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즈하라 시게루는 일본 프로 야구의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전설적인 인물로,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달성했다. 현역 시절에는 도쿄 교진군에서 활동하며 팀의 JBL 우승을 9차례 이끌었다. 특히 1942년에는 최고 수훈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시베리아 억류라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포로 수용소에 야구를 전파하는 등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감독으로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에이 플라이어스, 주니치 드래건스를 지휘하며 통산 1,586승 1,123패, 승률 0.585의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요미우리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며 8차례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4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도에이 감독 시절에는 퍼시픽 리그 팀을 재건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양대 리그에서 모두 정상에 오른 유일한 감독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의 리더십과 선수 육성 철학은 일본 야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1977년에는 일본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며 일본 야구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평을 제공했으며, 1982년에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미즈하라 시게루는 1909년 1월 19일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미즈하라'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야구를 시작한 것이 당시의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분 전환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생전 인터뷰에서 "야구가 없었다면, 이처럼 불우한 가정 환경 때문에 (인생을) 놓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밝히며 야구가 그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드러냈다.
2.1. 학창 시절
미즈하라는 구제 다카마쓰 상업학교 재학 시절, 선배인 미야타케 사부로 (훗날 한큐의 초대 주장)와 함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여 투수와 3루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25년 여름(제11회 전국 중등학교 우승 야구 대회)과 1927년 여름(제13회 전국 중등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 걸쳐 두 차례나 고시엔에서 전국 우승을 달성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즈하라와 미야타케는 나란히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진학하여 돈독한 선후배 관계이자 팀 동료로서 활약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시절, 미즈하라는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스타 선수로 큰 인기를 누렸고, 춘계 및 추계 리그에서 통산 5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린고 사건'과 마작 도박에 연루되어 야구부에서 제명되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기도 했다. 타자로서 대학 리그 통산 63경기에 출전하여 193타수 48안타, 타율 0.249, 0홈런, 24타점을 기록했으며, 투수로서는 통산 30경기에 등판하여 13승 8패를 기록했다. 야구부에서 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즈하라는 훗날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게이오 스포츠 신문 협회가 발행하는 학생 신문 '게이오 스포츠'의 제자를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미하라 오사무와 대학 시절부터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1931년 6월 14일 소케이센 2차전에서 미즈하라가 마운드에 올랐을 때, 미하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담한 홈스틸을 성공시켜 와세다 대학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홈스틸은 소케이센 역사상 가장 명장면 중 하나로 회자된다.
2.2. 선수 경력
미즈하라는 1931년과 1934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팀이 일본에 방문했을 때 전일본팀 멤버로 선정되어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6년 가을,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인 도쿄 교진군에 입단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입단 후 마에카와 하치로를 대신하여 주전 3루수로 자리매김했으며, 주로 2번 또는 3번의 상위 타선에서 활약했다. 1937년 추계 리그에서는 타율 0.290과 31타점을 기록하며 팀 내에서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사와무라 에이지가 징집으로 팀을 떠난 1938년 추계 리그에서는 투수로서도 마운드에 올라 빅토르 스타루힌에 이어 8승 2패, 평균자책점 1.76으로 리그 2위를 기록하는 등 만능 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39년부터는 팀의 주장을 맡았고, 1940년에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42년에는 시즌 도중 8월에 징집으로 인해 팀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높은 인망 덕분에 최고 수훈 선수(MVP)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1950년까지 JBL 소속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49년 7월 20일, 시베리아 억류에서 풀려나 마이즈루항을 통해 귀국한 미즈하라는 나흘 뒤 10시 30분 도쿄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고라쿠엔 구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열리는 다이에이 유니온스와의 더블헤더 경기를 앞두고 팬들 앞에 "미즈하라 시게루, 지금 돌아왔습니다"라고 외치며 귀환을 알렸다. 당시 그는 이미 40세였지만, 그의 플레이를 다시 보고 싶다는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요미우리 구단의 요청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억류 중 겪었던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신체적 쇠약이 심하여 복귀한 1949년 시즌에는 공식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1950년 양대 리그 제도가 도입되면서 선수 겸임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그 해 정규 시즌에서도 겨우 7경기에만 출전하는 데 그쳤다.
