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쿠바의 전설적인 육상 선수 알베르토 후안토레나 당헤르(Alberto Juantorena Danger알베르토 후안토레나 당헤르스페인어)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남자 400m와 8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동시에 획득하며 육상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특히 800m에서는 1분 43.50초의 세계 기록을 수립하며 중거리 선수로서의 놀라운 잠재력을 증명했다. 그는 역사상 올림픽에서 이 두 종목을 동시에 석권한 유일한 선수로 남아있으며, 이는 쿠바가 사회주의 체제 아래 스포츠 인재 양성에 성공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의 압도적인 기량과 특유의 주법으로 인해 고국 쿠바에서는 그를 '말'이라는 뜻의 엘 카발로El Caballo스페인어 또는 '트랙 위의 우아한 자'라는 뜻의 엘 엘레간테 데 라스 피스타스El elegante de las pistas스페인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은퇴 후에도 그는 쿠바 스포츠 행정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국가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2. 어린 시절과 육상 입문
알베르토 후안토레나의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와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뛰어난 재능은 농구에서 육상으로의 전환을 통해 만개했다.
2.1. 출생과 초기 배경
알베르토 후안토레나 당헤르는 1950년 12월 3일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 cm의 큰 키와 84 kg의 건장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운동 능력 발달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2. 육상으로의 전향
후안토레나는 14세가 되던 해에 잠재적인 농구 스타로 주목받아 국영 농구 학교에 입학하였고, 심지어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농구 선수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이미 800m와 1500m 종목에서 지역 고등학교 챔피언에 오르는 등 달리기에서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육상 재능은 폴란드 출신의 육상 코치 지그문트 자비에르조프스키에게 발견되었고, 코치는 그에게 육상에 진지하게 임할 것을 설득했다. 후안토레나 자신은 스스로를 '나쁜' 농구 선수라고 여겼고, 쿠바의 단거리 선수 엔리케 피게롤라를 우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전향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육상에 입문한 지 불과 1년 만에 그는 1972년 뮌헨 올림픽 남자 400m 종목 준결승에 진출하며 결승 진출을 0.05초 차이로 아쉽게 놓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3. 선수 경력
알베르토 후안토레나는 초기 경력에서부터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했고, 특히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역사적인 이중 금메달을 획득하며 정점에 올랐다.
3.1. 초기 경력과 발전
후안토레나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400m 준결승에 진출하며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1973년 유니버시아드에서 400m 금메달을 획득했고, 1975년 판아메리칸 게임에서도 400m 은메달을 따냈다. 그는 1973년과 1974년에는 무패 행진을 이어갔지만, 1975년에는 발에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가 800m 종목을 진지하게 시작한 것은 1976년의 일로, 당시에는 그가 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거론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의 코치 자비에르조프스키는 처음에는 다른 선수들에게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여 그를 800m 경기에 참가시켰다.
3.2.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후안토레나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남자 800m 결승에 진출하여 경주 내내 선두를 유지하며 1분 43.50초의 세계 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이 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비영어권 선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400m에서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점쳐졌지만, 800m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인 미국의 릭 월휴터를 제치고 우승한 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 3일 후, 그는 400m 결승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이 경주에서 저고도 세계 기록인 44.26초를 세웠다. 400m에서 우승함으로써 그는 1906년 아테네 중간 올림픽의 폴 필그림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두 종목을 동시에 석권한 선수가 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올림픽에서는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올림픽에서 카리브해 국가들의 육상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후안토레나는 그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3.3. 올림픽 이후의 경력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에도 후안토레나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1977년 소피아 유니버시아드에서 그는 800m에서 1분 43.44초의 또 다른 세계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IAAF 월드컵에서도 그는 400m와 800m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전년도 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했다. 특히 400m 경주에서는 시작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항의가 받아들여져 재경기가 진행되었고, 그는 이 재경기에서 승리했다. 이 400m 경주에서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보이콧으로 전년도 올림픽에서는 성사되지 못했던 케냐의 마이크 보이트와의 장대한 대결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후안토레나는 이후 부상으로 인해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평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발과 등 문제가 발생하여 1977년에는 교정 수술을 받아야 했다. 1978년에는 400m에서 무패를 기록했지만, 800m에서는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는 햄스트링 부상을 포함한 여러 부상으로 훈련과 경기에 어려움을 겪었고, 400m에서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1983년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는 그의 마지막 주요 국제 대회 출전이었다. 800m 예선에서 통과한 후 트랙 안쪽을 밟아 발 골절과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그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참가를 목표로 훈련에 복귀했지만,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으로 인해 올림픽 출전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대신 그는 동구권 국가들을 위한 대체 대회인 프렌드십 게임에 참가하여 리샤르트 오스트로프스키와 함께 800m 공동 금메달을 차지했다.
