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배경
윌리엄 켄라이트는 리버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교육을 그곳에서 보냈다.
1.1. 어린 시절
켄라이트는 리버풀에서 태어나 북커 애비뉴 카운티 초등학교에 다녔다. 이후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이는 현재의 리버풀 공연 예술 대학교(LIPA)의 전신이다. 그는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이 학교에 재학했으며, 학창 시절에는 기독교 연합의 회계를 맡기도 했다.
1.2. 교육
켄라이트는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에서 명예 펠로우십을, 웨스트 런던 대학교에서 명예 교수를 역임했다. 2008년 11월에는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로부터 영국 연극에 대한 탁월한 기여와 헌신을 인정받아 명예 문학박사 학위(D.Litt.)를 수여받았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빌 켄라이트는 연극, 영화, 음악, 그리고 배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2.1. 연극
켄라이트는 수많은 연극 작품을 제작하고 연출하며 영국 연극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1. 프로듀서
켄라이트는 웨스트 엔드의 장기 흥행작인 블러드 브라더스와 영국 전국 투어에서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 조셉 앤 디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의 프로듀서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제작한 다른 작품들로는 팰리스 극장에서 상연된 휘슬 다운 더 윈드, 런던, 영국 투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페스텐, 빅 라이프, 엘미나의 키친, 스크루지 - 더 뮤지컬, 이구아나의 밤, 어 퓨 굿 맨, 어 맨 포 올 시즌스 등이 있다. 또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토미, 텔 미 온 어 선데이, 디스 이즈 엘비스 등의 영국 투어 작품들도 그의 손을 거쳤다. 2006년 9월, 그는 리릭 시어터에서 애나 맥스웰 마틴, 제임스 드라이퓨스, 쉴라 핸콕이 출연한 카바레 런던 리바이벌 공연을 제작했다.
주요 뮤지컬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페임 - 영국 전국 투어 (2014)
- 블러드 브라더스 - 피닉스 극장, 런던 및 영국 전국 투어 (헬렌 홉슨, 스티븐 호턴 주연)
- 카바레 - 사보이 극장, 런던 (윌 영, 미셸 라이언, 시안 필립스 출연)
- 조셉 앤 디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 - 영국 전국 투어 (조 매켈더리 주연)
- 오즈의 마법사 - 런던 팔라디움, 런던 (2011)
- 지킬 앤 하이드 - 영국 전국 투어 (2011)
- 에비타 - 월드 투어 (마달레나 알베르토, 지안 마르코 스키아레티 주연, 2018)
2.1.2. 연출
켄라이트는 블러드 브라더스와 휘슬 다운 더 윈드를 포함한 여러 작품들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앤드루 로이드 웨버로부터 러브 네버 다이즈의 연출 변경을 요청받기도 했다. 그는 또한 2018/19년 새터데이 나이트 피버 영국 투어 공연을 제작하고 연출했으며, 이 공연에서 리처드 윈저가 토니 마네로 역으로 출연하여 상징적인 "스테잉 얼라이브" 춤을 "더 니브레이커"로 연기하고, 1997년 알렌 필립스가 만든 "스테이지 포즈"를 선보였다.
2.1.3. 연극 산업에 미친 영향
켄라이트는 마크 루빈스타인, 마크 신든을 포함한 현재 웨스트 엔드 극장 프로듀서들의 경력 시작에 도움을 주었다. 그가 한 해에 고용한 배우의 수는 BBC 다음으로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연극 산업 내에서 그의 중요한 고용주로서의 역할을 시사한다.
2.2. 영화 제작
켄라이트는 연극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2.2.1. 필모그래피
그가 프로듀서 또는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영화 목록은 다음과 같다.
