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알-파예드는 1929년 1월 27일 이집트 왕국 알렉산드리아의 로슈디 지역에서 아시우트 출신 초등학교 교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는 논란이 있었으나, 1988년 영국 무역산업부(DTI)는 그의 생일이 1929년 1월 27일임을 확인했다. 그의 형제인 알리와 살라흐는 그의 사업 동료였다.
19세에 알렉산드리아 거리에서 코카콜라 병을 팔았고, 21세에는 싱거 재봉틀을 판매했다. 1952년에는 친구 투손 엘 바라위와 당시 17세였던 아드난 카슈끄지의 가구 수입 사업에 고용되어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아드난의 아버지이자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주치의였던 모하메드 카슈끄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0년대 초반, 알-파예드는 처음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방문하며 유럽 여행을 했다. 이집트로 돌아온 그는 아드난 카슈끄지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아내인 사미라 카슈끄지에게 외도를 고백했고, 그녀는 이혼을 요구했다.
알-파예드는 아드난 카슈끄지와의 파트너십을 종료하고, 카슈끄지의 알 나스르 무역 회사에서 비밀리에 10.00 만 GBP를 인출했다. 카슈끄지는 돈의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사미라가 재혼하여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돈과 다른 대출 및 부채를 탕감해주기로 합의했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외국 기업의 재산 몰수를 위협하자, 알-파예드는 이민을 원하던 레온 카라소 소유의 소규모 해운 회사를 유리한 조건으로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라소는 알-파예드가 합의된 사업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알-파예드는 다른 운송 회사 지분도 유리한 가격에 인수했다. 1961년 나세르가 이집트 재산 몰수를 명령한 후, 알-파예드는 자신의 중동 해운 회사 소유권을 이탈리아 제노바로 이전했다. 이후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 중심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2. 국제 사업 확장 및 투자
런던의 아랍 국외 거주자 커뮤니티에서 알-파예드는 살림 아부 알완을 만나고, 그를 통해 당시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의 고문이었던 마흐디 알 타지르를 소개받았다. 두바이에 석유가 곧 발견될 예정이었고, 이는 토후국의 부를 변화시킬 것이었다.
타지르는 알-파예드에게 두바이가 무일푼이며 현대적인 항만 시설 건설을 위해 100.00 만 GBP를 빌려야 한다고 알렸다. 알-파예드는 미국 변호사 임레 로클리츠로부터 900.00 만 GBP의 대출을 확보했다. 로클리츠의 유대인 혈통은 타지르에게 당혹감을 주었고, 이후 로클리츠가 알-파예드의 공식 파트너십 제안을 거절하는 원인이 되었다. 알-파예드는 영국 엔지니어링 회사 코스테인 그룹이 항만 작업을 수행하는 계약에서 150.00 만 GBP의 수수료를 벌었다. 그는 또한 두바이 세계 무역 센터의 자금 확보를 도왔다. 모건 그린펠의 은행가 데이비드 더글러스-홈이 계약 관리를 담당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코스테인은 알-파예드와 타지르 덕분에 2.80 억 GBP 이상의 계약을 따냈고, 알-파예드는 코스테인 주식의 20.84%를 매입하여 회사 이사로 임명되었다. 두바이의 여러 프로젝트에서 얻은 수수료 수입으로 알-파예드는 롤스로이스와 그슈타트의 대형 샬레, 그리고 수년간 거주했던 메이페어 파크 레인 60번지의 나머지 아파트들을 매입했다.
1974년, 알-파예드는 남아프리카에 광범위한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 사업가이자 국제 복합기업 론로의 회장인 타이니 롤랜드를 만났다. 롤랜드와의 복잡한 직업적 관계는 그의 삶을 20년간 지배했으며, 법적 파급 효과는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롤랜드는 알-파예드에게 1975년 3월 코스테인 주식을 론로 주식 550만 주와 교환하도록 설득했고, 알-파예드는 이 거래에서 얻은 이익으로 론로 주식 300만 주를 추가로 매입하여 회사 이사가 되었다. 알-파예드는 곧 롤랜드가 론로의 돈을 자신의 생활비와 아프리카에서의 대규모 뇌물 지급, 그리고 회사 이익을 스위스 비밀 은행 계좌로 빼돌리는 데 사용하는 것에 경악했다.
영국 무역산업부(DTI)는 1976년 초 론로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당황한 알-파예드는 1976년 5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론로 주식을 쿠웨이트 투자자들에게 팔고, 자신의 코스테인 주식을 1100.00 만 GBP에 다시 사들였다. 1977년경 타지르의 두바이 내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알-파예드는 새로운 알루미늄 제련소 및 제벨 알리 개발 프로젝트의 수수료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이는 코스테인의 미래 이익을 위협했다.
1993년, 알-파예드는 두바이 경제 개발부 이사 모하메드 알라바르의 방문을 받았다. 알라바르는 셰이크 막툼에 의해 이전 수십 년간의 대규모 수수료 지급 시스템을 근절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타지르는 두바이 알루미늄 제련소 건설에서 얻은 과도한 이익을 상환하라는 영국 법원의 도전을 받았고, 알-파예드는 두바이 세계 무역 센터 관리 계약과 관련하여 표적이 되었다. 알-파예드의 센터 관리 계약은 나중에 막툼 가문에 의해 해지되었고, 알-파예드는 그들에게 3000.00 만 GBP에서 9000.00 만 GBP로 추정되는 보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1994년 10월 법원에 회부되었고, 막툼 가문과의 합의 시도가 실패한 후 알-파예드는 10월 17일 증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알-파예드의 변호사는 그가 목과 허리 합병증으로 심하게 아파 두바이로 비행할 수 없다고 법원에 알렸다. 알라바르는 그날 아침 알-파예드가 해러즈로 가는 길을 비밀리에 녹음했으며, 다음 날 이 테이프가 법원에 공개되었다. 알-파예드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주장이 거짓임이 명백해졌고, 그의 변호사는 그날 그의 기만이 사건에 미친 치명적인 영향에 대해 알-파예드에게 통보했다.
1960년대 중반, 그는 두바이의 통치자 셰이크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을 만나 두바이 변혁을 돕는 임무를 맡았고, 1968년 IMS (International Marine Services)를 설립했다. 그는 코스테인 그룹 (이후 이사 및 30% 주주가 됨), 버나드 선리 앤 선즈, 테일러 우드로 등 영국 기업들을 토후국에 소개하여 건설 작업을 수행하도록 했다.
2.1. 브루나이 술탄과의 관계
알-파예드는 1966년 당시 브루나이의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의 재정 고문이 되었다. 알-파예드는 모린 오스에게 자신이 술탄의 어린 시절부터 하사날 볼키아를 알고 지냈으며, 브루나이 무역 센터 건설 중에 만났다고 말했다. 타이니 롤랜드는 DTI 조사관들에게 알-파예드가 인도 성인이자 사기꾼으로 알려진 슈리 찬드라 스와미지 마하라지를 통해 술탄에게 소개를 요청하며 50.00 만 USD와 향후 사업 이익의 일부를 지불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으나, 롤랜드는 나중에 이 진술이 사실이 아님을 인정했다.
