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베토자르 마로비치(Svetozar Marović, Светозар Маровић / Svetozar Marović스베토자르 마로비치몬테네그로어, 1955년 3월 31일 출생)는 몬테네그로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2003년부터 2006년 몬테네그로 독립 선언까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마지막 국가 원수 겸 정부 수반을 역임했다. 그는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DPS)의 공동 창립자이자 부총재로서 몬테네그로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몬테네그로 의회 의장을 세 차례 지냈다.
마로비치의 정치 경력은 복잡한 전환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옹호했으나, 이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통령 재임 중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시민들에게 과거의 악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지역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2005년 군수품 계약 스캔들에 연루되어 공공 재정 관리 부실 및 부패 의혹에 휩싸였다.
그의 말년은 부패 혐의로 얼룩졌다. 2015년 몬테네그로에서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자신이 "부드바 범죄 집단의 수장"임을 인정했다. 유죄 판결을 받기 직전 세르비아로 도피하여 현재까지 망명 생활을 하고 있으며, 몬테네그로는 그의 송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2020년에는 망명지에서 자신이 공동 창립한 DPS 지도부, 특히 밀로 주카노비치 대통령을 부패와 권위주의로 비난하며 야당을 지지하는 등 전례 없는 공개 비판을 가했다. 2022년 4월에는 미국 재무부의 발칸 관련 제재 대상 명단에 추가되며 국제적인 제재를 받게 되었다. 마로비치의 생애는 몬테네그로의 국가 건설 과정과 정치적 책임성, 그리고 부패 문제의 복잡한 유산을 보여준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2.1. 출생 및 배경
스베토자르 마로비치는 1955년 3월 31일 코토르에서 요보 마로비치와 이바나 마로비치(혼전 성: 파비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지인 코토르가 해안선을 따라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 병원이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마로비치 자신은 부드바를 고향으로 여겼으며,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요보는 그르발 지역 출신이었다. 마로비치의 정치 경력이 발전하면서 그의 대가족은 부드바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2.2. 교육
마로비치는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그는 티토그라드(현 포드고리차)에 위치한 벨리코 블라호비치 대학교 법학부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3. 초기 정치 경력
3.1. 지방 정치 및 청년 조직
마로비치는 부드바 지방 의회에서 법률 보조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곧 부드바 사회주의 청년 연맹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어서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청년 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당의 구세대에 반대하는 공개 회의를 개최하고 1984년 "선거 사기 중단(Stop Electoral Fraud)"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그는 티토그라드에서 해임되어 부드바로 돌아왔고, 공공 수입 관리자를 거쳐 부드바 지방 정부의 수장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979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부드바를 재건하는 데 기여했으며, 1987년에는 연극 감독 류비샤 리스티치와 함께 "극장 도시 부드바(Budva Grad teatar)"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3.2. 반관료주의 혁명에서의 역할
1989년 1월, 마로비치는 모미르 불라토비치와 밀로 주카노비치와 함께 몬테네그로 공산주의자 동맹 내에서 행정 쿠데타를 일으켜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의 지지 아래 "반관료주의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로비치는 부드바 지방 정부 수장직에서 물러난 후 이 혁명에 참여했다.
1990년 첫 다당제 총선에서 몬테네그로 공산주의자 동맹(SKCG)이 다수 의석을 확보한 후, 그는 몬테네그로 의회 의원이 되었고, 이후 세 차례 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선거 승리 몇 달 후, SKCG는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DPS)으로 재편되었다.
4. 정치적 부상 및 당 지도력
4.1. 사회주의자 민주당(DPS) 지도력
마로비치는 밀로 주카노비치와 모미르 불라토비치와 함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모든 정책에 충실한 지지자였으나, 1997년에는 밀로셰비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밀로 주카노비치를 따랐다. 1991년 6월 몬테네그로 공산주의자 동맹이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DPS)으로 개칭된 후, 그는 당의 서기장이 되었다. 현재 그는 집권당인 DPS의 부총재직을 맡고 있다.