2.3. 군 복무 및 포로 경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즈하라는 징집되어 아시아 대륙으로 파병되었고, 이후 소련군에게 붙잡혀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하게 된다. 시베리아의 포로 수용소에서 그는 극도의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수용소 내에서 동료 포로들과 함께 야구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억류했던 소련군에게까지 야구를 전파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와 역경을 극복하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야구관과 리더십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3. 감독 경력
미즈하라는 선수 은퇴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에이 플라이어스, 주니치 드래건스의 감독을 역임하며 일본 프로 야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는 총 21년간 감독 생활을 하며 통산 1,586승 1,123패 73무승부, 승률 0.585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특히 19회의 A클래스(상위권) 진입과 5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요미우리에서 4회, 도에이에서 1회)은 그의 지도력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업적이다. 그의 지도 철학은 단순히 승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육성하며 팀워크를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프로 정신과 승리에 대한 집념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며 팀의 전력을 강화하고, 당대의 야구 흐름을 선도하는 혁신적인 전술을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3.1.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시절
1949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내부에서 미하라 오사무 당시 감독에 대한 선수들의 배척 소동이 일어났고, 이 흐름에 따라 1949년 12월 31일 미즈하라가 제7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49년 팀을 전후 첫 우승으로 이끌었던 미하라는 총감독으로 밀려났다. 이 사건은 미하라가 미즈하라를 대우하는 방식에 불만을 품었던 선수들이 사실상 지휘권을 빼앗은 '쿠데타'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미즈하라 본인은 이러한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우승으로 이끈 감독이 물러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며 감독 취임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선수 겸임 감독이었던 1950년 시즌에는 팀이 3위에 머물렀지만,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리그 3연패와 일본 시리즈 3연패를 동시에 달성하며 요미우리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열었다. 당시 팀에는 요나미네 가나메, 가와카미 데쓰하루, 치바 시게루, 히로타 준, 벳쇼 다케히코 등 당대 최고의 명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1954년에는 스기시타 시게루를 앞세운 주니치 드래건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고 2위로 만족해야 했다.
미즈하라 감독은 요미우리에 부임한 지 4년째인 1953년부터 유니폼에 검은색과 주황색의 팀 컬러를 도입했는데, 이는 뉴욕 자이언츠를 참고한 것이었다. 1955년에는 다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55년 일본 시리즈에서 난카이 호크스와 네 번째로 맞붙었다. 요미우리는 1차전에서 승리했지만 2차전부터 3연패를 당하며 위기에 몰렸다. 미즈하라는 5차전에 앞서 후지오 시게루를 포수로, 나이토 히로후미를 2루수로, 가쿠라이 미노루를 좌익수로 기용하는 등 젊은 선수들을 과감하게 발탁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요미우리는 3연승을 거두며 일본 시리즈를 역전 우승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이 시기 1955년 시즌 종료 후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시나가와 가즈에와 미즈하라 감독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시나가와는 미즈하라를 '권위에 기대는 남자'라고 비난했고, 미즈하라는 시나가와를 '야구 문외한 주제에'라고 반발하며 두 사람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듬해 1956년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한 요미우리는 1956년 일본 시리즈에서 숙명의 라이벌인 미하라 오사무가 이끄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와 맞붙었다. 언론은 이를 미하라의 요미우리 퇴단 경위를 언급하며 '간류섬의 대결'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시리즈 전 요미우리가 유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이나오 가즈히사와 나카니시 후토시 등 젊은 니시테쓰 선수들의 패기에 압도당해 2승 4패로 패배했다. 이 패배 후 시나가와 사장은 팀의 세대교체를 위해 투수 코치 다니구치 고로, 2군 감독 후지모토 히데오, 코치 우치보리 다모쓰의 경질과 히라이 사부로, 미나미무라 유코의 은퇴를 주장했다. 미즈하라는 반대했지만, 결국 후지모토는 투수 코치, 닛타 교이치는 2군 감독, 우치보리는 2군 조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는 등 코치진의 인사 이동이 단행되었다.
