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문선명(文鮮明, 1920년 1월 6일 ~ 2012년 9월 3일)은 한국의 종교인이자 사업가, 정치 활동가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창시자이자 초대 교주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 한학자를 '참부모'이자 '재림 메시아'로 주장하며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합동결혼식을 주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선명은 초기 한국에서 종교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통일교를 전 세계로 확장시켰다.
그의 활동은 종교적 신념을 넘어 언론, 수산업, 중공업 등 다양한 사업 분야와 정치적 영역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냉전 시대에는 강력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국제적인 정치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관여하는 등 한반도 통일 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통일교는 탈세 유죄 판결, 교리 및 관행에 대한 비판, 가족 내 갈등, 그리고 동성애 및 홀로코스트 등 논란이 된 발언들로 인해 끊임없이 사회적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추종자들에게 문선명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 중심의 세계'를 건설하려 한 인물로 존경받지만, 비판자들은 그를 종교적 사기꾼이자 신도들을 세뇌하고 가정을 파괴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화 예술, 스포츠, 인종 관계 개선, 종교 간 대화 등 다양한 사회 문화적 분야에 기여하며 20세기 후반 가장 주목할 만한 신흥 종교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문선명은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을 접했으며, 일본 유학을 통해 전기 공학을 공부하고 항일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2.1. 출생 및 가족 배경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음력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문용명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7남 6녀 중 둘째 아들이었으며, 그의 가족은 원래 유교를 따랐으나 그가 10세경에 장로교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의 종조부인 문윤국 목사는 3·1 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으며, 집안 재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 가계가 파산하기도 했다.
2.2. 교육 및 초기 활동
문선명은 서울의 경성상공실무학교(현 중앙대학교의 전신) 전기과를 다니며 전기 공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조선예수교회 계열의 명수대예배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다. 194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했으며, 일본 유학 중에는 '에모토'(江本)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중에는 한국인 유학생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때로는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에 "일본인은 보따리를 싸서 나가라"고 연설하여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1943년 10월 와세다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1944년 5월 최선길과 결혼하여 아들 문성진을 두었다. 귀국 후 가시마 건설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했으나, 일본에서의 항일 운동이 발각되어 1944년 10월부터 1945년 2월까지 경기도경찰부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 1945년 10월에는 금전 문제로 일주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에서 약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문선명은 16세가 되던 1935년 부활절에 기도 중 예수로부터 인류 구원 사업에 대한 당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훗날 통일교의 근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경성상공실무학교 재학 당시 교사나 동급생들은 그가 종교적인 열의를 보였다는 기억이 없다고 증언하며, 16세 계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3. 통일교 창시와 신학
문선명은 1954년 한국에서 통일교를 창시했으며, 그의 신학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그 자신의 메시아 주장을 핵심으로 한다.
3.1. 한국에서의 통일교 설립
1946년 문선명은 가족들을 남한에 남겨둔 채 홀로 신령파 교회를 찾아 평양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종교 활동을 하던 중 북한 정부의 신종교 탄압 정책에 따라 사회 문란 혐의와 간첩 혐의로 1946년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에도 종교 활동을 통해 신도 수가 늘었으나, 1948년 2월 다시 사회질서문란죄로 체포되어 흥남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5년간의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50년 6.25 전쟁 중 흥남에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었고, 경찰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여겨 방치했으나, 제자 김원필이 그를 돌봐 건강을 회복했다. 이후 10일간의 여정 끝에 평양을 거쳐 서울로, 다시 부산으로 피난했다. 흥남 노동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그를 확고한 반공주의자로 만들었다.
부산에서 그는 자신의 교리인 《원리원본》을 집필하여 1952년에 완성했으며,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5월 서울로 기반을 옮겨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초기에는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벌였으나,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학생 및 교수들이 통일교 신앙을 이유로 퇴학 및 퇴직당하며 기반이 약화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화폐 사용 및 병역기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0월에 무죄 판결을 받고 100일 만에 출감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그의 첫 아내 최선길은 이혼을 요구했고, 결국 이혼하게 된다. 1957년에는 교리서 《원리해설》을 발간하며 본격적인 종교 활동을 시작했고,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초창기부터 해외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59년에는 통일산업 공장을 설립하며 경제 사업을 시작했다.