1984년 중반, 알-파예드는 술탄으로부터 여러 위임장과 서면 승인을 받아 그의 업무를 수행했다. 이를 통해 알-파예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던 술탄의 막대한 돈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파예드 삼형제의 은행인 스코틀랜드 왕립 은행은 스위스에서 수억 달러를 그들의 계좌로 송금받았다. RBS는 그 돈이 술탄의 소유라고 가정했으나, 알-파예드는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술탄의 것과 별개라고 은행에 말했다. DTI 보고서는 "이 막대한 가처분 자산의 증가가 모하메드가 술탄의 신임을 얻은 직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매우 강력한 우연이다"라고 언급했다.
위임장을 사용하여 알-파예드는 1985년 술탄을 위해 도체스터 호텔을 매입했다. 1985년 1월, 알-파예드는 파운드 스털링의 가치 하락이 경제를 위협하던 시기에 마거릿 대처 총리를 만나기 위해 술탄과 함께 다우닝 가 10번지를 방문했다. 술탄은 파운드화 자산 50.00 억 GBP를 다른 통화로 옮겼다가 다시 스털링으로 되돌렸고, 알-파예드는 이를 자신이 설득한 결과라고 주장하며 영국 방위산업에 5.00 억 GBP 상당의 계약을 제공하도록 술탄을 설득했다고 공로를 내세웠다.
2.2. 아이티에서의 논란
1964년 6월 12일, 알-파예드는 당시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통제 하에 있던 아이티에 도착했다. 알-파예드는 쿠웨이트 여권으로 입국하여 자신을 셰이크 모하메드 파예드라고 소개했다。도착 직후 뒤발리에는 아이티 석유 산업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던 미국 회사와의 10년 계약을 취소하고, 알-파예드와 50년 동안 유사한 계약을 체결했다. 알-파예드는 또한 지질학자 조지 드 모렌실트와도 협력했다. 그는 6개월 후 아이티를 떠났는데, 아이티 동료들이 제공한 "원유" 샘플이 저급 당밀로 판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알-파예드는 포르토프랭스의 부두를 개발하고 정유소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두바이에서의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카리브해 섬에 투자를 유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알-파예드는 아이티 주요 항구에서의 선박 정박, 하역, 선적 수수료 징수에 대한 독점적인 통제권을 가졌고, 이는 아이티 해운업계의 불만을 샀다. 뒤발리에는 알-파예드에게 3.00 만 USD를 요구했으나, 그는 지불하지 않고 해운업자들의 커져가는 분노를 두려워하여 1964년 12월 아이티를 떠났다. 파예드는 나중에 아이티 정부가 자신에게 200.00 만 USD를 빚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8년 영국 무역산업부(DTI)의 알-파예드 배경 보고서는 "우리는 모하메드 파예드가 1964년 아이티 정부와 국민에게 상당한 기만을 저질렀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항만 당국으로부터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10.00 만 USD 이상을 빼앗았다"고 명시했다.
3. 주요 기업 인수 및 경영
1979년 알-파예드는 프랑스 파리의 리츠를 3000.00 만 USD에 매입했다. 1984년 파예드와 그의 형제들은 타이니 롤랜드로부터 런던의 해러즈 백화점을 포함한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그룹의 30% 지분을 1.38 억 GBP에 매입했다. 1985년에는 나머지 70%를 6.15 억 GBP에 인수했다. 롤랜드는 파예드 형제들이 자신들의 배경과 부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하며 정부에 조사를 압박했다. 파예드 형제에 대한 DTI 조사가 시작되었다. DTI의 후속 보고서는 비판적이었으나, 파예드 형제에 대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보고서 내용을 믿었지만 다른 이들은 정치적 동기가 있다고 느꼈다. 롤랜드는 자신의 책 영웅에서 제로로(A Hero from Zero)에서 파예드 가족과의 관계를 묘사했다.
1998년, 그해 사망한 롤랜드는 알-파예드가 자신의 해러즈 금고에서 서류와 보석을 훔쳤다고 비난했다. 알-파예드는 해러즈 보안 책임자 존 맥나마라와 다른 네 명의 직원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혐의는 기각되었다. 귀중한 서류와 보석, 희귀 우표, 금 담배 케이스 등이 도난당했다. 알-파예드는 롤랜드의 미망인에게 합의금을 지불하며 분쟁을 해결했다. 그는 또한 2002년 메트로폴리탄 경찰을 상대로 부당 체포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1994년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는 상장되었지만, 알-파예드는 해러즈의 소유권을 유지했다. 그는 1994년과 1999년 두 차례 영국 시민권을 신청했으나 모두 거부되었다. 롤랜드와의 불화가 첫 번째 거부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6년 알-파예드는 유서 깊은 영국 유머 잡지 펀치의 판권을 매입하여 그해 말 새로운 편집장 피터 매케이의 지휘 아래 300.00 만 GBP의 비용으로 재창간했다. 펀치는 이전에 1841년부터 1992년까지 발행되었다. 재창간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펀치는 풍자 경쟁자인 프라이빗 아이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2002년 두 번째로 폐간되었다.
1997년 1월, 알-파예드는 "폭력 문화"에 대한 십자군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조직인 '인민의 신탁(The People's Trust)'을 설립했다. 이 조직은 낙태 반대 후보들과 기독교 민주 운동의 신문인 기독교 민주당원(Christian Democrat)에 대한 알-파예드의 지지에 뒤이어 설립되었다. 인민의 신탁은 1997년 영국 총선의 모든 후보들에게 편지를 보내 "당파보다는 양심, 유권자, 그리고 국가를 정치의 중심에 두는" 의원 그룹을 식별할 계획이었다. 인민의 신탁은 회계 보고서 제출에 실패한 후 1998년 9월 해산되었다.
배니티 페어가 모린 오스의 기사 "해러즈의 성전(Holy War at Harrods)"을 1995년 9월에 게재한 후, 알-파예드는 미국 잡지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으나 1997년 소송을 철회했다. 알-파예드는 1996년 톰 바우어에게 자신의 전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바우어의 전기 파예드: 비공식 전기는 1998년에 출판되었다. 알-파예드는 소송 의사를 밝혔으나 소송을 철회했다. 오스와 바우어는 모두 알-파예드의 함정 수사 시도 대상이었으며, 알-파예드의 직원들은 작가들에게 도난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를 제공하려 했다.
3.1. 금품 로비 사건
1994년, 이른바 '금품 로비 사건(cash-for-questions affair)'에서 알-파예드는 자신을 대신하여 의회에서 질문을 하도록 돈을 지불했지만 수수료를 신고하지 않은 의원들의 이름을 폭로했다. 이로 인해 보수당 의원 닐 해밀턴과 팀 스미스는 불명예스럽게 정부를 떠났고, 이러한 부패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공공 생활 표준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알-파예드는 또한 내각 장관 조너선 에이트킨이 사우디아라비아 무기상 그룹과 동시에 파리 리츠 호텔에 무료로 머물렀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이는 에이트킨의 실패한 명예훼손 소송과 이후 위증으로 인한 투옥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알-파예드의 대변인은 전 BBC 기자 마이클 콜이었다.
