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개인 배경
앨런 볼은 1945년 5월 12일 랭커셔주 판워스에서 프로 축구 선수이자 감독, 그리고 후에 주점 주인이 된 아버지 앨런 볼 시니어와 어머니 바이올렛 덕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볼은 학창 시절부터 축구 경력을 시작했으며, 아버지가 감독을 맡았던 랭커셔 콤비네이션 리그의 애슈턴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다. 그는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 계약하고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판워스 그래머 스쿨 팀 경기에 불참하면서 교장 선생님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결국 그는 아무런 학위 없이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떠난 후 울버햄프턴은 볼과의 계약을 포기했다. 미드필더인 볼은 볼턴 원더러스에서 훈련을 시작했지만, 감독 빌 리딩이 그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프로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다. 볼은 키가 168 cm였다.
이후 볼의 아버지가 예전 동료였던 코치에게 부탁하여 블랙풀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볼은 1961년 9월 시험을 거쳐 즉시 수습생으로 계약했고, 1962년 5월 프로 선수로 전환했다.
2. 선수 경력
앨런 볼은 22년간의 프로 축구 선수 경력 동안 여러 클럽을 거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량과 기술적인 능력은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했다.
2.1. 클럽 경력
앨런 볼의 클럽 경력은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와 북미 리그를 아우르며, 각 팀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2.1.1. 블랙풀
앨런 볼은 1962년 8월 18일 안필드에서 열린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풋볼 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팀은 2대1로 승리했다. 그는 17세 98일의 나이로 블랙풀 역사상 최연소 리그 데뷔 선수가 되었다. 1964년 11월 21일에는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풀럼을 상대로 3대3 무승부를 기록한 경기에서 프로 데뷔 후 첫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블랙풀에서 그는 팀의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하며 블랙풀이 풋볼 리그 1부 디비전에 잔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1.2. 에버턴
1966년 월드컵 우승팀 잉글랜드에서의 활약은 블랙풀보다 더 큰 여러 클럽의 관심을 끌었다. 결국 볼은 1966년 8월, 당시 잉글랜드 클럽이 지불한 최고 이적료인 11.20 만 GBP에 에버턴으로 이적했다. 에버턴에서 볼은 콜린 하비와 하워드 켄달과 함께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 트리오로 평가받는 '성스러운 삼위일체'를 형성했다. 에버턴은 1968년 FA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에 패했고, 이듬해에는 맨체스터 시티에 의해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볼은 1970년 풋볼 리그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할 때 팀의 중요한 선수였으며, 리즈 유나이티드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렸다.
1971년 FA컵 준결승에서는 머지사이드 더비 라이벌인 리버풀에게 패하며 다시 한번 탈락했다. 볼은 이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리버풀의 두 골에 따라잡혔고, 리버풀은 결승에서 '더블'을 노리던 아스널에 패했다. 볼은 에버턴에서 총 259경기에 출전하여 79골을 기록했다.
2.1.3. 아스널
1971년 12월 22일, 아스널은 볼을 하이베리로 영입하기 위해 당시 기록적인 이적료인 22.00 만 GBP를 지불했다. 그는 아스널에 합류할 당시 26세로, 최고의 기량과 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1971년 12월 27일 노팅엄 포리스트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아스널은 1971-72 시즌 리그 타이틀을 방어하지 못했고, 웸블리에서 열린 창단 100주년 FA컵 결승전에서는 리즈 유나이티드에 1대0으로 패하며 FA컵도 놓쳤다.

볼은 이 기간 내내 아스널에서 계속 뛰었으며, 처음에는 거의 변함없이 주전으로 활약하며 1972-73 시즌에는 50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스널의 더블 우승팀은 곧 해체되었고, 그들의 대체 선수들은 역부족이었다. 볼은 아스널 팀에서 몇 안 되는 고품질 선수 중 한 명으로 남았고, 1974년에는 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 4월 볼은 다리 골절 부상을 입어 1974-75 시즌 초반 경기에 결장했고, 아스널은 이 시즌을 16위로 마쳤다. 볼은 1975-76 시즌에도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초반 경기에 결장했고, 아스널은 이 시즌 17위에 그쳤다. 1976년 여름 버티 미 감독이 아스널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새로운 감독인 테리 닐은 팀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31세가 된 볼은 1976년 12월까지 아스널에서 계속 뛰었으며, 이후 6.00 만 GBP의 이적료로 사우샘프턴에 매각되었다. 그는 아스널에서 총 217경기에 출전하여 52골을 기록했다.
2.1.4. 사우샘프턴
볼의 사우샘프턴 이적은 그가 1966년 에버턴, 1971년 아스널, 그리고 1976년 사우샘프턴에 도착했을 때 각 팀이 FA컵 우승팀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칭을 이룬다. 그는 사우샘프턴이 1978년 풋볼 리그 1부 디비전으로 다시 승격하는 데 기여했으며, 1979년에는 노팅엄 포리스트에 3대2로 패한 후 풋볼 리그 컵 준우승 메달을 획득했다.