3.2. 핵심 교리 및 신학
문선명은 16세 때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 미완성된 사명을 완수하고 인류의 부모가 되도록 자신을 기름 부었다고 주장했다. 통일 운동의 주요 신학 교재는 문선명과 초기 제자 유효원이 공동 집필하여 1966년에 처음 출판된 《원리강론》(Divine Principle영어)이다. 이 책은 통일 신학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신도들에게는 성경과 같은 경전으로 여겨진다.
《원리강론》은 체계적인 신학의 형식을 따르며,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 둘째, 인간의 타락, 셋째, 복귀(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타락의 악영향을 제거하고 인간을 원래 의도했던 관계와 위치로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창조주로, 모든 진리, 아름다움, 선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인간과 우주는 하나님의 인격, 본성, 목적을 반영한다고 본다. '수수작용'(상호작용)과 '주체대상 관계'(주도자와 응답자)는 핵심적인 해석 개념이며, 자아는 하나님의 대상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사위기대'(기원, 주체, 대상, 연합)는 또 다른 중요한 해석 개념으로, 가족에 대한 강조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문선명의 메시아 주장은 유대교와 기독교 학자들로부터 모두 거부당했다. 《원리강론》은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 특히 문선명 자신이 속했던 장로교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미국에서는 에큐메니컬 단체들로부터 비기독교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개신교 비평가들은 문선명의 가르침이 오직 믿음 교리에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또한 《원리강론》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냉전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탕감 조건'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4. 결혼과 가정 생활
문선명은 두 차례의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었으며, 특히 한학자와의 결혼은 통일교의 핵심 의식인 축복결혼식의 시작점이 되었다.
4.1. 첫 번째 결혼
문선명은 1944년 5월 최선길과 결혼하여 아들 문성진을 두었다. 그러나 문선명이 신흥 종교 활동을 시작하고 여러 차례 투옥되는 과정에서 최선길과 그의 가족은 문선명의 활동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결국 1957년에 이혼했다.
4.2. 한학자와의 결혼

문선명은 1960년 4월 11일(음력 3월 16일) 당시 17세였던 한학자와 '성혼식'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한학자는 통일교 신도들로부터 '어머니' 또는 '참어머니'로 불리며, 문선명과 함께 '참부모'로 불린다. 그들의 가족은 '참가정'으로 지칭된다. 통일교의 교리는 예수가 신성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아니었으며, 이상적인 아내와 결합하여 완전한 가정을 이루고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킬 두 번째 아담이 될 예정이었다고 가르친다. 예수가 결혼하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영적인 구원은 이루었지만 육적인 구원은 이루지 못했다고 보며, 이 과업은 '참부모'인 문선명과 한학자에게 남겨져 결혼한 부부와 그들의 가정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4.3. 축복결혼식
문선명과 한학자의 결혼 직후인 1960년부터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라는 대규모 합동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36쌍의 교인들이 참가했으며, 이후 1961년 33쌍이 추가로 축복을 받았다. 이 의식은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매스 웨딩'으로 불리게 되었다. 통일교 신도들은 문선명이 직접 짝지어 준 상대와 결혼하며, 때로는 서로 만난 적 없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과도 짝지어진다. 문선명은 낭만적인 사랑이 성적 방종과 부적절한 결혼, 기능 장애를 초래한다고 가르쳤으며, 인류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다른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을 짝지어 주었다. 그는 "국제적이고 문화 간의 결혼은 이상적인 평화 세계를 가져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사람들은 적대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국경과 문화적 경계를 넘어 결혼해야 평화 세계가 훨씬 더 빨리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축복결혼식은 규모가 점점 커져 1982년에는 한국 밖에서 처음으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2,000쌍 이상이 참가했다. 1992년에는 약 3만 쌍, 3년 뒤인 1995년에는 서울에서 36만 쌍이 참가하며 기록적인 규모를 보였다. 이 결혼식들은 통일교의 전통적인 도덕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문선명에게 명성과 논란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당한 에마뉘엘 밀링고 대주교가 이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4.4. 자녀와 후계 문제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는 14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중 둘째 딸 문혜진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이 가족은 통일교 내에서 '참가정'으로 불리며, 자녀들은 '참자녀'로 불린다. 문선명은 2010년경부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종교 및 사업 활동에 대한 많은 책임을 30~40대였던 자녀들에게 넘겨주었다.