해밀턴은 1999년 12월 알-파예드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했고, 2000년 12월 항소에서도 패소했다. 전직 의원인 해밀턴은 알-파예드로부터 의회 질문을 대가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상 부인했다. 해밀턴의 명예훼손 소송은 1997년 1월 16일 방영된 채널 4의 디스패치 다큐멘터리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 다큐멘터리에서 알-파예드는 해밀턴이 의회 질문을 대가로 최대 11.00 만 GBP의 현금과 기타 사례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해밀턴의 항소 근거는 원심 판결이 알-파예드가 벤저민 펠에 의해 해밀턴의 법률 대리인의 쓰레기통에서 훔친 문서에 대해 1.00 만 GBP를 지불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었다.
2003년 알-파예드는 서리주에서 스위스로 이주했는데, 이는 영국 국세청과의 합의 위반을 주장한 것이었다. 2005년, 그는 "영국을 고향으로 여긴다"며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2014년 매각하기 전까지 모나코에 소카르라는 이름의 요트를 정박시켰다.
3.2.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그룹 및 해러즈
1984년, 알-파예드와 그의 형제 알리는 론로의 회장이었던 타이니 롤랜드로부터 나이츠브리지 백화점 해러즈를 포함한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그룹의 30% 지분을 1.38 억 GBP에 매입했다. 론로는 1977년부터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의 통제권을 추구해왔고, 1981년 독점 및 합병 위원회의 판결로 회사 인수가 저지되었지만, 디 옵서버 인수는 승인되었다.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주식을 매입한 후, 알-파예드는 롤랜드에게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이사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회장 롤랜드 스미스를 설득하여 알-파예드가 회사를 인수한 후 소급 보너스를 받도록 했다. 무역산업부 장관 존 비펀은 론로가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의 주식을 더 이상 매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이는 롤랜드를 "격분"시켰다. 이 판결 이후 롤랜드는 알-파예드에게 주식을 매각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알-파예드가 잠시 론로의 이사로 있을 때 만났던 인물이었다. 롤랜드는 나중에 "나는 토치(롤랜드가 알-파예드를 부르던 이름)가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전체를 살 여유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알-파예드는 1985년 초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의 나머지 70%를 6.15 억 GBP에 매입하여 롤랜드와 격렬한 불화를 촉발시켰다. 디 옵서버의 전 편집장 도널드 트렐포드는 롤랜드가 "...확실히 알-파예드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는 자신이 속았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주주들이 속았다고 확신했다"고 믿었다. 롤랜드는 알-파예드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던 브루나이 술탄을 위해 보유하고 있던 위임장을 사용하여 매입 자금을 조달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주주들이 속았다고 느꼈다. 롤랜드의 불만은 또한 알-파예드가 자신의 가족 부의 출처에 대해 영국 정부에 거짓말을 했고, 정부가 알-파예드의 자격 증명을 조사하지 않고 독점 및 합병 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고 판매를 승인했으며 (론로는 위원회에서 세 차례 조사를 받았음), 새로운 무역 장관 노먼 테빗이 알-파예드의 거래가 진행되는 동안 론로의 입찰을 막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그룹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알-파예드 형제는 그룹을 안전하게 매입할 수 있는 충분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영국 정부에 납득시켜야 했다. 알-파예드 형제는 자신들을 위한 부유한 가문의 역사를 꾸며냈다. 투자 은행 클라인워트 벤슨과 법률 회사 허버트 스미스의 대리인으로, 알-파예드 형제의 은행가들은 정부에 자신들의 자산에 대한 1.5페이지짜리 요약본을 제출했고,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알-파예드 형제는 자신들이 부유한 면화 상인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부는 은행가인 클라인워트 벤슨에 의해 "수십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클라인워트 벤슨의 보도 자료는 알-파예드 형제들이 "1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선주, 지주, 산업가였던 유서 깊은 이집트 가문"이라고 명시했다. 보고서는 그들이 영국에서 자랐고 가말 압델 나세르의 집권 이후 이집트를 떠났다고 밝혔다.
DTI 보고서는 그들의 부의 규모에 대해 매우 다른 결론을 내렸다. "만약 사람들이, 예를 들어, 그들이 호화 호텔을 단 하나만 소유하고 있다는 것; 그들의 석유 탐사 컨소시엄 지분이 현재 가치가 없다는 것; 그들의 은행 지분이 은행 발행 주식 자본의 5% 미만이며 1000.00 만 USD 미만의 가치라는 것; 그들이 현재 건설 프로젝트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는 것; '선박 무역의 선도적인 선주'는커녕 1600톤급 롤온/롤오프 화물 페리 두 척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모든 사실이 알려졌다면 사람들은 알-파예드 형제들이 정말로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를 매입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돈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8년 DTI 보고서 중)
1985년 3월 알-파예드 형제는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에 대해 6.15 억 GBP의 공식 현금 제안을 발표했는데, 클라인워트는 이 제안이 어떤 대출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1985년 알-파예드의 재정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은 아직 없지만, DTI 보고서는 1984년 10월까지 알-파예드 형제가 스코틀랜드 왕립 은행과 스위스 은행에 최소 6.00 억 USD를 처분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DTI 조사관들은 "우리는 이 자금의 출처나 어떻게 어디서 얻었는지에 대한 신뢰할 만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알-파예드 형제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한 돈은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를 매입하기 위한 4.00 억 GBP 이상의 대출을 보증하는 담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알-파예드는 모린 오스와의 인터뷰에서 "해러즈와 같은 엄청난 자산을 가진 회사가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현금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 은행에서 받은 첫 번째 대출은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주식을 담보로 한 다른 대출로 대체되었고, 알-파예드 형제는 자신들의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를 인수했다. 알-파예드 형제의 해러즈 소유권은 영국 정부가 알-파예드 형제의 입찰을 독점 및 합병 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완성되었다.
알-파예드 형제의 해러즈 매입 마지막 단계에서 타이니 롤랜드는 무역산업부 장관 노먼 테빗에게 알-파예드 가족의 부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임을 통보했다. 롤랜드는 또한 아슈라프 마르완의 도움을 받아 알-파예드 형제를 폭로하려 했다. 롤랜드가 소유한 디 옵서버 신문은 알-파예드 형제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알-파예드는 디 옵서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알-파예드 형제에게 비판적인 다른 신문들도 일상적으로 위협을 받거나 유사한 소송이 제기되었다. 디 옵서버를 제외한 알-파예드 형제에 대한 모든 비판적 보도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3.2.1. 1988년 DTI 보고서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롤랜드는 알-파예드와 그의 해러즈 인수에 대한 전 세계적인 조사를 주도했다. 그는 회계사, 변호사, 사립 탐정, 프리랜서 언론인 등을 고용하여 수백만 파운드가 소요된 작전을 펼쳤는데, 이는 어떤 신문사의 조사 범위도 넘어섰다. 불법 도청 장치가 사용되었고, 일부 돈은 이집트, 아이티, 두바이, 브루나이, 프랑스, 스위스에서 알-파예드의 사기성 거래를 증명하고 그의 미천한 출신과 제한된 순자산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굴하기 위한 공무원 뇌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롤랜드의 알-파예드 형제에 대한 조사 결과는 론로가 소유한 주간지 디 옵서버에 전달되었다. 디 옵서버는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매입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고, 무역산업부 조사관들의 조사는 1988년 7월에 제출되었으나 DTI는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롤랜드는 1989년 사본을 입수했고, 이 보고서는 목요일 아침 디 옵서버의 특별 무료 16페이지 판으로 발행되었다. 보고서 발행은 DTI 조사관들의 findings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디 옵서버의 명예훼손 방어에 기여했으며, 정부에 보고서 공개를 압박하는 목적이 있었다. DTI 변호사들은 법원 명령을 받아 디 옵서버 버전의 보고서 모든 사본을 제출하거나 폐기하도록 명령했다. 이 보고서는 1990년에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DTI 보고서는 알-파예드 형제들이 "그들의 출신, 부, 사업 이익 및 자원을 장관, 공정 거래 사무소,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이사회 및 주주, 그리고 그들 자신의 고문들에게 부정직하게 표현했다"고 밝혔다. 롤랜드와 론로 그룹은 이전에 1976년 DTI 보고서에 의해 강력히 비판받았으며, 에드워드 히스 총리에 의해 "자본주의의 불쾌하고 용납할 수 없는 얼굴"로 묘사된 바 있다.