1957년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1957년 일본 시리즈에서 다시 니시테쓰에게 패배했다. 이번에는 1무 4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면서 요미우리 내부에서 미즈하라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나가와는 후지모토, 다니구치 코치의 해임과 베테랑 선수들의 정리를 결정했으나, 미즈하라는 후지모토의 해임에 강력히 반대했다. 같은 해 12월 6일, 미즈하라는 시나가와와 면담했지만 시나가와의 뜻이 확고하자 "코치가 나쁜 것은 감독에게도 책임이 있다. 후지모토를 그만두게 한다면 나도 물러나겠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이던 요미우리 구단주 쇼리키 마쓰타로는 미즈하라를 인사원 빌딩 내 자신의 위원장실로 불러들였다. 쇼리키는 시나가와의 코치 해임 인사를 받아들이되, 미즈하라에게 신임 코치 인선 권한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사임을 철회하도록 명령했다. 미즈하라가 이를 받아들이자 시나가와는 기자들 앞에서 "자네는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는 여우다. 나에게 사과하라"며 미즈하라를 질책했다. 쇼리키의 중재로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는데, 이 일은 '인사원 소동' 또는 사과 사건(謝れ事件일본어)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결국 후지모토와 다니구치 코치는 경질되었고, 미즈하라는 은퇴한 나카오 히로시와 히가사 가즈오를 후임 코치로 임명했다.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미하라 감독의 니시테쓰와 세 번째 대결을 펼쳤다. 요미우리는 1차전부터 3연승을 거두며 우승에 한 발 다가섰으나, 4차전이 우천으로 취소되는 변수가 발생했다. 비는 경기 시작 전 그쳤고 그라운드 상태는 경기에 충분히 지장이 없었지만, 니시테쓰 측은 규슈 각지에서 버스로 온 팬들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중단을 결정했고, 요미우리와 미즈하라는 강하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4차전을 내준 요미우리는 5차전에서 9회초까지 1점 차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9회말 니시테쓰의 대타 고부치 다이스케가 때린 3루선상 타구를 니데가와 노부아키 심판이 페어로 판정했고, 미즈하라와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가 파울이라고 강력히 항의했으나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어진 타석에서 세키구치 세이지가 중견수 적시타를 때려 동점이 되었고,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결국 10회말 이나오 가즈히사가 일본 시리즈 사상 첫 끝내기 홈런을 터뜨려 요미우리는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이어진 6차전에서는 니시테쓰가 경기 전날 발표했던 선발 멤버를 경기 직전에 변경하려 시도하면서 양 팀 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노우에 노보리 커미셔너를 사이에 두고 태연한 미하라와 잔뜩 화가 난 미즈하라가 대치하고 있는 사진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이 소동으로 경기 시작이 늦어졌고, 조정에 혼란을 겪은 선발 투수 후지타 모토시는 1회에 나카니시 후토시에게 결승 2점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결국 니시테쓰는 이나오의 4연투 4연승이라는 기세로 요미우리에 사상 첫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충격적인 역전패를 안겼다. 미즈하라는 사의를 표명했지만, 시나가와 사장은 "이대로 물러선다면 자네의 패배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니시테쓰를 꺾는 것이 진정한 사나이가 아닌가"라며 그를 만류했고, 미즈하라는 눈물을 흘리며 시나가와의 위로를 들었다고 한다.
이 해 오프 시즌, 투수 벳쇼 다케히코가 계약 갱신 과정에서 등판 횟수 보장을 요구하자, 미즈하라는 "선수 기용은 감독의 전권 사항"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갈등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으나, 결국 벳쇼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미즈하라도 최대한 벳쇼의 의사를 존중하려 노력했다. 당시 통산 294승을 기록 중이던 벳쇼는 빅토르 스타루힌이 세운 통산 303승 기록 경신을 목표로 등판 기회를 늘리고 싶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9년에도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이번에는 스기우라 다다시가 이끄는 난카이 호크스에게 일본 시리즈에서 4연패를 당하며 우승에 실패했다. 1958년 일본 시리즈 4차전부터 1959년 4차전까지 이어진 일본 시리즈 8연패는 2020년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9연패로 경신하기 전까지 요미우리 감독으로서는 최악의 기록이었다.
1960년에는 미하라 오사무가 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인 다이요 웨일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언론은 '간류섬의 대결'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하라는 6년 연속 최하위였던 다이요의 전력을 숙련된 선수 기용으로 끌어올렸고, 그 해 센트럴 리그는 혼전이었지만 9월 중순 이후 요미우리와 다이요가 우승 경쟁을 펼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최종적으로 요미우리는 다이요에 밀려 리그 우승을 놓치고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팀의 리그 우승이 좌절된 10월, 미즈하라는 경기 종료 후 집요하게 사진을 찍는 사진 기자에게 불만을 품고 폭력을 휘두르며 필름을 빼앗는 사건을 일으켰다. (일부 기자는 "때린 것이 아니라 불이 붙은 담배를 던졌을 뿐"이라고 증언하기도 하며, 소동을 인지하고 필름을 거론한 것은 히로오카 다쓰로였다.) 미즈하라는 5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실패했고, 쇼리키 마쓰타로 구단주의 그에 대한 평가도 하락했다. 결국 그는 그해 11월 19일 "그라운드에서의 치욕은 그라운드에서 갚는다"는 명언을 남기며 요미우리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실질적인 해임으로, 그해 시즌 종료 후 당시 다카하시 구단 사장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았다. 동시에 구단 프런트로의 잔류를 요청받았으나, 월급이 기존의 절반인 10.00 만 JPY로 제시되자 미즈하라는 이에 불복했다. 사장은 "당신도 10.00 만 JPY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구단에 남는다면 공로금 1000.00 만 JPY도 보장되었으나, 미즈하라가 부인과 상의하자 부인은 "그런 굴욕은 없다"며 거절할 것을 권유했다. 결국 미즈하라는 퇴단을 선택했고, 공로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요미우리의 마지막 감독 재임 시즌인 1960년에는 투수진의 부진과 인원 부족으로 신인이던 호리모토 리쓰오를 69경기에 등판시키는 등 과도하게 기용했다. 호리모토는 29승 18패의 대활약으로 신인왕과 최다승을 차지했지만, 이러한 혹사는 그의 어깨에 무리를 주어 결국 불과 6년 만에 현역에서 은퇴하게 만들었다. 호리모토가 은퇴할 당시 미즈하라는 "자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을 저질렀다. 내가 자네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좀 더 자네의 등판에 배려했더라면, 자네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호리모토는 "미즈하라 감독님의 이 한마디에 마음의 짐을 덜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요미우리의 선수였던 히로오카 다쓰로는 미즈하라의 이러한 투수 운용에 대해 한두 명의 걸출한 선수에 의존하기보다는, 긴 시즌을 내다본 투수진의 정비와 적절한 기용이 필요했다고 지적했다.