2.1.5. 북미 및 후기 클럽
이후 볼은 당시 10년 된 북미 사커 리그에서 뛰기 위해 1978년 5월 필라델피아 퓨어리에 선수로 합류했다. 6월에는 전 뉴캐슬 유나이티드 코치 리처드 디니스가 해고된 후 선수 겸 코치로 임명되었다. 한 시즌 후, 그는 더 이상 코치를 맡지 않게 되자 1979년 6월 밴쿠버 화이트캡스로 이적했다. 그는 밴쿠버에서 거의 즉시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해 9월 팀이 NASL 사커 볼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9경기에서 7골을 기록하며 1979년 플레이오프 최우수 선수(MVP)를 수상했다.
1980년 2월, 볼은 밴쿠버와의 남은 계약을 이행한 후 첫 프로 클럽인 블랙풀의 선수 겸 감독으로 영국에 복귀했다. 그의 임명은 블랙풀 서포터들에게 환영받았으며, 그는 클럽의 좋은 시절을 되찾고자 하는 열정과 여전히 가끔씩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복귀했다. 그러나 그해 블랙풀은 강등 위기에 처했고, 막판 6경기 중 4승을 거두는 등 결정적인 활약 덕분에 18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잔류에 성공했다. 비시즌 동안 볼은 여러 새 얼굴을 영입하고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려 했다. 팬들에게 가장 불만스러운 조치 중 하나는 블룸필드 로드의 인기 스타였던 토니 켈로우를 판매한 것이었다. 1980-81 시즌도 비슷하게 시작되었고, 블랙풀은 테이블 하위권에서 고군분투했다. 프리시즌 동안의 낙관론은 팀의 경기력이 볼의 약속에 미치지 못하자 분노로 바뀌었다. 11월 22일 FA컵 1라운드에서 플리트우드 타운에 승리한 후, 볼은 팀이 자신만큼 성공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팬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결국 감독과 클럽 모두에게 너무 힘든 상황이 되었고, 1981년 2월 28일 브렌트포드전 패배 직후, 볼의 계약은 즉시 해지되었고 서로의 애정 관계는 파탄으로 끝났다. 블랙풀은 시즌이 끝날 때 강등되었다. 2005년 3월, 볼은 블랙풀 감독 시절에 대해 "좋은 친구인 잭 찰턴이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코치직을 제안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다. 경험을 쌓았어야 했다. 또 한 가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스탠 터넨트를 계속 고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감독으로 그를 대체했지만, 그는 매우 좋았다. 나는 좀 자만했고, 고집이 세서 선수 겸 감독이 되는 것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고, 이사회와의 문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1981년 3월, 볼은 동료 베테랑이자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동료인 믹 채넌과 케빈 키건과 함께 뛰기 위해 사우샘프턴으로 복귀했다. 그는 1982년 10월 홍콩 팀 이스턴으로 이적한 후 1983년 1월 브리스틀 로버스에 합류하여 다음 시즌 은퇴할 때까지 머물렀다. 볼이 선수 생활에서 최종 은퇴했을 때, 그는 21년 동안 975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앨런 볼의 국가대표 경력은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의 주역으로서 빛났으며, 그의 투지와 에너지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2.2.1. 1966 FIFA 월드컵 우승
어려움을 겪던 블랙풀 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볼의 투지, 체력, 그리고 볼 배급 능력은 잉글랜드 감독 앨프 램지의 눈에 띄었다. 램지 감독은 1965년 5월 9일, 볼의 20번째 생일을 사흘 앞두고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의 1대1 무승부 경기에서 그에게 국가대표 데뷔전을 선사했다. 램지 감독은 1년 후 잉글랜드에서 개최될 월드컵을 준비하며, 전통적인 와이드 맨들에게서 항상 기대할 수 없었던 수비적이고 투지 넘치는 미드필더들을 활용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 결과 볼은 램지 감독이 활용하기에 유용한 자원이 되었다. 그는 전통적인 측면에서든 중앙에서든 플레이할 수 있었고, 필요할 때 수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볼은 램지 감독이 월드컵을 위해 선발한 22명 선수단 중 21세의 나이로 가장 어린 선수였다. 잉글랜드 팀이 월드컵에서 집단적으로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볼은 특히 최고 수준에서 입증된 경력이 없는 가장 경험이 부족한 선수 중 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성공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그와 제프 허스트, 마틴 피터스는 대회에서 엄청난 찬사와 영원한 명성을 얻었으며, 이들 모두는 서독과의 결승전 팀에 이름을 올릴 때까지 단 한 자릿수 국가대표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웸블리에 모인 98,000명의 관중은 볼의 훌륭한 개인 활약을 목격했다. 