4.2. 의회 경력
마로비치는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몬테네그로 공화국 의회 의장을 세 차례 역임했다. 또한 그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연방 의회 하원 의원과 몬테네그로 공화국 의회 의원을 겸했다. 1992년 6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7년에는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으로부터 몬테네그로 대통령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밀로 주카노비치에게 패배했다.
5. 부패 의혹
5.1. 모미르 불라토비치의 고발
2001년, 전 몬테네그로 대통령 모미르 불라토비치는 회고록 『침묵의 규칙(Pravila ćutanja)』을 출간하며 마로비치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1990년대 몬테네그로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석유 및 담배 밀수를 묵인하는 대가로 막대한 재정적 보상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마로비치와 불라토비치는 오랜 당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으며, 가족 간에 대부 관계를 맺을 정도로 친밀한 유대 관계를 공유했다.
두 사람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살고 개인적, 정치적 인맥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10년 동안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불라토비치는 책에서 1990년대에 마로비치에게 부패 문제로 따져 물었던 사적인 대화를 묘사하며 마로비치의 답변을 인용했다: "모미르, 당신은 몬테네그로 최초의 대통령이고, 그것이 당신이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이오. 나는 내 자녀에게 더 구체적인 것을 남기고 싶소."
마로비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 책을 읽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거짓과 비방에 대해 침묵하는 규칙"을 배웠다고 덧붙였다.
6.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통령 재임 (2003-2006)

6.1. 국가 원수로서의 역할과 도전
2003년 3월, 마로비치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06년 6월 3일 몬테네그로의 독립 선언으로 국가 연합이 해체될 때까지 재임했다. 그는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대통령직을 맡았으며, 동시에 드라기샤 페시치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장관평의회의 수반 역할도 수행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는 느슨한 국가 연합의 수장으로서 마로비치가 처한 입장은 매우 복잡하고 독특했다. 그는 자신이 부총재로 있는 당인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DPS)이 국가의 해체를 지지하는 선봉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DPS는 몬테네그로 분리주의 운동의 주도 세력이었고, 당 총재인 밀로 주카노비치는 저명한 몬테네그로 민족주의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로비치가 자신의 행정부의 견해와 대통령으로서 국가 연합의 이익을 지속해야 하는 의무를 조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임기는 2003년 3월 7일부터 2006년 6월 3일까지였다. 국가 연합 해체 이후에는 직책이 폐지되었고, 세르비아에서는 보리스 타디치가, 몬테네그로에서는 필리프 부야노비치가 각각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총리직 역시 세르비아에서는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가, 몬테네그로에서는 밀로 주카노비치가 이어받았다.
6.2. 외교적 사과와 화해
마로비치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시민들과의 화해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2003년 9월 10일, 크로아티아 대통령 스티페 메시치의 베오그라드 국빈 방문 중, 마로비치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의 어떤 시민이든 크로아티아의 누구에게든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메시치 대통령도 이에 화답하여 "크로아티아 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고통이나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 상호 사과를 전달했다.
이러한 사과는 마로비치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는 그가 1990년대 초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악명 높은 문구의 창시자였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이 문구를 사용하여 1991년 몬테네그로 예비군이 두브로브니크와 코나블레를 공격한 것을 묘사하고 정당화했다.
2003년 11월 13일, 그는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다시 한번 사과를 발표했다. 이번에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대표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시민들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누구라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출신 누군가에게 당한 모든 악행이나 재난"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몇 달 전 스티페 메시치와는 달리, 사라예보의 주최 측인 보스니아의 3인 순환 대통령단 구성원들은 어떠한 종류의 사과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6.3. 군수품 스캔들
2005년 9월, 군수품 스캔들이 터지면서 마로비치는 심각한 부패 의혹에 휩싸였다. 9월 1일, 세르비아 재무부 장관 믈라잔 딘키치는 기자회견을 열어 스베토자르 마로비치가 서명한 군사 계약서를 공개했다. 이 계약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장관평의회와 즈레냐닌의 밀레 드라기치 회사 간의 5년 계약으로,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군(VSCG)에 장비를 공급하는 조건을 명시하고 있었다。딘키치 장관은 "28,000명 규모의 군대에 69,000개의 헬멧과 60,000개 이상의 방탄복이 주문되었으며, 겨우 30대 남짓한 항공기를 위해 전투기 조종사 재킷 500개가 주문되었다!"고 폭로했다.
