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앙리에트 데시데리아 펠리치타스 라이니에라(Maria Christina Henriette Desideria Felicitas Raineria von Österreich마리아 크리스티나 헨리에테 데시데리아 펠리치타스 라이니에라 폰 외스터라이히독일어)는 스페인의 알폰소 12세 국왕의 두 번째 왕비이자 섭정이었다. 1858년 7월 21일 모라비아의 브르노 근처 지들로호비체 성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와 오스트리아 여대공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의 딸로 태어났다. 1879년 11월 29일 알폰소 12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의 사망 후 1885년 11월부터 아들 알폰소 13세가 성년이 되는 1902년 5월까지 섭정으로서 스페인을 통치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왕비로서 두 딸을 낳은 후, 왕실의 안정적인 계승을 위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 사망 직전 임신 중이었고, 1886년 5월 아들 알폰소를 낳아 그가 즉위와 동시에 알폰소 13세로 즉위하게 했다. 섭정으로서 그녀는 엄격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알려져 '도냐 비르투데스', '마리아 라 세카', '가정교사' 등으로 불렸다. 그녀의 통치는 헌법적 권리를 존중하고 정치적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며 균형 잡힌 것으로 평가된다. 비록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 스페인 제국의 주요 영토를 상실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그녀는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왕권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9년 2월 6일 마드리드 왕궁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으며, 엘에스코리알에 안장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린 시절 가족들 사이에서 '크리스타'로 불렸다.
2.1. 출생과 가족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858년 7월 21일 모라비아의 브르노 근처 지들로호비체 성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였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여대공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였다. 친조부모는 테셴 공작 카를과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트 알렉산드리네 공주였다. 그녀의 이복 언니로는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3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다.
2.2. 교육 및 초기 경력
결혼 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키가 크고, 공정하며, 현명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1875년부터 1879년까지 프라하 성에 위치한 테레지아 왕립 제국 귀족 수녀원의 원장으로 재직했다.
3. 왕비로서의 삶

알폰소 12세는 첫 왕비 오를레앙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가 1878년 6월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를 낳기 위해 재혼을 결심했다. 이후 빈 궁정과의 협상이 시작되었고, 1878년 8월 알폰소 12세는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과 그녀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여대공을 만나기 위해 지롱드주의 아르카숑으로 향했다. 이 첫 만남에서 알폰소 12세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이를 수락했다.
3.1. 결혼과 왕비 즉위
1878년 9월 초, 스페인 정부는 약혼을 승인했고,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조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프라하 테레지아 수녀원장 직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할 것을 요청했다. 이는 미래의 왕비로서 모든 오스트리아 직위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약혼 소식은 9월 7일 빈 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스페인 국왕 폐하께서는 아르카숑 방문 중 가장 고귀한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의 손을 청하셨습니다... 황실의 수장으로서 황제 폐하의 사전 동의를 얻어 가장 고귀한 여대공께서는 해당 청혼을 수락하셨습니다."
스페인 헌법 제56조에 따라, 스페인 의회는 11월 2일 미래 왕비에게 50.00 만 ESP의 연금을 지급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결혼 조건은 11월 15일 빈에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대표들 간에 체결된 협정을 통해 확정되었다. 같은 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외국 왕자와 결혼하는 여대공에게 부과되는 전통에 따라 황제와 궁정 앞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또 다른 결혼 협정은 11월 28일 마드리드에서 국왕과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직접 서명했다.
결혼식은 1879년 11월 29일 마드리드의 아토차 성모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알폰소 12세의 두 번째 결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지하는 보수적 성향과 합스부르크가가 스페인 역사에서 쌓아온 명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카를로스파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지 가능성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
3.2. 자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두 딸, 1880년생 아스투리아스 여공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와 1882년생 스페인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를 낳으며 왕조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전 카를로스 전쟁으로 인해 지배 왕조에 대한 위협이 커지면서, 당시에는 정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임신을 통해 남자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그녀는 1885년 11월 남편이 사망하기 전에 다시 임신했다. 알폰소 12세는 결핵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 알폰소 12세가 죽어가면서 그녀에게 "모든 것이 섭리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당신의 성기를 조심하고 항상 카노바스에게서 사가스타에게로, 사가스타에게서 카노바스로 가라"고 간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는 아마도 사실이 아닐 수 있지만 스페인 왕정복고 시대를 상징하는 일화로 여겨진다. 몇 달 후인 1886년 5월, 그녀는 남자아이 알폰소를 낳았고,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알폰소 13세로 즉위했다.
4. 섭정

1885년 남편의 사망으로 섭정으로 지명된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885년 12월 30일 코르테스 궁전에서 두 입법 기관 앞에서 1876년 스페인 헌법에 서약했다. 그녀는 1830년대에 이전 섭정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사용했던 레나 고베르나도라("여왕 총독")라는 칭호를 거부하며 이전 섭정의 기억과 거리를 두었다.
4.1. 섭정의 시작
1885년 11월 25일 알폰소 12세 국왕이 사망했을 때,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임신 중이었으므로 왕위는 공석이었다. 이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태아의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이었다. 남자아이일 경우 그 아이가 국왕이 되고, 여자아이일 경우 장녀인 아스투리아스 공주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가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다. 이 기간 동안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섭정으로 통치했으며, 1886년 5월 17일 아들 알폰소가 태어날 때까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아들 알폰소는 태어나면서부터 알폰소 13세로 즉위했다.
4.2. 통치 기간