- 2024년 Please Don't Feed the Children (프로듀서)
- 2023년 The Shepherd (프로듀서)
- 2019년 The Fanatic (프로듀서)
- 2017년 My Pure Land (프로듀서)
- 2012년 Broken (프로듀서)
- 2011년 Dixie: The People's Legend (총괄 프로듀서, 후반 작업 중)
- 2009년 Chéri (프로듀서)
- 2004년 The Purifiers (프로듀서)
- 2003년 The Boys from County Clare (총괄 프로듀서)
- 2003년 Die, Mommie, Die! (프로듀서)
- 2001년 Zoe (프로듀서)
- 1999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프로듀서)
- 1991년 Stepping Out (총괄 프로듀서)
2.3. 음악 경력
켄라이트는 자신의 음반 레이블을 운영하고 개인적인 음악 활동을 하는 등 음악 산업에서도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2.3.1. 음반 레이블 및 발매
켄라이트는 자신의 음반 레이블인 빌 켄라이트 레코드(Bill Kenwright Records빌 켄라이트 레코드영어)를 설립하여 여러 앨범을 발매했다. 여기에는 런던 팔라디움에서 공연된 스크루지의 오리지널 캐스트 앨범(토미 스틸 주연)과 2006년 리릭 시어터의 카바레 앨범이 포함된다. 2008년 2월에는 켄라이트가 새로 만든 보이그룹 드림 온(Dream On드림 온영어)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었다. 빌 켄라이트 레코드는 또한 조 매켈더리의 네 번째 앨범 Saturday Night at the Movies와 조가 조셉 노래를 부른 사운드트랙도 발매했다.
드림 온은 BBC One의 TV 시리즈 Any Dream Will Do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던 다섯 명의 참가자(크레이그 찰머스, 루이스 브래들리, 크리스 크로스비, 크리스 바턴, 안토니 핸슨)로 구성되었으며, 2008년 1월에 결성되었다.
2.3.2. 공연 및 제작 활동
켄라이트는 쉐브롤레츠(The Chevrolets더 쉐브롤레츠영어)라는 밴드에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솔로 가수로서, 그리고 그룹 빌 켄라이트 앤 더 런어웨이즈(Bill Kenwright and The Runaways빌 켄라이트 앤 더 런어웨이즈영어)의 멤버로서 여러 음반을 발매했다. 빌 켄라이트 앤 더 런어웨이즈는 1967년 8월 "I want to go back there again"/"Walk through dreams"를 발표했다. 빌 켄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도 했는데, 1968년 7월 "Love's Black & White"/"Giving Up", 1968년 11월 "Tiggy"/"House That Fell on its Face", 1969년 1월 "Baby I Could Be So Good at Loving"/"Boy & a Girl", 1969년 10월 "Sugar Man"/"Epitaph"/"When Times Were Good" 등의 싱글을 발표했다.
1969년에는 음반 제작에도 손을 대어 맨체스터 밴드 머니(Money머니영어)의 싱글 두 곡을 프로듀싱했다. 머니는 올덤과 리버풀의 앨린슨에서 열린 여러 카바레 공연에서 켄라이트의 백 밴드로 활동하기도 했다. 첫 번째 음반인 "Come Laughing Home"은 켄라이트의 첫 연극 제작 작품의 타이틀 음악으로 사용되었으며, 레지널드 마시와 공동 제작했다. 이 쇼에는 당시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에서 발레리 발로우 역으로 출연하던 앤 리드가 주연을 맡았다. 이 작품은 블랙풀의 그랜드 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 싱글은 아르헨티나에서도 발매되었다.
2.4. 배우 경력
젊은 시절 켄라이트는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2.4.1. 텔레비전 및 영화 출연
그의 초기 성공작 중 하나는 1968년 4월에 소개된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의 고든 클레그(Gordon Clegg고든 클레그영어) 역이었다. 켄라이트는 프로듀싱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1969년 3월에 이 쇼를 떠났지만, 1970년대에는 가끔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2012년까지도 간헐적으로 코로네이션 스트리트에 모습을 비췄다. 그는 또한 빌런스와 리버 버즈 같은 다른 쇼에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로는 1972년 Carry On Matron에서 기자 역할로, 1995년 England, My England에 출연했다. 1997년부터는 윈저의 왕립 극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3. 에버턴 FC
빌 켄라이트는 에버턴 FC의 이사회에 오랫동안 참여했으며, 특히 회장으로서 구단의 사업 운영과 재정에 깊이 관여했다.