1993년 유럽 인권 재판소는 알-파예드 형제가 영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기각했는데, 이들은 DTI 보고서에서 자신들이 허위 진술을 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보고서가 자신들의 명성을 망쳤고 항소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3.2.2. 해러즈 소유권
해러즈는 휴 프레이저의 지휘 아래 꾸준히 쇠퇴했지만, 여전히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그룹 이익의 절반을 차지했다. 해러즈의 재산을 회복하기로 결심한 알-파예드는 브라이언 월시를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의 관리자로 고용했다. 월시는 회사 내부에 분열을 일으켰고, 다음 2년 동안 200명 이상의 바이어가 사임했다. 알-파예드와의 논쟁 끝에 월시는 1987년 10월 해고되었다. 직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알-파예드는 2000 GBP 현금이 든 봉투를 배포했다. 월시가 떠난 후 알-파예드는 자신의 사무실을 해러즈 5층으로 옮기고, 백화점 회장으로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월시는 마이클 엘리스-존스로 교체되었으나, 그는 8주 만에 해고되었다.

크리스토프 베터만은 1984년부터 두바이에서 알-파예드를 위해 일한 후 1990년 해러즈의 부회장이 되었다. 1991년 4월, 베터만은 샤르자 토후국에서 일할 제안을 받았고, 6월에 베터만은 모린 오스에게 알-파예드가 "헤드헌터와 나 사이의 전화 통화 녹취록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이 사람들과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신뢰를 깨뜨렸다고 비난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나는 사임하겠다. 당신이 내 전화를 도청했다면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베터만은 해러즈 직장을 그만두고 샤르자의 석유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알-파예드는 샤르자의 통치자에게 베터만이 막대한 돈을 훔쳤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 베터만은 알-파예드가 고소한 세 건의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알-파예드는 소매업의 연극성을 즐겼고, 25년간 해러즈에서 해러즈 도어맨, 보이 스카우트,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유명인사들도 매년 해러즈 세일 개막식에 초청되었고, 해러즈는 1982년부터 매년 로열 윈저 마상 대회를 후원했다. 1997년 해러즈의 마상 대회 후원은 존 메이저 총리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알-파예드와 연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회 회장에게 새로운 후원사를 찾도록 촉구한 후 중단되었다.
예술가이자 디자이너인 윌리엄 미첼은 알-파예드에 의해 '즐거운 소매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고용되었는데, 이는 해러즈 1층에 이집트 홀을 만들었고, 그 성공에 힘입어 백화점의 중앙 엘리베이터를 대체하는 이집트 에스컬레이터를 만들었다. 미첼은 또한 해러즈에 도디 파예드와 다이애나 비를 위한 기념비를 디자인했다. 알-파예드는 해러즈 복원에 4.00 억 GBP 이상을 투자했다고 주장했으며, 이집트 에스컬레이터에만 2000.00 만 GBP 또는 7500.00 만 GBP가 소요되었다.
1991년 영국 하원 무역산업위원회는 영란은행 총재 로빈 리-펨버턴에게 파예드 형제가 은행을 운영하기에 "적합하고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해러즈 은행의 통제권을 신탁 관리인에게 이전하도록 명령했다. 알-파예드는 1994년 형제 살라흐의 해러즈 지분을 1.00 억 GBP에 매입했다. 1994년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가 런던 증권 거래소에 재상장되기 전, 해러즈는 알-파예드와 그의 가족의 개인 소유로 남을 수 있도록 그룹에서 분리되었다.
3.2.3. 직원 관계
알-파예드는 직원들의 충성심에 신경을 썼고, 두 명의 젊은 그리스 여성을 스파이로 고용하여 동료 직원들을 보고하게 했다. 상점 직원 노동조합인 USDAW의 전화는 도청되었다. 직원들은 3개월 계약을 맺었고, 종종 합의된 보상 없이 해고되어 산업 재판소에 갈 수밖에 없었다. 알-파예드는 또한 직원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의 성생활에 대한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하기도 했다.
알-파예드는 자신의 미적 감각을 해치는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특히 과체중이거나 흑인 직원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다. 흑인 고용을 피하기 위해 해러즈는 지원자들에게 사진 제출을 요구했다. 해러즈가 고용한 흑인 수는 결국 다른 런던 백화점의 절반 수준이었다. 해러즈의 전 법률 고문이었던 프란체스카 베터만은 알-파예드에 대해 "그는 예쁜 얼굴을 좋아한다. 못생긴 사람은 고용하지 않았다. 그는 피부가 밝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영국인이고, 젊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는 지원서에 '당신의 피부색, 인종'이라고 적힌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것을 양식에 넣을 수 없다'고 말했고, 그는 '그럼 적절한 사진을 꼭 제출하게 하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1994년 해러즈는 회사에 제기된 5건의 인종 차별 소송을 합의했으며, 노동조합 관계자들에 따르면 1994년 6월부터 9월까지 해고된 28명의 직원 중 23명이 주로 잡무를 맡았던 흑인이었다.
한 플로리스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해러즈에 고용이 거부되었다. 후속 산업 재판소의 의장은 해러즈의 변론을 '악의적이고 부정직하다'고 비난하며 "매우 큰 조직에서 일하는 매우 고위 인사 담당자에 의한 노골적인 인종 차별 행위가 있었다... 해러즈 인사 담당자 측에서 차별 행위를 숨기기 위한 거짓말과 기만이 있었고, 해러즈 인사 담당자의 증언은 부정직했다"고 밝혔다.
3.2.4. 왕실 납품 허가증
2010년 8월, 알-파예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보낸 편지에서 2000년에 철거했던 해러즈의 영국 왕실 납품 허가증을 불태웠다고 밝혔다. 해러즈는 1910년부터 왕실 납품 허가증을 보유하고 있었다. 알-파예드는 허가증을 "저주"라고 묘사하며, 제거 이후 사업이 세 배로 늘었다고 주장했다. 필립 공은 2000년 1월 자신의 허가증을 철회했으며, 나머지 허가증은 알-파예드에 의해 12월에 5년 주기 검토를 앞두고 해러즈에서 제거되었다. 필립 공은 알-파예드에 의해 해러즈 출입이 금지되었다. 2009년 허가증을 불태우는 영상은 알-파예드가 자금을 지원하고 키스 앨런이 감독한 영화 불법 살인의 마지막 장면에 상영되었다.