3.2. 도에이 플라이어스 감독 시절
1960년 12월 8일, 미즈하라는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구단주 오카와 히로시로부터 "돈은 대주겠지만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설득을 받고 도에이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도에이는 만년 B클래스(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팀이었다. 미즈하라는 부임과 동시에 직접 유니폼 디자인을 맡아 머리 글자 'F'를 비상하는 새의 형상으로 본떠 가슴 로고로 사용하는 등 세련된 디자인으로 변경시켰다. 이 유니폼은 요미우리와 비슷한 색채(모자 및 언더셔츠의 색상이 요미우리의 검은색과 유사한 암갈색 계열)를 사용하고, 미즈하라가 요미우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3루 코치를 겸임했기 때문에, "요미우리의 미즈하라가 아닌가?"라고 착각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67년 올스타전부터는 구단 프런트의 주도로 원정 유니폼에 한해 디자인 변경이 이루어졌다.)
미즈하라는 취임 첫해인 1961년에 팀을 재건하여 난카이 호크스와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쳐 팀을 2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전년도에 주로 쇼트 릴리프(짧은 이닝 구원)로 9승을 기록했던 구보타 오사무를 도바시 마사유키가 선발 등판한 다음날 곧바로 등판시켜 25승을 올리게 하는 등 과감한 투수 운용을 선보였다. 또한 '독불장군'으로 불리며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야마모토 하치로에게는 예외 없이 "프로 야구는 팀이 이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홈런왕이나 수위 타자를 아무리 기록해도, 20승을 해도 팀이 B클래스이면 월급은 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일치단결하여 매진할 수 있느냐, 어떻게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조언하며 팀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리모토 이사오는 당시를 회상하며 "역시 (미즈하라 감독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61년 9월 초, 기세가 꺾인 난카이를 제치고 선두로 올라서며 첫 우승을 눈앞에 두는 듯했지만, 우승 경쟁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들이 수비에서 실책을 연발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며 결국 난카이에 우승을 내주었다. 그러나 83승 52패 5무승부, 승패마진 +31은 구단 역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했으며, 하리모토가 수위 타자, 도바시가 30승, 구보타가 25승, 사이온지 아키오가 리그 최다 97득점, 부스지마 쇼이치가 리그 최다 11개의 3루타를 기록하는 등 투타가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1961년 오프 시즌에는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단행했다. 나미쇼 고등학교 2학년이던 오자키 유키오를 중퇴시켜 입단시켰고, 소케이센에서 활약한 안도 모토히로, 릿쿄 대학의 아오노 슈조, 시바우라 공업대학의 이와시타 고이치 등 대학 유망주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러한 보강은 성공적으로 이어져 오자키는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고, 아오노와 이와시타는 키스톤 콤비를 이루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1962년 시즌, 하리모토는 타율 0.333(리그 4위), 31홈런, 99타점(모두 리그 2위)으로 MVP를 석권했고, 구보타는 평균자책점 2.12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 오자키 유키오는 20승을 거두어 신인왕을 차지하는 등 주력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도에이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62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이끄는 한신 타이거스와 맞붙었다. 1차전과 2차전에 연패하며 미즈하라 개인으로서는 일본 시리즈 10연패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3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후 4차전부터 4연승을 거두며 극적인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 2차전 선발 투수였던 도바시는 3차전 이후 구원으로 전환하여 2승을 올렸고, 다네모 마사유키와 함께 MVP를 공동으로 수상했다. 3차전부터는 데이터 연구에 능했던 안도 준조 대신 다네모가 포수 마스크를 쓰면서 과감한 리드로 투수들의 역량을 끌어냈고, 타격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즈하라는 7차전에서 주포 하리모토를 수비 강화를 위해 대수비 요원과 교체 투입하는 등 비정한 지휘로 팀을 이끌었다. 그는 이후 1967년까지 도에이 감독을 맡으며 팀을 꾸준히 A클래스에 유지시켰다. 하리모토 이사오는 미즈하라 감독에 대해 "80년이 넘는 프로 야구 역사에서 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은 미하라 오사무, 미즈하라, 쓰루오카, 가와카미 데쓰하루 이 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하며, 미즈하라가 구단의 재정적 지원 부족으로 팀을 떠나야 했던 아쉬움을 표했다.