자녀들 중에는 문예진(장녀), 문효진(장남), 문인진(3녀), 문흥진(차남), 문은진(4녀), 문현진(3남), 문국진(4남), 문권진(5남), 문선진(5녀), 문영진(6남), 문형진(7남), 문연진(6녀), 문정진(7녀) 등이 있다. 장남 문효진은 록 음악과 총기류에 몰두하고 알코올 및 약물 중독에 빠져 결혼 생활이 파탄 났으며, 2008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차남 문흥진은 1984년 17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6남 문영진은 1999년 21세의 나이로 네바다주 리노의 호텔에서 추락사하여 자살로 알려졌다.
문선명 사망 이후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가족 내 갈등이 불거졌다. 특히 3남 문현진은 메시아론에 대해 아버지 및 형제들과 의견 차이를 보이며 가족들과 불화를 겪었고, 자신이 관리하던 기업들을 이탈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7남 문형진은 2015년 내부 교권 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다툼을 벌였고, 직무 권한이 잠정적으로 정지된 후 통일교를 이탈하여 생추어리 교회를 설립했다. 5녀 문선진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세계회장을 역임했다.
문효진의 전처 홍난숙은 1995년 출간한 책에서 문선명 부부가 자녀 양육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유모나 보모에게 맡겼으며, 문씨 가문 전체가 음모와 위선으로 망쳐지고 분열된 집안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5. 미국 이주 및 세계적 확장
문선명은 1971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통일교의 세계적인 확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5.1. 미국 이주 및 초기 활동
문선명은 1965년 처음 미국을 방문한 후, 1971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주 어빙턴의 한 저택에 정착했다. 그는 계속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한국에도 거주지를 두었다. 1972년에는 과학 학술 회의 시리즈인 국제과학통일회의(ICUS)를 창설했다. 첫 회의에는 20명이 참가했으며, 1982년 서울에서 열린 가장 큰 회의에는 100개국 이상에서 808명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는 존 에클스 경과 유진 위그너와 같은 노벨상 수상자들도 참여했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문선명은 통일교 신도들에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도록 요청했다. 신도들은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는 구호 아래 3일간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닉슨을 지지하며 기도하고 단식했다. 1974년 2월 1일, 닉슨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지지에 감사하며 문선명을 공식적으로 만났다. 이 사건은 통일교가 대중과 언론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에 문선명은 미국, 일본, 한국에서 대중 연설을 시작했다. 가장 큰 집회는 1975년 서울에서 북한의 침략에 반대하는 집회와 워싱턴 D.C.에서 통일교가 주최한 행사에서의 연설이었다.
5.2. 세계적 확산
문선명은 1970년대 미국에서의 선교를 통해 많은 기독교 개종자들을 이끌어냈다. 1990년대에는 소련 해체 이후 통일교가 구 공산주의 국가들로 확산되었다. 1990년 4월에는 소련을 방문하여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문선명은 소련에서 진행 중인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30주년 결혼 기념일을 맞아 한학자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동시에 통일교는 구 공산주의 국가들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일부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문선명이 이전의 반공주의 입장을 완화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6. 사업 활동
문선명은 통일교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과 해외에서 다양한 사업체를 설립하거나 인수했다.
6.1. 통일그룹
통일그룹은 문선명이 1963년 통일교의 재정 수입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국의 재벌이다. '통일'은 한국어로 '하나 됨'을 의미하며, 통일교의 한국어 명칭인 '통일교'와도 연결된다. 초기에는 제조업에 중점을 두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제약, 관광, 출판 분야의 사업체를 설립하거나 인수하며 확장했다. 통일그룹의 주요 계열사로는 인삼 및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일화, 건축 자재 회사인 일신석재, 그리고 한국군용 하드웨어를 포함한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통일중공업 등이 있다.
