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경력 시작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는 1935년 6월 11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클럽은 아틀란티다 SC였고, 키는 174 cm에 몸무게는 77 kg이었다. 이후 그는 클루브 리베르타드에 입단하여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5년, 마르티네스는 클루브 리베르타드를 파라과이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약은 그가 FC 바르셀로나의 관심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클럽 경력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는 여러 클럽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득점력을 과시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FC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기간이었으며, 이후 스페인 다른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2.1. FC 바르셀로나 시절
1956년, 마르티네스는 클루브 리베르타드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FC 바르셀로나에 영입되었다. 그는 곧바로 팀의 핵심 공격수로 자리 잡으며 1956-57, 1957-58, 1959-60 시즌 동안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두 차례의 스페인 리그 우승, 두 차례의 코파 델 레이 우승, 그리고 두 차례의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을 경험하며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마르티네스는 캄 노우 경기장의 역사적인 첫 골을 기록하며 FC 바르셀로나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 골은 1957년 9월 24일, 캄 노우 개장을 기념하는 폴란드 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전반 11분에 터져 나왔으며, 바르셀로나는 이 경기에서 4-2로 승리했다.
그의 또 다른 인상적인 업적은 1957년 5월 1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코파 델 레이 경기에서 한 경기 7골을 기록하여 팀의 8-1 대승을 이끌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교체 투입된 지 15분 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FC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은 상대 수비진을 뚫고 득점을 올리는 그의 모습에 "Abrelatas" (캔따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총 162번의 공식 경기에서 111골을 기록했으며, 다른 출처에서는 225경기 168골로 보고되기도 한다.

2.2. 이후 클럽 경력
과체중으로 인해 기량이 저하되기 시작하면서, 에울로히오 마르티네스는 1962년에 FC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이후 그는 엘체 CF,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그리고 CE 에우로파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시절만큼의 큰 성공이나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1964-65 시즌 스페인 컵 우승을 한 차례 더 추가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는 파라과이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경력 동안 두 국가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그는 파라과이와 스페인을 모두 대표했으며, 카탈루냐 대표팀에서도 한 차례 뛰었다.
파라과이 국가대표팀에서는 9번의 출장과 4골을 기록했다. 1959년에 스페인으로 귀화한 후에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일원이 되어 8번의 출장과 6골을 기록했다. 그는 특히 1962년 FIFA 월드컵에 스페인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월드컵 조별 리그 첫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전(0-1 패배)에 출전한 후, 아쉽게도 이후 경기에서는 제외되었다.
3.1.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가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 기록한 6골은 다음과 같다.
| # | 날짜 | 경기장 | 상대 | 점수 | 결과 | 대회 |
|---|---|---|---|---|---|---|
| 1. | 1959년 11월 22일 | 스페인 발렌시아 메스타야 | 오스트리아 | 4-1 | 6-3 | 친선경기 |
| 2. | 1959년 12월 17일 | 프랑스 파리 파르크 데 프랭스 | 프랑스 | 4-2 | 4-3 | 친선경기 |
| 3. | 1960년 3월 13일 | 스페인 바르셀로나 캄 노우 | 이탈리아 | 3-1 | 3-1 | 친선경기 |
| 4. | 1960년 5월 15일 | 스페인 마드리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 잉글랜드 | 2-0 | 3-0 | 친선경기 |
| 5. | 1960년 5월 15일 | 스페인 마드리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 잉글랜드 | 3-0 | 3-0 | 친선경기 |
| 6. | 1960년 7월 14일 | 칠레 산티아고 국립 경기장 | 칠레 | 0-4 | 0-4 | 친선경기 |
4. 플레이 스타일 및 혁신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는 공격수로서 뛰어난 마무리 능력을 지녔으며,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을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마르티네스 턴"으로 불리는 독특한 기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이 기술은 공을 소유한 채 몸을 회전하여 상대 수비를 따돌리는 동작으로, 1959-60 시즌 유러피언컵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의 8강전 경기에서도 이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이 기술은 훗날 요한 크라위프가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선보인 "크루이프 턴"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크라위프가 이 기술을 선보였을 당시 바르셀로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네스는 적어도 14년 먼저 이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인정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공헌은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르티네스 턴은 현대 축구의 중요한 개인 기술 중 하나로, 그의 선구적인 역할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5. 수상 경력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는 그의 클럽 경력 동안 여러 중요한 타이틀을 획득했다.
- 클루브 리베르타드**
- 파라과이 리그: 1955
- FC 바르셀로나**
-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1955-58, 1958-60
- 스페인 리그: 1958-59, 1959-60
- 스페인 컵: 1956-57, 1958-59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스페인 컵: 1964-65
6. 경력 통계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의 프로 클럽 리그 및 스페인 국가대표팀 통계는 다음과 같다.
| 클럽 기록 | 리그 | |||
|---|---|---|---|---|
| 시즌 | 클럽 | 리그 | 출장 | 득점 |
| 스페인 | 리그 | |||
| 1956-57 | 바르셀로나 | 라리가 | 23 | 9 |
| 1957-58 | 19 | 10 | ||
| 1958-59 | 16 | 7 | ||
| 1959-60 | 24 | 23 | ||
| 1960-61 | 13 | 4 | ||
| 1961-62 | 16 | 9 | ||
| 바르셀로나 합계 | 111 | 62 | ||
| 1962-63 | 엘체 | 라리가 | 28 | 6 |
| 1963-64 | 11 | 1 | ||
| 1964-65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라리가 | 2 | 0 |
| 1965-66 | CE 에우로파 | 세군다 | 10 | 3 |
| 총 클럽 경력 합계 | 164 | 71 | ||
7. 말년과 사망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는 1966년 프로 축구에서 은퇴한 후 카탈루냐 지방의 칼렐랴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의 삶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다. 1984년, 그는 차량 타이어를 교체하던 도중 지나가던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그는 23일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다, 결국 1984년 9월 30일 향년 49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8. 유산과 평가
에울로히오 라미로 마르티네스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FC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뛰어난 득점력과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캔따개"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캄 노우의 첫 골을 기록하고 한 경기 7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은 그의 공격수로서의 역량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그의 유산에 있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바로 "마르티네스 턴"이다. 그가 요한 크라위프보다 14년 일찍 유사한 기술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위프가 이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과 달리 마르티네스는 축구사에서 이 혁신적인 기술의 선구자로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그의 실제 업적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주며, 축구 기술의 기원과 그에 대한 공로 인정 방식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마르티네스는 비록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을지라도, 그의 기술적 선구성과 FC 바르셀로나에서의 눈부신 활약은 스페인 축구사에 분명히 기록될 중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