3.2.5. 해러즈 매각
매각 부인에도 불구하고, 해러즈는 2010년 5월 카타르 토후국의 국부펀드인 카타르 홀딩스에 매각되었다. 알-파예드의 대변인은 "은퇴를 결정하면서 (알-파예드는) 자신이 해러즈에 쌓아온 유산과 전통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해러즈는 15.00 억 GBP에 매각되었다.
알-파예드는 나중에 해러즈 연금 기금의 신탁 관리인으로부터 자신의 배당금 승인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은 후 해러즈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알-파예드는 "나는 매일 여기에 있지만, 그 빌어먹을 바보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익을 가져갈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이 사업을 운영하는데, 이익을 가져가려면 빌어먹을 신탁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알-파예드는 6개월 동안 해러즈의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3.3. 스코틀랜드 부동산
1972년 알-파예드는 스코틀랜드 북부 이스터 로스의 발나군 영지를 매입했다. 초기 4.8 ha에서 알-파예드는 영지를 2.63 만 ha까지 확장했다. 그는 영지에 2000.00 만 GBP 이상을 투자하여 14세기 분홍색 발나군 성을 복원하고 관광 숙박 사업을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관광청은 2002년 알-파예드의 "지역 홍보 노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명예 시민권을 수여했다.
스코틀랜드와 연관된 이집트인으로서 알-파예드는 2008년 월터 바우어의 15세기 연대기 스코티크로니콘 재판을 후원했다. 스코티크로니콘은 이집트 파라오의 딸인 스코타가 가족을 떠나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여 스콘의 돌을 가져왔고, 이후 스코틀랜드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기술한다. 이 이야기는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알-파예드는 나중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원래 이집트인이고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선언했다.
2009년 알-파예드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이제 당신들이 깨어나 영국과 그들의 끔찍한 정치인들로부터 독립할 때다...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되찾는 데 필요한 어떤 도움이라도 내가 제공할 것이다... 당신들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유를 되찾으면, 나는 당신들의 대통령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3.4. 자선 활동
알-파예드는 생명 제한 질환을 앓는 어린이와 빈곤에 처한 어린이를 돕기 위해 1987년 알-파예드 자선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주로 영국, 태국, 몽골의 장애 및 방치된 어린이를 위한 자선 단체 및 호스피스와 협력한다. 이 재단은 맨체스터의 프랜시스 하우스 호스피스,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병원, 차일드라인 등과 협력한다. 1997년 9월, 영국 켄트주 세븐오크스에 위치한 다이애나 비의 모교인 웨스트 히스 스쿨이 파산 관재인 관리에 들어갔다. 알-파예드는 1998년 5월 이 학교를 250.00 만 GBP에 매입했고, 이 학교는 이전에 세븐오크스에 기반을 둔 트라우마 아동을 위한 베스 마리 센터의 새로운 건물이 되었다. 이 학교는 1998년 9월 웨스트 히스 뉴 스쿨로 재개장했다. 2011년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딸 카밀라 (8년 동안 재단의 대사로 활동)는 리버풀 웨스트 더비에 새로 단장한 조이즈 플레이스 아기 호스피스를 개원했다.
3.5. 풀럼 FC
알-파예드는 1997년 서런던의 프로 축구 클럽 풀럼 FC를 625.00 만 GBP에 매입했다. 이 인수는 빌 머디맨의 머디맨 그룹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의 장기 목표는 풀럼이 5년 안에 프리미어리그 팀이 되는 것이었다. 2000-01 시즌, 풀럼은 장 티가나 감독 아래 1부 리그에서 101점을 획득하고 90골을 기록하며 우승하여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 이는 알-파예드가 예정보다 1년 일찍 프리미어리그 목표를 달성했음을 의미했다. 2002년까지 풀럼은 유럽 축구에 참가하여 인터토토컵에서 우승하고 UEFA컵에 참여했다. 풀럼은 2010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패배했다. 알-파예드가 구단주로 재임한 2013년까지 풀럼은 프리미어리그에서 계속 뛰었다.
풀럼은 현대 안전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크레이븐 코티지를 임시로 떠났다. 알-파예드가 경기장 건설 우선권을 부동산 개발 회사에 매각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클럽이 코티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알-파예드가 티가나 감독이 신인 선수 영입에 700.00 만 GBP 이상을 과도하게 지불하고 비밀리에 이적 협상을 했다고 잘못 주장한 후, 풀럼은 2004년 티가나를 상대로 한 법적 소송에서 패소했다. 2009년, 알-파예드는 축구 선수들의 임금 상한제를 지지한다고 말했으며, 잉글랜드 축구 협회와 프리미어리그의 경영진을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돈에 눈이 먼 당나귀들"이라고 비판했다.

마이클 잭슨의 동상은 2011년 4월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알-파예드에 의해 공개되었다. 1999년 잭슨은 경기장에서 위건 애슬레틱과의 리그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동상에 대한 비판이 일자 알-파예드는 "어떤 멍청한 팬들이 이 사람이 세상에 준 선물을 이해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지옥에나 가라. 나는 그들이 팬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이 동상은 2013년 클럽의 새 구단주에 의해 철거되었고, 알-파예드는 동상 철거로 인한 '불운' 때문에 클럽이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되었다고 비난했다. 알-파예드는 이후 이 동상을 국립 축구 박물관에 기증했다。2019년 3월, 이 동상은 박물관에서 철거되었는데, 대변인은 축구를 "더 잘 대표하는" 전시물을 도입하기 위해 "수개월 전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철거는 다큐멘터리 리빙 네버랜드에서 잭슨의 아동 성추행 혐의가 제기된 이후에 이루어졌다.
알-파예드 휘하의 풀럼 FC는 조세 피난처 버뮤다에 기반을 둔 마프코 홀딩스가 소유했으며, 이는 다시 알-파예드와 그의 가족이 소유했다. 2011년까지 알-파예드는 풀럼 FC에 1.87 억 GBP의 무이자 대출을 해주었다. 2013년 7월, 알-파예드가 NFL의 잭슨빌 재규어스를 소유한 파키스탄계 미국인 사업가 샤히드 칸에게 클럽을 매각했다고 발표되었다. 매각 가격은 1.50 억 GBP에서 2.00 억 GBP 사이였다.
3.6. 기타 사업 관심사
알-파예드의 사업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 발나군 성 & 영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 75 록펠러 플라자, 뉴욕 - 1947년에 건설되었으며, 원래는 에쏘 빌딩이었고 나중에 타임 워너 빌딩이 되었다. 알-파예드가 소유했으며 RXR 리얼티가 관리 및 임대했다.
