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Amateur Career
매직 존슨은 농구 선수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어린 시절부터 보였으며, 미시간 주립대학교 시절에는 래리 버드와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NCA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1.1. Childhood and Family Background
어빈 존슨 주니어는 1959년 8월 14일 미시간주 랜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너럴 모터스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어빈 존슨 시니어였고, 어머니는 학교 관리인이자 청소부인 크리스틴 존슨이었다. 존슨은 6명의 친형제자매와 아버지의 전 결혼에서 얻은 3명의 이복형제자매를 포함하여 총 9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다. 그는 부모님의 강한 직업윤리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퇴근 후에도 매일 밤 집안을 청소하고 다음 날 식사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버지는 중고차 매장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쓰레기를 수거하면서도 제너럴 모터스에서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다. 존슨은 종종 아버지의 쓰레기 수거 작업을 도왔으며, 동네 아이들에게 "쓰레기맨"이라고 놀림받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재림교회에서 키웠다.
어린 시절 존슨은 농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농구 선수는 빌 러셀이었는데, 그는 러셀의 운동 능력보다는 수많은 챔피언십 우승을 더 존경했다. 그는 또한 얼 먼로와 마퀴스 헤인즈와 같은 선수들을 우상화하며 "하루 종일" 연습했다. 존슨은 운동 신경이 뛰어난 가족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미시시피 고향에서 고등학교 농구를 했으며, 존슨은 아버지로부터 경기의 세세한 부분을 배웠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인 존슨의 어머니도 어릴 적 농구를 했으며, 형제들이 농구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8학년이 되었을 때, 존슨은 농구 선수로서의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니어 하이 스쿨에서 지배적인 선수로 성장하여 한 경기에서 48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존슨은 집에서 불과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농구팀이 매우 성공적이고 역사가 깊은 섹스턴 고등학교에서 뛰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그는 인종 통합 정책에 따라 백인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에버렛 고등학교로 통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계획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섹스턴 고등학교는 주로 흑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존슨의 누나인 펄과 형인 래리는 전년도에 에버렛 고등학교로 통학했지만 유쾌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 인종차별 사건들이 있었고, 흑인 학생들을 태운 버스에 돌이 던져지고 백인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래리는 연습 중 충돌로 농구팀에서 쫓겨났고, 이로 인해 동생인 존슨에게 농구를 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존슨은 농구팀에 합류했지만 며칠 후 새로운 팀원들이 연습 중에 자신을 무시하고 공조차 패스하지 않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헤드 코치 조지 폭스가 개입하기 전 다른 선수와 거의 싸움이 붙을 뻔했다. 결국 존슨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고, 소수의 흑인 학생들은 그를 자신들의 리더로 여겼다. 그는 자서전 『나의 삶』에서 에버렛 고등학교 시절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회상했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나는 전체 그림을 매우 다르게 본다. 섹스턴 고등학교를 놓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처음 몇 달 동안, 에버렛 고등학교에서 나는 비참했다. 그러나 에버렛 고등학교로 통학한 것은 내 인생에서 일어난 최고의 일 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나를 나만의 작은 세상에서 벗어나 백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거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1.2. High School Career: "Magic" Nickname
존슨은 15세 때 에버렛 고등학교 2학년으로 재학 중 36점, 18 리바운드, 16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을 때 처음으로 "매직"(Magic)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경기 후 지역 언론인 『랜싱 스테이트 저널』의 스포츠 기자 프레드 스태블리 주니어는 그에게 이 별명을 붙여주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존슨의 어머니는 이 이름이 신성모독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별명은 곧 미시간주 전역에 퍼져 유명해졌다.
그의 마지막 고등학교 시즌에서 존슨은 에버렛 고등학교를 27승 1패의 기록으로 이끌었으며, 경기당 평균 28.8점과 16.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팀을 주 챔피언십 경기에서 연장전 끝에 승리로 이끌었다. 존슨은 이 우승을 전년도 여름 교통사고로 사망한 가장 친한 친구 레지 채스타인에게 바쳤다. 그는 채스타인에게 농구 선수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발전에 큰 공을 돌렸으며, 몇 년 후 "그때는 나 자신을 의심했다"고 말했다. 존슨과 채스타인은 농구를 하거나 채스타인의 차를 타고 다니며 거의 항상 함께였다. 채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매직은 집에서 뛰쳐나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다. 두 차례 올스테이트에 선정되며 고등학교 경력을 마친 존슨은 당시 미시간주에서 나온 최고의 고등학교 선수로 평가받았다. 그는 또한 1977년 맥도널드 올아메리칸 팀에 처음으로 선정되었으며, 캐피탈 클래식에도 출전했다. 고등학교 코치는 당시 팀에서 가장 키가 큰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센터나 포워드 대신 가드 포지션이 존슨에게 더 적합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간파했으며, 이후 그는 포인트 가드로 주로 뛰게 되었다.
1.3. College Career and NCAA Championship
존슨은 인디애나 대학교나 UCLA와 같은 여러 명문 대학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뛰기로 결정했다. 그의 대학 선택은 미시간 대학교와 이스트랜싱에 있는 미시간 주립 대학교로 좁혀졌다. 그는 결국 저드 히스코트 코치가 그를 포인트 가드 포지션으로 뛰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미시간 주립대학교 선수단에 이미 있는 재능 있는 선수들에 이끌려 미시간 주립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존슨은 처음에는 프로 선수로 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대신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하며 텔레비전 해설자가 되고자 했다. 그렉 켈서, 제이 빈센트, 마이크 브르코비치와 같은 미래의 NBA 드래프트 선수들과 함께 1학년 때 경기당 평균 17.0점, 7.9리바운드, 7.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스파르탄스를 25승 5패의 기록, 빅텐 컨퍼런스 우승, 그리고 1978 NCAA 토너먼트 진출로 이끌었다. 스파르탄스는 엘리트 에이트에 진출했지만, 결국 전국 챔피언이 된 켄터키 대학교에 아쉽게 패했다.
1978-79 NCAA 남자 농구 시즌 동안, 미시간 주립대학교는 다시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결승전에서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와 맞붙었다.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는 4학년 래리 버드가 이끌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된 대학 농구 경기로 기록된 이 경기에서 미시간 주립대학교는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75-64로 꺾었고, 존슨은 파이널 포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그 시즌의 활약으로 1978-79 올아메리칸 팀에 선정되었다. 대학에서 2년간 경기당 평균 17.1점, 7.6리바운드, 7.9어시스트를 기록한 후, 존슨은 1979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저드 히스코트는 1994-95 시즌 후 스파르탄스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1995년 6월 8일 존슨은 브레슬린 센터로 돌아와 저드 히스코트 올스타 헌정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39점을 기록하며 모든 득점자 중 1위를 차지했다.
2. Professional Career (NBA)
매직 존슨의 NBA 경력은 "쇼타임" 시대를 이끌며 수많은 우승을 차지했지만, 때로는 부상과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1. Rookie Season (1979-1980)
존슨은 1979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전체 1순위로 드래프트되었다. 당시 유타 재즈가 원래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게일 구드리치의 자유 계약 보상으로 3년 전 레이커스에게 양도되었다. 존슨은 레이커스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가장 놀라운 일"은 NBA 역사상 최고 득점자가 된 2.18m의 센터 카림 압둘-자바와 함께 뛸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압둘-자바의 압도적인 기량에도 불구하고 그는 레이커스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존슨은 팀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레이커스의 잭 매키니 감독은 일부 분석가들이 포워드로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2.06m의 신인 존슨을 포인트 가드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기존의 놈 닉슨이 이미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한 명이었음에도 말이다.
