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아리고 보이토는 1842년 2월 24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영토였던 파도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실베스트로 보이토는 귀족 출신이 아님에도 자신을 귀족이라고 칭했던 미니어처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폴란드인 백작 부인 요제피나 라돌린스카였다. 보이토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는 헤어졌고, 그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의 형 카밀로 보이토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건축가이자 공학자였으며, 뛰어난 미술 평론가, 미술사학자, 소설가이기도 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보이토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밀라노 음악원에서 알베르토 마추카토에게 음악을 사사하며 1861년까지 학업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알베르트 비세티, 아민토레 갈리 등과 동문 수학하며 예술적 교류를 나누었다. 1861년, 보이토는 동료 음악가이자 지휘자였던 프랑코 파초와 함께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에서 그는 빅토르 위고, 엑토르 베를리오즈, 조아키노 로시니, 그리고 주세페 베르디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만나 교류하며 예술적 시야를 넓혔다. 20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이토는 베르디의 칸타타 <국가들의 찬가>의 가사를 쓰는 등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다.
1866년, 보이토는 갈리, 파초, 그리고 에밀리오 프라가와 함께 주세페 가리발디 휘하에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왕국과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전쟁으로, 전쟁의 결과로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예술적 사상과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2. 예술 활동 및 경력
아리고 보이토는 작곡가, 대본 작가, 시인, 비평가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경력은 이탈리아 낭만주의 후기 예술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으며, 특히 스카필리아투라 운동과 주세페 베르디와의 협업은 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2.1. 스카필리아투라 운동
보이토는 1860년대 밀라노를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 및 문학 운동인 스카필리아투라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 운동은 기존의 보수적인 예술적 관습과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며, 보헤미아니즘적 경향을 띠었다. 스카필리아투라는 음악, 문학,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보이토는 이 운동의 선두에서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진보적인 젊은 시인으로 활동하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이탈리아에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옹호하며 당시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오페라 작곡가들을 인습에 갇힌 무지한 자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한때 주세페 베르디와의 관계를 냉각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2. 작곡가로서의 활동
보이토는 작곡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유일한 완성 오페라 <메피스토펠레>는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공연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2.2.1. 메피스토펠레
보이토의 유일한 완성 오페라인 <메피스토펠레>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하며, 보이토 자신이 직접 대본을 썼다. 이 작품은 1868년 3월 5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보이토 자신이 직접 지휘한 이 초연은 무려 56번의 리허설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야유와 휘파람, 극장 안팎에서의 소동이 뒤섞인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초연 이틀 만에 경찰은 혼란 방지라는 명목으로 공연 금지 명령을 내렸다.
당시 비평가들은 긴 연주 시간, 보이토의 미숙한 지휘, 그리고 작품 자체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서투르게 모방한 것이라는 점을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주세페 베르디조차 "그는 독창성을 갈망하지만, 그저 기이할 뿐이다"라고 평할 정도로 혹평을 받았다. 보이토는 공연을 중단하고 작품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대폭 수정되고 축소된 개정판은 1875년 4월 10일 볼로냐에서 재초연되었고, 이때 파우스트 역은 바리톤에서 테너로 변경되었다. 개정판은 훨씬 성공적이었으며, 오늘날 <메피스토펠레>는 보이토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공연되는 오페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오페라의 서곡인 '천상의 프롤로그'는 콘서트 레퍼토리로도 인기가 많다. 유명 테너 엔리코 카루소는 그의 첫 녹음 세션에 이 작품의 두 테너 아리아를 포함하기도 했다.