6.2. 뉴스월드 커뮤니케이션즈
뉴스월드 커뮤니케이션즈는 문선명이 1976년에 설립한 국제 뉴스 미디어 기업이다. 이 회사는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UPI), 《월드 앤 아이》, 《티엠포스 델 문도》(라틴 아메리카), 《세계일보》(한국), 《세카이 닛포》(일본), 《잠베지 타임스》(남아프리카), 《미들 이스트 타임스》(이집트) 등을 소유하고 있다. 2008년까지는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뉴스 잡지 《인사이트 온 더 뉴스》를 발행했으며, 2010년까지는 《워싱턴 타임스》를 소유했다. 2010년 11월 2일, 문선명과 전 《워싱턴 타임스》 편집자 그룹이 뉴스월드로부터 《워싱턴 타임스》를 다시 인수했다. 문선명은 《워싱턴 타임스》를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라고 불렀다. 2002년까지 문선명은 《워싱턴 타임스》를 지원하기 위해 약 17.00 억 USD를 투자했다.
6.3. 기타 사업
문선명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 활동을 펼쳤다.
- 영화**: 1982년 한국 전쟁의 인천 상륙 작전을 다룬 역사 드라마 영화 《오! 인천》을 후원했으나, 비평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북한 정부를 불공정하게 다뤘다는 비판을 받았다.
- 스포츠**: 1989년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성공적인 축구 클럽인 성남 일화 천마를 창단했다. 성남 일화 천마는 K리그 7회 우승, FA컵 2회 우승, 리그컵 3회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03년에는 첫 피스컵 국제 클럽 축구 대회를 후원했으며, 펠레가 문선명을 만나기도 했다. FIFA도 2003년부터 피스컵에 200.00 만 USD 이상을 지원했다.
- 수산업 및 조선업**: 통일교는 미국 스시 거래량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는 트루 월드 푸즈를 소유하고 있으며, 알래스카주 코디액섬 지역에서 가장 큰 고용주이다. 통일교의 수산업 진출은 문선명이 "해양 섭리" 확장을 지시하면서 시작되었다. 1976년과 1977년에 통일교는 미국 수산업에 거의 100.00 만 USD를 투자했다. 문선명은 1980년 "참치 길"이라는 설교에서 "우리가 배를 만들고, 물고기를 잡아 시장에 가공하여 유통망을 갖추었다. 이것은 단지 계획이 아니라 이미 실행되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바다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통일교가 앨라배마주의 조선 및 어업 회사인 마스터 마린과 알래스카 코디액의 국제 수산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1년 마스터 마린은 문선명이 설계한 27피트짜리 레저 보트를 제조하기 위해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공장을 열었다.
- 자동차 산업**: 통일교는 북한에 최초로 가동 중인 자동차 제조 공장인 평화자동차를 설립했으며, 한국 상품의 두 번째로 큰 수출업체였다. 그러나 현재 평화자동차의 운영권은 북한에 양도되었다.
- 군수 산업**: 1960년대 한국에서 통일교 신도들이 M-16 소총, 대공포 등 군수품 생산에 참여했으며, 1978년 미국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통일교 관련 사업체가 한국의 중요한 국방 계약자였다. 1977년에는 M-16 소총의 제3국 수출을 위해 콜트 인더스트리와 한국 정부 간의 공동 생산 계약 재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문선명의 넷째 아들 문국진은 미국에서 총기 제조 회사인 카르 암스(Kahr Arms)를 설립하기도 했다.
- 관광 및 리조트**: 2011년 1800.00 만 USD 규모의 여수 엑스포 호텔 건설이 완료되었으며, 이 호텔은 문선명이 소유한 여수 오션 리조트에 위치해 2012 여수 엑스포의 개최지였다. 또 다른 오션 호텔은 2012년 2월에 완공되었다. 문선명이 소유한 영평 리조트, 오션 리조트, 파인릿지 리조트는 2012 여수 엑스포, 2018년 동계 올림픽, 포뮬러 원을 개최할 예정이었다.