존슨은 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18.0점, 7.7리바운드, 7.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NBA 올루키 팀에 선정되었고, NBA 올스타 게임 선발 선수로 지명되었다. 레이커스는 정규 시즌에서 60승 22패를 기록하며 1980 NBA 파이널에 진출했고, 줄리어스 어빙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76ers와 맞붙었다. 레이커스는 시리즈에서 3승 2패로 앞서갔지만, 시리즈에서 경기당 평균 33점을 기록하던 압둘-자바가 5차전에서 발목을 삐어 6차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시즌 초 매키니 감독이 치명적인 자전거 사고로 교체된 후 팀을 맡은 폴 웨스트헤드 감독은 6차전에 존슨을 센터로 선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존슨은 경기 동안 가드, 포워드, 센터 포지션을 번갈아 가며 뛰면서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하며 123-107 승리를 이끌었다. 존슨은 파이널 MVP 상을 수상한 유일한 신인 선수가 되었으며, 그의 클러치 상황에서의 활약은 NBA 역사상 최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NCAA와 NBA 챔피언십을 연속으로 우승한 4명의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2.2. Ups and Downs (1980-1983)
1980-81 NBA 시즌 초, 존슨은 왼쪽 무릎의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45경기에 결장했으며, 물리 치료 과정이 자신이 "가장 우울했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존슨은 1981 NBA 플레이오프 시작 전에 복귀했지만, 당시 레이커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미래의 헤드 코치인 팻 라일리는 존슨의 기대에 찬 복귀가 레이커스를 "분열된 팀"으로 만들었다고 훗날 말했다. 54승을 거둔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40승 42패의 휴스턴 로키츠와 맞붙었는데, 존슨이 3차전 마지막 순간에 에어볼을 던지면서 휴스턴이 레이커스를 2-1로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1981년, 1980-81 시즌 이후 존슨은 레이커스와 25년, 2500.00 만 USD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당시 스포츠 역사상 최고 금액의 계약이었다. 1981-82 NBA 시즌 초, 존슨은 웨스트헤드 감독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존슨은 웨스트헤드 감독이 레이커스를 "느리고" "예측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존슨이 트레이드를 요구하자 레이커스의 구단주 제리 버스는 웨스트헤드를 해고하고 라일리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존슨은 웨스트헤드 해고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지만, 레이커스 팬들을 포함한 리그 전역에서 야유를 받았다. 버스는 또한 레이커스의 공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웨스트헤드와 존슨의 갈등이 있기 며칠 전부터 웨스트헤드를 해고할 생각이었지만, 어시스턴트 GM 제리 웨스트와 GM 빌 샤먼이 버스를 설득하여 결정을 미루도록 했다. 코트 밖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경기당 평균 18.6점, 9.6리바운드, 9.5어시스트, 그리고 리그 최고인 2.7스틸을 기록했으며, 올NBA 세컨드팀 멤버로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윌트 체임벌린과 오스카 로버트슨에 이어 한 시즌에 최소 700점, 700리바운드, 700어시스트를 기록한 NBA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레이커스는 1982 NBA 플레이오프를 통과하여 1982 NBA 파이널에서 3년 만에 두 번째로 필라델피아와 맞붙었다. 존슨의 6차전 트리플 더블 이후 레이커스는 식서스를 4-2로 꺾었고, 존슨은 두 번째 NBA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식서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존슨은 16.2점(야투율 .533), 10.8리바운드, 8.0어시스트, 2.5스틸을 기록했다. 존슨은 훗날 자신의 세 번째 시즌에 레이커스가 처음으로 위대한 팀이 되었다고 말했으며, 그들의 성공을 라일리 감독의 공으로 돌렸다.
1982-83 NBA 시즌 동안, 존슨은 9시즌 연속 더블더블을 기록했는데, 경기당 평균 16.8점, 10.5어시스트, 8.6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첫 올NBA 퍼스트팀에 지명되었다. 레이커스는 다시 1983 NBA 파이널에 진출했고, 세 번째로 식서스와 맞붙었다. 식서스는 센터 모제스 말론과 줄리어스 어빙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존슨의 팀 동료인 닉슨, 제임스 워디, 밥 맥아두가 모두 부상에 시달리면서 레이커스는 식서스에게 스윕당했고, 말론이 파이널 MVP에 올랐다. 필라델피아와의 패배한 경기에서 존슨은 경기당 평균 19.0점(야투율 .403), 12.5어시스트, 7.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3. Battles against the Celtics (1983-1987)

존슨의 다섯 번째 시즌을 앞두고, 레이커스 단장이 된 제리 웨스트는 존슨이 볼 핸들링 책임을 공유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닉슨을 트레이드했다. 존슨은 경기당 평균 17.6점, 13.1어시스트, 7.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또 다른 더블 더블 시즌을 보냈다. 레이커스는 3년 연속 1984 NBA 파이널에 진출했고, 존슨의 레이커스와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레이커스는 1차전을 이겼고, 2차전에서 종료 18초를 남기고 2점 앞서 있었지만, 제럴드 헨더슨의 레이업 이후 존슨이 마지막 버저가 울리기 전에 슛을 날리지 못하면서 레이커스는 연장전에서 124-121로 패했다. 3차전에서 존슨은 2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37-104로 승리했지만, 4차전에서는 경기 막판 몇 차례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다. 경기 마지막 1분 동안 존슨은 셀틱스 센터 로버트 패리시에게 공을 스틸당했고, 경기를 이길 수 있었던 자유투 2개를 놓쳤다. 셀틱스는 연장전에서 4차전을 이겼고, 양 팀은 다음 두 경기를 나눠 가졌다. 보스턴에서 열린 결정적인 7차전에서 레이커스가 마지막 1분 동안 3점 뒤지고 있을 때, 상대 포인트 가드 데니스 존슨이 존슨으로부터 공을 스틸했고, 이 플레이는 사실상 시리즈를 끝냈다. 친구 아이재아 토마스와 마크 아귀레는 그날 밤 그의 보스턴 호텔 방에서 팬들의 축하가 이어지는 거리 한가운데서 아침까지 이야기하며 그를 위로했다. 파이널에서 존슨은 경기당 평균 18.0점(야투율 .560), 13.6어시스트, 7.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존슨은 훗날 이 시리즈를 "우리가 가졌어야 했지만 얻지 못한 유일한 챔피언십"이라고 묘사했다. 존슨은 이 실패를 철저히 분석하며 정신력을 강화했고, 셀틱스를 꺾을 기회를 간절히 기다렸다.
1984-85 정규 시즌에서 존슨은 경기당 평균 18.3점, 12.6어시스트, 6.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1985 NBA 파이널에 진출했고, 거기서 다시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었다. 시리즈는 레이커스에게 불리하게 시작되었다. 1차전에서 셀틱스에게 148점이라는 NBA 파이널 기록적인 점수를 내주며 34점 차로 대패했다. 그러나 당시 38세였던 압둘-자바는 2차전에서 30점 17리바운드를 기록했고, 5차전 승리에서 36점을 기록하며 로스앤젤레스의 3-2 리드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이커스가 6경기 만에 셀틱스를 꺾은 후, 시리즈에서 경기당 평균 18.3점(야투율 .494), 14.0어시스트, 6.8리바운드를 기록한 압둘-자바와 존슨은 이 파이널 우승이 그들의 경력 중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했다.