4. 은퇴 후 활동

1984년 육상 선수로서 은퇴한 후, 알베르토 후안토레나는 쿠바 스포츠 행정 분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왔다. 그는 쿠바 국립 스포츠, 체육 및 레크리에이션 연구소의 부소장, 쿠바 스포츠부 차관, 그리고 쿠바 올림픽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거쳐 수석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세계 육상 연맹 이사회 위원이며, 선수 위원회 의장 및 그랑프리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직책들은 그가 쿠바 스포츠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개인 생활
후안토레나는 1972년 전 체조 선수였던 이리아와 첫 결혼을 했으며, 두 자녀를 두었다. 이후 두 번 더 결혼한 뒤 현재의 아내인 쿠바나 데 아비아시온의 직원 욜란다를 만났다. 그는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의 조카인 오스마니 후안토레나는 프로 배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2021년에는 영국의 영화 제작자 마크 크레이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혁명을 향해 달리다'(Running for the Revolution)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6. 유산과 영향력
알베르토 후안토레나는 육상 역사에 길이 남을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쿠바 스포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400m와 800m 두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육상 역사상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육상계에서 가장 어려운 이중 우승 중 하나로 평가되며, 그의 다재다능함과 탁월한 기량을 증명한다.
그는 1974년과 1976년-1978년 사이에 400m 부문에서 세계 최고 선수로 평가받았고, 1976년-1977년에는 800m 부문에서도 세계 최고로 인정받았다. 특히 1976년과 1977년에는 미국의 육상 전문지 '트랙 & 필드 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별명인 엘 카발로El Caballo스페인어('말')는 그의 강력하고 폭발적인 달리기를 상징하며, 엘 엘레간테 데 라스 피스타스El elegante de las pistas스페인어('트랙 위의 우아한 자')는 그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주법을 묘사한다. 그는 단순한 스포츠 영웅을 넘어 쿠바 혁명 이후 국가가 육성한 스포츠 인재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인식된다. 그의 업적은 쿠바 스포츠의 위상을 높이고,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며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6.1. 세계 랭킹
'트랙 & 필드 뉴스' 전문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후안토레나는 1973년부터 1982년까지 10시즌 동안 400m와 800m 단거리 종목 모두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랭크되었다.
연도 | 400m | 800m |
---|---|---|
1973 | 3위 | - |
1974 | 1위 | - |
1975 | 4위 | - |
1976 | 1위 | 1위 |
1977 | 1위 | 1위 |
1978 | 1위 | 6위 |
1979 | 5위 | - |
1980 | 10위 | - |
1981 | - | - |
1982 | - | 2위 |
6.2. 주요 개인 기록
연도 | 기록 | 세계 랭킹 | 장소 | 날짜 |
---|---|---|---|---|
1973 | 45.36 | 6위 | 모스크바 | 8월 18일 |
1974 | 44.7 | 1위 | 토리노 | 7월 24일 |
1975 | 44.80 | 2위 | 멕시코시티 | 10월 18일 |
1976 | 44.26 개인 최고 기록 | 1위 | 몬트리올 | 7월 29일 |
1977 | 44.65 | 1위 | 아바나 | 9월 13일 |
1978 | 44.27 | 1위 | 메데인 | 7월 16일 |
1979 | 45.24 | 10위 | 산후안 | 7월 12일 |
1980 | 45.09 | 6위 | 모스크바 | 7월 30일 |
1982 | 45.51 | 25위 | 코블렌츠 | 8월 25일 |
연도 | 기록 | 세계 랭킹 | 장소 | 날짜 |
---|---|---|---|---|
1976 | 1:43.50 | 1위 | 몬트리올 | 7월 25일 |
1977 | 1:43.44 개인 최고 기록 | 1위 | 소피아 | 8월 21일 |
1978 | 1:44.38 | 4위 | 쾰른 | 6월 22일 |
1979 | 1:46.4 | 24위 | 산후안 | 7월 9일 |
1981 | 1:46.0 | 20위 | 아바나 | 7월 4일 |
1982 | 1:45.15 | 14위 | 아바나 | 8월 11일 |
1983 | 1:45.04 | 18위 | 아바나 | 6월 17일 |
1984 | 1:44.88 | 22위 | 피렌체 | 6월 1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