7. 정치 활동 및 영향력
문선명은 강력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국제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으며, 세계 여러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보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7.1. 반공주의와 정치 참여
문선명은 1964년 한국문화자유재단을 설립하여 한국의 이익을 증진하고 자유 아시아 방송을 후원했다.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등 전 미국 대통령들이 명예 회장이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2년 문선명은 《원리강론》의 가르침에 기반하여 공산주의의 쇠퇴를 예언했다. 그는 "성경적 7천년-6천년의 복귀 역사와 천년왕국, 완성의 시대-후 공산주의는 70년째에 멸망할 것이다. 1978년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1917년에 시작된 공산주의는 약 60년간 유지되며 정점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1978년은 경계선이며 그 이후 공산주의는 쇠퇴하고, 70년째에는 완전히 파멸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포기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1980년 문선명은 통일교 신도들에게 뉴욕시에 본부를 둔 반공 교육 단체인 카우사 인터내셔널(CAUSA International)을 설립하도록 요청했다. 1980년대에는 21개국에서 활동했으며, 미국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 회의와 상원 직원 및 기타 활동가들을 위한 세미나 및 회의를 후원했다. 1986년에는 반공 다큐멘터리 영화 《니카라과 워즈 아워 홈》을 제작했으며, 니카라과 콘트라를 지원하기도 했다.
1985년 8월, 문선명이 설립한 교수평화아카데미는 제네바에서 "공산주의 제국 붕괴 후 세계 상황"이라는 주제로 회의를 후원했다. 1990년 4월 문선명은 소련을 방문하여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났다. 문선명은 소련에서 진행 중인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동시에 통일교는 구 공산주의 국가들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일부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문선명이 이전의 반공주의 입장을 완화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7.2. 세계 지도자들과의 관계
문선명은 리처드 닉슨, 조지 H. W. 부시, 조지 W. 부시 등 미국 대통령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북한 주석 김일성, 네이션 오브 이슬람 지도자 루이스 파라칸 등과도 교류했다.
1991년 12월 6일, 문선명은 당시 노태우 한국 대통령의 북방외교에 호응하여 자동차 사업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중국 정부의 중재로 북한과 접촉했다. 그는 한국 정부의 허가 없이 전격적으로 방북하여 고향인 정주를 방문하고 평양에서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과 회담했다. 문선명은 이 방북에 대해 경유지인 베이징에서 "나의 승공 사상은 공산주의를 죽이는 사상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는 사상, 곧 인류 구원의 사상"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회담에서는 이산가족 재회, 핵 사찰 수용, 자유 진영 국가로부터의 투자 유치, 군수 산업을 제외한 경제 사업에 통일그룹 참여, 남북 정상 회담 개최, 금강산 개발 등에 합의했다. 1994년에는 북한과 한국 간의 외교 관계가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초청받기도 했다.
7.3. 한국 통일 운동 지지
문선명과 통일교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노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3년 한국 통일교 신도들은 '하나님, 평화, 통일, 가정'을 위한 당(현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했다. 이 신당은 창당 선언문에서 하나님과 평화에 대한 대중 교육을 통해 한국 통일을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밝혔다. 문선명은 대한민국 통일부 명예 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2012년에는 그에게 북한의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2013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한학자와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며 "김정은은 민족 화합, 번영, 통일,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문선명의 안식을 기원했다"고 밝혔다.
7.4. 보수 정치에 미친 영향
2005년 문선명과 그의 아내 한학자는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 특별 협의 지위를 가진 천주평화연합(UPF)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유엔의 활동과 지속가능 개발 목표 달성을 지지하고 촉진한다"고 밝혔다. 문선명의 프로젝트는 브라질 의원들에 의해 브라질 국회에서 로비되기도 했다. 문선명은 중동 평화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크네세트와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들 간의 대화를 주최하기도 했다.
2006년 9월 26일 아베 신조가 일본 총리에 취임한 지 일주일 후인 10월 3일, 문선명은 "아베가 총리가 되었다고 들었다"고 말하며 신도들에게 아베의 비서실장과 면담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1989년 7월 4일 한국에서 설교하며 아베 신타로가 당시 회장이었던 청화정책연구회(아베파)를 중심으로 일본 국회의원들과의 관계 강화를 지시했다. 그는 "국회 내에 교회를 만들고, 거기서 원리를 교육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며 "국회의원 비서를 교단에서 배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2004년에는 《워싱턴 타임스》 재단이 조지 H. W. 부시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 100.00 만 USD를 기부했으며, 이는 문선명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탈세 유죄 판결에 대한 사면을 얻기 위한 로비의 일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21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통일교 관련 행사에서 문선명을 칭찬했다. 이전에도 '희망 전진 대회'라는 통일교 행사에는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 폴라 화이트 고문 등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이 연사로 참여했다.