1985-86 NBA 시즌에서 존슨은 경기당 평균 18.8점, 12.6어시스트, 5.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다시 더블 더블 시즌을 보냈다. 레이커스는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 진출했지만, 5경기 만에 휴스턴 로키츠에 패하며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하킴 올라주원과 랄프 샘슨의 "트윈 타워"에 고전했으며, 오랜 기간 압둘-자바를 중심으로 한 공격 전술이 상대 팀에 의해 철저히 연구되고 예측되어 한계를 드러낸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다음 시즌에 존슨은 경기당 평균 23.9점이라는 커리어 하이 득점을 기록했으며, 12.2어시스트, 6.3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첫 정규 시즌 MVP상을 수상했다. 존슨은 이를 매우 열망했으며, 버드가 3개의 MVP상을 수상하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약간 괴로웠다"고 말했다. (존슨은 결국 1989년과 1990년에 다시 이 상을 수상하며 MVP 수상 횟수에서 버드와 동률을 이룬다.) 1987 NBA 파이널에서 레이커스는 세 번째로 셀틱스와 맞붙었고, 4차전에서 존슨은 셀틱스의 프런트코트 선수인 패리시와 케빈 맥헤일을 넘어 마지막 순간 훅 샷을 성공시키며 107-106으로 경기를 이겼다. 존슨이 "주니어, 주니어, 주니어 스카이훅"이라고 명명한 이 결승 슛은 로스앤젤레스가 보스턴을 6경기 만에 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존슨은 경기당 평균 26.2점(야투율 .541), 13.0어시스트, 8.0리바운드, 2.33스틸을 기록하며 세 번째 파이널 MVP 타이틀을 수상했다.
2.4. Repeat and Falling Short (1987-1991)

1987-88 NBA 시즌을 앞두고 레이커스 감독 팻 라일리는 셀틱스가 1969년 NBA 파이널에서 2년 연속 우승한 이후 어떤 팀도 연속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NBA 타이틀 방어를 약속했다. 존슨은 사타구니 부상으로 10경기에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평균 19.6점, 11.9어시스트, 6.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또 다른 생산적인 시즌을 보냈다. 1988 NBA 플레이오프에서 레이커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3경기 만에 스윕했고, 그 후 유타 재즈와 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두 번의 4-3 시리즈를 통과하며 1988 NBA 파이널에서 아이재아 토마스의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와 맞붙었다. 피스턴스는 빌 레임비어, 존 샐리, 비니 존슨, 데니스 로드먼과 같은 선수들과 함께 그들의 육체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배드 보이스"로 알려져 있었다. 존슨과 토마스는 1차전 시작 전 볼 키스를 하며 "형제애"를 보여주었다. 양 팀이 처음 6경기를 나눠 가진 후, 레이커스 포워드이자 파이널 MVP 제임스 워디는 36점, 16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자신의 첫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며 팀을 108-105 승리로 이끌었다. MVP로 선정되지는 않았지만, 존슨은 21.1점(야투율 .550), 13어시스트, 5.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강력한 챔피언십 시리즈를 보냈다. 이는 그의 경력 중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NBA 챔피언십 우승이었다.
1988-89 NBA 시즌에서 존슨은 경기당 평균 22.5점, 12.8어시스트, 7.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두 번째 MVP상을 수상했고, 레이커스는 1989 NBA 파이널에 진출하여 다시 피스턴스와 맞붙었다. 그러나 존슨이 2차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후, 레이커스는 피스턴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고, 0-4로 스윕당했다.
압둘-자바 없이 처음으로 경기를 치른 존슨은 경기당 평균 22.3점, 11.5어시스트, 6.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강력한 1989-90 NBA 시즌을 보낸 후 세 번째 MVP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피닉스 선스에 패하며 9년 만에 가장 이른 플레이오프 탈락을 겪었다. 마이크 던리비가 1990-91 시즌에 레이커스의 헤드 코치가 되었고, 이때 존슨은 리그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포인트 가드가 되었다. 그는 초창기보다 더 강력하고 강해졌지만, 또한 더 느리고 덜 민첩해졌다. 던리비 감독 아래에서 레이커스는 더 많은 하프 코트 공격을 사용했으며, 수비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있었다. 존슨은 시즌 동안 경기당 평균 19.4점, 12.5어시스트, 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고, 레이커스는 1991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거기서 그들은 당시 그의 시대 최고의 선수로 여겨지는 슈팅 가드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 맞붙었다. 이 시리즈는 존슨과 조던의 대결로 묘사되었지만, 불스의 포워드 스코티 피펜이 존슨을 효과적으로 수비했다. 존슨이 시리즈 동안 두 번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이널 MVP 조던은 팀을 4-1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경력 마지막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존슨은 경기당 평균 18.6점(야투율 .431), 12.4어시스트, 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3. HIV Announcement and Olympic Games
매직 존슨은 1991년 HIV 감염 사실을 공개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이후 1992년 올스타전과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하여 HIV/AIDS 인식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3.1. Public Announcement and Initial Retirement
존슨은 1991년 10월 파리에서 열린 맥도날드 오픈에 레이커스와 함께 출전하여 대회 MVP를 수상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1-92 NBA 시즌을 앞두고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존슨은 자신이 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91년 11월 7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존슨은 즉시 은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 쿠키와 뱃속의 태아가 HIV에 감염되지 않았으며, 자신은 "이 치명적인 질병과 싸우는" 데 삶을 바칠 것이라고 밝혔다.
존슨은 처음에는 어떻게 질병에 감염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선수 경력 동안 수많은 성적 파트너를 가졌음을 인정했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음을 인정했으며, "이성애자들 또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당시 HIV 양성 판정을 받은 미국 남성 중 이성애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 비율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에, 존슨이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둘 다 부인했다. 존슨은 나중에 아이제아 토마스가 소문을 퍼뜨렸다고 비난했지만, 토마스는 이를 부인했다.
존슨의 HIV 발표는 미국에서 주요 뉴스 기사가 되었으며, 2004년에는 ESPN이 선정한 지난 25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7번째로 꼽혔다. 많은 기사들은 존슨을 영웅으로 칭찬했으며, 당시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나에게 매직은 스포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영웅이다"라고 말했다.
3.2. 1992 NBA All-Star Game and "Dream Team" Olympics
은퇴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팬 투표로 올랜도 아레나에서 열린 1992 NBA 올스타 게임의 선발 선수로 뽑혔다. 비록 그의 옛 팀 동료인 바이런 스캇과 A. C. 그린은 존슨이 뛰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유타 재즈의 포워드 칼 멀론을 포함한 여러 NBA 선수들은 존슨이 코트에서 상처를 입으면 오염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슨은 서부팀을 153-113 승리로 이끌었으며, 25점, 9어시스트, 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스타 MVP로 선정되었다. 경기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3점 슛을 성공시키며 끝났고, 양 팀 선수들은 코트로 달려 나와 존슨을 축하했다.
존슨은 1992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의 미국 대표팀에 선발되었는데, 이 팀은 NBA 스타들로 구성되어 "드림팀"으로 불렸다. 존슨과 함께 버드,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와 같은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을 포함한 드림팀은 무적으로 여겨졌다. 1992년 아메리카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은 드림팀은 올림픽 경기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고, 8승 0패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상대팀을 경기당 평균 43.8점 차로 이겼다. 존슨은 올림픽 기간 동안 경기당 평균 8.0점을 기록했으며, 경기당 5.5어시스트는 팀 내에서 두 번째였다. 그는 무릎 문제로 인해 자주 뛰지 못했지만,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고, 이 기회를 통해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4. Post-Playing Career and Comebacks
매직 존슨은 선수 은퇴 후에도 농구와의 끈을 놓지 않고 감독, 선수로 다시 코트에 복귀했으며, 국제 친선 경기를 통해 팬들과 소통했다.
4.1. Return to the Lakers as Coach (1994)
1992-93 NBA 시즌을 앞두고 존슨은 NBA 복귀 의사를 밝혔지만, 몇몇 현역 선수들의 반대로 인해 복귀 논란이 일자 정규 시즌 시작 전 다시 은퇴했다. 그는 나중에 2011년 인터뷰에서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은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며, "경기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고 은퇴 이유를 밝혔다. 존슨은 1992년 올림픽을 앞두고 육체적으로 매우 경쟁적인 연습과 스크리미지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팀 동료들이 여전히 NBA 복귀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말했다.