끊임없이 달리며, 동료들과 상대 선수들이 지쳐 쓰러져 있을 때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질주하며 수비에 가담했다. 경기 종료 1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오른쪽에서 코너킥을 얻어냈고, 곧바로 그 코너킥을 찼다. 허스트는 페널티 에어리어 가장자리에서 슛을 날렸고, 이 슛은 굴절되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피터스의 발등에 맞고 떨어졌고, 피터스는 잉글랜드를 2대1로 앞서게 하는 골을 넣었다. 독일은 경기 종료 직전 동점골을 넣었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어떻게든 볼의 플레이는 추가적인 활기를 띠었고, 양말을 발목까지 내린 채 웸블리 경기장을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그날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논란이 많았던 허스트의 두 번째 골이자 잉글랜드의 세 번째 골은 볼의 추격과 낮은 크로스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한 허스트가 공을 앞으로 몰아붙여 역사적인 해트트릭 골을 터뜨릴 때, 마크 없이 전속력으로 전방으로 달려가 패스를 외치고 있었다. 월드컵 우승 후 볼은 부모님과 여동생과 함께 살던 랭커셔주 워크덴에서 시민 환영회를 받았다. 볼의 결승전 출전은 블랙풀 선수가 잉글랜드 성인 대표팀에 마지막으로 출전한 기록이 되었다.
2.2.2. 1970년과 1974년 FIFA 월드컵

이때쯤 볼은 램지 감독의 잉글랜드 팀 명단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는 선수 중 한 명이었고, 그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고지대의 멕시코에서 열린 1970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는 선수단에 포함되었다. 볼은 잉글랜드가 브라질에 1대0으로 패한 조별 리그 경기에서 크로스바를 맞히는 슛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잉글랜드는 다른 조별 리그 경기에서는 승리하며 준결승에서 다시 서독과 맞붙게 되었지만, 더위는 볼의 타고난 투지를 꺾었다. 잉글랜드는 2대0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3대2로 패하며 월드 챔피언으로서의 통치를 마감했다.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1973년 6월 6일 폴란드와의 호주프 경기 중, 볼은 선수들 간의 몸싸움 도중 레스와프 치미키에비츠의 목을 잡고 사타구니를 무릎으로 가격하여 퇴장당하면서 잉글랜드 국가대표 경기에서 퇴장당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턴 매치에 결장했는데, 이 경기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경기 중 하나로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이 무승부로 인해 잉글랜드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2.2.3. 잉글랜드 주장직과 국가대표 은퇴
램지 감독이 해고되고 조 머서가 임시 감독을 맡았지만, 볼은 부상으로 인해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볼과 국가대표팀의 관계는 돈 레비가 램지 감독의 영구적인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더욱 개선되었다가 회복 불능 상태로 악화되었다. 볼은 엠린 휴즈가 제외된 후 주장직을 맡았고, 잉글랜드가 한 번도 패하지 않은 6경기 연속으로 주장 완장을 찼다. 이 경기들에는 1975년 3월 현 월드 챔피언 서독을 상대로 한 2대0 승리와 1975년 5월 스코틀랜드를 5대1로 물리친 경기가 포함되었다.
아스널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후, 레비 감독이 스위스와의 경기를 위한 선수단을 발표했을 때 볼은 주장으로 잔류하기는커녕 아예 잉글랜드 대표팀에 소집되지 않았다. 볼은 아내가 기자로부터 그의 반응을 묻는 전화를 받았을 때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30세의 나이에 볼의 국가대표 경력은 72경기 출전, 8골이라는 기록과 함께 갑작스럽고 불쾌하게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1966년 월드컵 우승팀 멤버 중 국제 무대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은퇴한 선수였다(하지만 선수단 전체로 보면 1977년 론 그린우드 감독에 의해 예상치 못하게 소집된 이언 캘러건이 마지막이었다).
2.3. 플레이 스타일
에버턴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앨런 볼은 뛰어난 기술과 높은 수준의 체력, 정확한 패스 능력, 그리고 동료들에게 득점 기회를 제공하고 자신도 멋진 골을 넣을 수 있는 만능형 전투적인 미드필더였다. 주로 상대 골문을 향해 전진하는 공격형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였지만, 팀 수비수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했다. 켄 로저스는 볼의 불같은 정신력이 축구 선수로서 그의 성공의 열쇠였다고 언급했다. 볼은 또한 동기 부여가 되는 선수로도 두드러졌는데, 존 모리세이는 볼이 팀 동료들과 원투 패스를 주고받을 때마다 그들이 플레이에 동기 부여를 받는다고 언급했다.
