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슈텔러는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뉘른베르크 근처 빈트스하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소양을 쌓았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슈텔러는 1709년 3월 10일, 루터교 교회 성가대 지휘자(칸토르)인 요한 야코프 슈텔러(Johann Jakob Stöhler)의 아들로 태어났다. 1715년 이후, 그는 러시아어 발음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성을 슈텔러(Steller)로 변경했다.
1.2. 교육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할레 대학교에서 신학, 철학,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을 폭넓게 수학했다. 특히 그는 자연과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이어갔다.
2. 경력 및 탐험
슈텔러의 직업적 여정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합류에서 시작하여 비투스 베링과의 기념비적인 탐험, 조난과 생존, 그리고 캄차카 반도 탐험으로 이어진다.
2.1.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합류
슈텔러는 1734년 11월, 부상병을 싣고 귀환하는 병사 수송선의 의사 자격으로 러시아에 도착했다. 그는 제국 과학 아카데미에서 자연주의자 다니엘 고틀리프 메세르슈미트를 만났다. 메세르슈미트가 사망한 지 2년 후, 슈텔러는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메세르슈미트가 시베리아 여행 중 작성했지만 아카데미에 제출되지 않았던 기록들을 입수하게 되었다.
2.2. 제2차 캄차카 탐험
슈텔러는 1733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비투스 베링의 제2차 캄차카 탐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이 탐험에 자원하여 받아들여졌고, 1738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그의 아내는 모스크바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1739년 1월 예니세이스크에서 요한 게오르크 그멜린을 만난 슈텔러는 그멜린으로부터 캄차카 탐험의 자리를 제안받았고, 이를 수락했다. 마침내 1740년 3월, 베링의 탐험선인 성 베드로호와 성 바울호가 거의 완성될 무렵 오호츠크에서 주 탐험대에 합류했다.
2.2.1. 알래스카 항해
1740년 9월, 탐험대는 베링과 함께 캄차카 반도 남쪽 끝을 돌아 아바차만까지 항해했다. 슈텔러는 캄차카 동쪽 해안에 상륙하여 볼셰레치예에서 겨울을 보냈고, 그곳에서 지역 학교 설립을 돕고 캄차카 탐험을 시작했다. 베링이 그를 아메리카와 두 대륙 사이의 해협을 찾는 항해에 과학자이자 의사로 합류하라고 소환했을 때, 슈텔러는 개썰매를 타고 반도를 횡단했다.
베링의 성 베드로호가 폭풍우로 자매선인 성 바울호와 분리된 후, 베링은 곧 육지를 찾을 것이라 예상하며 동쪽으로 계속 항해했다. 슈텔러는 해류, 부유물, 야생동물을 관찰하며 북동쪽으로 항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당한 시간을 허비한 후, 탐험대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741년 7월 20일 월요일 알래스카의 카약섬에 상륙했다. 베링은 신선한 물을 보급할 만큼만 머물기를 원했지만, 슈텔러는 베링 선장을 설득하여 육지 탐험을 위해 10시간을 더 할애받았다. 그는 10년간의 준비 끝에 단 10시간의 조사를 허락받았다는 점을 기록했다.
승무원들은 본토에 발을 딛지 못했지만, 게오르크 슈텔러는 알래스토 땅을 밟은 최초의 비원주민 중 한 명으로 기록된다. 탐험대는 고집과 "둔한 두려움" 때문에 본토에 상륙하지 못하고, 본토가 어떻게 생겼을지에 대한 스케치만을 남기고 떠났다. 이 놀라운 여정에서 슈텔러는 스텔러어치를 포함하여 여러 북아메리카 동식물을 최초로 기술한 유럽 자연주의자가 되었다.
2.2.2. 조난과 생존
슈텔러는 자신이 채집한 잎과 열매로 승무원들의 증가하는 괴혈병 유행을 치료하려 했지만, 장교들은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 슈텔러와 그의 조수는 괴혈병에 걸리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귀환 항해 중, 단 12명의 승무원만이 움직일 수 있고 돛대가 빠르게 손상되는 상황에서 탐험대는 나중에 베링섬으로 알려진 곳에서 난파되었다. 항해 중 거의 절반의 승무원이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슈텔러는 베링을 포함한 생존자들을 간호했지만, 베링은 결국 사망했다. 남은 사람들은 식량과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야영을 했고, 북극여우들의 잦은 습격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승무원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해달, 바다사자, 물개, 바다소를 사냥했다.