은퇴 기간 동안 존슨은 안전한 성관계에 관한 책을 썼고, 여러 사업을 운영했으며, NBC에서 해설가로 일했고, 전 대학 및 NBA 선수들로 구성된 농구팀과 함께 아시아, 호주, 뉴질랜드를 순회했다. 1985년 존슨은 유명인 농구 경기와 블랙 타이 디너를 포함하는 연례 자선 행사 "한여름 밤의 매직"을 만들었다. 수익금은 유나이티드 니그로 대학 기금에 기부되었으며, 존슨은 이 행사를 2005년까지 20년간 개최했다. "한여름 밤의 매직"은 결국 1991년에 그가 설립한 매직 존슨 재단의 산하로 들어갔다. 1992년 행사는 존슨의 1992년 올림픽 출전 후 처음으로 열렸으며, UNCF를 위해 130.00 만 USD 이상을 모금했다. 존슨은 샤킬 오닐과 유명 코치 스파이크 리와 함께 블루 팀을 이끌고 아르세니오 홀이 코치한 화이트 팀을 147-132로 이겼다.
존슨은 1993-94 NBA 시즌 막바지에 레이커스의 코치로 복귀하여 랜디 펀드를, 그리고 2경기 동안 임시 코치로 활동했던 빌 버트카를 대신했다. 구단주 제리 버스의 권유로 이 직책을 맡은 존슨은 "항상 코치직에 대한 열망이 마음속에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선수 복귀에 대한 질문은 "나는 은퇴했다. 그 정도로 하자"며 일축했다. 단장 제리 웨스트는 그가 시즌 말까지만 코치할 수 있다고 추측했지만, 존슨은 28승 38패의 팀을 맡아 첫 경기인 밀워키 벅스와의 경기에서 110-101로 승리했다. 그는 블라데 디바츠, 엘든 캠벨, 토니 스미스, 커트 램비스, 제임스 워디, 마이클 쿠퍼 등 5명의 전 팀 동료들이 선수 명단에 있는 팀을 코치했으며, 마이클 쿠퍼는 보조 코치로 합류했다. 존슨은 1994-95 NBA 시즌 동안 1460.00 만 USD를 받을 선수 계약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팀을 코치하기 위한 별도의 계약에는 보수가 없었다. 레이커스는 존슨 휘하에서 처음 6경기 중 5승을 거두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다음 5경기에서 패한 후 존슨은 시즌 후 감독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레이커스는 시즌을 10연패로 마쳤고, 존슨의 최종 감독 기록은 5승 11패였다. 그는 코치직이 자신의 꿈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대신 1994년 6월 팀의 5% 지분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4.2. NBA Comeback as Player (1996)
36세의 나이였던 존슨은 1995-96 NBA 시즌 중 레이커스에 다시 합류하며 선수로서의 또 다른 복귀를 시도했다. 은퇴 기간 동안 존슨은 HIV와의 싸움을 돕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시작했고, 벤치 프레스 중량을 135파운드에서 300파운드로 늘리고, 몸무게를 255파운드로 늘렸다. 그는 1996년 1월 29일 공식적으로 팀에 복귀했으며, 다음 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 식스맨으로 출전한 존슨은 19점, 8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레이커스의 128-118 승리를 도왔다. 2월 14일, 존슨은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15점, 10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마지막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다. 파워 포워드로 뛰면서 32경기에서 평균 14.6점, 6.9어시스트, 5.7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MVP 투표에서 찰스 바클리와 공동 12위를 차지했다。존슨이 뛰었던 경기에서 레이커스는 22승 10패를 기록했고, 그는 자신의 마지막 복귀를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존슨은 1996년에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코트 안팎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존슨의 복귀 후 출전 시간이 줄어든 세드릭 세발로스는 며칠 동안 팀을 떠났고, 두 경기에 결장한 후 팀 주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닉 밴 엑셀은 4월 9일 경기 중 심판 론 개럿슨을 밀친 혐의로 7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존슨은 밴 엑셀의 행동이 "용납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존슨 자신도 5일 후 심판 스캇 포스터를 밀쳐 3경기에 결장했다. 그는 또한 종아리 부상으로 여러 경기에 결장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레이커스는 53승 29패의 기록과 1996 NBA 플레이오프에서 4번 시드를 차지했다. 그들은 디펜딩 챔피언 휴스턴 로키츠와 맞붙었지만, 레이커스는 5전 3선승제 시리즈에서 홈 코트 이점을 가졌다。레이커스는 1차전에서 부진한 경기를 펼쳤고, 존슨은 델 해리스 감독의 공격 전술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 존슨은 26점을 기록하며 2차전 승리를 이끌었지만, 시리즈의 나머지 경기에서는 경기당 평균 7.5점만을 기록했고, 로키츠가 3-1로 승리했다.
레이커스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휴스턴 로키츠에 패한 후, 존슨은 처음에는 1996-97 NBA 시즌에 팀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자유 계약으로 다른 팀에 합류하여 파워 포워드 대신 포인트 가드로서 더 많은 출전 시간을 얻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다. 며칠 후 존슨은 마음을 바꿔 영구 은퇴를 발표하며 "나는 1992년 복귀를 중단했을 때 말할 수 없었던, 내 방식대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4.3. International Exhibition Games
NBA에서 뛰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존슨은 은퇴 후에도 경쟁적인 농구를 하기 위해 전 NBA 및 대학 선수들로 구성된 "매직 존슨 올스타즈" 팀을 결성했다. 1994년 존슨은 마크 아귀레, 레지 시어스, 존 롱, 얼 큐어톤, 짐 파머, 레스터 코너와 같은 전 프로 선수들과 함께 호주, 이스라엘, 남아메리카, 유럽, 뉴질랜드, 일본에서 경기를 펼쳤다. 그들은 또한 미국을 순회하며 CBA 팀들과 5경기를 치렀다. CBA 시리즈의 마지막 경기에서 존슨은 30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스타즈를 오클라호마시티 캐벌리에 126-121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1996년 레이커스로 돌아올 무렵, 매직 존슨 올스타즈는 55승 0패의 기록을 쌓았고, 존슨은 경기당 36.50 만 USD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다. 존슨은 이후 몇 년 동안 이 팀과 자주 뛰었으며, 아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01년 11월에 열렸다. 42세의 존슨은 자신의 모교인 미시간 주립대학교를 상대로 올스타즈 팀과 경기를 펼쳤다. 그는 1995년 저드 히스코트 코치를 기리는 유명인 경기에 출전했지만, 이 경기는 존슨이 22년 만에 고향 랜싱에서 치르는 첫 의미 있는 경기였다. 만원 관중 앞에서 뛴 존슨은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며 경기 내내 뛰었지만, 그의 올스타 팀은 스파르탄스에 2점 차로 패했다. 버저가 울리는 순간 존슨의 하프 코트 슛은 경기를 이길 수 있었지만, 아쉽게 빗나갔다. 2002년 11월 1일, 존슨은 미시간 주립대학교를 상대로 두 번째 친선 경기를 치렀다. 평소 함께 뛰던 선수들 대신 호주 내셔널 농구 리그의 캔버라 캐논스와 함께 뛴 존슨의 팀은 스파르탄스를 104-85로 꺾었으며, 존슨은 12점, 10어시스트, 10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99년, 존슨은 스웨덴 팀인 M7 보로스 (현재 '보로스 바스켓')에 합류하여 5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했다. 존슨은 또한 구단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한 시즌 만에 실패했고, 구단은 재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 덴마크 팀인 더 그레이트 데인스에 합류했다.