3.1. 구단주 및 사업 거래
켄라이트는 1989년 10월 23일부터 2023년 사망할 때까지 에버턴 축구 클럽 이사회에 재직했으며, 필립 카터의 뒤를 이어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1999년 피터 존슨이 축구 협회로부터 트랜미어 로버스 또는 에버턴에 대한 지분을 매각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그의 지분을 매입하여 두 번째로 큰 주주가 되었다. 2004년에는 구단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1994년, 켄라이트는 에버턴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에 참여하여 피터 존슨의 컨소시엄과 경쟁했다. 켄라이트의 컨소시엄은 에버턴 구단주 가문인 무어스 가문의 수장인 그랜체스터 여사로부터 구단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그러나 켄라이트의 제안은 리버풀 에코에 의해 "맨체스터 컨소시엄"으로 폄하되었고,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지역 라이벌 의식 때문에 지지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켄라이트의 컨소시엄에는 맨체스터 기반의 톰 캐논, 토니 타이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토니 타이는 나중에 에버턴 컬렉션을 만들게 된다. 마이크 다이블과 체셔 기반의 건설 거물 아서 애버크롬비도 참여했다. 애버크롬비는 선수 구매를 위해 구단에 200.00 만 GBP의 무이자 대출을 제안했다. 당시 10년간 에버턴 이사였던 켄라이트는 이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기회가 있었지만, 더 부유한 존슨과의 PR 전쟁을 원치 않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론인 데이비드 콘과의 인터뷰에서 타이는 "빌은 공개적인 논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언론에 많이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사회가 만장일치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보기에, 에버턴의 이름이 논란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피터 존슨의 입찰이 에버턴 이사회에 의해 수락되었고, 존슨은 켄라이트를 부회장으로, 필립 카터 경을 회장으로 재선임했다.
1999년, 켄라이트의 컨소시엄은 피터 존슨으로부터 에버턴 FC 지분 68%를 2000.00 만 GBP에 매입했다. 2000년 1월에는 트루 블루 홀딩스(True Blue (Holdings) Ltd트루 블루 홀딩스영어)라는 지주회사가 설립되었고, 이 회사에는 폴 그레그, 지미 멀빌, 존 우즈, 윌리 러셀 등이 주주로 참여했다가 2004년에 해산되었다. 미히르 보스(Mihir Bose미히르 보스영어)는 아니타 그레그가 켄라이트에게 최대 700.00 만 GBP를 대출해 주었다고 보도했다. 거래가 완료된 후 켄라이트는 "피터 존슨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은 위대한 클럽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첫 단계에 불과하다. 성공적인 축구 클럽을 운영하려면 현실적이고 계획이 있어야 한다. 나는 현실적이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003년, 그는 에버턴을 강변의 킹스 독으로 이전하려고 시도했으나, 제안된 재정 문제와 웨인 루니 매각을 둘러싸고 이사 폴 그레그와 공개적인 불화가 발생하면서 이전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레그는 루니를 구단에 남겨두기를 원했지만, 켄라이트는 구단의 재정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루니를 매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마지못해 판단했다. 폴과 아니타 그레그는 나중에 자신들의 지분을 플로리다 기반 사업가 로버트 얼에게 매각했다. 켄라이트의 절친한 친구인 필립 그린이 구단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3.2. 회장직 및 구단 운영