8. 법적 문제와 논란
문선명과 통일교는 탈세 유죄 판결, 교리 및 관행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논란이 된 발언들로 인해 지속적인 법적 문제와 사회적 비판에 직면했다.
8.1. 탈세 유죄 판결
1982년 미국 국세청(IRS) 조사 후, 문선명은 미국에서 8000 USD 미만의 연방 소득세 신고를 허위로 제출한 혐의로 공모죄와 탈세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유죄 판결은 항소심에서도 분할 결정으로 유지되었다. 문선명은 18개월 형과 1.50 만 USD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댄버리 연방 교정 시설에서 13개월을 복역한 후 모범수로 석방되어 중간 거주 시설로 옮겨졌다.
이 사건은 미국의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하버드 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인 로렌스 H. 트라이브는 배심원 재판이 "종교적 편견에 기반한 유죄 판결"로 문선명을 파멸시켰다고 주장했다. 미국 침례교회, 미국 교회 협의회, 전국 흑인 가톨릭 성직자 협의회,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 등 많은 단체들이 문선명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제리 팔웰과 조지프 로워리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성직자들이 정부의 기소에 항의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고 문선명을 옹호했다. 칼턴 셔우드는 자신의 저서 《종교 재판: 문선명 목사의 박해와 기소》에서 문선명 목사의 유죄 판결이 개신교 목사들에게 종교적 자유의 굴욕으로 여겨졌다고 밝혔다.
8.2. 교리 및 관행에 대한 비판
문선명은 자신이 인류의 메시아이자 재림 예수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 학자들로부터 거부되었다. 《원리강론》은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로부터 이단으로, 미국에서는 에큐메니컬 단체들로부터 비기독교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문선명의 가르침이 개신교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교리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원리강론》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냉전을 '탕감 조건'으로 설명하여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선명의 초기 종교 활동 중에는 '피가름'이라 불리는 비정통적인 성적 의식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부 소식통은 문선명이 여러 여성들과 비정통적인 성적 의식을 가졌으며, 1964년까지 한 여성과의 관계가 지속되어 1965년 비밀리에 아들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통일교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하며 일부 학자들도 의문을 제기했다.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은 다른 교회 신도들, 특히 파문된 로마 가톨릭 대주교 에마뉘엘 밀링고가 참여하면서 비판을 받았다. 1990년대에 문선명이 다른 교회와 종교의 신도들에게 통일교의 결혼 축복식을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 이는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8년 언론인 피터 마스는 《더 뉴요커》에 기고한 글에서 일부 통일교 신도들이 문선명이 비신도들에게 축복식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고 불평했다고 보도했다. 2001년 문선명은 71세의 가톨릭 대주교 에마뉘엘 밀링고와 43세의 한국인 침술사 마리아 성이 축복 결혼식에서 결혼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8.3. 논란이 된 발언 및 행보
문선명은 동성애에 반대하며 동성애자들을 "더러운 똥 먹는 개"에 비유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게이들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울버햄프턴 대학교의 조지 D. 크리사이디스는 문선명이 통일 운동의 창립 목적이었던 기독교 교회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초래하는 교리를 도입했다고 비판했다. 문선명 자신도 2009년 자서전에서 처음에는 별도의 교파를 설립할 의도가 없었다고 썼다.