5. Business Ventures
매직 존슨은 농구 선수 은퇴 후 성공적인 사업가로 변모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소외된 도시 지역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5.1. Early Business Endeavors and Major Successes
존슨은 레이커스에서 뛰던 중에도 농구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왜 그렇게 많은 운동선수들이 사업에 실패했는지 궁금해했고, 조언을 구했다. NBA에서 7번째 시즌을 보내던 중, 그는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에이전시의 CEO인 마이클 오비츠와 만남을 가졌다. 오비츠는 그에게 비즈니스 잡지를 읽고 모든 인맥을 활용하도록 격려했다. 존슨은 출장 중에도 기업 임원들과 자주 만나면서 사업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 배웠다.
존슨의 첫 사업 진출은 "매직 32"라는 이름의 고급 스포츠 용품점이었는데, 1년 만에 실패하여 20.00 만 USD의 손실을 입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고객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이 원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 존슨은 소외된 지역의 도시 재개발 기회를 창출하며 도시 공동체에 투자하는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특히 그의 극장 체인과 스타벅스와의 제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에게 도시 지역에 커피숍을 성공적으로 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슐츠에게 소수 민족의 막대한 구매력을 보여준 후, 존슨은 125개의 스타벅스 매장을 인수할 수 있었고, 이 매장들은 평균 이상의 1인당 매출을 기록했다. Urban Coffee Opportunities라는 이름의 이 파트너십은 디트로이트, 워싱턴 D.C., 할렘, 크렌쇼 지구와 같은 지역에 스타벅스 매장을 열었다. 존슨은 2010년 나머지 지분을 회사에 다시 매각하며 12년간의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마쳤다. 그는 또한 캐년-존슨(Canyon-Johnson) 및 유카이파-존슨(Yucaipa-Johnson) 펀드를 통해 도시 부동산에 투자했다. 또 다른 주요 프로젝트는 보험 서비스 회사인 에이온 코퍼레이션과의 협력이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존슨은 브루클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윌리엄스버그 저축은행 타워를 7100.00 만 USD에 매입하여 512피트 높이의 랜드마크 건물을 사무실 건물에서 고급 콘도미니엄으로 전환하는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존슨은 2023년에 억만장자가 되어 가장 부유한 유명인 중 한 명이 되었다.
1990년 존슨과 얼 그레이브스 시니어는 워싱턴 D.C.의 펩시코 병입 사업에 큰 지분을 확보하여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소수 민족 소유 시설로 만들었다. 존슨은 1994년 레이커스의 소수 소유주가 되었으며, 보도에 따르면 1000.00 만 USD 이상을 지분으로 지불했다. 그는 또한 팀 부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존슨은 2010년 10월 자신의 레이커스 소유 지분을 패트릭 순-시옹에게 매각했지만, 팀의 무급 부사장직을 계속 유지했다. 2017년 2월, 존슨은 지니 버스의 고문으로 레이커스에 다시 합류했다.
도널드 스털링 논란 이후, 제한적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존슨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프랜차이즈를 매입하는 데 관심을 표명했다. 2015년 존슨은 annuities, 생명 보험 및 기타 금융 상품에서 145.00 억 USD를 관리하는 EquiTrust Life Insurance Company의 "대부분의 지배 지분"을 인수하는 계획을 완료했다. 그는 팀 리퀴드의 소유 회사인 aXiomatic e스포츠의 투자자이기도 하다.
5.2. Media and Entertainment
1997년, 매직 존슨의 프로덕션 회사인 매직 존슨 엔터테인먼트는 폭스와 계약을 맺었다. 1998년 존슨은 폭스 네트워크에서 늦은 밤 토크쇼인 『더 매직 아워』를 진행했지만, 낮은 시청률로 인해 두 달 만에 취소되었다. 토크쇼 취소 직후, 존슨은 음반사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매직 32 레코드(Magic 32 Records)라고 불렸던 이 레이블은 2000년 MCA 레코드와 합작 투자를 체결하면서 매직 존슨 뮤직(Magic Johnson Music)으로 이름을 바꿨다. 매직 존슨 뮤직은 R&B 아티스트 아방을 첫 번째 아티스트로 영입했다. 존슨은 또한 자신의 회사인 매직웍스(Magicworks)를 통해 재닛 잭슨의 벨벳 로프 투어를 공동 홍보했다. 그는 또한 동기 부여 연설가로 활동했으며, 7년 동안 터너 네트워크 텔레비전의 NBA 해설자로 일했고, 2008년에는 ESPN의 『NBA 카운트다운』의 스튜디오 분석가가 되었다. 2012년 존슨은 BET 및 TV 원과 유사하게 흑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케이블 TV 네트워크인 어스파이어를 론칭했다.
그는 199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스포큰 워드 또는 비음악 앨범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스페인 스포츠 신문 『마르카』가 수여하는 마르카 레옌다 상을 수상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이 1991년에 발표한 앨범 『댄저러스』의 두 번째 싱글인 "리멤버 더 타임"의 이집트 배경 뮤직비디오에 에디 머피와 함께 출연했다.
5.3. Real Estate and Investments
매직 존슨은 자신의 비즈니스 기업인 매직 존슨 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다양한 부동산 및 투자 활동에 참여했다. 이 회사는 순자산이 7.00 억 USD에 달하는 복합 기업이며, 자회사로는 홍보 회사인 매직 존슨 프로덕션, 전국 영화관 체인인 매직 존슨 극장, 영화 제작사 매직 존슨 엔터테인먼트 등이 있다. 이러한 사업 외에도 존슨은 저소득층의 돈을 절약하고 전자 상거래에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불 마스터카드인 "매직 카드"를 만들었다.
2006년 존슨은 소덱소 USA와 계약하여 소덱소-매직이라는 음식 서비스 회사를 설립했다. 2004년 존슨과 그의 파트너 켄 롬바드는 매직 존슨 극장을 로우스 시네플렉스 엔터테인먼트에 매각했다。볼드윈 힐스 크렌쇼 플라자에 위치한 첫 번째 매직 존슨 극장은 2010년에 문을 닫았고, 2011년에 레이브 시네마 15로 다시 문을 열었다.
존슨은 도시 공동체에 투자하는 방법, 특히 영화관과 스타벅스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소외된 지역에 재개발 기회를 창출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는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에게 도시 지역에 커피숍을 성공적으로 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슐츠에게 소수 민족의 막대한 구매력을 보여준 후, 존슨은 125개의 스타벅스 매장을 인수할 수 있었고, 이 매장들은 평균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Urban Coffee Opportunities라는 이름의 이 파트너십은 디트로이트, 워싱턴 D.C., 할렘, 로스앤젤레스의 크렌쇼 지구와 같은 지역에 스타벅스 매장을 열었다. 존슨은 2010년 나머지 지분을 회사에 다시 매각하며 성공적인 12년간의 파트너십을 마쳤다. 그는 또한 캐년-존슨(Canyon-Johnson) 및 유카이파-존슨(Yucaipa-Johnson) 펀드를 통해 도시 부동산에 투자했다. 또 다른 주요 프로젝트는 보험 서비스 회사인 에이온 코퍼레이션과의 협력이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존슨은 브루클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윌리엄스버그 저축은행 타워를 7100.00 만 USD에 매입하여 512피트 높이의 랜드마크 건물을 사무실 건물에서 고급 콘도미니엄으로 전환하는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2023년 포브스에 따르면 존슨은 억만장자가 되었다.