2004년 6월 1일, 켄라이트는 에버턴 축구 클럽의 회장이 되었다. 같은 날, 트레버 버치가 전임 마이클 던포드의 뒤를 이어 최고 경영자로 임명되었다. 켄라이트는 버치가 자신의 "조언자"가 될 것이며, 새로운 최고 경영자가 "축구 클럽의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켄라이트는 버치가 구단을 매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투자자가 "구단을 운영할 돈이 있다면" 자신의 지분을 가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버치는 6주 후인 2004년 7월에 사임했다. 그는 트루 블루 홀딩스(켄라이트, 우즈, 그레그, 애버크롬비)와의 회의에서 이사회가 구단을 매각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 사임했다. 그레그는 다른 이사들이 통제권을 포기하기를 거부하여 구단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켄라이트는 2007년 ITV와의 인터뷰에서 구디슨 파크가 곧 경기장 안전 인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커크비로 구단을 이전하고 싶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데스티네이션 커크비(Destination Kirkby데스티네이션 커크비영어)로 알려진 제안의 일부로, 테스코 슈퍼마켓과 소매 단지를 포함했다. 이 프로젝트 추진으로 인해 소수 주주들은 2008년 임시 주주 총회(EGM) 소집을 요구했다. 임시 주주 총회가 확정된 후, 키스 와이네스는 사임하고 내부에서 로버트 엘스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켄라이트는 소매 업계의 리더인 필립 그린 경과 테리 리히 경으로부터 사업 자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소수 주주들은 여러 가지 우려로 인해 구단이 이 프로젝트를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켄라이트와 다른 대다수 주주들은 1주 1표 원칙을 이용하여 이 결의안을 부결시키고 프로젝트를 강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국무장관의 재검토를 거쳤으며, KEIOC와 같은 반대 단체의 증언을 들은 후 공청회를 통해 프로젝트를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2008년 4월, 그는 리버풀 기반의 제작사 타바큘라가 제작한 에버턴의 전설 딕시 딘에 대한 다큐멘터리 Dixie: The People's Legend 제작에 동의했다.
3.3. 재정 및 투자 문제
2004년 8월, 브루나이 기반의 펀드인 포트리스 스포츠 펀드(Fortress Sports Fund포트리스 스포츠 펀드영어, FSF)가 에버턴 지분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이사 폴 그레그와의 공개적인 불화 이후, 그레그의 지분 및 다른 주주들의 지분이 이 펀드에 매각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켄라이트와 에버턴 이사 존 우즈는 투자를 수용하는 데 찬성했지만, 폴 그레그는 회의적이었으며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그레그는 펀드가 자신의 투자를 저평가하고 있다고 믿었고, 펀드의 입찰 가격은 구단의 29.9%에 대해 1280.00 만 GBP로 알려졌다.
2005년 2월, 키스 와이네스는 구단이 다른 잠재적 투자자를 찾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2005년 4월, FSF의 사무엘슨은 "펀드가 완료되어 등록되었다"고 밝혔지만, 에버턴 이사 폴 그레그는 FSF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이사로서 나는 자금 증명이나 심지어 그들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리버풀 에코는 FSF 상황을 "소동"이라고 묘사했다. 폴 그레그는 자신이 "잘못된 길로 인도되었고 전체 과정이 구단에 망신을 주었다"고 밝혔다. 사무엘슨은 자금이 준비되어 있다고 거듭 강조하며 "펀드는 승인되었고 준비되었다. 나는 펀드의 법인 설립 증명서를 받지 못했지만,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FSF 펀드를 확정하기 위해 임시 주주총회가 필요하다고 언급했으나, 임시 주주총회는 소집되지 않았고 FSF의 에버턴 투자 문제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2005년 11월 다음 연례 총회에서 켄라이트는 사무엘슨에 대해 "나는 그가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구단에 좋은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로 된 것을 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나는 이 구단의 재정 확보를 위해 하루 24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회의를 했고, 어제는 세 번의 회의를 가졌다. 모두 내 지분을 희석시킬 돈과 관련된 것이지만, 나는 그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덧붙였다.
4. 사생활
켄라이트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배우 아누스카 헴펠과 결혼했다. 배우 버지니아 스트라이드와의 관계에서 딸과 두 명의 손주를 두었다. 켄라이트는 2023년 사망할 때까지 배우 제니 시그로브와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사람은 런던에 거주했다. 웨스트 엔드 극장 홍보 담당자인 애덤 켄라이트는 그의 조카이며, 광고 및 마케팅 회사인 아카(aka아카영어)를 운영하고 있다.