1742년 초, 승무원들은 성 베드로호에서 건져낸 재료를 사용하여 아바차만으로 돌아갈 새 선박을 건조하고 이를 베링호라고 불렀다.
2.3. 캄차카 반도 및 코만도르스키 제도 탐험
슈텔러는 베링섬에서 귀환한 후 다음 2년 동안 캄차카 반도를 탐험하며 지역의 동식물과 지형을 상세히 연구했다. 그는 질투심 많은 경쟁자에 의해 이텔멘족 반란군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는 거짓 고발을 당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되었다. 한때 그는 체포되어 심문을 위해 이르쿠츠크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풀려나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지만, 도중에 열병에 걸려 튜멘에서 사망했다.
3. 과학적 기여
슈텔러는 북태평양 지역의 동식물을 탐사하고 기록하며 수많은 새로운 종들을 발견하고 상세히 기술했다. 그의 연구는 이 지역의 생물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크게 증진시켰다.
3.1. 동식물 기록 및 분류
슈텔러는 탐험 중 발견한 다양한 동식물 종들을 기록하고 분류했다. 그는 이들이 서식하는 환경에 대한 상세한 관찰 기록을 남겼다.
3.1.1. 해양 포유류
슈텔러는 탐험 중 6종의 조류와 포유류를 발견했는데, 이 중 2종은 멸종되었고 3종은 취약종 또는 준위협종으로 분류된다. 특히 스텔러바다소는 슈텔러가 발견하고 명명한 이후 불과 27년 만에 멸종되었다. 이 거대한 바다소는 빙하기 동안 북태평양 전역에 서식했지만, 슈텔러가 발견했을 당시에는 코만도르스키 제도 주변의 얕은 다시마 숲에만 남아있던 잔존 개체군이었다. 슈텔러의 보고서 이후 러시아 선원들의 남획으로 인해 빠르게 멸종되었다.
슈텔러는 또한 큰바다사자(스텔러바다사자), 해달, 북방물개를 포함한 해양 포유류에 대한 상세한 행동 및 해부학적 관찰 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한 해양 미확인 동물인 스텔러바다원숭이를 유일하게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3.1.2. 조류
슈텔러가 발견하고 기술한 조류 중에는 스텔러바다수리와 쇠솜털오리(스텔러오리), 그리고 멸종된 안경가마우지가 있다. 스텔러어치는 슈텔러의 이름을 딴 몇 안 되는 종 중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하지 않은 종이다. 슈텔러는 이 새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이 어치가 아메리카 큰어치와 친척 관계임을 추론했는데, 이는 알래스카가 실제로 북아메리카의 일부라는 증거로 여겨졌다.
3.1.3. 기타 종
슈텔러는 스텔러가자미 (Myoxocephalus stelleri), 말군부 (Cryptochiton stelleri), 흰쑥 (Artemisia stelleriana)과 같은 다양한 동식물 종들을 발견하고 기술했다. 또한 피뿌리풀속 (Stellera L., 팥꽃나무과)과 스텔러라이트 (비석 그룹의 광물)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3.2. 민족지학적 관찰
슈텔러는 탐험 중 만난 이텔멘족과 같은 원주민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문화적 관찰 내용을 남겼다. 그의 민족지학적 연구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원주민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4. 개인 생활
슈텔러는 1736년 자연주의자 다니엘 고틀리프 메세르슈미트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의 결혼 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결혼을 통해 그는 메세르슈미트의 시베리아 탐험 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5. 사망
슈텔러는 1746년 11월 14일, 러시아 제국 시베리아의 튜멘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도중이었으며, 사망 당시 37세였다. 그는 이전에 질투심 많은 경쟁자에 의해 캄차달족 반란군을 감옥에서 풀어주었다는 거짓 고발을 당해 체포되었고, 심문을 위해 이르쿠츠크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였다.