6. Sports Ownership and Executive Roles
매직 존슨은 선수 경력 이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경영진을 거쳐, 다양한 스포츠 구단의 공동 소유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성공적인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6.1. Los Angeles Lakers Front Office
존슨은 1994년 6월 레이커스 지분 5%를 매입하며 부분 소유주가 되었고, 팀 부사장 직함을 맡았다. 그는 2010년 10월 레이커스 소유 지분을 패트릭 순-시옹에게 매각했지만, 팀의 무급 부사장직은 계속 유지했다. 2017년 2월, 존슨은 지니 버스의 고문으로 레이커스에 복귀했다. 2017년 2월 21일, 그는 짐 버스를 대신하여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농구 운영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존슨의 재임 기간 동안 레이커스는 여러 스타 플레이어를 영입하려 했고, NBA 샐러리캡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미래의 올스타인 디앤젤로 러셀을 포함한 기존 선수들을 트레이드했다. 구단은 2018년 르브론 제임스와 4년 계약에 합의했지만, 2018-19 시즌 동안 앤서니 데이비스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존슨의 경영진 재임 기간 동안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2019년 4월 9일, 존슨은 즉흥적인 기자회견에서 NBA 앰배서더 역할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로 레이커스 사장직에서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6.2. Multi-sport Team Ownership
2012년 1월, 존슨은 구겐하임 파트너스와 스탠 캐스턴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야구팀의 소유권 입찰에 참여했다. 2012년 3월, 존슨이 이끄는 소유 그룹이 다저스 인수를 위한 절차에서 승리자로 발표되었다. 영화 제작사 피터 구버도 포함된 존슨이 이끄는 이 그룹은 다저스를 위해 20.00 억 USD를 지불했다. 존슨은 소유 그룹의 얼굴로 여겨지지만, 실질적인 지배적 소유주는 마크 월터이다. 다저스는 2020년과 2024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존슨과 구버는 또한 데이턴 드래곤스의 파트너였는데, 이 팀은 오하이오주 데이턴을 연고로 하는 클래스 A 마이너 리그 야구 팀으로, 1,000경기 연속 매진을 기록하며 프로 스포츠 신기록을 세웠다. 존슨과 구버는 2014년에 드래곤스 지분을 매각했다. 구겐하임과 함께 존슨은 2014년 WNBA의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 인수에도 참여했다. 이로 인해 2014년 존슨은 ESPNW의 임팩트 25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2016년에 구단주로서 WNB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존슨은 MLS 확장 프랜차이즈인 로스앤젤레스 FC의 공동 소유권을 발표했으며, 이 팀은 2018년에 창단되어 2022년 MLS컵에서 우승했다.
2023년, 존슨은 조시 해리스가 이끄는 그룹에 2.40 억 USD를 투자하여 워싱턴 커맨더스 (NFL)를 60.50 억 USD에 인수했는데, 이는 스포츠 팀에 지불된 역대 최고 가격이다. 평생 NFL 팬이었던 그는 이를 "꿈"이자 자신의 사업 경력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여겼다. 존슨은 이전에 마이애미 돌핀스와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를 인수하는 데 관심이 있던 다른 그룹들과도 논의했으며, 2022년에는 해리스와 함께 덴버 브롱코스에 대한 입찰에 실패하기도 했다. 2024년 9월, 존슨은 NWSL의 워싱턴 스피릿 투자 그룹에 합류했다.
7. Personal Life
매직 존슨은 가족과의 유대와 신앙을 중요시하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의 친선 경기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대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7.1. Family and Relationships
존슨은 1981년 멜리사 미첼과의 사이에서 아들 앙드레 존슨을 얻었다. 앙드레는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지만, 매년 여름 존슨을 방문했으며, 나중에는 매직 존슨 엔터프라이즈의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기도 했다.
1991년, 존슨은 얼리타 "쿠키" 켈리와 랜싱에서 소규모 결혼식을 올렸는데, 여기에는 토마스, 아귀레, 허브 윌리엄스가 하객으로 참석했다. 존슨과 쿠키 사이에는 아들 어빈 3세("EJ")가 있다. EJ는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이며, 리얼리티 쇼 『리치 키즈 오브 베벌리 힐즈』의 스타이기도 하다. 부부는 1995년에 딸 엘리사를 입양했다. 존슨은 비벌리힐스에 거주하며, 캘리포니아주 데이나 포인트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
7.2. Faith and Public Engagements
존슨은 기독교인이며, 그의 신앙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존슨은 당시 현역 및 은퇴한 NBA 선수들인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빌 러셀과 WNBA의 마야 무어와 함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농구 경기를 펼쳤는데, 이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시범 경기였다. 이 경기는 포트 맥네어 내 체육관에서 열렸으며, 대통령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 농구 경기는 오바마 대통령의 49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직된 여러 행사 중 하나였다。
존슨은 레이커스 구단주 제리 버스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를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겼다. 버스를 "제2의 아버지"이자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부른 존슨은 2013년 버스가 암으로 사망하기 몇 달 전 병원에서 5시간 동안 버스를 방문했다. 버스가 사망한 지 몇 시간 후 언론에 이야기하면서 존슨은 감정에 복받쳐 "제리 버스 박사 없이는 매직도 없다"고 말했다. 버스는 1979년 잭 켄트 쿡으로부터 팀을 인수한 직후 1979년 NBA 드래프트에서 존슨을 1순위로 지명했다. 버스는 존슨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그에게 로스앤젤레스의 중요한 사업 인맥을 소개해 주었으며, 레이커스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결국 1994년에는 존슨에게 팀 지분을 매각하기도 했다. 존슨은 버스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공동 소유주가 될 수 있도록 사업 지식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버스는 1991년 존슨이 HIV 진단을 공개했을 때 그를 지지했으며, 존슨을 조직과 가깝게 유지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그를 부분 소유주로, 심지어 감독으로까지 영입했다. 존슨은 감독직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지만, 1994년 버스의 요청으로 레이커스의 감독직을 맡기로 동의했다. 1992년, 버스는 존슨이 리그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아니었던 모든 해에 대한 보상으로 연간 1400.00 만 USD를 지급하는 계약을 존슨에게 주었다. 비록 1992-93 NBA 시즌 이전에 존슨이 은퇴하면서 이 계약은 무효화되었지만, 버스는 여전히 그에게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합의 덕분에 존슨은 추가 급여를 받지 않고 팀을 코치할 수 있었다. 존슨이 감독직을 마친 후, 버스는 그에게 레이커스 지분 4%를 1000.00 만 USD에 매각했고, 존슨은 팀 임원으로 활동했다.
8. Rivalry with Larry Bird

존슨과 버드는 1979년 NCAA 결승전에서 존슨의 미시간 주립대학교 팀이 버드의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팀을 꺾으면서 처음으로 라이벌 관계로 엮였다. 이 라이벌 관계는 NBA에서도 계속되었으며, 1984년부터 1987년까지 4번의 NBA 파이널 중 세 번 레이커스와 셀틱스가 맞붙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 중 레이커스는 세 번의 파이널 중 두 번을 승리했다. 존슨은 자신에게 82경기 정규 시즌은 80개의 평범한 경기와 2개의 레이커스-셀틱스 경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비슷하게 버드도 존슨의 일일 박스스코어가 아침에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여러 언론인들은 존슨-버드 라이벌 관계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가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대결, 할리우드의 화려함("쇼타임")과 보스턴/인디애나의 블루 칼라 투지("셀틱 프라이드"), 그리고 흑인과 백인 사이의 대결과 같은 수많은 다른 대조를 상징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라이벌 관계는 또한 침체되어 가던 NBA에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존슨과 버드가 등장하기 전 NBA는 10년 동안 관심이 줄고 TV 시청률이 낮아지는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이 두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와 함께 리그는 새로운 팬 세대를 얻었고, 버드의 흙먼지 코트 인디애나 게임을 선호하는 전통주의자들과 존슨의 공개 코트의 화려함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모두를 끌어들였다. ESPN의 스포츠 저널리스트 래리 슈워츠에 따르면, 존슨과 버드는 NBA를 파산으로부터 구했다.
