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포메라니아의 에리크(Erik of Pomerania에리크 오브 포메라니아영어), 덴마크어로는 Erik af Pommern에리크 아프 포메른덴마크어, 노르웨이어로는 Erik av Pommern에리크 아브 포메른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는 Erik av Pommern에리크 아브 포메른스웨덴어, 독일어로는 Erich von Pommern에리히 폰 포메른독일어, 폴란드어로는 Eryk Pomorski에리크 포모르스키폴란드어는 1381년 또는 1382년에 태어나 1459년 9월 24일에 사망한 인물로, 1396년부터 1439년까지 칼마르 동맹의 군주로 재위했다. 그는 1412년 외이종조모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와 공동 통치했다. 에리크는 노르웨이 국왕으로서는 에리크 3세(1389년-1442년), 덴마크 국왕으로서는 에리크 7세(1396년-1439년), 그리고 스웨덴 국왕으로서는 에리크 13세(1396년-1434년, 1436년-1439년)로 불렸다. '에리크 13세'라는 칭호는 후대에 스웨덴의 에리크 14세가 가상의 스웨덴 역사를 바탕으로 자신의 왕호 숫자를 정하면서 소급 적용된 것으로, 그 이전의 에리크라는 이름을 가진 스웨덴 군주가 몇 명이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최소 6명 이상). 그의 별칭인 '포메라니아의'는 그가 스칸디나비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에리크는 결국 칼마르 동맹의 세 왕국 모두에서 폐위되었으나, 1449년 포메라니아 공국의 한 분할 영지를 상속받아 사망할 때까지 공작으로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코펜하겐을 왕실 소유로 만들고 외레순 통행세를 도입하는 등 경제 및 군사적 업적을 남겼으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백작들과의 오랜 전쟁과 과도한 세금 부과로 인한 내부 반란으로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스웨덴의 엥엘브렉트 반란과 노르웨이의 반란은 그의 통치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독단적인 성격과 외교적 미숙함은 그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그의 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에리크는 마르그레테 1세에 의해 양육되고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노르웨이 왕위 계승을 준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에리크는 1381년 또는 1382년에 현재 폴란드 다르워보(Darłowo다르워보폴란드어, 당시 포메라니아의 뤼겐발데(Rügenwalde뤼겐발데독일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보구스와프(Bogusław보구스와프폴란드어)였으며, 포메라니아의 바르치스와프 7세 공작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아 공작부인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1363년-1402년)는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딸이자 마르그레테 1세의 언니인 덴마크의 잉에보르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하인리히 3세 공작의 딸이었다.
2.2. 교육 및 후계자 지명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왕국을 통치하던 그의 외이종조모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는 자신의 왕국이 통일되고 평화롭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사후를 대비했다. 그녀는 보구스와프를 자신의 상속인이자 후계자로 선택했다. 1389년, 보구스와프는 마르그레테 여왕에 의해 양육되기 위해 덴마크로 보내졌다. 그의 이름은 보다 북유럽적인 '에리크'로 변경되었다. 1389년 9월 8일, 그는 트론헤임의 팅에서 노르웨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1392년 오슬로에서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에리크의 아버지 바르치스와프는 1394년 11월에서 1395년 2월 23일 사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왕위는 상속인인 에리크에게 모두 계승되었다.
3. 칼마르 동맹과 즉위
에리크는 마르그레테 1세의 후계자로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왕위에 올랐으며, 이를 통해 칼마르 동맹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3.1. 노르웨이 국왕 즉위
1389년 9월 8일, 에리크는 트론헤임에서 열린 팅에서 노르웨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1392년에 오슬로에서 노르웨이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3.2. 덴마크 및 스웨덴 국왕 즉위
1396년, 에리크는 덴마크에서, 이어서 스웨덴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마르그레테 1세가 스웨덴 국왕 스웨덴의 알브렉트를 폐위시킨 후 에리크를 스웨덴 왕위에 앉히고 동시에 덴마크 왕위에도 앉힌 결과였다.