1965년 무렵, 도에이가 시범 경기를 위해 대한민국에 원정 갔을 때, 한 경기에서 오스기 가쓰오가 한국 아마추어 팀을 편파적으로 판정하는 심판에게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붓자, 미즈하라는 오스기를 불러내 즉시 뺨을 때렸다. 이 모습을 본 한국 관중들은 미즈하라의 단호한 행동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1965년에 주전 포수로 자리 잡았던 백인천을 이듬해인 1966년에는 외야수로 전향시켰고, 1967년에는 신인 오시타 쓰요시를 주전 유격수로 발탁하는 등 젊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과 과감한 기용을 보여주었다. 오시타 자신도 "미즈하라 감독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스지마 쇼이치는 미즈하라 감독에 대해 "미즈하라는 승부사라고 할까, '이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와서 비로소 팀워크와 승리에 대한 집념이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세세한 야구를 펼쳤다. 그전까지는 비교적 자유롭고 대략적인 야구였다"고 평가했다. 도바시 마사유키는 "미즈하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우승할 수 없다. 나는 결혼 중매를 미즈하라에게서 받았지만 시즌 중에는 미즈하라와 대화도 없었고 한 번도 칭찬받은 적이 없다"고 회고하며 그의 엄격한 리더십을 증언했다. 1967년 11월 25일, 그는 오카와 구단주로부터 감독 해임 통보를 받았다.
3.3.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 시절
1968년 11월 6일, 미즈하라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1969년부터 1971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3년차인 1971년에 62세의 나이로 시즌 개막을 맞이한 그의 감독 재임은 2011년 다카기 모리미치가 취임하기 전까지 주니치 구단 역사상 최고령 감독 기록이었다. 취임 당시 그는 주쿄권 재계의 여러 요인들을 대동하여 구단 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주니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팀은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각각 4위, 5위, 2위를 기록했지만, 그는 호시노 센이치, 시마타니 긴지, 야자와 겐이치와 같은 젊은 선수들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지도 아래 성장한 이들은 훗날 그의 후임 감독인 요나미네 가나메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0년 연속 리그 우승을 저지하고 1974년 주니치를 우승으로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취임 첫해부터 갈등을 빚었던 에토 신이치를 팀에서 방출하는 등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즈하라의 지도 아래 프로 선수로서 재능을 꽃피운 호시노 센이치는 신인 시절이던 1969년, 요미우리전에서 난타당하며 패전 투수가 되자 코치진에게 "내일도 던지게 해주십시오. 반드시 복수하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코치진은 연투에 난색을 표했지만, 미즈하라는 "센(호시노의 별명)이 던지고 싶다고 하잖아. 던지게 해줘라!"라고 말하며 다음 날 요미우리전에도 선발 등판을 허락했다. 연투에도 불구하고 호시노는 상당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었지만,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또다시 패전 투수가 되었다. 덕아웃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호시노에게 미즈하라는 조용히 손을 내밀며 "잘 했다. 괜찮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당하면 반드시 갚아주는 정신을 잊지 말아라. 그것을 잃으면 프로로서 끝나는 것이다. 오늘 일을 결코 잊지 말아라. 잘 했어"라고 격려했다. 호시노는 "미즈하라 감독님과 악수했던 그때 손의 따뜻함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프로 정신은 미즈하라 감독님께 배웠다"고 회상했다.