그는 1974년 미국에서 자신에 대한 세금 관련 기소에 대해 "내 피부가 하얗거나 내 종교가 장로교였다면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 피부가 노랗고 내 종교가 통일교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 있다. 이 아름다운 미국에서 가장 추악한 것은 종교적 편협과 인종차별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인종적 편견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문선명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발언으로도 비판을 받았다. 그는 2003년 유대인 학살이 예수를 죽인 대가로 치러진 것이라고 주장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2009년 한일 해저터널 지지 발언은 일본과 한국 양국의 이익과 국민 정체성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2005년 한국에서 신도들에게 한 설교에서 한일 터널 구상에 "100.00 억 JPY 이상의 통일교 재원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문선명은 일본 유학 시절 쇼와 천황 암살과 황거의 이중교 파괴를 생각했으며, 일본인 여성을 차별하는 발언을 반복하고 일본인을 한국어 비칭인 '왜놈'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뿌리는 한국에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한국인" 등 한국 기원설을 주장하고 한국의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문선명선생말씀선집》 제381권에는 "일본은 가장 원수의 나라였다. 이중교를 내 손으로 파괴해 버리려고 생각했다. 히로히토 천황을 내가 암살하기로 결심했다"는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조직이 일본 자민당, 야당, 자위대, 공산당 깊숙이 침투하여 모든 정보를 자신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일본 공안 당국이 손을 쓸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8.4. 가족 및 후계 관련 논란
문선명은 아내 한학자에 대한 소홀함과 자녀 및 배우자들을 교회 및 관련 사업의 지도부에 임명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특히 딸 문인진을 일부 신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통일교 총회장으로 임명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1995년 문선명의 장남 문효진과 결혼했던 홍난숙은 1998년 출간한 책 《문선명 가문의 그림자》에서 남편의 폭행과 마약 중독을 폭로하며 "문씨 가문 전체는 음모와 위선으로 망쳐지고 분열된 집안"이라고 묘사했다.
9. 문화 및 사회적 기여
문선명은 종교 활동 외에도 문화 예술, 스포츠, 인종 관계, 종교 간 대화 등 다양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활동하며 기여했다.
9.1. 예술 및 문화 활동
1962년 문선명과 통일교 신도들은 한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전통 한국 무용을 선보이는 어린이 무용단 리틀엔젤스 예술단을 창단했다. 1984년에는 800.00 만 USD를 들여 유니버설 발레단을 창단했으며, 소련 출신 올레그 비노그라도프가 예술 감독을 맡고 문선명의 며느리 문훈숙이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했다. 문훈숙은 현재 세계평화여성연합의 세계회장을 맡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이 발레단을 아시아 최고의 발레단으로 평가했다. 1989년에는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후에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로 개명)를 워싱턴 D.C.에 설립했다.
9.2. 스포츠 후원
문선명은 축구를 매우 좋아하여 생전에 한국 축구계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는 성남 일화 천마 축구단과 충남 일화 천마 여자 축구단을 운영했으며, 브라질 상파울루의 프로 축구팀 아틀레치쿠 소로카바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첫 피스컵 국제 클럽 축구 대회를 후원했으며, 2년 주기로 대회가 열렸다. 2006년부터는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피스퀸컵도 2년마다 개최했다. 그러나 문선명 사망 후 통일교가 스포츠계 지원을 중단하면서 충남 일화 천마는 해체되었고, 성남 일화 천마는 성남시에서 인수했다. 피스컵 또한 2012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9.3. 교육 활동
문선명은 예술 학교 외에도 경복초등학교, 선정중학교, 선정고등학교, 선문대학교 등을 설립했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화 교육기관인 청심국제중학교와 청심국제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도 설립했다. 미국에서는 통일신학대학원(UTS)을 설립했으며, 브리지포트 대학을 인수받아 경영하기도 했다.
9.4. 인종 관계 및 종교 간 대화
문선명은 인종차별과 인종 차별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74년 그는 통일교 신도들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며 "우리는 백인 대통령을 충분히 가졌다. 그러니 이번에는 흑인 대통령을 선출하자. 내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거대한 인류 가족의 형제자매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수준의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가족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들 이스트 평화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크네세트와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들 간의 대화를 주최하기도 했다. 2000년 문선명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 지도자 루이스 파라칸과 함께 밀리언 패밀리 마치를 후원했다. 이 행사는 워싱턴 D.C.에서 가족 통합과 인종 및 종교 화합을 기념하고 낙태, 사형, 건강 관리, 교육, 복지, 사회 보장 개혁, 약물 남용 예방, 세계은행 및 국제 통화 기금 개혁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집회였다. 파라칸은 기조 연설에서 인종 화합을 촉구했다.
