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에디 톰슨은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열정을 보이며 프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 그는 탄광 노동자였던 부모님 아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재능을 갈고닦았다.
1.1. Childhood and education
톰슨은 1947년 2월 25일 스코틀랜드 미드 로디언의 로즈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화이트힐 웰페어 FC와 페니큐이크 애슬레틱 FC에서 유소년 축구를 경험하며 선수로서의 기본기를 다졌다. 그는 15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트위드 방직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2. Early career
1964년, 17세의 나이에 지역 클럽인 스코티시 풋볼 리그의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하츠)와 프로 계약을 맺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블레이저와 넥타이를 매고 고향인 로즈웰 마을을 걸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1966년, 하츠에서 토미 워커 감독의 발탁으로 하프백(미드필더)으로 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이듬해인 1967년에는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후 센터하프로 주로 플레이하며 득점보다는 팀의 수비를 굳건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Playing career
에디 톰슨은 선수 시절 여러 클럽을 거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국제 경기에서도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며 경험을 쌓았다.
2.1. Club career
톰슨은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에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162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특히 1967-68 시즌에는 스코티시컵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1973년, 6.00 만 GBP의 이적료로 애버딘 FC로 이적하여 세 시즌 동안 91경기에 출전, 1골을 기록했다.
1976년, 스코틀랜드를 떠나 북미 축구 리그(NASL)의 샌안토니오 선더로 이적하여 19경기에 출전해 3골을 넣었다. 1977년에는 호주로 건너가 신설된 내셔널 사커 리그(NSL)의 시드니 시티에 입단하여 수비수로서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80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며 팀의 NSL 우승을 다시 한번 이끌었다.
클럽 | 시즌 | 리그 | 내셔널컵 | 리그컵 | 유럽 대회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골 | 출전 | 골 | 출전 | 골 | 출전 | 골 | 출전 | 골 | ||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 1966-67 | 스코티시 디비전 원 | 9 | 0 | 0 | 0 | 0 | 0 | 0 | 0 | 9 | 0 |
1967-68 | 9 | 1 | 5 | 1 | 3 | 0 | 0 | 0 | 17 | 1 | ||
1968-69 | 34 | 0 | 2 | 0 | 6 | 0 | 0 | 0 | 42 | 0 | ||
1969-70 | 23 | 0 | 2 | 0 | 0 | 0 | 0 | 0 | 25 | 0 | ||
1970-71 | 34 | 0 | 1 | 0 | 6 | 0 | 0 | 0 | 41 | 0 | ||
1971-72 | 29 | 2 | 4 | 0 | 6 | 1 | 0 | 0 | 39 | 3 | ||
1972-73 | 24 | 1 | 2 | 0 | 0 | 0 | 0 | 0 | 26 | 1 | ||
총계 | 162 | 4 | 16 | 1 | 21 | 1 | 0 | 0 | 199 | 6 | ||
애버딘 | 1972-73 | 스코티시 디비전 원 | 7 | 0 | 0 | 0 | 0 | 0 | 0 | 0 | 7 | 0 |
1973-74 | 32 | 1 | 1 | 0 | 10 | 0 | 4 | 0 | 47 | 1 | ||
1974-75 | 17 | 0 | 4 | 0 | 4 | 1 | 0 | 0 | 25 | 1 | ||
1975-76 | 스코티시 프리미어 디비전 | 28 | 0 | 1 | 0 | 2 | 0 | 0 | 0 | 31 | 0 | |
1976-77 | 7 | 0 | 0 | 0 | 4 | 0 | 0 | 0 | 11 | 0 | ||
총계 | 91 | 1 | 6 | 0 | 20 | 1 | 4 | 0 | 121 | 2 | ||
샌안토니오 선더 | 1976 | 북미 축구 리그 | 19 | 3 | 0 | 0 | 0 | 0 | 0 | 0 | 19 | 3 |
시드니 시티 | 1977 | 내셔널 사커 리그 | 17 | 0 | 1 | 0 | - | - | - | - | 18 | 0 |
1978 | 23 | 1 | 3 | 1 | - | - | - | - | 26 | 2 | ||
1979 | 13 | 1 | 2 | 0 | - | - | - | - | 15 | 1 | ||
1980 | 12 | 0 | 0 | 0 | - | - | - | - | 12 | 0 | ||
총계 | 65 | 2 | 6 | 1 | - | - | - | - | 71 | 3 | ||
총 경력 합계 | 337 | 10 | 28 | 2 | 41 | 2 | 4 | 0 | 410 | 14 |
2.2. International playing career
에디 톰슨은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 소속 당시 스코틀랜드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국제 무대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스코틀랜드 U-21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3경기에 출전했다.
