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공예왕후 임씨는 고려 인종의 왕후로서, 그의 총애를 받으며 세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삶은 출생부터 사망까지 여러 특별한 사건들과 왕실 내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1.1. 출생 및 배경
공예왕후 임씨는 1109년 10월 2일(음력 9월 7일)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중서령을 지낸 임원후의 맏딸이며, 어머니는 부평 이씨 가문 출신으로 임원후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공예왕후에게는 다섯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 여동생은 훗날 장선왕후의 어머니가 되어 공예왕후에게는 외조카이자 며느리가 되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녀의 탄생에 얽힌 특별한 설화가 전해진다. 공예왕후가 태어나던 날 밤, 그녀의 외조부인 문하시중 이위가 황색의 큰 깃발 꼬리가 선경전(善慶殿)을 감싸고 도는 꿈을 꾸었다. 이에 이위는 자신의 외손녀가 "선경전에서 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1.2. 유년 시절 및 혼인
공예왕후는 15세가 되던 1123년,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와 혼인을 약속했다. 그러나 김지효가 신부집 문에 이르자 갑자기 병이 발작하여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에 임원후는 혼인을 물리고 점쟁이에게 점을 쳐 보았는데, 점쟁이는 그녀가 왕후가 될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 소문은 당시 고려의 권력자였던 이자겸의 귀에 들어갔다. 이자겸은 이미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후로 삼아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임원후의 딸이 왕후가 된다는 예언은 자신의 가문인 인주 이씨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여긴 이자겸은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강등시켜 버렸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자겸의 두 딸은 왕후의 자리에서 폐출되었다. 같은 해 음력 6월,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는 절차가 진행되었고, 예언대로 임씨 부인이 왕후로 선택되어 궁에 입궐하게 되었다. 그녀는 1126년 6월 20일, 18세의 나이로 인종과 정식으로 혼인하여 고려의 새로운 왕후가 되었다.
1.3. 궁정 생활 및 왕태후 시절
혼인 후 공예왕후는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혼인 이듬해인 1127년 4월 11일, 그녀는 인종의 맏아들인 왕현(훗날 의종)을 낳았다. 1129년 5월 10일, 인종은 그녀에게 연덕궁(延德宮) 내의 후덕전(厚德殿)에 있는 선경부(善慶府)를 궁으로 하사하고, 그녀를 연덕궁주(延德宮主)로 봉했다.
이후 그녀는 1131년 둘째 아들 왕경(훗날 대령후), 1132년 셋째 아들 왕호(훗날 명종), 1144년 넷째 아들 왕탁(훗날 신종)을 낳았다. 1148년에는 인종의 다섯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왕충희를 낳았다. 또한 다섯 명의 딸도 두었다. 인종은 공예왕후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의 본향인 장흥부를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시켰고, 그녀의 어머니 이씨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1146년 4월 10일 인종이 붕어하자, 맏아들 왕현이 왕위에 올라 의종이 되었다. 이에 공예왕후는 왕태후가 되어 후덕전에서 거처했다. 의종 또한 선경부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의종은 자주 술에 취해 무관들을 경시하는 행동을 보였고, 이는 무신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공예왕후는 맏아들 의종의 자질에 회의적이었고, 둘째 아들 대령후를 더 총애하여 그를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 이로 인해 그녀와 의종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151년에는 대령후와 공모한 세력에 의한 반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공예왕후는 총애하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종에게 대령후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설득했으나, 의종은 과거의 일로 실망감을 표했다. 이에 공예왕후는 맨발로 궁궐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맹세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쳤고, 의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170년 가을, 지속적인 차별에 분노한 무관들의 무신정변이 발발하여 문신들이 살해당하고 의종은 폐위되었으며, 셋째 아들 왕호가 명종으로 즉위하였다.
공예왕후는 둘째 아들 대령후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랐으나, 정중부는 대령후가 훗날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암살했다. 정중부는 대신 무력한 왕호(명종)를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는 당시 실권이 무신들에게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4. 말년 및 죽음
명종의 재위 기간 중, 공예왕후는 병을 얻었다. 1182년(명종 12년) 그녀가 총애하던 다섯째 아들 왕충희가 사망하자, 공예왕후는 왕충희가 무신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세가 악화되었다.
넷째 아들 왕탁(평량공)이 치질로 고통받아 오랫동안 어머니를 문안하지 못하자, 공예왕후는 이 아들 또한 맏형 왕충희와 같은 신의 노여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근심했다. 일 년 후 왕탁은 병이 나아 명종의 명으로 어머니를 찾아 문안하고 위로했다.
1183년 12월 2일(음력 11월 22일), 공예왕후는 74세의 나이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녀는 사후에 공예왕후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순릉(純陵)에 안장되었다. 1184년, 금나라의 금 세종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공예왕후의 죽음에 대한 조의를 표했다.
