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만프레트 게를라흐의 생애는 그의 어린 시절 반파시즘 저항 활동부터 교육 배경, 그리고 초기 법조계 및 언론계에서의 활동을 아우른다.
1.1. 유년기 및 교육
게를라흐는 1928년 5월 8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재판소 직원이 되었으나, 같은 해 불법적인 청소년 단체를 설립한 죄로 소년원에 수용되기도 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저항 운동의 단원이 되었고, 특히 1943년 법률적 반파시즘 청소년 운동을 창립했다. 이 활동으로 인해 1944년 3월 히틀러 암살 음모와 관련하여 투옥되었으며, 종전 이후인 1945년에 석방되었다.
1.2. 초기 활동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독일국립과학법률아카데미 "발터 울브리히트"(German Academy of State Sciences and Law "Walter Ulbricht")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할레의 자유민주 신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는 1964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20년 후인 1984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2. 정치 경력
게를라흐의 정치 경력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자유민주당 입당부터 동독 사회의 개혁을 주도하고 마지막 국가원수를 역임하는 과정, 그리고 독일 통일 이후의 행보와 관련된 논란까지 폭넓게 펼쳐진다.
2.1. 자유민주당 입당 및 초기 활동
전쟁이 끝난 1945년, 게를라흐는 자유민주당(LDPD)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자유 독일 청년당(FDJ)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작센주 서북부의 자유민주당 청소년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작센 자유민주당 행정 회의의 위원을 지냈다. 1949년부터 1959년까지 자유 독일 청년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에는 인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50년대에는 라이프치히의 시장 및 부시장으로 시정부에서 봉직했다.
2.2. 주요 직책 및 당내 활동
게를라흐는 자유민주당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부의장, 1954년부터 1967년까지 서기장을 역임했다. 1967년 자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막스 주르비어의 뒤를 이어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90년 2월 10일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1949년부터 1990년까지 인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1960년부터 1990년까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67년부터는 동독의 위성 조직인 국민전선의 평의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동독 정부로부터 여러 국가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1964년에는 조국공로훈장과 인민우의성장을, 1988년에는 카를 마르크스 훈장을 받았다.
2.3. 개혁적 입장과 동독 변화에 대한 기여
초기에 게를라흐는 비공산주의 정당들을 사회주의통일당(SED)에 통합하려는 정책인 '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을 지지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SED에 대한 완전한 순응적 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지도 아래 자유민주당은 서독의 자유민주당(FDP)과 소규모 접촉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가 관료로서 남아있던 사기업들의 국유화를 옹호하기도 했다.
게를라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시작된 소련의 자유화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독 내에서 더 많은 자유화와 다원주의를 지지함으로써 그는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독 사회의 격변기(디 벤데, Die Wende) 동안 보여준 다소 주저하는 태도로 인해 이러한 인기를 잃기도 했다. 특히 1989년 10월 13일, 게를라흐는 동독의 주요 정치인 중 처음으로 SED의 일당 독재적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자유민주당에서 정치와 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동독의 사회주의와 그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SED의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며칠 후인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는 마침내 자신의 정치국에 의해 해임되었다.
2.4. 국가 원수 재임 및 독일 통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만프레트 게를라흐는 1989년 12월 6일 에곤 크렌츠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그는 동독 역사상 최초의 비공산주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는 1990년 4월 5일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1990년 3월, 동독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평의회가 폐지되었다. 이로 인해 국가원수의 지위는 게를라흐로부터 인민의회 의장인 자비네 베르크만폴에게로 넘어갔다. 1990년 3월, 게를라흐가 이끌던 자유민주당은 다른 두 개의 자유주의 정당과 합병하여 새로운 자유민주협회를 결성했으며, 이 협회는 독일 통일 이후 서독의 자유민주당과 통합되었다.
2.5. 통일 이후 활동 및 논란
독일의 재통일 이후, 게를라흐는 자유민주당(FDP)에 입당했으나 1993년 11월 23일 당원직을 사임했다. 이는 1992년 그가 전후 직후인 1947년 독일 주둔 소련군에게 당 동료를 밀고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제명 심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밀고로 인한 구금 치사 방조 혐의로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2000년까지 증거 불충분 또는 무죄로 판결되어 모든 심리가 중단되었다. 정치적으로 그의 견해는 이후 옛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의 입장과 유사해졌다. 그는 동독 역사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시각을 옹호하는 '베를린 대안 역사 포럼'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 이에 대해 옛 공산주의 체제 비판자들은 게를라흐, 게랄트 괴팅, 한스 모드로프 등 옛 동독 고위 관료들이 공동 저술한 이러한 출판물들이 SED 독재를 미화하고 반파시스트 수사를 사용하여 현재 독일의 이미지를 조작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통일 이후 게를라흐는 베를린에서 시민권 및 인권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3. 저서 및 출판물
만프레트 게를라흐는 여러 저서를 집필하여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동독의 역사를 다루었다.
- Manfred Gerlach: Wortmeldungen zur Zeitgeschichte (시대사에 대한 발언). Buchverlag Der Morgen, Berlin 1980
- Manfred Gerlach: Äußerungen über uns und unsere Zeit (우리와 우리 시대에 대한 발언). Buchverlag Der Morgen, Berlin 1985
- Manfred Gerlach: Standortbestimmung (위치 확인). Buchverlag Der Morgen, Berlin 1989
- Manfred Gerlach: Mitverantwortlich: Als Liberaler im SED-Staat (공동 책임: SED 국가의 자유주의자로서). Morgenbuch-Verlag, Berlin 1991
4. 평가와 비판
만프레트 게를라흐에 대한 평가는 그가 동독의 변화를 촉구하고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한 긍정적 측면과 함께, 과거 체제 내에서의 순응적 태도 및 통일 이후의 논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동시에 포함한다.
4.1. 주요 업적 및 긍정적 평가
게를라흐는 197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독점적 지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환영하며 동독 사회의 변화를 촉구한 선구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89년 10월, 그가 공개적으로 SED의 일당 독재 체제를 비판한 것은 동독의 정치적 격변기 '디 벤데'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의 첫 비공산주의 국가원수로서 그는 혼란스러운 과도기에 국가를 이끌며 독일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이러한 기여는 동독의 민주화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조국공로훈장, 인민우의성장, 카를 마르크스 훈장 등 동독의 여러 국가 훈장을 수여받았다.
4.2. 비판 및 논란
게를라흐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는 초기에는 사회주의통일당의 '글라이히샬퉁' 정책을 지지하는 등 동독 체제 내에서 순응적인 태도를 보였고, 1989년 격변기 동안 일부에서는 그의 태도가 충분히 단호하지 못하고 주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한 통일 이후 그가 옛 동독 체제를 미화하려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특히 그가 서명한 '베를린 대안 역사 포럼'은 옛 동독 고위 관료들이 작성한 것으로, 사회주의통일당 독재를 미화하고 반파시즘 수사를 이용해 현재 독일의 이미지를 조작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7년 소련군에 당 동료를 밀고했다는 의혹과 관련 재판은 비록 무죄 또는 심리 중단으로 결론났지만, 그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으로 남았다.
5. 사망
만프레트 게를라흐는 오랜 투병 끝에 2011년 10월 17일 베를린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