3. 감독 경력
앨런 볼은 선수 은퇴 후 다양한 클럽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며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 그의 감독 경력은 클럽을 승격시키거나 강등으로부터 구해내는 중요한 순간들을 포함하고 있다.
3.1. 블랙풀
볼은 1980년 7월 1일 블랙풀의 선수 겸 감독으로 처음 감독직을 맡았다. 당시 팀은 강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볼의 지도 아래 마지막 6경기 중 4승을 거두는 등 필사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18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강등을 모면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도 팀의 부진은 계속되었고, 1981년 2월 28일 브렌트포드에 패배한 직후 계약이 해지되었다. 블랙풀은 그 시즌 말에 결국 강등되었다. 볼은 나중에 블랙풀 감독 시절에 대해 "경험이 부족했고, 약간 자만했으며, 선수 겸 감독이 되는 것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훨씬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3.2. 포츠머스 (첫 번째 임기)
볼은 1984년 5월 포츠머스 감독으로 부임하며 감독 경력을 재개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첫 두 시즌 동안 아쉽게 1부 리그 승격을 놓쳤지만, 1987년 마침내 포츠머스를 28년 만에 최상위 리그로 이끌었다. 그러나 1부 리그 복귀 후 단 한 시즌 만에 다시 강등되었고, 1989년 1월 심각한 승격 도전에 실패하고 당시 회장이었던 짐 그레고리와의 성격 충돌로 인해 해고되었다.
3.3. 스토크 시티
포츠머스를 떠난 지 한 달 뒤인 1989년 2월, 볼은 콜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조크 월리스의 보조 감독으로 합류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스토크 시티에서 믹 밀스 감독 아래 유사한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밀스 감독이 2주 후 해고되면서 볼이 감독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선수단이 충분히 좋지 않다고 결론 내렸고, 크리스 카마라, 데이브 밤베르, 리 팔린, 칼 사운더스, 게리 해켓, 니키 모건 등을 방출했다. 그리고 토니 엘리스, 리 샌드포드, 토니 켈리, 데이브 케반, 폴 반스, 노엘 블레이크를 영입했다. 볼이 너무 많은 선수단을 너무 빨리 바꾼 것은 큰 도박이었고,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스토크는 테이블 최하위에 머물렀고, 63년 만에 처음으로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볼의 다음 목표는 2부 리그로 즉시 복귀하는 것이었고, 1990-91 시즌 12경기 후에는 승격 후보 중 하나로 보였기 때문에 달성 가능한 목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스토크의 경기력은 저하되었고, 몇몇 당황스러운 결과와 함께 팀은 순위표에서 떨어졌다. 결국 위건 애슬레틱과의 원정 경기에서 4대0으로 패배한 후 볼은 해고되었다. 스토크는 결국 14위로 시즌을 마쳤는데, 이는 클럽 역사상 가장 낮은 리그 순위였다.
3.4. 엑서터 시티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보조
1991년 7월, 볼은 3부 리그의 엑서터 시티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엑서터는 예산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볼은 1993년에 팀을 3부 리그(1992년 프리미어리그 창설 이후 새로운 2부 리그)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그가 떠날 때 팀은 최하위 리그로 강등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1992년 2월부터 8월까지 그는 그레이엄 테일러 감독 아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코치로도 활동했으며, 스웨덴에서 열린 UEFA 유로 1992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하며 성공적이지 못했다.
3.5. 사우샘프턴
1994년 1월, 볼은 이언 브랜풋 감독의 후임으로 엑서터를 떠나 사우샘프턴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가 부임할 당시 사우샘프턴은 시즌 내내 강등권에 머물며 강등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볼의 첫 번째 임무는 매튜 르 티시에의 팀 내 역할을 재확립하고 다른 선수들이 그가 클럽의 가장 큰 자산임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르 티시에는 볼 감독 부임 후 첫 4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이에 응답했고, 1994년 2월 14일 리버풀을 상대로 한 4대2 승리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1993-94 시즌 후반기 동안 르 티시에는 볼 감독의 지휘 아래 16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넣었다.
이스터 기간 동안 세 번의 패배를 겪은 후, 사우샘프턴은 여전히 강등권에 머물렀다. 마지막 6경기에서 사우샘프턴은 15골(그 중 르 티시에가 8골)을 넣고 10점을 얻어 시즌 마지막 날 잔류를 확정지을 수 있었다.