그녀는 엄격하고 침착한 성품을 길렀으며, 대중들 사이에서 '도냐 비르투데스'("덕행 부인"), '마리아 라 세카'("무뚝뚝한 마리아"), 그리고 '라 인스티트리스'("가정교사")로 알려졌다. 그녀는 강한 종교적 신념을 보여 레오 13세 교황의 지지를 얻었으며, 성직자들 사이에서 카를로스파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그녀의 주요 고문이자 정부 수반은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였다. 그녀의 통치는 균형 잡힌 것으로 평가되며, 헌법적 권리를 존중했고, 정치적 갈등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정치 개혁이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시행되었다. 그녀의 역할은 주로 의례적이었으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왕권을 보존하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4.3. 주요 사건 및 영향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인해 1898년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상실했다. 이는 스페인 제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5. 말년 및 사망

5.1. 왕위 계승 이후의 삶
1906년 아들 알폰소 13세가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와 결혼한 후, 그녀는 공적인 행사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13세는 여러 차례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다.
5.2.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역할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페인 왕실 내에서 독일 지지파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이는 영국 출신 며느리 빅토리아 에우헤니아로 대표되는 협상국 지지파와 대조를 이루었다. 스페인은 전쟁 기간 동안 중립국으로 남았다.
5.3. 사망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몇 주간의 심장병을 앓다가 1929년 2월 6일 마드리드 왕궁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엘에스코리알에 안장되었다. 알폰소 13세의 전기 작가인 찰스 페트리 경은 왕대비의 죽음이 아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고, 알폰소 13세가 그 충격에서 정치적으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사망 후 2년여 만에 스페인 군주정은 붕괴되었다.
러시아의 마리아 파블로브나 여대공은 1932년 회고록에서 그녀를 "총명하고 날카로운 얼굴과 흰 머리를 가진 깔끔하고 활기찬 작은 노부인"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태도는 완벽하게 소박하고 친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궁전의 벽 밖으로 한 번도 나선 적이 없는 옛 시대의 군주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6. 훈장 및 영예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훈장을 받았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엘리자베스 훈장 대십자, 1898년
- 성성 십자 훈장 1등급 기사
- 스페인 왕정복고 시대:
- 마리아 루이사 왕비 훈장 805번째 기사, 1879년 9월 1일
- 대총장, 1879년 11월 29일
- 시암: 차크리 왕가 훈장 기사, 1897년 10월 18일
- 프랑스 제3공화국: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 1898년 11월 17일
- 포르투갈 왕국:
- 성 이사벨 훈장 기사, 1879년 11월 14일
- 빌라 비소사의 성모 마리아 수태고지 훈장 대십자 기사, 1886년 10월 14일
- 세 가지 훈장 휘장 대십자, 1892년 11월 8일
- 교황령: 황금 장미, 1886년
- 일본 제국: 보관장 대훈위, 1889년 2월 16일
- 바이에른 왕국:
- 성 엘리자베스 훈장 1등급 기사
- 테레지아 훈장 명예 기사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수장, 1902년
- 몰타 기사단: 명예와 헌신 대십자 기사, 예루살렘 특별 훈장
- 오스만 제국: 자선 훈장 대수장
- 러시아 제국: 성 예카테리나 훈장 대십자 기사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빅토리아 앨버트 왕실 훈장 1등급
7. 문장학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관련된 문장 및 왕실 문장은 다음과 같다.
문장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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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비 문장 | 스페인 왕대비 문장 | 스페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의 왕실 모노그램 |
8. 가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1.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 2.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
- 4. 테셴 공작 카를
- 8.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황제)
- 9.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1745년)
- 5.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트 공주
- 10. 나사우-바일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 11. 키르히베르크의 루이제 이자벨 부르크라피네
- 4. 테셴 공작 카를
- 3. 오스트리아 여대공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 6. 헝가리 팔라틴 요제프 대공
- 12.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황제) (= 8)
- 13.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1745년) (= 9)
- 7.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 여공작
- 14. 뷔르템베르크 공작 루이
- 15.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트 공주
- 6. 헝가리 팔라틴 요제프 대공
- 2.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
9. 평가 및 영향
9.1. 긍정적 평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섭정으로서 스페인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헌법적 권리를 존중하고 정치적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며 균형 잡힌 통치를 펼쳤다. 특히, 그녀의 강한 종교적 신념은 레오 13세 교황의 지지를 얻어 성직자들 사이에서 카를로스파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녀의 엄격하고 침착한 성품은 왕실의 위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덕행 부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나타났다. 그녀는 아들 알폰소 13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권을 성공적으로 보존하여 스페인 군주정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2. 비판 및 논란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 기간은 스페인 제국이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 주요 식민지를 상실하는 시기와 겹친다. 비록 그녀의 통치가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헌법적이었다고 평가되지만, 이러한 영토 상실은 스페인 역사에서 큰 재앙으로 기록되며, 그녀의 섭정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