10. 사망과 유산
문선명은 2012년 9월 3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통일교의 지속적인 활동과 다양한 기념 사업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10.1. 말년과 사망
2012년 8월 14일, 문선명은 그달 초 폐렴을 앓은 후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했다. 8월 15일에는 위독한 상태로 보도되었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착용했다. 8월 31일,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인해 서울 북동쪽 가평군에 있는 통일교 소유 병원으로 옮겨졌다. 문선명은 2012년 9월 3일 오전 1시 54분(한국 표준시)에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2주간의 애도 기간이 진행되었다. 9월 15일, 수만 명의 통일교 신도들이 참석한 장례식 후 문선명은 가평에 있는 통일교 소유 저택에 안장되었다.
10.2. 유산 및 기념 사업
문선명 사망 후 그의 아내 한학자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공동 총재로서 문선명의 유업을 이어받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문선명과 한학자의 이름을 딴 선학평화상이 제안되었으며, 이 상은 "인류 발전, 분쟁 해결, 생태 보존 분야의 혁신을 인정하고 권한을 부여한다"는 그의 유지를 계승한다. 수상자에게는 증서, 메달, 그리고 100.00 만 USD가 수여된다.
2012년 문선명은 사후에 북한의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으며, K리그 공로상도 받았다. 2013년 짐바브웨의 모건 츠방기라이 전 총리는 "문선명 박사와 같은 분들의 업적과 삶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나는 여전히 그분들에게 큰 영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11. 평가 및 영향
문선명에 대한 평가는 추종자들의 시각과 비판적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며, 그의 사회적 영향력은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11.1. 추종자들의 시각
통일교 신도들은 문선명을 인류의 메시아이자 재림 예수, 그리고 '참부모'로 믿고 존경한다. 《원리강론》은 그들에게 경전의 지위를 가지며, 문선명은 고난을 용감하게 견디고, 확신에 차서 알며,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신도들은 그가 우주에 대한 설명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며, 그의 진리를 자신의 진리로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문선명이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맥락을 제공하며, 인간에게 에덴 동산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기회를 제공하는 계시를 가져다주었다고 믿는다.
11.2. 비판적 시각
문선명의 메시아 주장은 유대교와 기독교 학자들로부터 거부되었으며, 《원리강론》은 이단적이거나 비기독교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신도들을 '세뇌'하고 자율적인 사고와 행동을 억압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종교적 사기꾼이자 음모를 통해 신도와 그 가족의 삶을 망쳤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반컬트 운동 관계자, 언론, 신도 가족들이 문선명을 "수만 명의 구도자들을 세뇌한 컬트의 꼭두각시"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의 반공주의 활동은 제3차 세계 대전과 핵 홀로코스트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일본의 사사카와 료이치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은 사실도 논란이 되었다. 1977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 소위원회는 코리아게이트 스캔들을 조사하면서 한국 중앙정보부(KCIA)가 통일교와 협력하여 미국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위원회는 또한 닉슨 지지 캠페인에 대한 KCIA의 영향 가능성도 조사했다.
문선명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 발언, 홀로코스트에 대한 논란이 된 해석, 그리고 한일 해저터널 지지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또한 아내 한학자에 대한 소홀함, 자녀들을 교회 및 관련 사업의 지도부에 임명한 것, 그리고 루이스 파라칸과 같은 논란이 있는 인물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문선명의 교리가 기독교 교회를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11.3. 사회 및 역사적 영향
문선명은 20세기 후반 가장 주목할 만한 신흥 종교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종교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수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대규모 합동결혼식은 그의 상징적인 활동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국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언론, 수산업, 중공업 등 다양한 사업 분야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예술 단체, 스포츠 대회 후원, 인종 차별 반대 운동, 종교 간 대화 노력 등을 통해 사회 문화적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끊임없이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으며, 탈세, 가족 내 갈등, 비정통적인 교리 및 관행에 대한 의혹은 그의 유산에 복합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 사회와 국제 관계, 그리고 신흥 종교 운동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