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학력
김기림의 생애는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한국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그의 문학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김기림은 1907년 4월 5일(일부 자료에서는 1908년 5월 11일로 기록되기도 함)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인손(김인손한국어, 金仁孫)이며, 어린 시절 이름은 김인손(김인손한국어, 金寅孫)으로도 알려져 있다. 편석촌(편석촌한국어, 片石村)이라는 아호를 사용했다. 1914년 임명소학교에 입학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다.
1.2. 학력
김기림은 1921년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한국어, 현 보성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릿쿄 중학교(立教中学校일본어)로 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1930년 니혼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며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귀국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1936년 일본 센다이의 도호쿠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당시 그는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직을 잠시 내려놓고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방응모 사장의 지원으로 휴직계를 내고 회사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는 1939년 영국의 문학 비평가 I. A. 리처즈의 이론에 대한 논문으로 졸업했다.
2. 문학 활동
김기림의 문학 활동은 시와 비평 양면에서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초석을 다지고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등단 및 초기 활동
일본 유학 후 귀국한 김기림은 1930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며 문단에 발을 들였다.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또한 1931년에는 평론 "피에로의 독백", "시의 기술 인식 현실 등 제문제" 등을 발표하며 비평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에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무곡원(무곡원한국어)이라는 과수원을 가꾸며 창작 활동에 집중하기도 했다.
2.2. 시와 모더니즘
김기림은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중요한 시인이었다. 그는 1936년 첫 시집 "기상도"를 발표했으며, 이 시집은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에는 두 번째 시집 "태양의 풍속"을 출간했는데, 이 시집의 일부 시들은 지성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유희가 특징이다. 그는 "바다와 나비"(1939)와 같은 기념비적인 시들을 발표하며 당시 한국 문단에서 새로운 시도인 회화적인 모더니즘을 선보였다.
그의 시 세계는 1920년대의 감상적인 낭만주의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좌익 이념 기반 문학을 비판하며 새로운 시 정신을 추구했다. 김기림은 시가 시대정신을 담아야 하며, 견고한 사상 없이 시각적이거나 회화적인 시는 또 다른 형태의 순수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산물인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가치를 대중에게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지녔다고 보았다. 한편, 그는 "철도 연변의 땅"(1935~1936)을 비롯한 세 편의 소설과 희곡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2.3. 문학 비평 및 이론
김기림은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문학 비평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서구의 이미지즘과 주지주의 이론을 한국 문학계에 도입하여 문학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930년대 서구의 이미저리(imagery)와 지성주의를 한국에 소개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시론"(1947)은 그가 서구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문학 비평의 지평을 넓힌 중요한 시론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의 이해"(1950)는 I. A. 리처즈의 심리학 이론에 기반한 계몽 문학으로 평가된다.
그는 문학 평론과 논문을 통해 이상, 백석, 정지용 등 당대 뛰어난 한국 작가들을 문단에 소개하고 그들의 작품을 비평하며 문단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자신의 문학 활동 중반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냈는데, 이는 현대화의 비인간성과 불안감이라는 세계적인 경향에 따른 것이었다. 해방 후에는 문학과 현실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는 글들을 발표하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 했고, 작가들의 사회 참여를 촉구하며 자신의 '전체시' 이론을 실현하려 했다. 그는 모더니즘 기법과 비판적 사회 인식 사이의 균형을 찾아 추구함으로써 시가 시대정신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방 후는 김기림이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길 적기였으며, 그는 시인들이 공동체 생활에서 대중을 대변할 것을 독려했다.
2.4. 문학 단체 활동
1933년 9월, 김기림은 서울에서 이상,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 저명한 한국 작가들과 함께 구인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구인회 창립 멤버로서 당대 문학에 모더니즘을 접목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양하, 최재서 등과 함께 지성주의를 문학에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으나, 1948년 경 이 단체에서 탈퇴했다.