3. Coaching career
선수 은퇴 후 에디 톰슨은 성공적인 감독 경력을 시작했으며, 호주에서 클럽 팀을 이끌고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호주 축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일본 J리그 팀을 맡으며 국제적인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3.1. Early coaching in Australia
1980년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던 에디 톰슨은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하고 시드니 시티의 전임 감독이 되었다. 그는 시드니 시티를 이끌고 1980년부터 3년 연속 내셔널 사커 리그 챔피언십 우승을 달성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으며, 1986년에는 NSL컵 우승도 차지했다. 시드니 시티에서 이룬 리그 3연패는 NSL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1981년, 1984년, 1985년에 걸쳐 세 차례나 호주 최우수 감독에 선정되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호주 축구 연맹과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의 최고 수준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1987년 시드니 시티가 NSL에서 철수하자, 그는 시드니 올림픽 FC의 지휘봉을 잡았고, 1989년 그랜드 파이널 진출을 이끌었다.
3.2. Australia national team
1984년부터 에디 톰슨은 호주 B 축구 국가대표팀(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그의 B 대표팀 첫 경기는 멜버른에서 열린 글래스고 레인저스 FC와의 경기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1985년부터는 프랭크 아록이 이끄는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로도 활동했다. 1990년, 그는 호주 A대표팀과 B대표팀(올림픽 대표팀)의 감독으로 정식 부임하며, 클럽팀과 겸임하던 이전 감독들과 달리 대표팀 전임 스태프로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의 A대표팀 첫 경기는 1990년 9월 6일 서울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로, 0-1로 패했다.
톰슨 감독 체제하의 호주 대표팀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과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주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고 본선에 진출한 호주 올림픽 대표팀은 역대 최고 기록인 4위를 달성했다. 준결승전에서는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1-6으로 패했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가나 축구 국가대표팀에 0-1로 패했다. 1994년 1994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아쉽게 패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후, 같은 해 말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감독직 제안을 받아 호주 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의 대표팀 감독 시절은 해리 큐얼과 루카스 닐 같은 젊은 재능들을 발탁하고 잠재력을 꽃피우게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들 젊은 선수들은 훗날 2006 FIFA 월드컵에서 호주의 사상 첫 월드컵 조별리그 돌파에 크게 기여했다.
3.3. Sanfrecce Hiroshima
1997년부터 4년 동안 에디 톰슨은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 감독을 맡았다. 팀은 당시 재정난으로 인해 핵심 선수들을 방출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톰슨 감독은 카운터어택을 신조로 삼는 축구를 구현하며 팀이 J2리그로 강등되지 않도록 고군분투했다. 그의 수비 지향적인 전술은 때때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철학을 꿋꿋이 지켜나갔다.
톰슨 감독은 호주 축구계와의 인맥을 활용하여 그레이엄 아놀드, 하이든 폭스, 토니 포포비치, 아우렐리오 비드마르, 스티브 코리카 등 여러 호주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쿠보 다쓰히코, 핫토리 고타, 시모다 다카시를 비롯해 모리사키 가즈유키, 후지모토 지카라 등 젊은 일본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1999년에는 자신이 발탁한 선수들을 이끌고 천황배 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 Controversies
에디 톰슨의 경력 중 1994년에는 선수 이적과 관련된 논란이 발생했다. 네드 젤리치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이적 과정에서 부적절한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에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은퇴한 판사 도널드 스튜어트가 이끄는 조사가 시작되었다. 보고서에서는 그의 해고를 권고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해 그는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5. Honours and achievements
에디 톰슨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다양한 리그와 컵 대회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개인적으로도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5.1. As a player
