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과 교육
모리스 부르제모누리는 저명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명문 교육기관에서 학업을 마쳤다.
1.1. 출생과 가족 배경
모리스 부르제모누리는 1914년 8월 19일 외르에루아르의 뤼이상에서 모리스 장 마리 부르제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조르주 부르제는 해양 공학 분야의 고위 임원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제네비에브 모누리는 저명한 정치적 유산을 가진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외조부인 모리스 모누리는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 장관을 역임했으며, 그의 증조부인 폴 모누리는 외르에루아르주의 하원의원을 지냈다. 이러한 가족 배경은 그가 정치에 입문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2. 교육
부르제모누리는 프랑스의 명문 교육기관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35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했으며, 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시앙스 포를 마쳤다. 이러한 교육 과정은 그가 훗날 복잡한 국내외 정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 정치 경력
모리스 부르제모누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초기 정치 활동부터 프랑스 제4공화국의 주요 장관직 역임, 그리고 프랑스 제5공화국에 대한 반대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경험했다.
2.1. 전전 활동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부르제모누리는 급진사회당 내의 좌파 세력인 '젊은 튀르크' 파벌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 그는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 중, 부르제모누리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하여 X-Libre 네트워크에서 자크 샤방델마스, 펠릭스 가야르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활동했다. 1944년 9월 2일, 그는 브루아에서 기차에 대한 기총소사 공격 중 부상을 입었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샤를 드골 장군으로부터 레지스탕스 동지단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에는 보르도의 공화국 위원으로 임명되며 전쟁 이후의 재건 과정에 참여했다.
2.2. 제4공화국 장관직
부르제모누리는 프랑스 제4공화국 시기에 수많은 정부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1956년부터 1957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며 알제리 전쟁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지지했고, 수에즈 위기 이후 포트사이드에서의 철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57년부터 1958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던 중에는 1958년 3월 부르봉 궁전 앞에서 경찰관들의 시위가 발생하는 등 상당한 사회적 불안에 직면하기도 했다.
1957년 6월부터 11월까지 국무회의 의장(총리)을 역임하면서, 부르제모누리는 로마 조약의 비준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 유럽 경제 공동체의 설립을 확정지었다. 이는 유럽 통합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2.3. 프랑스-이스라엘 협력
부르제모누리는 1950년대 프랑스와 이스라엘 간의 협력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부 사무총장이었던 시몬 페레스와 협력하여, 이스라엘이 최초의 디모나 핵 원자로와 다소 미스테르 IV 전투기를 포함한 군사 장비를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노력은 양국 간의 전략적 동반 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4. 제5공화국에 대한 반대
부르제모누리는 샤를 드골 장군의 권력 복귀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주도했으며, 새로운 공화국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다. 1973년에는 랑드 (데파르트망)에서 국민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3. 개인 생활
부르제모누리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마들렌 지로와 이루어졌으며, 슬하에 자크와 마르크 두 아들을 두었다. 두 번째 결혼은 자클린 라코스트와 이루어졌으며, 딸 플로랑스-에마뉘엘을 두었다.
4. 서훈 및 표창
모리스 부르제모누리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다음과 같은 국내외 상훈과 표창을 수여받았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 레지스탕스 동지단 (1944년 9월 12일 칙령)
- 전쟁 십자장 1939-1945 (두 개의 표창)
- 로제트가 달린 레지스탕스 훈장 (1946년 8월 3일)
- 수훈 훈장 (영국)
- 공로 훈장 (미국)
5. 사망
모리스 부르제모누리는 1993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
6. 유산과 평가
모리스 부르제모누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업적과 함께 몇 가지 논란을 포함하고 있다.
6.1. 긍정적 평가
모리스 부르제모누리는 유럽 통합의 중요한 진전인 로마 조약의 비준을 이끌어내며 유럽 경제 공동체 설립에 기여한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또한 1950년대 프랑스와 이스라엘 간의 외교 및 군사 협력을 증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양국 관계 발전에 기여한 점도 그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이러한 공헌들은 그가 민주적 제도의 안정과 국제 협력에 기여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6.2. 비판과 논란
부르제모누리는 몇몇 정책 결정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았다. 알제리 전쟁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지지하고 수에즈 위기 이후 포트사이드에서의 철군에 반대한 그의 입장은 당시 프랑스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1958년 3월 내무부 장관 재임 시 부르봉 궁전 앞에서 발생한 경찰 시위에 대한 그의 대응 방식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샤를 드골의 권력 복귀와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것이었으나, 역사적으로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성공적인 정착과 대조되는 시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7. 같이 보기
- 프랑스 제4공화국
- 샤를 드골
- 프랑스 레지스탕스
- 수에즈 위기
- 알제리 전쟁
- 로마 조약
- 유럽 경제 공동체
- 시몬 페레스
- 디모나 원자력 연구 센터
- 다소 미스테르 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