주된 책임은 당시 국방부 장관 프르보슬라브 다비니치에게 있었지만, 마로비치 역시 명백히 부풀려진 계약에 서명하여 이를 합법화함으로써 세르비아 납세자들에게 2.96 억 EUR의 비용을 초래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산 위원회가 딘키치의 주장을 확인한 후, 그는 2005년 9월 15일 "마로비치와 다비니치가 모든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말하며 국방부 및 군 관계자 몇 명을 더 연루시켰다. 다비니스는 결국 사임했고, 문제가 된 계약은 취소되었다. 그러나 마로비치는 서면 성명을 통해 딘키치를 "명예훼손 및 국가 연합 기관 파괴" 혐의로 비난하며 반격했다. 그는 성명에서 "국가 연합의 대통령으로서 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그들은 누구도 비난하거나, 고소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직 나만을 비난하고 고소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에 대해 가진 모든 것을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당 조사관이나 일시적인 장관 경력으로 압박하는 국내 법원이 아닌, 가장 훌륭하고 경험 많고 유능하며 가장 높은 보수를 받고 가장 존경받는 유럽 및 세계 조사관과 법원에 모든 것을 제출해야 하며, 그러면 그들은 스베토자르 마로비치가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답변을 얻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며칠 동안 마로비치 내각의 구성원, 몬테네그로 정권 관계자들, 그리고 밀로 주카노비치 총리 자신까지 모두 베오그라드에서 모든 몬테네그로 직원들을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상황이 다소 진정되자 딘키치는 "예산 조사가 국방부 내에서 많은 방해를 받았다"고 발표했지만, "문제를 종결하고 책임자들을 재판에 회부할 것"이라고 단호히 밝혔다. 그 책임자들이 다비니치와 마로비치를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는 딘키치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검찰청은 필요한 만큼 지휘 계통을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6.4.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한 입장
마로비치의 소속 정당인 DPS는 몬테네그로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했으며, 마로비치 또한 2006년 몬테네그로 독립 국민투표에서 "찬성" 투표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이는 그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국가의 해체를 지지하는 독특한 입장에 놓이게 했다. 국민투표 통과 후 마로비치는 2006년 6월 1일에 "장관평의회의 마지막 회의를 개최하고 국가 연합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7. 대통령 퇴임 후 및 후기 정치 활동
7.1. DPS 내에서의 지속적인 역할
2007년, 스베토자르 마로비치는 새로운 의제를 가지고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의 부총재로 재선되었다.
7.2. 헌법 협상 참여
2007년 10월, 그는 새로운 몬테네그로 헌법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DPS-SDP 협상팀을 이끌었다. 합의에 따르면 공식 언어는 몬테네그로어로 명명되며, 라틴 문자와 키릴 문자가 모두 공식 문자로 사용된다. 또한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알바니아어, 크로아티아어도 인정되었다. 몬테네그로는 몬테네그로인의 국가가 되며,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도 헌법에 명시될 예정이다. 교회는 국가와 분리되며, 헌법에 언급되지 않는다. 몬테네그로 시민은 이중 국적을 가질 수 없지만, 독립 선언 채택 이전에 다중 국적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를 유지할 수 있어, 사실상 세르비아에 거주하는 몬테네그로인들은 이중 국적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와 비정규 몬테네그로 정교회 간의 갈등이 있는 동안, 마로비치는 정식으로 인정받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8. 부패 혐의, 체포 및 망명
8.1. 체포 및 법적 절차
2016년, 당시 집권당인 몬테네그로 사회주의자 민주당의 부총재였던 스베토자르 마로비치는 그의 고향인 부드바와 관련된 오랜 부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몬테네그로 검찰은 그를 "부드바 범죄 집단의 수장"으로 지목했으며, 그는 훗날 법정에서 이를 인정했다. 2017년 8월 18일에는 그의 가족 자산이 동결되었다.