미즈하라는 도에이에 이어 주니치에서도 유니폼 디자인을 담당했다. 당시 메이저 리그에서는 선명한 색상의 유니폼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화려한 붉은 유니폼을 입고 일본을 방문하여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1950년에서 1951년 요미우리 감독 시절에 이미 붉은색 유니폼을 경험했고, 주니치 구단 역시 전년도(1968년)에 붉은색 유니폼이 실패했던 터라, 이를 대신하여 선명한 스카이 블루를 주 색상으로 도입하고 붉은색은 포인트 색상으로 최소한만 사용했다. 또한 가슴 로고 'Dragons'는 1966년까지의 로고와 유사하면서도, 아래로 늘어졌던 용의 수염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처럼 머리 글자 'D' 밑까지 길게 늘린 형태로 변경했다. (1967년부터 1968년 시즌 도중까지는 다저스와 동일한 서체에 수염이 긴 로고를 사용했었다.) 이 디자인 요소는 이후 주니치 유니폼에도 계승되었다.
1971년 10월 4일, 미즈하라는 정규 시즌 종료와 함께 주니치 감독직에서 사임하며 유니폼 생활에 작별을 고했다. 그의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 상대는 숙명의 라이벌 미하라 오사무가 이끄는 야쿠르트 아톰스였다. 이 경기에서 미즈하라의 주니치는 승리하여 1971년 야쿠르트와의 상대 전적을 12승 2무 12패로 균형을 맞췄다. 이어진 다이요 웨일스와의 두 번째 경기 종료 후, 미즈하라는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으며 현장을 떠났다.
4. 개인사 및 일화
미즈하라는 쌀밥을 거의 먹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방 원정을 가면 아침 식사로 맥주에 노른자 두 개를 넣어 섞어 마셨고, 점심에는 소바 등을 가볍게 먹었으며, 저녁에는 술안주와 함께 오로지 술만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의 사생활은 때때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야구부 시절에는 당대의 유명 여배우 다나카 기누요와 연애 관계에 있었으며, 이는 당시 언론의 큰 화제를 모았다. 다나카가 미즈하라의 팬으로서 그에게 연락하여 진구가이엔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전쟁 전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 마쓰이 준코와 1935년에 결혼했다.
미즈하라는 일본 야구계에 메이저 리그의 원 포인트 릴리프 개념과 블록 사인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이 3루나 1루의 코치 박스에서 직접 지휘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호시노 센이치는 한 프로그램에서 미즈하라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미즈하라 '아버지'여서, 그런 블록 사인을 보내는 포즈 자체가 그림이 되었다"고 말했다. 감독 취임 이후 등번호 '30'번을 오랫동안 사용했으나, 도에이 감독 시절 마지막 해에는 '81'번으로, 주니치 감독 시절 첫 2년은 '68'번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주니치 감독 시절에는 3루 코치를 전담 코치에게 맡겼지만, 마지막 해에 다시 '30'번으로 등번호를 바꾼 뒤 최종 경기에서 도에이 감독 시절 이후 주니치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3루 코치 박스에 서기도 했다.
나니와 상업고등학교의 감독을 역임한 나카지마 하루오와는 시베리아 억류 시절 포로 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하며 인연을 맺었다. 전후 미즈하라는 나카지마가 재직하던 학교의 강타자 사카자키 가즈히코를 요미우리에 영입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고등학생이던 하리모토 이사오를 중퇴시켜 요미우리에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하리모토의 형이 "프로는 언제든 갈 수 있지만, 고등학교는 졸업하는 것이 좋다"고 설득하여 하리모토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이후 미즈하라가 도에이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두 사람은 한 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약 20여 년 뒤 미즈하라가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 하리모토는 트레이드를 통해 미즈하라가 처음 스카우트하려 했던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된다. 참고로 하리모토를 방출할 당시 닛폰햄(도에이의 후신)의 구단 대표는 미하라 오사무였다. 미하라는 당시 구단주 오코소 요시노리와 함께 미즈하라 시대에 입단했던 오스기 가쓰오, 백인천, 오시타 쓰요시 등 주력 선수들을 방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하리모토 본인도 이적을 희망하는 사정이 있었다.
5. 말년 및 야구계 평가
5.1.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 활동
감독 은퇴 후 미즈하라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도에이 감독직에서 물러난 1968년과 주니치 감독직에서 사임한 1972년 이후에는 도쿄 방송(TBS 텔레비전 및 TBS 라디오)의 전속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1968년에는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1972년 이후에는 닛칸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언론을 통해 야구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과 비평을 제공했다.
1978년 10월, TV 아사히의 뉴스 프로그램에서 우승에 실패한 요미우리에 대해 "패인은 나가시마 시게오의 지휘봉에 실수가 있다. 올해 나가시마의 야구를 보면 그는 '야구를 모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발언하며, 당시까지 금기시되던 나가시마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1982년 1월 26일에는 그해 출범을 앞둔 한국프로야구에 대한 조언을 위해 나가시마 시게오, 하리모토 이사오와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5.2.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및 사망
미즈하라 시게루는 1977년에 일본 야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2년 2월경, 그는 각혈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같은 해 3월 26일 간부전으로 도쿄도 신주쿠구의 도쿄 여자 의과대학 병원에서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1947년 현역 생활 중 장티푸스로 급서하여 등번호 '4'가 영구 결번이 되었던 구로사와 도시오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구단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묘소는 요코하마시 쓰루미구에 있는 소지지에 안치되어 있다.