다음 시즌인 1994-95 시즌 초반, 볼은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를 영입했고, 더 중요하게는 르 티시에와 새로운 3년 계약을 맺었다。 첫 4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뉴캐슬 유나이티드에 5대1 패배 포함), 로니 에켈룬드의 세 골에 힘입어 사우샘프턴은 9월에 5경기 중 4승을 거두며 리그 7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후 팀은 부진에 빠져 3월 중순까지 단 2승만을 추가하며 다시 강등권으로 떨어졌다. 1995년 3월 22일, 사우샘프턴은 홈에서 뉴캐슬과 맞붙어 4분 남겨두고 1대0으로 뒤지고 있었지만, 추가 시간 2골을 포함해 3골을 터뜨리며 놀랍고도 값진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 결과는 사우샘프턴에 영감을 주었고, 남은 10경기 중 5승을 거두며 시즌을 10위로 마쳤다.
3.6. 맨체스터 시티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볼은 1995년 7월 전 잉글랜드 동료이자 당시 구단주였던 프랜시스 리의 맨체스터 시티 감독 제안에 흔들렸다. 그가 델을 떠나는 과정은 상당히 불화스러웠고, 이후 몇 년 동안 볼이 델을 다시 방문할 때마다 일부 사우샘프턴 팬들의 야유를 받았다.
볼의 메인 로드 재임 기간은 논란이 많았는데, 많은 전문가들과 서포터들은 그가 감독으로서의 자격보다는 그의 이름과 회장과의 친분 때문에 임명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전 감독 브라이언 호튼이 잘못한 것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호튼 감독 체제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16위와 17위를 기록했으며, 그 이전 피터 리드 감독 체제에서는 5위, 5위, 9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볼은 1994-95 시즌 동안 시티에서 리그 및 컵 대회에서 15골을 넣었던 폴 월시와 현금을 포츠머스에 주고 게리 크리니를 영입했지만, 크리니는 1995-96 시즌 시티에서 4골에 그쳤다. 1995-96 시즌은 끔찍한 시작을 맞았는데, 시티는 개막 11경기에서 8패를 당하며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11월에는 반전이 찾아왔다. 시티는 12번째 시도 만에 마침내 리그 경기에서 승리했고, 이어서 무승부와 2승을 거두며 그 달을 강등권 밖에서 마쳤으며, 볼은 1995년 11월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시티의 경기력은 다시 하락했고, 시즌 마지막 날 리버풀과 2대2 무승부를 기록했다. 다른 강등 위협 팀들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시티는 골득실차로 강등되었고, 7시즌 연속 최상위 리그에서 뛰던 기록이 중단되었다. 이사회는 볼을 믿었지만, 그는 다음 시즌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세 경기 만에 사임했다. 그는 시티의 재정난 때문에 최고의 선수들을 팔아야만 했다고 느꼈다.
3.7. 포츠머스 (두 번째 임기)
1998년 1월, 볼은 브라이언 하우로부터 클럽 인수 제안을 받았고, 그가 클럽을 맡아주기를 원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로 인해 볼은 1998년 2월 포츠머스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인수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그가 부임할 당시 포츠머스는 테이블 최하위에서 몇 점 뒤처져 있었고, 거의 치명적인 재정 위기를 겪으며 1년 이상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1998년 그는 시즌 마지막 날 브래드퍼드 시티에서 포츠머스가 3대1로 승리하면서 그의 전 팀이었던 스토크 시티와 맨체스터 시티 두 팀이 강등되는 기적적인 탈출을 이루어냈다. 그는 또한 1998-99 시즌에도 팀을 잔류시켰지만, 1999년 12월 9일 21경기에서 20점을 얻어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하위권에 있던 클럽과의 계약이 해지되었다. 그의 해임은 밀란 만다리치 새 구단주가 클럽을 재정적 파탄에서 구출한 지 6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은퇴 당시 54세의 볼은 1966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마지막으로 감독직을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4. 개인 생활
볼은 판워스 그래머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볼의 아버지 앨런 시니어 역시 프로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었으며, 1982년 1월 키프로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2021년 4월, 볼의 아들 지미는 포레스트 그린 로버스의 임시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가족 중 3대째 풋볼 리그에서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볼은 작은 키, 붉은 머리, 그리고 높은 음역의 목소리 덕분에 항상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1967년 자서전 "볼 오브 파이어"(Ball of Fire)를 썼으며, 1978년 "잇츠 올 어바웃 어 볼"(It's All About a Ball)로 개정했다. 그의 세 번째 자서전인 "플레이잉 엑스트라 타임"(Playing Extra Time)(2004)은 축구계에서의 그의 영광과 좌절을 통찰력 있게 다루어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2004년 4월, 볼은 사우샘프턴 근처 토튼의 BAT 경기장에서 열린 로저 프랩웰 추모 경기에서 테스트우드 뱁티스트 교회 팀으로 출전했는데, 1966년 월드컵 우승 당시 입었던 등번호 7번 유니폼을 착용했다. 이 팀에는 전 사우샘프턴 감독 데이브 메링턴과 전 사우샘프턴 수비수 프랜시스 베날리도 함께했다. 경기의 수익금은 지역 자선 단체인 SCRATCH에 기부되었다.
