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Étienne 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 Étienne 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프랑스어; 1727년 10월 9일 ~ 1794년 2월 19일)은 18세기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정치가로, 루이 16세 시대에 프랑스의 수석 대신과 재정 총감을 역임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직전의 격동기에서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나면서 혁명의 도래에 기여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초년 및 성직자 경력
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은 명망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뛰어난 학업 능력과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초기 성직자 경력을 쌓았다.
2.1. 가문과 교육
파리에서 태어난 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은 15세기부터 리무쟁 지역(현재 누벨아키텐의 일부)의 리모주에서 약 20 km 떨어진 플라비냐크에서 유래한 로메니 가문의 후손이다. 로메니 드 브리엔 가문은 로메니 가문의 하급 분파로, 수세기 동안 프랑스 왕실 궁정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 1552년 앙리 2세 국왕의 비서가 된 마르시알 드 로메니가 귀족 작위를 얻으면서 가문이 귀족화되었고, 이후 1561년부터 1571년까지 베르사유 영지를 획득했다. 1623년 앙리-오귀스트 드 로메니, 브리엔 백작의 유리한 결혼을 통해 로메니 가문은 브리엔 백작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들은 루이 14세 시대에는 외교 분야에서, 앙시앵 레짐 말기에는 전쟁부에서 중요한 정부 요직을 계속 역임했다. 샤를-프랑수아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은 쿠탕스 주교(1668년~1720년)였으며, 그의 입양 사촌인 피에르-프랑수아-마르시알 드 로메니는 잠시 상스 대주교의 대리 주교(1789년~1794년)를 지냈다.
유능한 학생이었던 에티엔 샤를은 고위직에 오르기 위한 길로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1751년 그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그의 논문에 대한 정통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루앙 대주교 니콜라 드 소-타반 추기경의 대리 주교(grand vicaire프랑스어)로 임명되었다.
2.2. 초기 교회 활동 및 사회적 관계
로마를 방문한 후, 1760년 12월 19일 콘돔 주교로 임명되었고, 1763년 3월 21일에는 툴루즈 대주교로 전임되었다. 1766년부터 1769년까지는 몽생미셸 수도원의 명예 수도원장이었으며, 1788년부터는 코르비 수도원의 명예 수도원장을 지냈다. 1772년에는 쇠퇴하는 종교 시설을 폐쇄하기 위해 설립된 종교 위원회(Commission des Réguliers)의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유명한 친구들 중에는 튀르고, 앙드레 모렐레, 볼테르 등이 있었으며, 1770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직자 총회에서 세 차례나 사법국(bureau de jurisdiction)의 수장을 지녔다. 또한 그는 당시의 정치 및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빈곤 문제에 대한 회고록을 포함하여 이 주제들에 대해 튀르고에게 여러 편의 회고록을 보냈다.
일부에서는 이 주장을 반박하지만, 로메니 드 브리엔은 처음부터 불신자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781년 파리 대주교 크리스토프 드 보몽이 사망했을 때, 로메니 드 브리엔을 그의 후임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루이 16세는 이를 거부하며 "파리 대주교라면 적어도 신을 믿어야 한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3. 정치 경력
로메니 드 브리엔의 정치 경력은 앙시앵 레짐 말기의 심각한 재정 위기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재정 개혁 시도는 프랑스 혁명 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1. 명사회에서의 역할
1787년 명사회에서 로메니 드 브리엔은 당시 재정 총감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재정 정책에 반대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칼론의 개혁안은 특권 계층의 반대에 부딪혔고, 브리엔은 명사회 의장으로서 이러한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의 친밀한 관계와 더불어, 1787년 5월 25일 명사회의 심의 과정에서 칼론의 후임으로 수석 대신에 임명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루이 16세의 핵심 관료가 되어 프랑스의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중책을 맡게 되었다.
3.2. 재정 총감
권력을 잡은 로메니 드 브리엔은 국내의 자유 무역, 지방 의회 설립, 부역 폐지 등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 법령들을 추진했다. 특히 부역 폐지는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가장 시급했던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인지세와 새로운 일반 토지세 도입에 관한 법령들을 파리 고등법원(parlement)이 등록을 거부하면서 심각한 갈등에 직면했다.
파리 고등법원의 지속적인 반대에 직면하자, 브리엔은 루이 16세를 설득하여 1787년 8월 6일 리 드 쥐스티스(lit de justice)를 개최하여 법령 등록을 강제 집행하게 했다. 하지만 고등법원은 여전히 반발했고, 1787년 8월 18일 루이 16세는 고등법원 의원들을 트루아로 추방하여 저항을 무력화하려 했다. 고등법원이 모든 종류의 수입에 대한 직접세 연장에 동의하자, 의원들은 파리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1억 2천만 리브르의 공채 발행 법령을 강제로 등록시키려는 시도는 또다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재정 개혁 시도의 실패는 1788년 5월 8일 고등법원이 자체 폐지 법령에 동의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이는 국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은 동의였다. 1788년 5월이 되자 세금 징수 절차에 결함이 발생하고 군대의 충성심이 약화되었다. 그 결과, 루이 16세는 1788년 5월에 고등법원을 정지시키고 47개의 법원을 신설했다.