6. 유산 및 평가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의 업적은 과학 탐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름은 수많은 종과 지리적 명칭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가져온 일부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6.1. 슈텔러의 이름이 붙은 종과 장소
슈텔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동물, 식물, 광물 및 지리적 명칭은 그의 과학적 기여를 기리는 중요한 유산이다.
- 동물:
- 쇠솜털오리 (Polysticta stelleri)
- 스텔러어치 (Cyanocitta stelleri)
- 스텔러바다수리 (Haliaeetus pelagicus)
- 검은바다제비 (Steller's albatross, Phoebastria albatrus)
- 스텔러바다소 (Hydrodamalis gigas)
- 큰바다사자 (Steller sea lion, Eumetopias jubatus)
- 스텔러가자미 (Myoxocephalus stelleri)
- 말군부 (Cryptochiton stelleri)
- 식물:
- 흰쑥 (Artemisia stelleriana)
- 피뿌리풀속 (Stellera L., 팥꽃나무과)
- Restella Pobed. (팥꽃나무과)
- 광물:
- 스텔러라이트 (Stellerite, 비석의 일종)
- 장소:
-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스텔러 중등학교 (Steller Secondary School)
- 스텔러산 (Mount Steller), q=58.429722, -154.391389|position=right
6.2. 과학 탐험에 대한 영향
슈텔러의 탐험 일지와 기록은 피터 시몬 팔라스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이는 제임스 쿡 선장을 포함한 후대 북태평양 탐험가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의 상세한 관찰과 기록은 북태평양의 자연사 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의 성 베드로호 항해 일지는 스탠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Journal of a Voyage with Bering, 1741-1742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제2차 캄차카 탐험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6.3. 역사적 평가 및 비판
슈텔러의 과학적 업적은 높이 평가받지만, 그의 연구 결과가 특정 종의 멸종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가 발견하고 보고한 스텔러바다소와 안경가마우지는 그의 보고서가 서구 세계에 알려진 후 불과 수십 년 만에 남획으로 인해 멸종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저작은 이 멸종된 종들의 생태를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는 아이러니를 남겼다. 이러한 사례는 과학적 발견이 생태계에 미칠 수 있는 의도치 않은 부정적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있다.
6.4. 문화적 영향
슈텔러의 삶과 업적은 여러 문화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더 그레이트 노스의 "Xmas With the Skanks Adventure" 에피소드(시즌 3 에피소드 10)에서 문 토빈은 자신이 찾은 순록에게 동물학자의 이름을 따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T. 에드워드 박의 그래픽 노블 Wild Man - vol. 1: Island of Memory: The Natural History of Georg Wilhelm Steller (2013)은 슈텔러의 북부 여행과 그의 사회적 연결 및 맥락을 이야기한다. W. G. 제발트의 장편 시 After Nature (2002)의 두 번째 부분과 제임스 A. 미치너의 소설 알래스카에서도 슈텔러와 베링과의 시간이 다소 허구화되어 다루어진다.
7. 저작
슈텔러는 생전에 여러 중요한 저작물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에도 탐험 일지와 기록이 출판되어 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7.1. 주요 저작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물 중 하나는 De Bestiis Marinis (바다의 짐승들에 관하여)로, 1751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북방물개, 해달, 큰바다사자, 스텔러바다소, 쇠솜털오리, 안경가마우지를 포함한 베링섬의 동물상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753년에는 Georg Wilhelm Stellers ausführliche Beschreibung von sonderbaren Meerthieren, mit Erläuterungen und Nöthigen Kupfern versehen라는 제목의 독일어판이 출판되었다.


7.2. 탐험 일지
슈텔러는 1741년부터 1742년까지 비투스 베링과의 항해에 대한 상세한 탐험 일지를 남겼다. 이 일지는 그의 사후 피터 시몬 팔라스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Journal of a Voyage with Bering, 1741-1742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일지에는 당시 승무원들의 태도에 대한 신랄한 표현이 많았는데, 이는 그가 직접 교정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8. 관련 항목
- 괴혈병
- 토드 (큰바다사자의 다른 이름)
- 오오와시
- 스텔러카케스
- 코케와타가모
- 스텔러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