2.2.2. 미완성 작품 및 기타 음악
<메피스토펠레> 외에도 보이토는 오페라 <Ero e Leandro에로 에 레안드로이탈리아어>를 완성했지만, 후에 직접 파기했다. 또한 그는 1877년부터 1915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오페라 <Nerone네로네이탈리아어>를 작업했지만, 완벽주의적 성향과 느린 작업 속도 때문에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 작품은 5막 중 마지막 막의 스케치만 남은 상태였으며, 보이토 사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빈첸초 토마시니가 보완하여 1924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네로네>는 베르디의 격려로 시작된 보이토의 두 번째 오페라였다. 이 외에도 보이토는 A단조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이는 원고 형태로 남아있다. 이 두 오페라 모두 오늘날 녹음으로 접할 수 있다.
2.3. 대본 작가로서의 활동
보이토의 문학적 재능은 대본 작가로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자신의 오페라 대본뿐만 아니라 다른 위대한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집필하며 이탈리아 오페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3.1. 베르디와의 협업
주세페 베르디와 보이토의 관계는 초기에 굴곡이 많았다. 1862년 베르디의 칸타타 <국가들의 찬가>의 가사를 함께 작업한 후, 보이토는 그의 오랜 친구인 작곡가이자 지휘자 프랑코 파초를 위한 축배사에서 베르디를 불쾌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둘의 관계는 한동안 냉각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양상까지 띠었다. 베르디는 보이토를 경쟁자로 여겼으며, 보이토와 파초는 베르디를 비롯한 이탈리아 작곡가들을 인습에 갇힌 무지한 자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칭송했다.
그러나 음악 출판업자 줄리오 리코르디의 중재로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리코르디는 베르디가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다. 베르디와 보이토가 협업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베르디는 보이토의 비판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관현악법을 더욱 풍부하게 활용한 오페라가 필요하다는 보이토의 주장에 공감했다. 둘째, 베르디는 항상 훌륭한 오페라에는 뛰어난 음악뿐만 아니라 고품격 대본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오랜 친구이자 대본 작가였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를 병으로 잃은 후 유능한 대본 작가를 필요로 했다. 셋째, 보이토 자신은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쳤지만 어떤 분야에서도 거장으로 인정받을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었기에, 거장과의 협업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했다.
두 사람의 첫 협업은 베르디의 중기 대표작 <시몬 보카네그라>의 개정판 작업이었다. 베르디는 1857년에 초연된 이 작품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잡한 대본 때문에 자주 공연되지 못했다. 보이토는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대본을 더욱 명확하고 통찰력 있게 개정했고, 1881년 개정 초연된 이 작품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며 베르디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이후 두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오텔로>(1887년 초연)와 <팔스타프>(1893년 초연)에서 완벽한 협업을 이루었다. <오텔로>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팔스타프>는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과 <헨리 4세>의 일부를 기반으로 한다. 이 두 작품에서 베르디의 노련한 작곡 기법과 보이토의 예리한 문학적 감각은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팔스타프>는 베르디가 1901년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희극 오페라로, 보이토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랜 기간 동안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던 보이토는 1901년 베르디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임종을 지켰다. 이 시기 베르디와 보이토의 공동 작업 과정은 그들의 서신 왕래를 통해 엿볼 수 있다.
2.3.2. 기타 작곡가와의 협업
보이토는 베르디 외에도 여러 작곡가들의 오페라 대본을 집필했다. 그는 Tobia Gorrio토비아 고리오이탈리아어라는 필명(자신의 이름 아나그램)으로 아밀카레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1876년)의 대본을 제공했다. 또한 알프레도 카탈라니의 <La falce라 팔체이탈리아어>(1875년), 프랑코 파초의 <Amleto암레토이탈리아어>(1865년), 가에타노 코로나로의 <Un tramonto운 트라몬토이탈리아어>(1873년), L. 산 제르마노의 <Semira세미라이탈리아어>(미공연), 조반니 보테시니의 <Ero e Leandro에로 에 레안드로이탈리아어>(1879년), 루이지 만치넬리의 <Ero e Leandro에로 에 레안드로이탈리아어>(1897년), 리카르도 픽-만기아갈리의 <Basi e bote바시 에 보테이탈리아어>(1927년) 등의 대본을 썼다.