코트 안팎에서의 라이벌 관계에도 불구하고, 존슨과 버드는 1984년 컨버스 신발 광고 촬영 중에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 광고는 그들을 앙숙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존슨은 1992년 버드의 은퇴식에 참석하여 버드를 "영원한 친구"라고 묘사했다. 존슨의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는 버드가 직접 옛 라이벌을 헌액했다.
2009년, 존슨과 버드는 언론인 재키 맥멀런과 함께 『우리의 게임이었을 때』라는 논픽션 책을 공동 집필했다. 이 책은 그들의 코트 안팎에서의 라이벌 관계와 우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듬해 HBO는 에즈라 에델만이 감독한 그들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다큐멘터리 『매직 & 버드: 라이벌의 구애』를 제작했다.
9. HIV/AIDS Activism
매직 존슨은 자신의 HIV 감염 사실을 공개하며 HIV/AIDS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예방 활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9.1. Foundation and Advocacy Work
존슨은 HIV에 감염된 사실을 공개한 최초의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다. 존슨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엘리자베스 글레이서는 존슨에게 자신의 진단을 공개적으로 알리도록 설득했다. 존슨은 2011년 『프론트라인』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죽기 전에 내가 이 질병의 얼굴이 되어 사람들을 돕고 교육할 것이라고 약속하게 했다"고 회상했다.
1991년 11월 감염 사실을 발표한 후, 존슨은 HIV 퇴치를 돕기 위해 매직 존슨 재단을 설립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자선 목표를 포함하도록 재단을 확장했다. 1992년, 그는 의회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 구성원들이 임명한 위원회인 전미 에이즈 위원회에 합류했다. 존슨은 8개월 후 위원회를 떠났는데, 백악관이 위원회의 권고 사항(보편적 의료 보장 및 모든 저소득 에이즈 환자를 위한 메디케이드 확장 포함)을 "철저히 무시"하고 반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1999년 유엔 세계 에이즈의 날 컨퍼런스의 주요 연설자였으며, 유엔 평화 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9.2. Public Health Impact
HIV는 정맥 주사 약물 남용자와 동성애자와 연관되어 있었지만, 존슨의 캠페인은 감염 위험이 해당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존슨은 자신의 목표가 "[HIV]가 무엇인지 모든 사람에게 교육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HIV와 에이즈 환자를 차별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밝혔다. 존슨은 나중에 질병 확산에 대한 대중의 홍보 활동이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에이즈 커뮤니티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존슨의 HIV 발표가 다양한 인구, 특히 HIV 감염에 대한 고정관념(즉, 이성애자)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인 "매직 존슨 효과"에 대해 여러 연구 논문이 작성되었다.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의 한 논문에 따르면 존슨의 발표는 "공중 보건 촉매"였으며, "감염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빠르게 교정했다". 이 논문은 "발표 후 이성애 남성들의 에이즈 진단 건수가 크지만 일시적으로 증가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일부 사람들에게 존슨의 발표가 "더 일찍 의료 접근을 가능하게 하여 환자들의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제안한다. 『에이즈 교육 및 예방』에 발표된 한 논문은 "매직 존슨이 HIV에 감염되었다는 발표가 HIV에 대한 우려 증가와 위험을 줄일 수 있는 태도 및 행동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HIV 감염이 에이즈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존슨은 매일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 조합을 복용하여 바이러스를 차단하고 억제한다. 그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의 의약품을 광고했으며, 애벗 래버러토리스와 협력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에서 에이즈 퇴치 운동을 홍보했다.
10. Legacy and Honors
매직 존슨은 그의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수많은 수상 경력을 통해 농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10.1. Playing Style and Impact
905번의 NBA 경기에서 존슨은 17,707점, 6,559리바운드, 10,141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이는 경기당 평균 19.5점, 7.2리바운드, 11.2어시스트로, NBA 역사상 가장 높은 경기당 평균 어시스트 기록이다. 존슨은 단일 경기 플레이오프 어시스트 기록(24개)을 공유하며, 파이널 단일 경기 어시스트 기록(21개)을 보유하고 있으며, 플레이오프 최다 어시스트(2,346개)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는 NBA 파이널 시리즈에서 평균 12어시스트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며, 이를 여섯 번 달성했다. 그는 올스타 게임 단일 경기 어시스트 기록(22개)과 올스타 게임 통산 어시스트 기록(127개)을 가지고 있다. 존슨은 NCAA 챔피언십, NBA 챔피언십, 올림픽 금메달을 모두 획득한 농구 역사상 8명밖에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매직은 모든 사람보다 한 수 위다. [...] 나는 그만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래리 버드라고 평가했다.
존슨은 "쇼타임"(Showtime)이라는 빠른 농구 스타일을 도입했는데, 이는 "패스트 브레이크에서의 노룩 패스, 하프코트에서의 정확한 앨리웁, 회전하며 주는 패스, 그리고 트리플 팀을 뚫고 바스켓 아래로 꽂아 넣는 오버핸드 패스"가 혼합된 것으로 묘사된다. 팀 동료였던 레이커스 가드 마이클 쿠퍼는 "존슨이 패스를 던질 때 나는 그가 어디로 패스할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선수 중 한 명이 공을 잡고 득점하면, 나는 그가 누군가를 통과시켜 패스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하며 코트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존슨은 득점 없이도 경기를 지배할 수 있었고, 공격을 지휘하며 화려하게 공을 배분했다. 1982년 NBA 파이널에서 그는 16.2점이라는 3점 슛 시대 파이널 MVP 수상자 중 가장 낮은 득점 평균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
존슨은 일반적으로 프런트코트 선수들에게나 어울리는 2.06m의 키에도 불구하고 포인트 가드를 소화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었다. 그의 경력 통산 138개의 트리플 더블 경기는 니콜라 요키치, 오스카 로버트슨, 러셀 웨스트브룩에 이어 역대 4위에 해당한다. 존슨은 NBA 파이널 역사상 여러 시리즈 우승 결정전에서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다. 그의 통산 정규 시즌 승률은 73.95% (670승 236패)로 역대 1위다. 존슨은 자유투 성공률 또한 매우 높았으며, 1988-89 시즌에는 91.1%의 성공률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역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를 결정하는 순위에서 2위 이하는 매체마다 오스카 로버트슨, 아이재아 토마스, 존 스톡턴, 그리고 최근에는 스테픈 커리 등의 순위가 달라지지만, 매직 존슨은 모든 순위에서 항상 1위로 선정된다. 이는 그의 플레이와 업적, NBA에 대한 기여도와 위대함이 매우 지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0.2. Awards and Accolades
매직 존슨은 그의 뛰어난 농구 경력과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NBA/레이커스
- 5회 NBA 챔피언 (1980, 1982, 1985, 1987, 1988)
- 3회 NBA 정규 시즌 MVP (1987, 1989, 1990)
- 3회 NBA 파이널 MVP (1980, 1982, 1987)
- 9회 올NBA 퍼스트팀 (1982-1990)
- 1회 올NBA 세컨드팀 (1981)
- 12회 NBA 올스타 (1980, 1982-1992)
- 2회 NBA 올스타 게임 MVP (1990, 1992)
- J. 월터 케네디 시민상 (1991)
- 1996년 NBA 50주년 기념 올타임팀에 선정
- 2021년 NBA 75주년 기념팀에 선정
- 등번호 32번 레이커스 영구 결번
- 크립토닷컴 아레나 앞에 동상 건립
- NBA 평생 공로상 (2019)
- 서부 콘퍼런스 파이널 MVP 트로피는 존슨의 이름을 따서 명명 (2022년 제정)
- 맥도널드 오픈 우승 (1991)
- 맥도널드 오픈 MVP (1991)
- 맥도널드 오픈 올-토너먼트 팀 (1991)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 올림픽 금메달 (1992)
- 아메리카 선수권 대회 금메달 (1992)
NCAA
- NCAA 전국 챔피언십 (1979)
- NCAA 파이널 포 최우수 선수 (1979)
- 등번호 33번 미시간 주립대학교 영구 결번
- 미시간 주립대학교에 동상 건립
고등학교
- 1977년 미시간주 고등학교 주 챔피언 (에버렛 고등학교)
명예의 전당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스타 헌액 (2001)
- 2회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 2002년: 개인
- 2010년: "드림팀" 멤버
- 전미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2006년 클래스)
- FIBA 명예의 전당 (2017년 클래스, "드림팀" 멤버)
-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 (2009년 클래스, "드림팀" 멤버)
- 캘리포니아 명예의 전당 (2011년 클래스)
스포츠 구단주
- 5회 NBA 챔피언 (2000, 2001, 2002, 2009, 2010)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부분 소유주/임원으로서
- WNBA 챔피언 (2016) -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의 부분 소유주로서
- 2회 월드 시리즈 챔피언 (2020, 2024)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부분 소유주로서
- MLS컵 챔피언 (2022) - 로스앤젤레스 FC의 부분 소유주로서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 NAACP 이미지 어워드 - 1992년 재키 로빈슨 스포츠 어워드
- 1993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스포큰 워드 또는 비음악 앨범상
- 마르카 레옌다 (2001)
국가
- 대통령 자유 훈장, 미국 (2025년 1월 4일)
11. Political Activities
매직 존슨은 미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민주당을 지지하고 여러 정치인의 선거 운동에 힘을 보탰다.