그의 주요 사업 인수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그룹, 해러즈 포함 (1985년, 6.15 억 GBP; 2010년 15.00 억 GBP에 매각)
- 풀럼 FC (1997년, 3000.00 만 GBP; 2013년 1.50 억 GBP에서 2.00 억 GBP에 매각)
- 월리스 심프슨 사망 후, 알-파예드는 파리의 빌라 윈저의 임대권을 인수했는데, 이 빌라는 윈저 공작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윈저 공작, 즉 전 에드워드 8세의 옛 거주지였다. 그는 자신의 시종 시드니 존슨 (윈저 공작의 시종이기도 했음)과 함께 빌라와 그 소장품의 복원을 조직했다.
3.7. 미디어 관심사
1996년 알-파예드는 '리버티 퍼블리싱(Liberty Publishing)'을 설립했는데, 회사의 목표는 "중요한 미디어 사업을 시작하고 인수하거나 전략적 지분을 확보하는 것"으로 명시되었다. 리버티 퍼블리싱의 회장은 전 이브닝 스탠더드 편집장 스튜어트 스티븐이었고, 최고 경영자는 전 뉴스 인터내셔널 상무이사 존 덕스였다. 알-파예드는 1986년 론민으로부터, 1995년 뉴스 인터내셔널로부터 신문 투데이를 인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알-파예드는 영국 정부가 뉴스 인터내셔널의 CEO 루퍼트 머독에게 자신에게 신문을 팔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믿었다. 앤드루 닐은 리버티 퍼블리싱에 영입되어 런던 뉴스 라디오의 400.00 만 GBP 인수 합의를 도왔으나, 인수는 나중에 무산되었다.
스티븐은 개릭 클럽에서 스콧 트러스트의 회장 휴 영과 식사를 하고, 알-파예드로부터 신문 디 옵서버를 위해 1700.00 만 GBP 수표를 제안했으나 영은 이를 거절했고, 2500.00 만 GBP의 다른 제안도 거절했다. 여성 전용 라디오 방송국인 비바 라디오는 1996년 5월 300.00 만 GBP에 매입되었다. 비바 라디오는 리버티 라디오로 이름이 바뀌었고, 풀럼 FC의 홈 및 원정 경기를 중계했다. 이 방송국은 2000년 UCKG에 매각되었다. 650.00 만 GBP의 부채로 인해 리버티 퍼블리싱은 1996년 알-파예드의 형제 알리에 의해 청산되었다. 스티븐, 덕스, 마이크 홀링스워스는 해고되었지만, 앤드루 닐은 컨설턴트로 남았다.
3.8. 부동산
알-파예드는 파크 레인 55번지 및 60번지와 메이페어 사우스 스트리트의 건물을 소유했다. 이 세 건물은 모두 알-파예드가 브루나이 술탄 하사날 볼키아를 위해 매입한 도체스터 호텔과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1995년 웨스트민스터 시의회는 파크 레인 55번지 및 60번지의 170개 고급 아파트를 임대하는 회사인 하이드 파크 레지던스가 단기 임대에 부과되는 더 높은 사업 요율을 피하기 위해 아파트를 장기 임대로 잘못 보고했다고 판단했다. 시의회는 추가로 110.00 만 GBP를 요구했고, 알-파예드는 임대 대리인 샌드라 루이스-글래스가 자신과의 신뢰를 시의회에 배신했다고 믿었다. 루이스-글래스의 전화 통화를 도청하고 감시한 후, 알-파예드의 보안 책임자이자 전 메트로폴리탄 경찰관이었던 존 맥나마라는 경찰에 그녀가 80 펜스 상당의 플로피 디스크 두 개를 훔쳤다고 주장했다. 루이스-글래스는 이 혐의를 부인하고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나중에 부당 해고로 소송을 제기하여 1.35 만 GBP를 받았다.
1970년대 초 알-파예드는 프랑스 리비에라의 생트로페 공원에 있는 생 테레즈 성과 스위스 그슈타트의 샬레, 그리고 서리주 옥스테드 근처의 배로 그린 코트와 농장을 매입했다.
보카르도 SA 대 스타 에너지 UK 사건에서 영국 대법원은 에너지 회사 스타 에너지가 그의 서리 영지 아래에서 석유를 시추한 후 알-파예드에게 보상을 거부했다. 알-파예드는 원래 고등 법원에서 석유 수익의 일부를 얻었으나, 나중에 항소 법원 판사들로부터 손해 배상만 청구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보카르도 SA는 알-파예드가 소유한 회사로, 스코틀랜드와 서리의 그의 영지를 소유했으며 리히텐슈타인에 기반을 두었다.
4. 개인적인 삶과 가족
알-파예드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사미라 카슈끄지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아들 도디 알파예드를 두었다. 그는 처남이자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상 겸 사업가인 아드난 카슈끄지와 함께 일했다. 1985년, 알-파예드는 핀란드 사교계 명사이자 전 모델인 헤이니 와텐과 결혼하여 오마르를 포함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70년대 초반, 그는 자신의 이름에 '알-'(ال알-아랍어) 접두사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영어로 자신의 이름을 단순히 "파예드"가 아닌 "알-파예드"로 표기하게 했다. 아랍어 이름에서 '알-'이라는 단어는 조상의 이름과 함께 사용될 때 '가문의' 또는 '가문의'를 의미한다. 이 귀족적인 접두사는 잡지 프라이빗 아이가 그에게 "가짜 파라오(Phoney Pharaoh)"라는 별명을 붙이게 했다. 그의 형제인 알리와 살라흐도 1980년대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를 인수할 당시 이 관행을 따랐으나, 1980년대 후반에는 둘 다 이 관행을 철회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전 편집장 맥스 헤이스팅스는 알-파예드가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전 소유주 콘래드 블랙을 "우리 신문에서 '알 파예드'로 언급해달라는 요구를 추구하며 괴롭혔다"고 썼다. 헤이스팅스는 회장에게 "파예드 가문은 수년 동안 자신들을 알 파예드라고 부르려고 노력해왔다. 마치 사회적으로 야심 있는 프랑스인이 자신을 드 파예드라고 부르려 하거나, 독일인이 폰 파예드라고 부르려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면에서는 파예드 가문이 자신들을 시바의 왕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이 해롭지 않지만, 나는 우리가 위협받지 않을 것임을 항상 보여주기로 결심했다"는 메모를 보냈다.
5. 도디 알파예드와 다이애나 비의 죽음에 대한 논란
다이애나 비는 1981년 영국 왕위 계승자였던 찰스 웨일스 공과 결혼하여 웨일스 공작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국제적인 유명인이었고 1980년대 해러즈를 자주 방문했다. 알-파예드와 도디는 1986년 7월 해러즈가 후원하는 폴로 토너먼트에서 다이애나와 찰스를 처음 만났다.
다이애나와 찰스는 1996년 이혼했다. 1997년 중반 알-파예드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들인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를 프랑스 남부에 초대했다. 휴가를 위해 알-파예드는 59 m (195 ft) 길이의 요트 조니칼 (나중에 소카르로 이름 변경)을 구입했다. 도디와 다이애나는 나중에 조니칼에서 개인 크루즈를 시작했고, 두 사람이 포옹하는 파파라치 사진이 공개되었다. 다이애나의 친구인 기자 리처드 케이는 다이애나가 이혼 후 "첫 번째 진지한 로맨스"에 빠졌다고 확인했다.