3.3. 칼마르 대관식
1397년 6월 17일, 에리크는 칼마르 대성당에서 세 북유럽 왕국의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동시에 동맹 조약이 초안되었고, 이는 오늘날 칼마르 동맹으로 알려진 연합의 설립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그레테 여왕은 1412년 사망할 때까지 세 왕국의 사실상의 통치자로 남아 있었다.
4. 통치 기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왕으로서 에리크는 다양한 정책과 사건들을 통해 통치했다.
4.1. 섭정 및 공동 통치
에리크의 통치 초기 기간 동안,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은 섭정으로서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에리크는 그녀의 공동 통치자였다. 1412년 마르그레테가 사망한 후, 에리크는 세 왕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4.2. 주요 정책 및 업적
에리크 국왕은 통치 초기에 1417년 코펜하겐을 왕실 소유로 만들며 덴마크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는 또한 로스킬레 주교로부터 코펜하겐 성의 권리를 빼앗아 그 이후로 성은 왕실의 소유가 되었다.
아마도 에리크의 가장 광범위한 업적은 1857년까지 지속될 외레순 통행세(Øresundtolden외레순톨덴덴마크어)를 1429년에 도입한 것이었다. 이 세금은 외레순 해협을 통해 발트해로 진입하거나 나가는 모든 선박에 부과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강제하기 위해 에리크는 1400년대 초 해협의 가장 좁은 지점에 강력한 요새인 크로겐(Krogen, 후일 크론보르 성)을 건설했다. 이는 외레순 해협을 통한 모든 항해를 통제하게 했고, 그의 왕국에 막대한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여 상대적으로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헬싱외르 마을을 번성하게 했다. 이는 덴마크의 무역 및 해군력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다른 발트해 세력, 특히 그가 전쟁을 벌였던 한자 동맹 도시들을 영구적으로 자극했다.
4.3. 외교 및 대외 관계
1402년, 마르그레테 여왕은 잉글랜드의 헨리 4세 국왕과 북유럽 연합과 잉글랜드 왕국 간의 동맹 가능성에 대해 협상했다. 제안은 에리크 국왕이 헨리 4세의 둘째 딸인 잉글랜드의 필리파와 결혼하고, 헨리 4세의 상속자인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에리크의 누이인 포메라니아의 카타르지나와 결혼하는 이중 결혼이었다. 이중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에리크와 잉글랜드의 필리파의 결혼은 성공적으로 협상되었다. 1406년 10월 26일, 그는 룬드에서 12세의 필리파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잉글랜드와의 순수 방어 동맹을 수반했다.

에리크의 단독 통치 기간 거의 전부는 홀슈타인-샤우엔부르크 백작들과의 오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마르그레테 여왕이 획득했던 남부 유틀란드 (슐레스비히)를 되찾으려 했으나, 협상 대신 전쟁 정책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정복 없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획득했던 남부 유틀란드 지역마저 상실하게 되는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이 전쟁 동안 그는 많은 에너지와 끈기를 보였지만, 동시에 현저한 미숙함을 드러냈다. 1424년,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국왕 지기스문트가 에리크를 남부 유틀란드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으나, 홀슈타인인들은 이를 무시했다. 이 긴 전쟁은 덴마크 경제뿐만 아니라 북유럽 연합의 통합에도 큰 부담을 주었다. 1426년부터 1435년까지 그는 덴마크-한자 동맹 전쟁 (1426년-1435년)을 벌였다. 1428년 한자 동맹과 홀슈타인인들이 코펜하겐을 공격했을 때, 에리크 국왕은 쇠뢰 수도원에 머물며 도시로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필리파 왕비가 수도 방어를 지휘했다.
4.4. 유럽 순방 및 성지 순례
에리크는 지적이고 비전이 있으며 활기찬 인물로 묘사된다. 1420년대의 대규모 유럽 순방을 통해 그는 매력적이고 언변이 뛰어난 세계인이라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부정적으로는 성미가 급하고 외교적 감각이 부족하며 고집이 세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래의 교황 비오 2세는 에리크를 "아름다운 몸, 붉은 황금빛 머리카락, 붉은 얼굴, 길고 좁은 목을 가졌으며... 도움 없이 혼자서, 등자에 발을 대지 않고도 말에 뛰어올랐고, 모든 여성들이 그에게 이끌렸으며, 특히 황후는 사랑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고 묘사했다.