가정적인 남자였던 볼은 아내와 막내딸이 모두 심각한 질병 진단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67년 5월 21일 랭커셔주 키어슬리의 세인트 스티븐 교구 교회에서 결혼한 그의 아내 레슬리는 3년간의 난소암 투병 끝에 2004년 5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앨런과 레슬리는 결혼 전 5년 동안 교제했으며, 세 자녀 맨디, 킬리, 지미를 두었다. 그들은 또한 세 명의 손주도 있었다.
그는 워새시에 있는 가족 집에 머물렀고, 2005년 중반부터 어린 시절 친구였던 발레리 비치(전 볼턴 선수 해리 비치의 전처)와 관계를 이어갔다. 2005년 5월, 볼은 가족을 위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월드컵 우승 메달과 기념 토너먼트 모자를 경매에 내놓으며 "그것들은 공간을 차지하는 장신구일 뿐이고, 수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월드컵에 대한 내 기억이 그런 것들보다 훨씬 중요하며, 내 가족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물품들은 14.00 만 GBP에 팔렸다.
볼은 프로 축구 선수 존 매카티와 제임스 매카티의 외종조부이다.
5. 사망
앨런 볼은 2007년 4월 25일 이른 시간에 햄프셔주 훅 (페럼)에 있는 자택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정원 쓰레기를 태우던 모닥불이 다시 불이 붙어 근처 울타리로 번지자 이를 진압하려다 심장마비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장례식은 2007년 5월 3일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많은 볼의 전 축구 동료들이 참석했으며, 그가 즐겨 쓰던 챙이 넓은 모자는 그의 관 위에 놓였다.
2007년 7월 29일, 앨런 볼 추모 컵 자선 경기가 "잉글랜드 대 세계" 형식으로 전 국가대표 선수들로 구성된 두 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수익금은 보비 무어 기금과 워릭셔주 및 노샘프턴셔주 항공 구급차 서비스에 기부되었다.
6. 유산과 영예
앨런 볼은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그의 뛰어난 경력은 수많은 찬사와 영예로 기억되고 있다.
6.1. 영예 및 수상
앨런 볼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다음과 같은 주요 팀 타이틀과 개인 표창, 그리고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 선수
- 잉글랜드
- 1966년 FIFA 월드컵: 1966 우승
- 에버턴
-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1969-70 우승
- FA 채리티 실드: 1970 우승
- FA컵: 1967-68 준우승
- 아스널
- FA컵: 1971-72 준우승
- 사우샘프턴
- 풋볼 리그 2부 디비전: 1977-78 준우승
- 풋볼 리그 컵: 1978-79 준우승
- 밴쿠버 화이트캡스
- 북미 사커 리그 사커 볼: 1979 우승
- 북미 사커 리그 내셔널 컨퍼런스 서부 지구: 1979 우승
- 개인
- 로스먼스 골든 부츠상: 1970, 1973
- 사우샘프턴 올해의 선수: 1977-78
- 아스널 올해의 선수: 1973-74
- 1979 북미 사커 리그 플레이오프 최우수 선수(MVP)
- 1979 북미 사커 리그 베스트 XI (2nd 팀)
- 감독
- 개인
-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 1995년 11월
- 서훈 및 헌액
- 2000년, 볼은 1966년 월드컵 우승팀의 다른 4명과 함께 축구에 대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을 받았다. 볼은 로저 헌트, 노비 스틸스, 레이 윌슨, 조지 코언과 함께 자신들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3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 2003년, 볼은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11년, 캐나다 축구 명예의 전당은 1979년 NASL 챔피언 밴쿠버 화이트캡스 팀을 헌액했다. 볼은 이 스쿼드의 핵심 멤버였다.
- 2006년 4월, 블랙풀 FC 명예의 전당이 지미 암필드 전 블랙풀 선수에 의해 공식적으로 개장되었을 때, 볼은 블룸필드 로드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블랙풀 서포터스 협회가 주최한 투표에서 전 세계 블랙풀 팬들은 역대 최고의 영웅들을 투표했고, 각 10년마다 5명의 선수가 헌액되는데, 볼은 1960년대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 2001년, 볼은 에버턴의 '에버턴 자이언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3-04 시즌 초반에는 클럽의 창단 125주년 공식 기념 행사 일환으로 팬들에 의해 역대 최고의 팀 멤버로 선정되었다.
- 개인
- 잉글랜드
6.2. 추모 및 기념
앨런 볼을 추모하고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방식들이 마련되었다. 2007년 7월 29일에는 "잉글랜드 대 세계" 형식으로 전 국가대표 선수들로 구성된 두 팀 사이에서 앨런 볼 추모 컵 자선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 경기의 수익금은 보비 무어 기금과 워릭셔주 및 노샘프턴셔주 항공 구급차 서비스에 기부되었다.
