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데이비드 앨런 리게티(David Allan Righetti)는 1958년 11월 28일생으로, '랙스(Rags)'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야구 코치이자 전 야구 선수이다. 좌완 투수였던 리게티는 1979년부터 1995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뉴욕 양키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활약했다. 그는 은퇴 후 2000년부터 2017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로 재직하며 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리게티는 경력 초기에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나, 1984년 양키스에 의해 구원 투수이자 마무리 투수로 전환되었다. 그는 1981년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으며, 선발 투수 시절인 1983년 7월 4일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마무리 투수로서는 두 차례 롤레이즈 구원 투수 상을 수상하고 MLB 올스타전에 두 번 출전했다. 그는 역사상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동시에 세이브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선수이며, 이러한 위업은 훗날 데니스 에커슬리와 데릭 로가 재현했다. 리게티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로서 2010년, 2012년, 2014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 어린 시절과 교육
데이비드 앨런 리게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1958년 11월 28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야구 선수였던 레오 리게티(Leo Righetti)이다. 데이비드의 형 스티브는 그보다 13개월 먼저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는 아들들을 야구 선수로 키우기 위해 훈련시켰다. 데이비드와 스티브는 링컨 글렌 리틀 리그 팀인 Letterman레터맨영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데이비드는 외야수, 스티브는 유격수로 뛰었다.
2.1. 고등학교와 대학교
리게티는 Pioneer High School파이오니어 고등학교영어에 다녔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텍사스 레인저스 스카우트 패디 코트렐(Paddy Cottrell)은 리게티의 투구 동작을 눈여겨보고 그에게 투수가 될 것을 제안했다. 리게티는 고학년 때 올 리그 팀에 선정되었다.
이후 리게티는 San Jose City College새너제이 시티 칼리지영어에 입학하여 학교 야구 팀에서 투수로서 계속 성장했다. 그는 동료이자 훗날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게 되는 데이브 스티브를 제치고 주니어 칼리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3. 프로 선수 경력
데이비드 리게티는 드래프트를 통해 프로 무대에 입문한 뒤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를 거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여러 팀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좌완 투수로 이름을 알렸다.
3.1. 마이너 리그 경력
패디 코트렐의 권유에 따라 텍사스 레인저스는 1977년 1월 11일 아마추어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0순위로 리게티를 지명했다. 레인저스는 데이비드의 형 스티브도 6라운드에서 지명했으며, 데이비드가 계약해야 스티브도 계약할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리게티 형제는 모두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데이비드는 그해 클래스 A 웨스턴 캐롤라이나스 리그의 Asheville Tourists애슈빌 투리스츠영어 소속으로 프로 데뷔를 하여 11승 3패의 기록을 남겼다.
1978년, 리게티는 클래스 AA 텍사스 리그의 Tulsa Drillers털사 드릴러스영어에서 뛰었다. 7월 미들랜드 록하운즈(Midland RockHounds)와의 경기에서 리게티는 리그 기록인 21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당시 뉴욕 양키스 스카우트 제리 워커(Jerry Walker)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그해 오프시즌에 레인저스 구단주 브래드 코빗과 트레이드 협상을 하는 동안, 리게티를 트레이드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하기 위해 협상 후반부까지 기다렸다. 1978년 11월 10일, 양키스는 리게티와 후안 베니케스(Juan Beníquez), 마이크 그리핀(Mike Griffin), 그렉 제미슨(Greg Jemison), 폴 미라벨라(Paul Mirabella)를 영입했고, 레인저스는 스파키 라일(Sparky Lyle), 도밍고 라모스(Domingo Ramos), 마이크 히스(Mike Heath), 래리 맥콜(Larry McCall), 데이브 라지치(Dave Rajsich), 그리고 현금을 받았다. 양키스는 리게티를 "차세대 론 기드레(Ron Guidry)"로 소개했다. 리게티는 1979년 1월 미네소타 트윈스로 트레이드될 뻔했다. 당시 트윈스와 양키스는 리게티와 크리스 챔블리스(Chris Chambliss), 후안 베니케스, 다마소 가르시아(Dámaso García)를 트윈스로 보내는 대신 로드 커루를 받는 트레이드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3.2. 뉴욕 양키스 (1979-1990)