1423년부터 1425년 5월까지 에리크는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곳에 도착한 후,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성지 관리인에 의해 성묘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어서 이반 안츠 프랑코판을 포함한 그의 순례 동료들에게도 직접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가 부재하는 동안, 필리파 왕비는 코펜하겐에서 세 왕국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4.5. 내부 반란 및 사회적 영향

1430년대에 들어서면서 에리크 국왕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섰다. 1434년, 스웨덴의 농민과 광부들이 국가적, 사회적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곧 스웨덴 귀족들이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엥엘브렉트 반란 (1434년-1436년)은 스웨덴 귀족 엥엘브렉트 엥엘브렉트손 (1390년경-1436년 5월 4일)이 주도했다. 스웨덴인들은 한자 동맹과의 전쟁(1426년-1435년)으로 인해 무역에 영향을 받고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메클렌부르크, 포메라니아로의 스웨덴 수출이 방해받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반란은 칼마르 동맹의 통합을 약화시켰고, 덴마크 군대가 스웨덴에서 일시적으로 추방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르웨이에서는 1436년에 아문 시구르손 볼트 (1400년-1465년)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오슬로와 아케르스후스 성을 포위하는 결과를 낳았으나, 결국 휴전으로 끝났다. 1438년에는 동부 노르웨이에서 할바르 그라토프가 이끄는 새로운 반란이 발생했지만, 이 반란 또한 진압되었다.
에리크는 홀슈타인인들과 한자 동맹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435년 4월, 그는 한자 동맹 및 홀슈타인과 보르딩보르그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평화 협정 조건에 따라 한자 도시들은 외레순 통행세에서 면제되었고, 슐레스비히 공국은 홀슈타인 백작에게 양도되었다.
5. 개인 생활
에리크의 사적인 삶은 결혼과 왕실 애인과의 관계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5.1. 결혼
1406년 10월 26일, 에리크는 잉글랜드의 필리파와 룬드에서 결혼했다. 필리파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잉글랜드와의 방어 동맹을 목적으로 했다.
5.2. 왕실 애인
1430년 필리파 왕비가 사망한 후, 에리크는 필리파의 전 시녀였던 세실리아를 자신의 왕실 애인으로 삼았고, 나중에는 귀천상혼 배우자가 되었다. 이 관계는 공개적인 스캔들이었으며, 왕실 평의회가 국왕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한 문서에도 언급될 정도로 비판을 받았다.
6. 폐위 및 말년

에리크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쿠데타로 폐위되었으며, 이후 포메라니아 공작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6.1. 폐위
덴마크 귀족들이 그의 통치에 반대하고, 그가 후계자로 지명한 포메라니아의 보구스와프 9세를 덴마크의 다음 왕으로 비준하기를 거부하자, 에리크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덴마크를 떠나 고틀란드의 비스보르그 성에 영구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439년 덴마크와 스웨덴의 국가 평의회에 의한 쿠데타로 그는 폐위되었다.
1440년, 에리크의 조카인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가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선택되어 그의 뒤를 이었다. 처음에는 노르웨이의 릭스라드(Riksråd릭스로드노르웨이어)가 에리크에게 충성을 유지하며 그가 노르웨이 국왕으로 남기를 원했다. 1439년 9월, 에리크는 시구르 욘손에게 국왕의 이름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하는 '드로트세테'(drottsete드로트세테노르웨이어) 직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국왕이 고틀란드에 고립되자 노르웨이 귀족들도 1440년 쿠데타를 통해 에리크를 폐위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1442년에 공식적으로 폐위되었으며, 시구르 욘손이 드로트세테 직위에서 물러나고 크리스토페르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1448년 크리스토페르 국왕이 사망하자, 다음 군주는 에리크의 친척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세 (에리크의 초기 경쟁자였던 올덴부르크의 디트리히 백작의 아들)가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고, 칼 크누트손 본데는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노르웨이 왕위를 놓고 칼과 크리스티안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고, 1450년 칼은 크리스티안 국왕에게 노르웨이 왕위를 포기해야 했다.