7. 경력 통계
7.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컵 | 유럽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경기 | 골 | 경기 | 골 | 경기 | 골 | 경기 | 골 | 경기 | 골 | 경기 | 골 | ||
애슈턴 유나이티드 | 1960-61 | 랭커셔 콤비네이션 | 7 | 1 | 0 | 0 | 0 | 0 | 0 | 0 | 0 | 0 | 7 | 1 |
블랙풀 | 1962-63 | 1부 디비전 | 5 | 0 | 0 | 0 | 0 | 0 | 0 | 0 | 0 | 0 | 5 | 0 |
1963-64 | 1부 디비전 | 31 | 13 | 2 | 0 | 1 | 1 | 0 | 0 | 0 | 0 | 34 | 14 | |
1964-65 | 1부 디비전 | 39 | 11 | 1 | 1 | 2 | 1 | 0 | 0 | 0 | 0 | 42 | 13 | |
1965-66 | 1부 디비전 | 41 | 16 | 2 | 0 | 2 | 1 | 0 | 0 | 0 | 0 | 45 | 17 | |
합계 | 116 | 40 | 5 | 1 | 5 | 3 | 0 | 0 | 0 | 0 | 126 | 44 | ||
에버턴 | 1966-67 | 1부 디비전 | 41 | 15 | 6 | 2 | 0 | 0 | 4 | 1 | 0 | 0 | 51 | 18 |
1967-68 | 1부 디비전 | 34 | 20 | 4 | 0 | 2 | 0 | 0 | 0 | 0 | 0 | 40 | 20 | |
1968-69 | 1부 디비전 | 40 | 16 | 5 | 0 | 4 | 2 | 0 | 0 | 0 | 0 | 49 | 18 | |
1969-70 | 1부 디비전 | 37 | 10 | 1 | 1 | 3 | 1 | 0 | 0 | 0 | 0 | 41 | 12 | |
1970-71 | 1부 디비전 | 39 | 2 | 6 | 3 | 3 | 1 | 6 | 3 | 1 | 0 | 55 | 9 | |
1971-72 | 1부 디비전 | 17 | 3 | 0 | 0 | 1 | 0 | 0 | 0 | 0 | 0 | 18 | 3 | |
합계 | 208 | 66 | 22 | 6 | 13 | 4 | 10 | 4 | 1 | 0 | 254 | 80 | ||
아스널 | 1971-72 | 1부 디비전 | 18 | 3 | 9 | 2 | 0 | 0 | 0 | 0 | 0 | 0 | 27 | 5 |
1972-73 | 1부 디비전 | 40 | 10 | 8 | 4 | 3 | 0 | 0 | 0 | 0 | 0 | 51 | 14 | |
1973-74 | 1부 디비전 | 36 | 13 | 3 | 0 | 1 | 0 | 0 | 0 | 0 | 0 | 40 | 13 | |
1974-75 | 1부 디비전 | 30 | 9 | 8 | 1 | 0 | 0 | 0 | 0 | 0 | 0 | 38 | 10 | |
1975-76 | 1부 디비전 | 39 | 9 | 1 | 0 | 2 | 0 | 0 | 0 | 0 | 0 | 42 | 9 | |
1976-77 | 1부 디비전 | 14 | 1 | 0 | 0 | 6 | 0 | 0 | 0 | 0 | 0 | 20 | 1 | |
합계 | 177 | 45 | 29 | 7 | 12 | 0 | 0 | 0 | 0 | 0 | 218 | 52 | ||
헬레닉 (임대) | 1976 | 남아공 내셔널 풋볼 리그 | 4 | 0 | 0 | 0 | 0 | 0 | 0 | 0 | 0 | 0 | 4 | 0 |
사우샘프턴 | 1976-77 | 2부 디비전 | 23 | 1 | 6 | 1 | 0 | 0 | 0 | 0 | 0 | 0 | 29 | 2 |
1977-78 | 2부 디비전 | 41 | 5 | 4 | 0 | 3 | 0 | 0 | 0 | 0 | 0 | 48 | 5 | |
1978-79 | 1부 디비전 | 42 | 2 | 6 | 1 | 8 | 0 | 0 | 0 | 0 | 0 | 56 | 3 | |
1979-80 | 1부 디비전 | 26 | 1 | 1 | 0 | 1 | 0 | 0 | 0 | 0 | 0 | 28 | 1 | |
합계 | 132 | 9 | 17 | 2 | 12 | 0 | 0 | 0 | 0 | 0 | 161 | 11 | ||
필라델피아 퓨어리 (임대) | 1978 | NASL | 25 | 5 | - | - | - | - | 25 | 5 | ||||
1979 | NASL | 8 | 0 | - | - | - | - | 8 | 0 | |||||
합계 | 33 | 5 | - | - | - | - | 33 | 5 | ||||||
밴쿠버 화이트캡스 | 1979 | NASL | 15 | 8 | - | - | - | - | 15 | 8 | ||||
1980 | NASL | 16 | 2 | - | - | - | - | 16 | 2 | |||||