8.2. 세르비아 도피 및 송환 분쟁
마로비치는 2017년 유죄 판결을 받기 직전, 치료를 명목으로 이웃 국가인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로 도피하여 현재까지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에 그의 송환을 반복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8.3. 전직 당 지도부에 대한 공개적 비판
2020년 8월, 마로비치는 베오그라드로 도피한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이 공동 창립한 당의 지도부가 부패, 족벌주의, 당파주의, 권위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한 밀로 주카노비치 대통령이 자신과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부패 수사를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암필로히예 라도비치 주교와 2019-2020년 몬테네그로 성직자 시위를 지지했으며, 2020년 몬테네그로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를 이끈 야당들을 지지했다. 그는 "주카노비치는 몬테네그로가 DPS에 투표하는 사람들만의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 이제 변화의 때이다"라고 언급했다.
9. 제재 및 국제적 인정
9.1. 미국 재무부 지정
2022년 4월, 마로비치는 미국 재무부의 발칸 관련 제재 대상인 특별 지정 국적자 명단(Specially Designated Nationals List)에 추가되었다. 이는 그의 부패 혐의와 관련된 국제적 제재를 의미한다.
10. 개인적인 삶
10.1. 가족 및 관계
스베토자르 마로비치는 지나 프렐레비치(Đina Prelević)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밀로스(Milos)라는 아들과 밀레나(Milena)라는 딸, 두 명의 성인 자녀가 있다. 아들 밀로스는 부드반스카 리비예라(Budvanska Rivijera) 소속의 프로 배구 선수이다. 밀로스는 2006년 새해 전야 부드바의 트로카데로 나이트클럽에서 크로아티아 유명 가수 세베리나 부치코비치(Severina Vučković)의 공연 중 발생한 싸움에 연루되어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11. 유산 및 평가
11.1. 역사적 및 정치적 영향
스베토자르 마로비치의 정치 경력은 몬테네그로의 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행동은 국가의 정치 지형, 거버넌스, 그리고 대중의 신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마지막 국가 원수로서 국가 연합의 해체를 감독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몬테네그로 독립을 지지하면서도 연합의 수장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그의 이중적인 입장은 당시 몬테네그로의 복잡한 정치적 열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외교적 사과는 지역 화해를 위한 중요한 제스처였으나, 1990년대 초 두브로브니크 공격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정당화했던 과거 발언과 대비되어 그의 정치적 유산에 복합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러한 모순은 그가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겪었던 이념적, 정치적 전환을 반영한다.
가장 비판적인 부분은 그의 부패 혐의와 그로 인한 법적 문제이다. 2005년 군수품 스캔들에서 드러난 공공 재정의 막대한 손실과 그의 연루 의혹은 국가 거버넌스의 투명성과 책임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2015년 체포와 법정에서의 자백, 그리고 세르비아로의 도피는 그가 "부드바 범죄 집단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며 몬테네그로 정치 엘리트의 부패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는 몬테네그로 국민의 공공 기관에 대한 신뢰를 크게 훼손시켰다.
망명 후 그가 자신의 전직 당 지도부, 특히 밀로 주카노비치에 대해 가한 공개적인 비판은 비록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으나, 오랜 기간 집권해 온 사회주의자 민주당 내부의 부패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했다. 2022년 미국 재무부의 제재 대상 지정은 그의 부패 행위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며, 이는 그의 유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더했다.
결론적으로, 스베토자르 마로비치는 몬테네그로의 독립과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한 주요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경력은 권력 남용, 부패, 그리고 책임 회피의 전형을 보여주며 몬테네그로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발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그의 유산은 국가적 화합과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