5. 사망
2023년 10월 12일, 에버턴 구단은 켄라이트의 건강 상태에 대해 "8월 초 진단에 따라 켄라이트 씨는 6주 전 간에서 암성 종양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완전히 성공적이었으나, 수술 중 합병증으로 인해 중환자실에서 장기간 입원해야 했다"고 밝혔다. 또한 "회복 기간은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완전한 회복이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켄라이트는 2023년 10월 23일, 78세의 나이로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고가 가디언에 실린 후, 한 독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게시했다. "저는 1963년쯤 국립 청소년 극장에서 함께 지낸 이후 빌 켄라이트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의 걸쭉한 머지사이드 악센트는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우리가 오래전에 사라진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했던 리처드 3세에서 그의 3번째 사자(使者)의 대사를 듣기 위해 배우들이 인터폰을 기다리거나 날개 쪽으로 몰려가던 생생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의 평평한 모음으로 'By sudd'n fludds, Buckin-gum's ahhmee is dispehhhrsed 'n' scatta'd'라고 소식을 전하는 것을 글로 음성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2023년 10월 26일, 영국 전역의 극장들은 켄라이트를 추모하기 위해 2분간 불을 끄는 행사를 가졌다.
6. 서훈 및 수상
빌 켄라이트는 그의 생애 동안 여러 영예와 인정을 받았다.
6.1. 명예 및 훈장
켄라이트는 2001년 새해 서훈 명단에서 영화 및 연극에 대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수훈했다. 이 외에도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명예 펠로우십을, 웨스트 런던 대학교의 명예 교수를 역임했다. 2008년 11월에는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로부터 영국 연극에 대한 뛰어난 기여와 헌신을 인정받아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2014년 1월 3일, 켄라이트는 BBC 쇼 Pointless Celebrities에 출연하여 파트너 제니 시그로브와 함께 결승에 진출해 트로피를 획득했다. 비록 2500 GBP의 상금은 받지 못했지만, 이는 그의 대중적 인기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7. 평가 및 영향
빌 켄라이트는 연극, 영화, 음악, 그리고 스포츠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업적과 행동은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7.1. 긍정적 평가
켄라이트는 영국 연극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블러드 브라더스와 조셉 앤 디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와 같은 장기 흥행작을 성공시키며 수많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특히 그가 BBC 다음으로 많은 배우를 고용했다는 추정은 연극 배우들의 경력 유지와 개발에 그가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마크 루빈스타인과 마크 신든과 같은 후배 프로듀서들의 성장을 도우며 연극 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에 기여했다.
에버턴 FC의 회장으로서 그는 20년 가까이 구단에 헌신하며 구단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비록 여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열렬한 에버턴 서포터로서 구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장기간 회장직을 유지하며 구단의 안정성을 확보하려 했다.
7.2. 비판 및 논란
켄라이트는 에버턴 FC의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여러 차례 재정 및 운영상의 논란에 휘말렸다. 특히 2003년 킹스 독으로의 경기장 이전 시도는 재정 문제와 핵심 선수 웨인 루니의 매각을 둘러싼 이사회 내 불화로 무산되었는데, 이는 구단의 장기적인 비전을 흔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포트리스 스포츠 펀드의 투자 유치 실패 과정에서는 펀드의 존재와 자금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며 "소동"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2008년 커크비로의 경기장 이전 프로젝트(데스티네이션 커크비) 추진 과정에서는 소수 주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주 1표" 원칙을 내세워 강행하려 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공청회를 통해 부결되었으나, 이는 구단 운영 방식에 대한 투명성 및 소수 주주 의견 무시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재정적, 운영적 문제들은 켄라이트의 리더십 하에 에버턴이 장기간 재정적 어려움과 경기장 문제에 시달렸다는 비판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7.3. 영향력
빌 켄라이트는 연극, 영화, 음악, 그리고 축구라는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영국 문화 및 스포츠 산업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연극 제작은 수많은 작품을 흥행시키며 대중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고, 배우 고용에 대한 기여는 연극계의 중요한 부분을 지탱했다. 또한 에버턴 FC의 회장으로서 프리미어리그 구단의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구단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은 오랜 기간 회자될 것이다. 그의 다재다능한 경력과 여러 산업에 걸친 활약은 그를 단순한 사업가를 넘어선 문화적 아이콘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