- 스코티시컵 준우승: 1967-68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
- 내셔널 사커 리그: 1977, 1980 (시드니 시티)
5.2. As a manager
- 내셔널 사커 리그: 1980, 1981, 1982 (시드니 시티)
- NSL 북부 디비전: 1984, 1985 (시드니 시티)
- NSL컵: 1986 (시드니 시티)
- NSL 채리티 실드: 1982 (시드니 시티)
- 내셔널 사커 리그 준우승: 1986 (시드니 올림픽 FC)
- NSL 프리미어십 준우승: 1986 (시드니 올림픽 FC)
- NSL컵 준우승: 1989 (시드니 올림픽 FC)
- OFC 네이션스컵: 1996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 트랜스 타스만 컵: 1991, 1995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 OFC U-23 챔피언십: 1996 (호주 U-23 축구 국가대표팀)
5.3. Individual honours
- 내셔널 사커 리그 올해의 감독: 1981, 1984, 1985
- 호주 축구 연맹 명예의 전당: 2002 헌액
6. Career statistics
6.1. Club statistics
클럽 | 시즌 | 리그 | 내셔널컵 | 리그컵 | 유럽 대회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골 | 출전 | 골 | 출전 | 골 | 출전 | 골 | 출전 | 골 | ||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 1966-67 | 스코티시 디비전 원 | 9 | 0 | 0 | 0 | 0 | 0 | 0 | 0 | 9 | 0 |
1967-68 | 9 | 1 | 5 | 1 | 3 | 0 | 0 | 0 | 17 | 1 | ||
1968-69 | 34 | 0 | 2 | 0 | 6 | 0 | 0 | 0 | 42 | 0 | ||
1969-70 | 23 | 0 | 2 | 0 | 0 | 0 | 0 | 0 | 25 | 0 | ||
1970-71 | 34 | 0 | 1 | 0 | 6 | 0 | 0 | 0 | 41 | 0 | ||
1971-72 | 29 | 2 | 4 | 0 | 6 | 1 | 0 | 0 | 39 | 3 | ||
1972-73 | 24 | 1 | 2 | 0 | 0 | 0 | 0 | 0 | 26 | 1 | ||
총계 | 162 | 4 | 16 | 1 | 21 | 1 | 0 | 0 | 199 | 6 | ||
애버딘 | 1972-73 | 스코티시 디비전 원 | 7 | 0 | 0 | 0 | 0 | 0 | 0 | 0 | 7 | 0 |
1973-74 | 32 | 1 | 1 | 0 | 10 | 0 | 4 | 0 | 47 | 1 | ||
1974-75 | 17 | 0 | 4 | 0 | 4 | 1 | 0 | 0 | 25 | 1 | ||
1975-76 | 스코티시 프리미어 디비전 | 28 | 0 | 1 | 0 | 2 | 0 | 0 | 0 | 31 | 0 | |
1976-77 | 7 | 0 | 0 | 0 | 4 | 0 | 0 | 0 | 11 | 0 | ||
총계 | 91 | 1 | 6 | 0 | 20 | 1 | 4 | 0 | 121 | 2 | ||
샌안토니오 선더 | 1976 | 북미 축구 리그 | 19 | 3 | 0 | 0 | 0 | 0 | 0 | 0 | 19 | 3 |
시드니 시티 | 1977 | 내셔널 사커 리그 | 17 | 0 | 1 | 0 | - | - | - | - | 18 | 0 |
1978 | 23 | 1 | 3 | 1 | - | - | - | - | 26 | 2 | ||
1979 | 13 | 1 | 2 | 0 | - | - | - | - | 15 | 1 | ||
1980 | 12 | 0 | 0 | 0 | - | - | - | - | 12 | 0 | ||
총계 | 65 | 2 | 6 | 1 | - | - | - | - | 71 | 3 | ||
총 경력 합계 | 337 | 10 | 28 | 2 | 41 | 2 | 4 | 0 | 410 | 14 |
6.2. Managerial statistics
연도 | 소속팀 | 대회명 | 경기수 | 승점 | 승리 | 무승부 | 패전 | 순위 | 나비스코컵 | 천황배 | |
---|---|---|---|---|---|---|---|---|---|---|---|
1997 | 산프레체 히로시마 | J리그 | 1st | 16 | 21 | 8 | - | 8 | 10위 | 예선 리그 탈락 | 4회전 탈락 |
2nd | 16 | 15 | 5 | - | 11 | 13위 | |||||
1998 | J리그 | 1st | 17 | 19 | 7 | - | 10 | 13위 | 예선 리그 탈락 | 8강 | |
2nd | 17 | 24 | 9 | - | 8 | 9위 | |||||
1999 | J1리그 | 1st | 15 | 27 | 9 | 0 | 6 | 6위 | 2회전 탈락 | 준우승 | |
2nd | 15 | 21 | 7 | 1 | 7 | 8위 | |||||
2000 | J1리그 | 1st | 15 | 19 | 7 | 1 | 7 | 10위 | 2회전 탈락 | 4회전 탈락 | |
2nd | 15 | 18 | 6 | 1 | 8 | 11위 |
7. Death
에디 톰슨은 2000년 호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2001년 9월 악성 림프종으로 확진되어 치료를 시작했으며, 췌장 적출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암이 재발하여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는 오랜 투병 끝에 2003년 2월 20일 늦은 밤, 시드니 시내 병원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8. Legacy and evaluation
에디 톰슨은 호주 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해리 큐얼과 루카스 닐 등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육성한 선수들은 훗날 2006 FIFA 월드컵에서 호주가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에는 호주 축구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는 그의 지도력과 호주 축구 발전에 대한 기여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