합계 | 31 | 10 | - | - | - | - | 31 | 10 | ||||||
블랙풀 | 1980-81 | 3부 디비전 | 30 | 5 | 2 | 0 | 3 | 0 | 0 | 0 | 3 | 0 | 38 | 5 |
사우샘프턴 | 1980-81 | 1부 디비전 | 1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0 | 0 |
1981-82 | 1부 디비전 | 41 | 1 | 1 | 0 | 1 | 0 | 4 | 0 | 0 | 0 | 47 | 1 | |
1982-83 | 1부 디비전 | 12 | 1 | 0 | 0 | 2 | 0 | 2 | 0 | 0 | 0 | 16 | 1 | |
합계 | 63 | 2 | 1 | 0 | 3 | 0 | 6 | 0 | 0 | 0 | 73 | 2 | ||
플로리트 아테나 (임대) | 1982 |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 풋볼 리그 | 3 | 2 | 0 | 0 | 0 | 0 | 0 | 0 | 0 | 0 | 3 | 2 |
이스턴 | 1982-83 | 홍콩 1부 리그 | 12 | 0 | - | - | - | - | 12 | 0 | ||||
브리스틀 로버스 | 1983-84 | 3부 디비전 | 17 | 2 | 0 | 0 | 0 | 0 | 0 | 0 | 0 | 0 | 17 | 2 |
커리어 합계 | 821+ | 187+ | 76+ | 16+ | 48+ | 7+ | 16+ | 4+ | 4+ | 0+ | 977+ | 214+ |
7.2. 국가대표
국가대표팀 | 연도 | 경기 | 골 |
---|---|---|---|
잉글랜드 | 1965 | 4 | 1 |
1966 | 13 | 0 | |
1967 | 5 | 3 | |
1968 | 6 | 0 | |
1969 | 8 | 0 | |
1970 | 10 | 3 | |
1971 | 7 | 0 | |
1972 | 5 | 1 | |
1973 | 7 | 0 | |
1974 | 1 | 0 | |
1975 | 6 | 0 | |
합계 | 72 | 8 |
7.3. 국가대표팀 득점
잉글랜드의 골 기록이 먼저 표시되며, 점수 열은 각 볼의 득점 후 점수를 나타낸다.
순번 | 날짜 | 경기장 | 상대팀 | 득점 | 결과 | 대회 |
---|---|---|---|---|---|---|
1. | 1965년 5월 16일 | 스톡홀름, 스웨덴 | 스웨덴 | 1-0 | 2-1 | 친선 경기 |
2. | 1967년 5월 27일 | 빈,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 1-0 | 1-0 | |
3. | 1967년 10월 21일 | 카디프, 웨일스 | 웨일스 | 3-0 | 3-0 | 1967-68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4. | 1967년 12월 6일 | 런던, 잉글랜드 | 소련 | 1-0 | 2-2 | 친선 경기 |
5. | 1970년 2월 25일 | 브뤼셀, 벨기에 | 벨기에 | 1-0 | 3-1 | |
6. | 3-1 | |||||
7. | 1970년 5월 21일 | 보고타, 콜롬비아 | 콜롬비아 | 4-0 | 4-0 | |
8. | 1972년 5월 27일 |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 스코틀랜드 | 1-0 | 1-0 | 1971-7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7.4. 감독
팀 | 시작 | 종료 | 기록 | ||||
---|---|---|---|---|---|---|---|
경기 수 | 승 | 무 | 패 | 승률 | |||
블랙풀 | 1980년 7월 1일 | 1981년 2월 28일 | 34 | 7 | 10 | 17 | - |
포츠머스 | 1984년 5월 11일 | 1989년 1월 17일 | 222 | 94 | 58 | 70 | - |
스토크 시티 | 1989년 11월 7일 | 1991년 2월 23일 | 62 | 17 | 21 | 24 | - |
엑서터 시티 | 1991년 8월 6일 | 1994년 1월 20일 | 135 | 36 | 43 | 56 | - |
사우샘프턴 | 1994년 1월 21일 | 1995년 7월 2일 | 67 | 22 | 24 | 21 | - |
맨체스터 시티 | 1995년 7월 3일 | 1996년 8월 27일 | 49 | 13 | 14 | 22 | - |
포츠머스 | 1998년 1월 26일 | 1999년 12월 9일 | 97 | 28 | 26 | 43 | - |
총합 | 666 | 217 | 196 | 25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