3. 시대별 활동 및 삶
김기림의 삶은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의 혼란, 그리고 한국 전쟁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3.1. 일제 강점기 활동
김기림은 1939년 도호쿠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다시 조선일보 기자로 복직하여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40년 일본 제국주의 정부에 의해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면서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942년에는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당시 시인 김규동이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3.2. 해방 이후 및 남북 분단
1945년 해방 직후, 김기림은 진보적 성향의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46년 1월에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북한 지역을 떠나 자유주의적 남한으로 월남했다. 당시 그의 책과 재산은 강제로 몰수당해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1947년 6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두고, 평양에 머물고 있던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다시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세 자녀와 함께 남한으로 넘어오는 데 성공했으며, 그의 아내와 막내아들은 1948년 봄에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월남 후 김기림은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강사로 재직했으며, 이후 서울대학교 조교수로 부임하여 신문화 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그는 1946년에 시집 "바다와 나비"를, 1947년에 "새노래"를 출간했다. "바다와 나비"는 삶의 한계를 투명하게 묘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새노래"는 "바다와 나비"의 어둡고 사적인 분위기와 달리 당시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3.3. 한국 전쟁 납북 및 사망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기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사망 시기 및 행방은 현재까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북한에서 당뇨 합병증으로 2000년 1월 12일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는 남한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4. 평가 및 영향
김기림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이자 이론가로서 후대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비평적 평가
김기림은 T. S. 엘리엇, T. E. 흄, I. A. 리처즈 등 서구 작가와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아 서구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비교적 정확하게 초기에 습득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는 모더니즘의 문화적 기반과 철학적 토대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의 첫 시집 "기상도"(1936)는 명확하고 통일된 주제의식 없이 실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기상도"는 형식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는데, 비평가들은 언어의 운율과 음악성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김기림이 언어를 통해 시각적 인상을 전달하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의도치 않게 간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상도"는 사상과 감각을 통합하고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마지막 시집인 "새노래"(1948)는 민족 정체성 확립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인정받았지만, 예술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반면 문학 평론가로서의 김기림은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한국에 도입하여 한국 시문학계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초기 시에서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흩어져 시적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이러한 단점들은 이후 작품에서 극복되었다.
4.2. 사회 및 사상적 영향
김기림은 문학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인들이 지식인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고 대중에게 시대의 가치를 전달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의 '전체시' 이론은 모더니즘의 기교와 비판적 사회 인식을 결합하여 문학이 현실에 깊이 개입해야 함을 역설하는 그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이념은 해방 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데 영향을 미쳤다.
5. 주요 작품 분석
김기림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바다와 나비"는 그의 문학적 특징과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5.1. 바다와 나비
"바다와 나비"(1939)는 김기림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당시 문예지 여성에 발표되었다. 이 시는 지성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한국 중·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다. 시는 푸른색과 흰색의 대비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좌절을 동시에 보여준다. 또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개념인 바다와 나비를 제시한다. 바다는 식민지 시대의 잔혹하고 섬뜩한 현실이나 당시의 새로운 문명을 나타내는 반면, 나비는 외부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연약한 지식인을 상징한다. 이 시는 당시 한국 문단에서 새로운 시도였던 회화적인 모더니즘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6. 기념 및 유산
김기림의 문학적 업적과 삶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1990년 6월 9일에는 동료 시인 김광균, 구상 등이 주도하여 김기림의 모교인 보성고등학교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2018년 11월 30일에는 그가 유학했던 도호쿠 대학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7. 주요 저서
김기림은 시인으로서 여러 시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비평가이자 이론가로서 다양한 저서를 출판하며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7.1. 시집
- "기상도"(창문사, 1936)
- "태양의 풍속"(학예사, 1939)
- "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46)
- "새노래"(아문각, 1948)
7.2. 비평 및 이론서
- "문학개론"(신문화연구소, 1946)
- "시론"(백양당, 1947)
- "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 - 수필집
- "과학개론"(존 아서 톰슨 저, 을유문화사, 1948) - 번역서
- "학원과 정치"(수도문화사, 1950) - 유진호, 최호진, 이건호 공저 시론집
- "시의 이해"(을유문화사, 1950) - 시 연구서
- "문장론신강"(민중서관, 1950) - 이론서
7.3. 대표 시
김기림의 대표적인 개별 시로는 다음 작품들이 있다.
-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1930)
- "바다와 나비"(1939)
- "길"
- "유리창"
8. 외부 링크
- [https://library.ltikorea.or.kr/writer/ Digital Library of Korean Literature]
- [https://www.ltikorea.or.kr/en/main.do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of Korea]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A%B8%B0%EA%B8%B0%EB%A6%BC&ridx=0&tot=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