존슨은 민주당의 지지자이다. 2006년 그는 캘리포니아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필 엔젤리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2008년 그는 힐러리 클린턴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지했으며, 2010년에는 바버라 복서의 미국 상원 재선 운동을 지지했다. 2012년 그는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재선을 지지했다. 20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장 후보였던 웬디 그리엘의 선거 광고에 출연하고 지지했다. 2015년 그는 두 번째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다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2016년 8월 22일, 그는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 선거 운동을 위한 모금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12. NBA Career Statistics
매직 존슨의 NBA 선수 경력 동안 기록한 주요 통계 수치는 아래와 같다.
12.1. Regular Season
| 시즌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 1979-80 | LAL | 77 | 72 | 36.3 | .530 | .226 | .810 | 7.7 | 7.3 | 2.4 | 0.5 | 18.0 |
| 1980-81 | LAL | 37 | 35 | 37.1 | .532 | .176 | .760 | 8.6 | 8.6 | 3.4 | 0.7 | 21.6 |
| 1981-82 | LAL | 78 | 77 | 38.3 | .537 | .207 | .760 | 9.6 | 9.5 | 2.7 | 0.4 | 18.6 |
| 1982-83 | LAL | 79 | 79 | 36.8 | .548 | .000 | .800 | 8.6 | 10.5 | 2.2 | 0.6 | 16.8 |
| 1983-84 | LAL | 67 | 66 | 38.3 | .565 | .207 | .810 | 7.3 | 13.1 | 2.2 | 0.7 | 17.6 |
| 1984-85 | LAL | 77 | 77 | 36.1 | .561 | .189 | .843 | 6.2 | 12.6 | 1.5 | 0.3 | 18.3 |
| 1985-86 | LAL | 72 | 70 | 35.8 | .526 | .233 | .871 | 5.9 | 12.6 | 1.6 | 0.2 | 18.8 |
| 1986-87 | LAL | 80 | 80 | 36.3 | .522 | .205 | .848 | 6.3 | 12.2 | 1.7 | 0.4 | 23.9 |
| 1987-88 | LAL | 72 | 70 | 36.6 | .492 | .196 | .853 | 6.2 | 11.9 | 1.6 | 0.2 | 19.6 |
| 1988-89 | LAL | 77 | 77 | 37.5 | .509 | .314 | .911 | 7.9 | 12.8 | 1.8 | 0.3 | 22.5 |
| 1989-90 | LAL | 79 | 79 | 37.2 | .480 | .384 | .890 | 6.6 | 11.5 | 1.7 | 0.4 | 22.3 |
| 1990-91 | LAL | 79 | 79 | 37.1 | .477 | .320 | .906 | 7.0 | 12.5 | 1.3 | 0.2 | 19.4 |
| 1995-96 | LAL | 32 | 9 | 29.9 | .466 | .379 | .856 | 5.7 | 6.9 | 0.8 | 0.4 | 14.6 |
| 경력 | 906 | 870 | 36.7 | .520 | .303 | .848 | 7.2 | 11.2 | 1.9 | 0.4 | 19.5 | |
12.2. Playoffs
| 시즌 | 팀 | 경기 수 | 선발 경기 수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 1980 | LAL | 16 | 16 | 41.1 | .518 | .250 | .802 | 10.5 | 9.4 | 3.1 | 0.4 | 18.3 |
| 1981 | LAL | 3 | 3 | 42.3 | .388 | .000 | .650 | 13.7 | 7.0 | 2.7 | 1.0 | 17.0 |
| 1982 | LAL | 14 | 14 | 40.1 | .529 | .000 | .828 | 11.3 | 9.3 | 2.9 | 0.2 | 17.4 |
| 1983 | LAL | 15 | 15 | 42.9 | .485 | .000 | .840 | 8.5 | 12.8 | 2.3 | 0.8 | 17.9 |
| 1984 | LAL | 21 | 21 | 39.9 | .551 | .000 | .800 | 6.6 | 13.5 | 2.0 | 1.0 | 18.2 |
| 1985 | LAL | 19 | 19 | 36.2 | .513 | .143 | .847 | 7.1 | 15.2 | 1.7 | 0.2 | 17.5 |
| 1986 | LAL | 14 | 14 | 38.6 | .537 | .000 | .766 | 7.1 | 15.1 | 1.9 | 0.1 | 21.6 |
| 1987 | LAL | 18 | 18 | 37.0 | .539 | .200 | .831 | 7.7 | 12.2 | 1.7 | 0.4 | 21.8 |
| 1988 | LAL | 24 | 24 | 40.2 | .514 | .500 | .852 | 5.4 | 12.6 | 1.4 | 0.2 | 19.9 |
| 1989 | LAL | 14 | 14 | 37.0 | .489 | .286 | .907 | 5.9 | 11.8 | 1.9 | 0.2 | 18.4 |
| 1990 | LAL | 9 | 9 | 41.8 | .490 | .200 | .886 | 6.3 | 12.8 | 1.2 | 0.1 | 25.2 |
| 1991 | LAL | 19 | 19 | 43.3 | .440 | .296 | .882 | 8.1 | 12.6 | 1.2 | 0.0 | 21.8 |
| 1996 | LAL | 4 | 0 | 33.8 | .385 | .333 | .848 | 8.5 | 6.5 | 0.0 | 0.0 | 15.3 |
| 경력 | 190 | 186 | 39.7 | .506 | .241 | .838 | 7.7 | 12.3 | 1.9 | 0.3 | 19.5 | |
13. Head Coaching Record
매직 존슨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감독 시절 경기 기록은 아래와 같다.
| 시즌 | 팀 | 정규 시즌 경기 수 | 승 | 패 | 승률 |
|---|---|---|---|---|---|
| 1993-94 | LAL | 16 | 5 | 11 | .313 |
| 경력 | 16 | 5 | 11 | .31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