리게티는 1979년 9월 16일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등번호 56번을 달았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이 경기에서 그는 5 이닝 동안 3개의 탈삼진을 잡고 3개의 안타, 6개의 볼넷, 3개의 자책점을 허용했다. 리게티가 두 번째 선발 등판을 마친 후, 양키스 감독 빌리 마틴(Billy Martin)은 리게티가 "다음 시즌에 20승을 거둘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리게티는 제구에 어려움을 겪었고, 1980년 시즌을 클래스 AAA 인터내셔널 리그의 Columbus Clippers콜럼버스 클리퍼스영어에서 보냈다. 그는 6승 10패의 기록과 4.6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142이닝 동안 101개의 볼넷과 13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1981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리게티는 좋은 투구를 보였지만, 양키스 로스터에 자리가 없어 콜럼버스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콜럼버스에서 5승 0패와 1.0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45이닝 동안 50개의 탈삼진을 잡은 후, 양키스는 1981년 5월 리게티를 메이저 리그로 다시 불렀다. 그는 등번호 19번을 배정받았다. 양키스는 딕 티드로(Dick Tidrow)가 19번, 캣피시 헌터(Catfish Hunter)가 29번, 론 데이비스(Ron Davis)가 39번, 기드레가 49번을 달았던 것처럼,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한 투수들에게 9로 끝나는 등번호를 부여하는 전통이 있었다. 리게티는 양키스의 선발 투수로서 강력한 투구를 펼쳤으며, 1981년 시즌 15경기 선발 등판에서 8승 4패, 2.06 평균자책점, 105이닝 동안 8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리게티는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으며, 리치 게드먼(Rich Gedman)과 밥 오제다(Bob Ojeda)를 제쳤다. 리게티는 1981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루어스를 두 번 물리쳤다. 양키스는 그해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리게티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패한 1981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일찍 강판되었다.
1982년, 리게티는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8.5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리게티를 마이너 리그로 강등시키려 했지만, "그때는 내가 반대표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1982년 6월까지 리게티는 5승 5패, 4.2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의 77개의 탈삼진은 아메리칸 리그 4위였지만, 62개의 볼넷은 문제로 여겨졌다. 양키스는 리게티를 마이너 리그로 강등시켰는데, 스타인브레너는 이를 "2주 반 동안의 집중 재교육"이라고 표현했다. 콜럼버스에서 리게티의 투수 코치였던 새미 엘리스(Sammy Ellis)는 리게티가 투구 동작을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불안감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엘리스와 함께 훈련한 리게티는 클리퍼스에서 4차례 선발 등판하여 26이닝 동안 33개의 탈삼진을 기록한 후 뉴욕으로 다시 불려왔다. 리게티는 1982년 시즌을 27번의 선발 등판에서 11승을 거두며 3.79의 평균자책점과 162개의 탈삼진, 그리고 리그 최다인 108개의 볼넷으로 마쳤다. 그의 탈삼진은 아메리칸 리그 3위였다.
1983년 7월 4일, 리게티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이는 돈 라슨(Don Larsen)의 1956년 월드 시리즈 퍼펙트 게임 이후 양키스 최초의 노히트 노런이자, 1917년 이후 양키스 좌완 투수로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리게티는 웨이드 보그스(Wade Boggs)를 상대로 헛스윙 탈삼진을 잡아내며 경기를 마쳤다. 25년 후, 리게티는 그 경기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3루 쪽으로 넘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큰 걱정은 보그스가 저와 돈 매팅리(Don Mattingly) 사이로 공을 치고 제가 1루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타석에서 많은 패스트볼을 던졌지만, 마지막에 던진 슬라이더를 그가 놓쳤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1984년, 리게티는 오프시즌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한 구스 고사지(Goose Gossage)의 대체자로 양키스의 불펜으로 이동하여 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양키스가 선발 투수 과포화로 인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리게티가 선발 투수로서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하며 이 결정을 비판했다.
리게티는 구원 투수로서 첫 등판에서 만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왔지만, 이전 주자를 득점시키지 않고 경기 마지막 7타자를 모두 처리했다. 그는 구원 투수로서 훨씬 더 효과적인 모습을 보였고, 다음 7년간 양키스에서 시즌 평균 32개의 세이브를 기록했으며, 1986년과 1987년에는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86년 10월 4일,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더블헤더 두 경기에서 모두 세이브를 기록하며 시즌을 46세이브로 마쳤다. 이는 댄 퀴젠베리(Dan Quisenberry)와 브루스 서터(Bruce Sutter)가 세운 메이저 리그 기록을 깬 것이었다. 이 기록은 바비 시그펜(Bobby Thigpen)이 1990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57세이브를 기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리게티는 좌완 투수 단일 시즌 세이브 기록을 1993년 시카고 컵스의 랜디 마이어스(Randy Myers)가 53세이브를 기록할 때까지 보유했으며, 여전히 아메리칸 리그 좌완 투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리게티는 1987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리게티가 일본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2000.00 만 USD 상당의 3년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리게티의 에이전트는 자이언츠가 리게티에게 제안을 한 것은 맞지만, 소문난 금액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었고, 리게티는 메이저 리그에서 계속 투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계약 제안은 나중에 1000.00 만 USD으로 추정되었다. 리게티는 양키스와 재계약하기로 결정하고 450.00 만 USD 상당의 3년 계약을 체결했다.