도디와 다이애나는 8월 셋째 주에 조니칼에서 두 번째 개인 크루즈를 떠났고, 8월 30일 사르데냐에서 파리로 돌아왔다. 그날 늦게, 언론의 행동으로 인해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한 후 두 사람은 리츠에서 개인적으로 식사를 했다. 그들은 에투알 개선문 근처에 있는 도디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파파라치를 속이기 위해 미끼 차량이 호텔 정문에서 출발했고, 다이애나와 도디는 컨시어지 앙리 폴이 운전하는 메르세데스-벤츠 S280을 타고 호텔 후문에서 출발했다. 5분 후, 차량은 알마 터널에서 충돌했다. 도디와 폴은 사망했고, 다이애나는 나중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은 영국 경호원 트레버 리스-존스는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알-파예드는 다음 날 파리에 도착하여 도디의 시신을 확인했고, 시신은 이슬람식 장례식을 위해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5.1. 음모론
1998년 2월부터 알-파예드는 이 사고가 음모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중에 이 사고가 필립 공의 지시에 따라 MI6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프랑스 사법 당국의 조사에 의해 기각되었으나, 알-파예드는 이 판결에 항소했다.
영국 메트로폴리탄 경찰의 오퍼레이션 페이지트는 2006년에 완료된 조사에서 음모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알-파예드는 오퍼레이션 페이지트에 175건의 "음모 주장"을 제기했다.
다이애나와 도디의 죽음에 대한 스콧 베이커 경이 주재한 심문은 2007년 10월 2일 런던 왕립 법원에서 시작되어 6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이는 2004년에 시작된 원래 심문의 연장이었다.
스콧 베이커 심문에서 알-파예드는 필립 공, 웨일스 공, 다이애나 비의 여동생인 레이디 사라 맥코쿼데일,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웨일스 공작부인을 살해하려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그들의 동기가 공작부인이 무슬림과 결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알-파예드는 2001년 5월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다이애나 비가 임신 중이었으며, 자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처음 주장했다. 심문에서 다이애나 비가 임신하지 않았으며 임신할 수 없었다고 증언한 증인들은 알-파예드에 따르면 음모의 일부였다. 심문에서 알-파예드의 증언은 언론에서 터무니없다고 비난받았다. 영국 정부의 정보 보안 위원회 위원들은 알-파예드가 심문을 '서커스'로 만들었다고 비난하며 조기 종료를 촉구했다. 알-파예드를 대리하는 변호사들은 나중에 심문에서 필립 공이나 MI6가 다이애나나 도디의 살인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알-파예드의 수사관이자 전 스코틀랜드 야드 고위 형사였던 존 맥나마라는 알-파예드의 주장을 제외하고는 어떤 불법 행위의 증거도 없음을 2008년 2월 14일 인정해야 했다. 그의 인정은 또한 다이애나 비의 임신과 약혼에 대한 알-파예드의 주장에 대한 증거 부족과도 관련이 있었다.
2008년 4월 7일에 내려진 배심원 평결은 다이애나와 도디가 음주운전을 한 앙리 폴의 중대한 과실 운전과 뒤따르던 차량들로 인해 "불법 살인"되었다는 것이었다.
알-파예드의 변호사들은 다이애나 비의 임신을 숨기기 위해 불법적으로 방부 처리되었다는 주장이나, 어떤 의학적 증거로도 임신이 확인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그들은 또한 프랑스 응급 및 의료 서비스가 다이애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음모에 어떤 역할도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베이커 심문 이후, 알-파예드는 음모 캠페인을 포기하고 배심원의 평결을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인 도미닉 로슨은 2008년 디 인디펜던트에 알-파예드가 "술에 취하고 흥분한 운전자(모하메드 파예드의 파리 리츠 호텔 직원)에 의해 발생한 사망 사고의 진정한 상황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려 했다고 썼다. 그는 "특히 데일리 익스프레스와 같은 타블로이드 언론의 일부가 음모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설득하는 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알-파예드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불법 살인(2011년)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 영화는 명예훼손 소송 가능성 때문에 공식적으로 개봉되지 않았다.
5.2. 국적
알-파예드는 이집트 시민으로 태어나 쿠웨이트 여권으로 아이티에 입국했으며, 1964년 아이티 외교관 여권으로 영국에 입국했다. 1970년 알-파예드는 마흐디 알 타지르에게 자신과 형제들의 아이티 외교관 여권이 만료되었고, 이집트 여권으로는 많은 국가에서 비자를 얻기 어렵다고 알렸다. 타지르는 알-파예드에게 아랍에미리트 여권을 확보해주었으나, 아랍에미리트 국적은 부여하지 않았다. 여권 문서에서 알-파예드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9년에서 1933년으로 변경하여 자신을 4살 더 젊게 만들었다. 그의 두 형제는 새로운 여권에서 자신들의 나이를 10살 줄였다.
두바이 통치자인 알 막툼 가문은 1993년 파예드 형제의 여권 갱신을 거부했고, 그래서 그들은 원래의 이집트 여권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모하메드와 알리 알-파예드는 1993년 초 영국 시민권을 신청했다. 알리의 신청은 고든 리스와 피터 호더른의 지지를 받았고, 모하메드의 신청은 브래멀 경과 제프리 아처의 지지를 받았다. 알-파예드 형제의 영국 시민권 신청은 1993년 12월 DTI 보고서가 시민권 자격을 박탈한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보수당 내무부 장관 마이클 하워드는 DTI 조사 중에 드러난 사기꾼 해리 랜디와의 연루로 인한 새로운 당혹감을 우려하여 결정을 재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신청은 1995년 2월 다시 거부되었고, 1996년 고등법원은 내무부 장관이 설명 없이 알-파예드 형제의 시민권 요청을 거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내무부는 나중에 고등법원의 결정에 대한 상원 항소를 포기했다.
1997년, 새로운 노동당 정부의 내무부 장관 잭 스트로는 알-파예드 형제의 시민권 요청을 재고했지만, 1999년 5월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요청을 거부했다. 알리 알-파예드는 1999년 3월 시민권 요청이 승인되었다.
거부는 알-파예드가 정치인에게 뇌물을 주었음을 인정한 것과 해러즈의 금고를 침입한 것 때문으로 돌려졌다. 알-파예드는 이 결정을 "비정상적"이라고 묘사하며 자신이 영국 기득권층과 "좀비" 정치인들의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6. 비판 및 의혹: 차별, 성추행, 그리고 후속 폭로
알-파예드는 여러 여성들로부터 성희롱 및 성폭행 혐의로 비난받았다. 해러즈에 취업을 신청하는 젊은 여성들은 종종 HIV 검사와 부인과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 후 그들은 알-파예드와 함께 파리에서 주말을 보내도록 선택되었다.