5.3. 영향력 및 평가
미즈하라 시게루는 선수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그는 3루수로서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 그리고 정확하고 빠른 송구 능력을 자랑했다. 깊은 수비 위치에서도 1루에 주자를 정확하게 잡아내는 능력이 있었으며, 3루 앞에 굴러가는 느린 땅볼을 맨손으로 잡아 언더핸드 송구로 아웃시키는 플레이에 능했다. 이러한 수비 기술은 다카마쓰 상업학교 시절 게이오기주쿠 대학 야구부 감독이었던 고시모토 히사시의 지도와 미국 원정에서 현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타격에 있어서는 손목 힘이 강해 허리보다는 손으로 타격하는 편이었다고 평가된다.
감독으로서는 승리에 대한 강한 집념과 세밀한 야구를 추구하는 승부사적 기질을 가졌다. 그는 젊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호시노 센이치에게 프로 정신을 강조하며 선수의 성장을 도왔던 일화처럼 선수 개인의 정신력과 태도를 중시했다. 선수들에게 팀 승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엄격한 규율과 헌신을 요구했지만, 동시에 선수들을 아끼는 인간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혁신적인 전술과 과감한 선수 기용은 일본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메이저 리그의 개념을 일본에 도입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하리모토 이사오, 부스지마 쇼이치, 도바시 마사유키 등 그가 지도했던 여러 선수들은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엄격하지만 명확한 지도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도바시 마사유키는 미즈하라를 "피도 눈물도 없는 감독"이라고 표현하면서도, 그러한 강단 있는 리더십 덕분에 팀이 우승할 수 있었다고 인정했다. 미즈하라 시게루는 일본 프로 야구의 기틀을 다지고 현대적인 야구의 흐름을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일본 야구사에 깊이 새겨져 있다.
6. 통계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36 추계 | 도쿄 교진군 요미우리 | 16 | 66 | 62 | 3 | 14 | 2 | 0 | 0 | 16 | 7 | 1 | -- | 1 | -- | 3 | -- | 0 | 7 | -- | .226 | .262 | .258 | .520 |
1937 춘계 | 56 | 260 | 218 | 32 | 55 | 11 | 2 | 1 | 73 | 18 | 17 | -- | 5 | -- | 33 | -- | 4 | 14 | -- | .252 | .361 | .335 | .696 | |
1937 추계 | 48 | 221 | 176 | 39 | 51 | 10 | 4 | 3 | 78 | 31 | 12 | -- | 5 | -- | 38 | -- | 1 | 7 | -- | .290 | .419 | .443 | .862 | |
1938 춘계 | 34 | 149 | 120 | 19 | 24 | 4 | 0 | 0 | 28 | 13 | 5 | -- | 2 | -- | 23 | -- | 4 | 6 | -- | .200 | .347 | .233 | .580 | |
1938 추계 | 29 | 110 | 91 | 14 | 22 | 3 | 1 | 2 | 33 | 9 | 2 | -- | 1 | -- | 18 | -- | 0 | 8 | -- | .242 | .367 | .363 | .730 | |
1939 | 96 | 446 | 358 | 61 | 86 | 13 | 3 | 2 | 111 | 40 | 15 | -- | 4 | 2 | 78 | -- | 3 | 26 | -- | .240 | .380 | .310 | .690 | |
1940 | 86 | 384 | 332 | 42 | 79 | 9 | 3 | 1 | 97 | 22 | 9 | -- | 6 | 1 | 43 | -- | 2 | 16 | -- | .238 | .329 | .292 | .621 | |
1941 | 86 | 415 | 340 | 44 | 86 | 11 | 1 | 3 | 108 | 27 | 6 | -- | 1 | -- | 71 | -- | 3 | 13 | -- | .253 | .386 | .318 | .704 | |
1942 | 65 | 298 | 258 | 32 | 58 | 10 | 2 | 0 | 72 | 16 | 2 | 3 | 2 | -- | 38 | -- | 0 | 8 | -- | .225 | .324 | .279 | .603 | |
1950 | 7 | 6 | 5 | 1 | 1 | 0 | 0 | 0 | 1 | 1 | 0 | 0 | 0 | -- | 1 | -- | 0 | 1 | 0 | .200 | .333 | .200 | .533 | |