2. 가족 관계
공예왕후 임씨는 고려 인종의 정비로서, 인종과의 사이에서 5남 5녀를 두었다. 그녀의 자녀들은 고려 왕실의 주요 인물들이 되었으며, 특히 세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2.1. 부모
구분 | 이름 | 본관 | 생몰년 | 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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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임원후 (任元厚) | 장흥 임씨 | 1089년 ~ 1156년 | 임의 (任懿) 낙랑군부인 이씨 (樂浪郡夫人 李氏) |
모 | 진한국대부인 이씨 (辰韓國大夫人 李氏) | 부평 이씨 | 1090년 ~ 1138년 | 이위 (李瑋) |
2.2. 배우자
구분 | 이름 | 생몰년 | 부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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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인종 공효대왕 (仁宗 恭孝大王) | 1109년 10월 29일 (음력 10월 4일) | 1146년 4월 10일 (음력 2월 28일) | 예종 (睿宗) |
2.3. 자녀
구분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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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의종 (懿宗) | 1127년 ~ 1173년 | 장경왕후 김씨 | 제18대 국왕 |
대령후 (大寧侯) 왕경 (王暻) | 1130년 ~ 1167년? | 대령후 부인 | 정중부에 의해 살해됨 | |
명종 (明宗) 왕호 (王晧) | 1131년 ~ 1202년 | 의정왕후 김씨 | 제19대 국왕 | |
원경국사 (元敬國師) 왕충희 (王冲曦) | ? ~ 1183년 | 미혼 | 출가하여 승려가 됨 | |
신종 (神宗) 왕탁 (王晫) | 1144년 ~ 1204년 | 선정왕후 김씨 | 제20대 국왕 | |
딸 | 덕녕궁주 (德寧宮主) | 1125년 ~ 1192년 | 강양공 왕감 (王瑊) | |
승경궁주 (承慶宮주) | 1126년 ~ 1158년 | 공화후 왕영 (王瑛) | ||
창락궁주 (昌樂宮主) | 1130년 ~ 1216년 | 신안후 왕성 (王珹) | 고려 고종의 외조모 | |
영화궁주 (永和宮主) | 1141년 ~ 1208년 | 소성후 왕공 (王珙) | ||
개성 왕씨 부부인 (開城 王氏 府夫人) | 1146년 ~ ? | 김시흥 (金時興) | 김녕 김씨 |
2.4. 손자녀
인종과 공예왕후의 손자녀들은 사촌 간 혼인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나타나는 족내혼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 의종의 아들 효령태자는 덕녕궁주의 딸과 혼인하였다.
- 의종의 셋째 딸인 화순궁주는 승경궁주의 아들 광릉공 왕면과 혼인하였다.
- 명종의 아들 강종은 창락궁주의 딸인 원덕왕후와 혼인하여 고종을 낳았다.
- 명종의 맏딸인 연희궁주는 창락궁주의 아들 영인후 왕진과 혼인하여 성평왕후를 낳았는데, 성평왕후는 신종의 아들인 희종의 왕비이다.
- 명종의 둘째 딸인 수안궁주는 영화궁주의 아들 창화후 왕우와 혼인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은 희종의 첫 번째 태자비였으나 최충수에 의해 폐위되었다.
의종 | 대령후 | 명종 | 신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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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태자 孝靈太子 | 경덕궁주 敬德宮主 | 미상 | 강종 康宗 | 연희궁주 延禧宮主 | 희종 熙宗 | 효회공주 孝懷公主 |
승경궁주 | 덕녕궁주 | 창락궁주 | 영화궁주 | |||
광릉공 왕면 廣陵公 王沔 | 왕씨 王氏 | 효령태자비 왕씨 孝靈太子妃 王氏 | 계성후 왕원 桂城侯 王沅 | 원덕왕후 元德王后 | 창화후 왕우 昌化侯 王祐 | 이간의 처(妻) |
3. 영향력
공예왕후는 세 명의 아들을 왕위에 올린 어머니로서 고려의 왕위 계승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왕위 계승에 대한 영향
공예왕후는 의종, 명종, 신종 등 세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 특히 그녀는 맏아들 의종의 자질에 불만을 품고 둘째 아들 대령후를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 이러한 그녀의 의도는 의종과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대령후를 둘러싼 정변 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비록 대령후가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훗날 무신정변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명종의 즉위 이후에도 왕태후로서 왕실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들의 삶에 깊이 관여했다.
4. 대중 문화 속 등장
공예왕후 임씨의 삶과 왕실 내에서의 역할은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다루어졌다.
- KBS TV 드라마 《무인시대》(2003년~2004년)에서는 배우 김윤경이 공예왕후 역을 연기했다.
5. 관련 항목
- 임원후
- 대령후
- 이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