6.1. 초기 의혹
1995년 배니티 페어에 실린 알-파예드 프로필 기사 "해러즈의 성전"에서 모린 오스는 전 직원들의 말을 인용하여 "알-파예드는 정기적으로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할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을 찾았다. 그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종종 외모나 옷차림에 대한 저속하고 굴욕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다... 내가 인터뷰한 12명의 전 직원들은 알-파예드가 사무실에서 비서들을 쫓아다니며 때로는 여성들의 블라우스에 돈을 쑤셔 넣으려 했다고 말했다." 알-파예드는 배니티 페어를 고소했고, 합의가 이루어져 손해배상 없이 모든 증거를 잠긴 저장소에 보관하기로 했다. 배니티 페어는 다이애나 비의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부분적으로 합의를 선택했다.
1997년 12월, ITV 시사 프로그램 더 빅 스토리(The Big Story)는 알-파예드가 비슷한 방식으로 여성들을 일상적으로 성희롱했다고 증언하는 전 해러즈 직원들의 인터뷰를 방영했다. 알-파예드는 2008년 10월 15세 여학생에 대한 성폭행 혐의로 메트로폴리탄 경찰의 조사를 받았으나, 진술이 엇갈려 검찰청이 기소할 현실적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사건은 종결되었다.
2017년 12월 채널 4의 디스패치 프로그램은 알-파예드가 해러즈 여직원 3명을 성희롱하고 "길들이려(groom)" 했다고 주장했다. 이 중 한 직원은 당시 17세였다. 체스카 힐-우드는 익명권을 포기하고 프로그램 인터뷰에 응했다. 이 프로그램은 알-파예드가 13년 동안 젊은 직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성희롱 의혹에 대한 초기 언론의 감시는 알-파예드의 빈번한 소송 위협으로 인해 제한되었다. 알-파예드는 자신에 대한 성폭행 의혹을 보도하는 언론 매체를 상대로 막대한 소송 비용을 지출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감시 부족은 또한 알-파예드의 보안 책임자 존 맥나마라의 행동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는 잠재적 증인과 피해자들을 위협하고 감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6.2. 성추행 스캔들
2024년 9월, BBC 뉴스는 해러즈에서 일했던 20명 이상의 여성이 알-파예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이 중 5명은 강간을 당했다고 고발했다고 보도했다. 풀럼 L.F.C.의 전 감독 가우테 하우게네스는 2024년 9월, 선수들을 알-파예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와 단둘이 두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직원들은 그가 "젊고 금발인 소녀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BBC Two에서는 여성들의 인터뷰를 담고 해러즈가 주장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고 학대 의혹을 "은폐"했을 가능성을 탐구한 다큐멘터리 알-파예드: 해러즈의 포식자(Al-Fayed: Predator at Harrods)가 방영되었다. 2024년 9월 21일,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변호사 딘 암스트롱은 자신의 팀에 37명의 의뢰인이 있지만, 알-파예드에 대한 주장을 가진 150명의 개인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2024년 9월, 리츠 호텔에서 일했던 크리스티나 스벤손이 프랑스에서 모하메드 알-파예드에 대한 첫 번째 고소를 제기할 것이라고 보도되었는데, 이전에는 런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24년 9월 26일,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알-파예드에 대한 의혹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형사 처벌을 추구해야 하는지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해러즈의 전무이사 마이클 워드는 알-파예드가 "비밀, 협박, 보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적 비행의 유해한 문화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9월 26일까지 알-파예드를 위해 일했던 약 200명의 여성들이 강간 및 성폭행 주장을 가지고 조사관들과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러즈에서의 성폭행 문제 외에도, 9월 26일에는 알-파예드가 1997년부터 2013년까지 풀럼 FC를 소유했던 기간과 관련된 성폭행 의혹도 제기되었다. 9월 27일, 알-파예드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변호사들은 60명의 여성과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10월 11일,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1979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성폭행 및 강간을 포함한 40명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40건의 새로운 의혹이 알-파예드에 대해 제기되었다고 밝혔다. 10월 18일, 전 풀럼 레이디스 FC 주장 로니 기븐스는 2000년 20세였을 때 해러즈 백화점의 알-파예드 개인 사무실에서 그에게 두 번 성추행당했고 강제로 키스하려 했다고 말했다.
10월 21일까지 해러즈는 알-파예드의 성적 비행을 주장한 여성들이 제기한 250건 이상의 손해배상 청구를 해결하는 중이라고 발표했다. 10월 31일까지 400명의 피해자 또는 증인이 성적 비행 의혹과 관련하여 변호사들에게 연락했다. 당시 '해러즈 생존자 정의 그룹(Justice for Harrods Survivors group)'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이를 "세계 역사상 최악의 기업 여성 학대 사례"라고 묘사했다. 일부 여성들은 알-파예드와 그의 형제 살라흐(2010년 췌장암으로 사망) 모두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2024년 11월, 메트로폴리탄 경찰이 이전에 인정한 것보다 10년 더 일찍 알-파예드에 대한 성폭행 의혹을 통보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2005년에 처음으로 그러한 의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5년,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현재 사망한 사만다 램지로부터 그러한 의혹을 받았었다. BBC는 "사만다의 가족은 메트로폴리탄 경찰이 그녀의 주장을 묵살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경찰이 조치를 취했더라면 여러 여성들이 성적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보도했다.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자신들의 컴퓨터 시스템에 사만다의 의혹 기록이 없지만, "1995년에는 일부 보고서가 종이 기반이었고 전산화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램지의 여동생 엠마는 당시 경찰이 "우리가 모하메드 알-파예드에 대해 동일한 불만을 제기한 다른 여성들의 이름 더미에 추가했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알-파예드의 성범죄를 돕거나 가능하게 했을 수 있다고 믿는 5명 이상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2024년 11월 말까지 조사는 1977년부터 2014년까지의 범죄 혐의를 다루고 있으며, 가장 어린 피해자는 13세였다.
7. 사업적 성과와 사회적 영향
알-파예드는 해러즈 백화점의 소유주로서 백화점의 명성을 회복하고 독특한 "소매업의 연극성"을 도입하여 이집트 홀과 이집트 에스컬레이터와 같은 혁신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해러즈는 영국 유통 산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풀럼 FC의 구단주로서 클럽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키고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에 진출시키는 등 스포츠계에 큰 기여를 했다.
자선 활동 분야에서는 알-파예드 자선 재단을 설립하여 생명 제한 질환을 앓거나 빈곤에 처한 어린이들을 지원했으며, 다이애나 비의 모교를 인수하여 트라우마 아동을 위한 학교로 재개장하는 등 사회적 약자 보호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사업 운영 방식과 관련된 인종 차별, 성희롱, 성폭행 등 수많은 비판과 의혹은 그의 사회적 이미지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특히 2024년에 대규모로 제기된 성추행 혐의들은 그의 사업적 성공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며, 사회적 약자 보호 및 인권 문제와 관련된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불러일으켰다.
대중문화에서 알-파예드는 마담 투소 박물관에 왁스 인형으로 전시되었으며, 텔레비전 시리즈 더 크라운에 등장하고 알리 G 쇼, 하워드 스턴 쇼, 셀러브리티 빅 브라더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8. 사망
알-파예드는 2023년 8월 30일 94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노환으로 알려졌으며, 9월 1일에 발표되었다. 그는 런던 중앙 모스크에서 금요 기도 장례식을 마친 후 아들 도디와 함께 배로 그린 코트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