통산 : 8년 | 523 | 2355 | 1960 | 287 | 476 | 73 | 16 | 12 | 617 | 184 | 69 | 3 | 27 | 3 | 346 | -- | 17 | 106 | 0 | .243 | .361 | .315 | .676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도쿄 교진군은 1947년 요미우리(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구단명을 변경함.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 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38 춘계 | 도쿄 교진군 | 1 | 0 | 0 | 0 | 0 | 0 | 0 | -- | -- | ---- | 11 | 2.0 | 3 | 0 | 3 | -- | 0 | 1 | 0 | 0 | 4 | 4 | 18.00 | 3.00 |
1938 추계 | 11 | 11 | 6 | 1 | 0 | 8 | 2 | -- | -- | .800 | 327 | 82.0 | 46 | 4 | 37 | -- | 2 | 44 | 0 | 0 | 25 | 16 | 1.76 | 1.01 | |
통산 : 1년 | 12 | 11 | 6 | 1 | 0 | 8 | 2 | -- | -- | .800 | 338 | 84.0 | 49 | 4 | 40 | -- | 2 | 45 | 0 | 0 | 29 | 20 | 2.14 | 1.06 |
연도 | 소속 | 등번호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50 | 요미우리 | 30 | 3위 | 140 | 82 | 54 | 4 | .603 | 17.5 | 126 | .268 | 2.90 | 41세 |
1951 | 1위 | 114 | 79 | 29 | 6 | .731 | - | 92 | .291 | 2.62 | 42세 | ||
1952 | 1위 | 120 | 83 | 37 | 0 | .692 | - | 77 | .292 | 2.45 | 43세 | ||
1953 | 1위 | 125 | 87 | 37 | 1 | .702 | - | 80 | .283 | 2.48 | 44세 | ||
1954 | 2위 | 130 | 82 | 47 | 1 | .636 | 5.5 | 88 | .271 | 2.38 | 45세 | ||
1955 | 1위 | 130 | 92 | 37 | 1 | .713 | - | 84 | .266 | 1.75 | 46세 | ||
1956 | 1위 | 130 | 82 | 44 | 4 | .646 | - | 100 | .258 | 2.08 | 47세 | ||
1957 | 1위 | 130 | 74 | 53 | 3 | .581 | - | 93 | .241 | 2.39 | 48세 | ||
1958 | 1위 | 130 | 77 | 52 | 1 | .596 | - | 101 | .253 | 2.37 | 49세 | ||
1959 | 1위 | 130 | 77 | 48 | 5 | .612 | - | 117 | .245 | 2.54 | 50세 | ||
1960 | 2위 | 130 | 66 | 61 | 3 | .519 | 4.5 | 106 | .229 | 3.09 | 51세 | ||
1961 | 도에이 | 2위 | 140 | 83 | 52 | 5 | .611 | 2.5 | 108 | .264 | 2.39 | 52세 | |
1962 | 1위 | 133 | 78 | 52 | 3 | .600 | - | 85 | .252 | 2.42 | 53세 | ||
1963 | 3위 | 150 | 76 | 71 | 3 | .517 | 10.5 | 114 | .236 | 3.02 | 54세 | ||
1964 | 3위 | 150 | 78 | 68 | 4 | .534 | 5.5 | 100 | .250 | 2.95 | 55세 | ||
1965 | 2위 | 140 | 76 | 61 | 3 | .555 | 12 | 107 | .240 | 2.88 | 56세 | ||
1966 | 3위 | 136 | 70 | 60 | 6 | .538 | 9 | 91 | .256 | 2.75 | 57세 | ||
1967 | 81 | 3위 | 134 | 65 | 65 | 4 | .500 | 10 | 97 | .260 | 3.19 | 58세 | |
1969 | 주니치 | 68 | 4위 | 130 | 59 | 65 | 6 | .476 | 14 | 145 | .231 | 3.11 | 60세 |
1970 | 5위 | 130 | 55 | 70 | 5 | .440 | 23.5 | 118 | .234 | 3.20 | 61세 | ||
1971 | 30 | 2위 | 130 | 65 | 60 | 5 | .520 | 6.5 | 127 | .226 | 2.97 | 62세 | |
통산 : 21년 | 2782 | 1586 | 1123 | 73 | .585 | A클래스 : 19회, B클래스 : 2회 |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1953년부터 1960년, 1962년, 1966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1961년과 1965년에는 140경기제.
- 1963년부터 1964년까지는 150경기제.
- 1960년에는 사진 기자 폭행 사건으로 근신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10월 3일과 10월 5일에 감독 대행을 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