다.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는 러시아 합류를 지지하는 분리주의자들에게 사형을 적용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한 러시아와의 비자 제도 도입, 러시아와의 협정 파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및 지역당 금지를 주장했다.
4. 개인사 및 논란
랴슈코의 사생활과 경력은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4.1. 과거 범죄 기록
1993년 6월 21일, 랴슈코는 거액의 공금 횡령 혐의로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1994년 12월 9일, 키이우 시 법원 형사부는 랴슈코가 개인적으로 130.00 만 RUB, 공범들과 함께 110.00 만 RUB를 횡령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6년의 징역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4년으로 감형되었다. 랴슈코는 1995년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 50주년" 사면 협정에 따라 5월에 석방되었다. 1998년에는 그의 형사 사건 기록이 삭제되었다. 랴슈코 본인은 이 사건이 자신의 비판적인 언론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무부 차관 베니아민 바르타셰비치가 사건을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4.2. 사생활 관련 논란
랴슈코는 오랫동안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시달렸으며, 그는 이를 강력히 부인해왔다. 2010년 10월 초, 1993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출되었는데, 이 영상에는 랴슈코와 비슷하게 생긴 젊은 남성이 고위 공직자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상이 유출된 다음 날, 랴슈코는 정치적 반대자들이 "현대 기술"을 이용해 영상을 조작했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나는 전통적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 10월 한 인터뷰에서는 기자가 랴슈코가 의회에서 성소수자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는 친구의 말을 전하자, 랴슈코는 카메라 앞에서 그 친구의 얼굴을 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5월에는 성소수자에 대해 아무런 반감도 없다고 강조했으며, 2015년 9월 인터뷰에서는 성소수자가 되는 것은 "각 개인의 선택이며, 비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랴슈코는 2018년 6월, 20년간 동거해온 로지타 사이라넨과 결혼하여 관계를 공식화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블라디슬라바라는 딸이 있다.
5. 사회적 평가 및 비판
랴슈코의 행동, 정책, 이념은 사회적으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을 받았다.
5.1. 인권 및 시민 자유 관련 비판
2014년 친러시아 분쟁 당시, 랴슈코는 2014년 5월 25일 대통령 선거 이틀 전, 토레즈의 지방 정부 건물을 습격하여 친러시아 분리주의자 한 명을 살해하고 다른 한 명에게 중상을 입힌 것에 대해 자신이 이끄는 "랴슈코 대대 '우크라이나'"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와 국제앰네스티는 랴슈코 대대 '우크라이나'의 활동과 동부 우크라이나에서의 랴슈코의 행동을 비난했다. 국제앰네스티는 "분쟁 양측에 의해 자행된 학대"를 언급하면서, 랴슈코를 "특히 문제가 많은 의원"으로 지목하며 자신의 행동 영상을 웹사이트에 공개했다고 지적했다. 랴슈코는 자신의 행동이 시민 체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제앰네스티가 "명백히 편향적"이라고 비난했다.
5.2. 정치적 관계 및 의혹
랴슈코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재벌인 리나트 아흐메토프와의 관계에 대한 의혹을 받았다. 2013년 랴슈코는 아흐메토프를 우크라이나 독립의 보증인이라고 묘사했다. 2016년 자유유럽방송의 특별 조사에서는 올레흐 랴슈코와 리나트 아흐메토프 간의 비밀 회동 사실이 기록되었다. 2018년 2월, 아흐메토프 소유의 메트인베스트 그룹에 속한 마리우폴 공장의 전 이사 유리 진첸코가 올레흐 랴슈코의 급진당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18년 5월 9일,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의 기자 올렉시 브라투슈차크는 "랴슈코가 아흐메토프의 부적이 되다"라는 블로그를 통해 랴슈코가 아흐메토프와 협력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비난했다. 랴슈코는 아흐메토프 소유의 TV 채널 '우크라이나' 방송에 자주 출연했으며, 미디어 전문가 나탈리아 리하초바는 "우리의 모니터링에 따르면, 랴슈코가 어떤 이유로든 거기에 나타나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발발 이후, 랴슈코는 공개 성명에서 아흐메토프에 대해 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6. 군 복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올레흐 랴슈코는 우크라이나군에 자원입대하여 복무 중이다. 2022년 10월 초, 그는 자신이 우크라이나군에 입대 선서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상을 게시했다. 이후 그는 군복을 입은 사진과 자신의 군 복무에 대한 정보를 소셜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7. 영향력 및 평가
올레흐 랴슈코는 우크라이나 정치계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반러시아적 입장을 표명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 동부 우크라이나 분쟁 초기에는 군사적 행동을 주도하며 강경파 이미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인권 단체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과거 범죄 기록과 사생활 논란은 그의 정치적 신뢰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재벌과의 유착 의혹은 그가 대중을 위한 정치인이기보다는 기득권과 연계된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게 했다. 랴슈코는 대중적인 이미지와 선동적인 언변으로 한때 높은 지지율을 얻었으나, 결국 의원직을 상실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러시아 침공 이후 군 복무에 나선 것은 그의 이미지를 일부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나, 그의 복잡한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