3. 개인 생활
1887년부터 1894년 사이에 보이토는 유명한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와 연인 관계를 맺었다. 그들의 관계는 보이토의 많은 귀족 친구들과 지인들 때문에 매우 비밀스럽게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서신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두 사람은 보이토가 사망할 때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보이토는 무신론자였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인 신념은 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말년 및 사망
음악 경력의 말년, 보이토는 1889년 조반니 보테시니의 사망 이후 파르마 음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1897년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 1893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로부터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수여받으며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아리고 보이토는 1918년 6월 10일 밀라노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밀라노 기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30년 후인 194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라 스칼라 극장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5. 평가 및 유산
아리고 보이토는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음악 및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예술적 기여와 영향력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된다.
5.1. 긍정적 평가
보이토는 특히 뛰어난 대본 창작 능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오페라 대본에 깊이와 섬세함을 더했으며, 이는 주세페 베르디와 같은 거장들이 그의 대본을 선호하는 주된 이유였다. 베르디의 <오텔로>와 <팔스타프> 대본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오페라 형식에 완벽하게 부합하도록 각색되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는다. 이러한 베르디와의 협업은 이탈리아 오페라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보이토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유일한 완성 오페라 <메피스토펠레>는 초연 당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개정판을 통해 오늘날까지 꾸준히 공연되며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작품의 '천상의 프롤로그'는 독립적인 콘서트 레퍼토리로도 사랑받고 있다. 보이토는 스카필리아투라 운동의 선구자로서 이탈리아 예술계에 새로운 사조를 도입하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소개하는 데 기여하며 이탈리아 음악의 국제적 시야를 넓히는 데 일조했다.
5.2. 비판 및 논란
보이토의 예술적 경력에는 비판과 논란도 존재했다. 그의 오페라 <메피스토펠레>의 1868년 초연은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혹평을 받으며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작품은 너무 길고, 보이토의 지휘는 미숙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을 서투르게 모방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주세페 베르디조차 그의 작품을 "기이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이러한 초연의 실패는 보이토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며, 그가 작곡가로서 더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보이토의 완벽주의적 성향과 느린 작업 속도는 그가 <네로네>와 같은 중요한 오페라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곡가로서의 작품 수가 매우 적다는 한계로 지적된다.
6. 영향
아리고 보이토는 이탈리아 음악 및 문학계에 다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스카필리아투라 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이탈리아 예술계에 새로운 사상과 미학을 전파했으며, 이는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고 그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발전에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가장 지대한 영향은 단연 주세페 베르디와의 협업을 통해 나타났다. 보이토는 베르디의 후기 걸작 오페라 <오텔로>와 <팔스타프>의 대본을 집필하며 베르디의 창작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본은 베르디가 새로운 음악적 표현과 극적 깊이를 탐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이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황금기를 연장하고 그 예술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베르디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희극 오페라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보이토의 권유와 협업 덕분이었다. 보이토의 이러한 기여는 그를 단순한 대본 작가를 넘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혁신을 이끈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7. 미디어에서의 묘사
아리고 보이토의 생애와 특히 주세페 베르디와의 협업은 여러 미디어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연극 <아이다 이후>(1985년, 줄리언 미첼 작): 이 작품은 음악이 가미된 연극으로, 은퇴한 베르디가 젊은 보이토와 협력하여 <오텔로>를 만들도록 줄리오 리코르디와 프랑코 파초가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 라디오 드라마 <Tell Giulio the Chocolate is Ready줄리오에게 초콜릿이 준비되었다고 전해줘영어>(2001년 11월, 머레이 담 작, 라디오 뉴질랜드 방영): 이 라디오 드라마는 베르디와 보이토의 서신 왕래를 기반으로 하며, 베르디와 보이토의 오페라 <오텔로>의 탄생과 제작 과정을 탐구한다. 드라마에는 이아고의 '크레도'와 같이 서신에 등장하는 오페라의 특정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