6.2. 포메라니아 공작

10년 동안 에리크는 고틀란드에 머물며 발트해 상업 무역에 대항하여 싸웠다. 1449년부터 1459년까지 에리크는 보구스와프 9세의 뒤를 이어 포메라니아 공작이 되었고, 포메라니아-스웁스크 공국의 작은 분할 영지인 포메라니아-뤼겐발데(Księstwo Słupskie크시엔스트보 스웁스키에폴란드어)를 "에리크 1세"로서 통치했다. 그는 1459년 다르워보 성에서 사망했으며, 포메라니아 다르워보의 성 마리아 교회에 안장되었다.
킬 시장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 국왕에게 에리크가 디드리크 피닝과 한스 포토르스트의 북서항로 탐험을 장려했다고 기록했다. 에리크 사망 후 그들의 항해는 그린란드에 도달하여 이누이트와 교전했다고 전해진다.
7. 작위 및 칭호
에리크의 전체 작위는 "덴마크, 스웨덴 및 노르웨이의 국왕, 벤드인과 고트인의 왕, 포메라니아 공작"이었다.
8. 가계도
| 발데마르 4세 | ||
|---|---|---|
| 보기스와프 5세 | 잉에보르 | 마르그레테 1세 |
| 보기스와프 8세 | 바르치스와프 7세 | 마리아 |
| 보기스와프 9세 | 포메라니아의 카타르지나 | 포메라니아의 에리크 |
| 크리스토페르 3세 (덴마크 국왕) |
9. 평가 및 영향
에리크의 통치, 정책, 그리고 북유럽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평가와 비판은 그의 통치가 연합의 안정성, 경제, 사회에 미친 긍정적 및 부정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9.1. 긍정적 평가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에리크는 지적이고, 비전이 있으며, 활기차고, 단호한 성격을 지녔다. 1420년대의 대규모 유럽 순방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는 매력적이고 언변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1429년 외레순 통행세를 도입한 것은 그의 가장 선견지명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 세금은 덴마크 왕국에 막대한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게 하여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었고, 헬싱외르의 번영에 기여했다. 이는 덴마크의 무역과 해군력 강화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9.2. 비판 및 논란
에리크의 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의 성격적 결함과 정책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성미가 급하고 외교적 감각이 부족하며 고집이 세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홀슈타인 백작들과의 오랜 분쟁에서 협상 대신 전쟁 정책을 고수하여 영토를 상실하고 덴마크 경제와 연합의 통합에 큰 부담을 주었다.
그의 통치 후반기인 1430년대에는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심각한 내부 반란에 직면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것은 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1434년 스웨덴에서 발생한 엥엘브렉트 반란과 1436년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아문 시구르손 볼트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반란은 그의 통치력 약화와 사회적 불만을 극명하게 드러냈으며, 결국 덴마크 군대가 스웨덴에서 일시적으로 추방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필리파 왕비 사후 세실리아와의 관계는 공개적인 스캔들로 비화되어 왕실 평의회의 공식적인 비난을 받았다. 귀족들의 반대와 후계자 지명 실패는 그의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보여주며, 이는 1439년 덴마크와 스웨덴, 그리고 1442년 노르웨이에서 그가 폐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의 별칭인 '포메라니아의'가 그가 스칸디나비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북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완전히 인정받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에리크의 통치가 연합의 안정성을 해치고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뒷받침한다.
10. 외부 링크
- [https://narratively.com/the-king-who-became-a-pirate/ 해적이 된 왕]
- [http://www.dokpro.uio.no/perl/middelalder/diplom_vise_tekst.prl?b=741&s=n&str= 노르웨이 외교 문서]
- [http://fmg.ac/Projects/MedLands/DENMARK.htm#ErichVIIdied1459 중세 토지에서의 에리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