3.3. 사임
이러한 상황에서 로메니 드 브리엔은 거의 전면적인 정치적 반대에 직면했다. 그는 고등법원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쿠르 플레니에'(Cour plenière)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삼부회 소집을 약속해야 했다. 1788년 3월 10일 로마에 의해 상스 대주교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양보조차도 그를 권좌에 유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고는 텅 비었고, 1788년 8월 25일 그는 결국 재정 총감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사임 직후인 1788년 9월 14일, 대중에게 혐오받던 기욤-크레티앙 드 라무아뇽 드 말제르브가 다시 소환되었고, 이는 파리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폭도들은 라무아뇽과 브리엔의 집을 불태우려 시도했다.
4. 프랑스 혁명과 죽음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변기에 로메니 드 브리엔은 파란만장한 행적을 보였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4.1. 추기경 임명과 귀국
재정 총감 직에서 사임한 직후인 1788년 12월 15일, 그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2년간 체류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요청에 따라 그의 입양 조카인 피에르-프랑수아-마르시알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이 상스 교구의 대리 주교로 임명되었고, 에티엔 샤를은 그를 직접 서품했다. 그러나 이 조카는 나중에 삼촌을 따라 성직자 민사 기본법에 서약했으나, 자신의 서약에 회개한 후 1794년 5월 10일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에티엔 샤를은 프랑스로 귀국했다.
4.2. 성직자 민사 기본법 서약
혁명 발발 이후, 1790년 에티엔 샤를은 성직자 민사 기본법(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에 서약한 몇 안 되는 앙시앵 레짐 시대의 주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또한 많은 사제들에게도 같은 서약을 할 것을 장려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욘 데파르트망의 헌법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보는 교황 피우스 6세에 의해 비난받았고, 1791년 교황의 강압으로 그는 추기경직을 박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진 사임했다.
4.3. 말년과 최후
상스 시내에 위치했던 옛 생 피에르 르 비프 수도원을 사들인 그는 웅장했던 교회를 철거하고 수도원장의 집에 가족들과 함께 머물렀다. 그는 인기를 얻는 재주가 있었고, 지역 주민 중 일부는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헌법 교회의 시대도 곧 막을 내렸다. 그는 헌법 주교를 서품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혁명의 절정기였던 1793년 11월 15일에는 사제직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거와 현재의 행적은 당시의 유력한 혁명가들에게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794년 2월 18일 상스에서 체포되었고, 바로 그날 밤인 1794년 2월 19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뇌졸중이나 독살설이 제기되었고, 일부에서는 자살이라고도 했으나, 그의 허세와 필사적인 생존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충격만으로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5. 저작
로메니 드 브리엔이 생전에 발표한 주요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 도팽의 장례식 연설(Oraison funébre du Dauphin) (파리, 1766년)
- 국왕에게 드리는 보고서(Compte-rendu au roi) (파리, 1788년)
- 화해자(Le Conciliateur), 튀르고와의 공동 저작 (로마, 파리, 1754년)
6. 유산과 평가
에티엔 샤를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의 생애와 정치적 행보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변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며, 그의 정책과 결정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된다.
6.1. 역사적 맥락과 영향
로메니 드 브리엔은 앙시앵 레짐 말기와 프랑스 혁명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프랑스의 재정 위기를 심화시키고 혁명의 도래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고등법원과의 격렬한 대립을 통해 루이 16세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결국 삼부회 소집이라는 전례 없는 조치를 불러오게 했다. 이는 특권 계층의 저항을 넘어 전 사회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재정 총감으로서의 실패는 프랑스의 국가 부채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국고는 텅 비었고, 이는 국민들의 불신을 증폭시켜 혁명의 불가피성을 더욱 명확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2. 비판과 논란
로메니 드 브리엔은 그의 재정 총감으로서의 정책, 특히 무리한 세금 도입 시도로 인해 광범위한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특권 계층의 저항을 무마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등법원과의 충돌을 통해 국왕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또한, 성직자로서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신론적 성향을 가졌다는 의혹은 당시 사회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루이 16세가 그를 파리 대주교로 임명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성직자 민사 기본법에 서약하고 헌법 주교로 선출된 그의 행보는 교황청으로부터의 파문과 추기경직 사임을 초래했다. 이후 공포정치 시기에는 사제직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거 행적은 의심을 샀고,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서 의문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앙시앵 레짐의 붕괴와 혁명의 격랑 속에서 개인의 정치적 판단과 신념이 어떻게 좌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