리게티는 1988년 시즌 초 양키스에서 고전하며 4연속 세이브 기회를 날려버렸고, 이로 인해 양키 스타디움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후 5번의 세이브 기회를 연속으로 성공시켰다. 리게티는 양키스가 리키 헨더슨(Rickey Henderson), 잭 클라크(Jack Clark), 데이브 윈필드(Dave Winfield)를 트레이드하는 방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3.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91-1993)
1990년 시즌 후, 리게티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하여 1000.00 만 USD 상당의 4년 계약을 체결했다. 1991년 자이언츠 소속으로 뛰는 동안, 그는 좌완 투수 통산 238세이브라는 스파키 라일의 메이저 리그 기록을 깼다. 리게티의 통산 252세이브 기록은 1994년 존 프랑코(John Franco)가 이를 넘어설 때까지 유지되었다.
리게티는 1991년에 24세이브를 기록했다. 1992년 시즌 중에는 로드 벡(Rod Beck)에게 마무리 투수 역할을 내주었다. 리게티는 1992년 6월 10일 선발 등판을 했는데, 이는 1983년 9월 이후 첫 선발 등판이었다. 그는 1993년 시즌에는 자이언츠에서 중간 계투로 활약했다.
3.4. 기타 팀 (1994-1995)
1993년 시즌 후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리게티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했다. 그러나 1994년 애슬레틱스에서 시즌을 시작한 후 방출되었다.
리게티는 1994년 5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했다. 블루제이스에서 리게티는 0승 1패에 6.7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 시즌 후, 리게티는 블루제이스에서 방출되었다.
1995년, 리게티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했다. 1995년 11월 9일, 그는 다시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었지만, 어떤 팀도 그를 영입하지 않았다. 리게티는 16년간의 선수 경력을 마감하며 은퇴했고, 통산 252세이브, 3.46 평균자책점, 718경기에서 82승 79패의 기록을 남겼다.
4. 코치 경력
데이비드 리게티는 선수 생활 은퇴 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오랜 기간 투수 코치로 활동하며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국제 무대에서도 코칭 경험을 쌓았다.
4.1.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0-2017)
2000년, 리게티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가 되었다. 리게티의 지도를 받은 투수들은 자이언츠가 2002년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하는 데 기여했지만, 자이언츠는 2002년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애너하임 에인절스에게 패했다.

2007년 시즌을 앞두고 감독 교체로 인해 자이언츠로 돌아올지 불확실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게티는 2007년 11월 초에 현재 역할로 자이언츠에 남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맷 케인(Matt Cain), 매디슨 범가너(Madison Bumgarner), 팀 린스컴(Tim Lincecum), 조나단 산체스(Jonathan Sánchez),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 등의 투수진을 지도하며 2010년 월드 시리즈, 2012년 월드 시리즈, 2014년 월드 시리즈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팬그래프닷컴(Fangraphs)의 분석에 따르면 리게티는 투수들에게 홈런 허용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2017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즌에 팀이 메이저 리그 최악의 64승 98패를 기록한 후, 리게티는 2017년 10월 21일 투수 코치 역할에서 물러나 자이언츠의 프런트 오피스 역할로 이동했다. 리게티는 18시즌 동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로 재직하며 더스티 베이커(Dusty Baker), 펠리페 알루(Felipe Alou), 브루스 보치(Bruce Bochy) 감독 아래에서 일했다.
4.2. 국제 코칭
리게티는 202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불펜 코치로 활동했다.
5. 개인 생활
리게티와 그의 아내는 1991년에 세 쌍둥이(두 딸과 한 아들)를 낳았으며, 그의 처제가 대리모 역할을 했다.
6. 유산과 평가
데이비드 리게티는 경력 동안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동시에 리그 세이브 1위를 차지한 역사상 최초의 선수이다. 이후 데니스 에커슬리와 데릭 로가 이 위업을 달성했다. 그는 선수로서의 뛰어난 활약과 더불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로서 여러 차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투수들의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코칭 능력은 야구 통계 분석에서도 그 효과가 입증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7. 같이 보기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간 세이브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노히트 노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