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흠성황후 주씨는 1052년에 개봉부 祥符縣상부현중국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래 성씨는 최씨(崔氏)였으며, 친부인 최걸(崔傑)은 그녀가 어릴 때 일찍 사망하였다. 이후 어머니 이씨(李氏)는 주사안(朱士안)에게 재가하였고, 주씨는 계부의 성을 따라 주씨로 성을 바꾸었다. 주사안의 가세가 기울자 주씨는 임정화(任廷和)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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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궁정 생활 및 승진
주씨는 16세가 되던 해인 1068년(희녕 원년)에 궁에 입궁하여 御侍어시중국어(황제의 측녀)가 되었다. 8년간 궁녀로 지내던 중 신종의 눈에 띄어 1075년(희녕 8년)에 재인(才人)으로 책봉되었다. 이듬해인 1076년에는 첩여(婕妤)로 승진하였고, 1079년(원풍 2년)에는 정2품 소용(昭容)으로 진봉되었다. 1082년(원풍 5년)에는 현비(賢妃)로, 1084년(원풍 7년)에는 덕비(德妃)로 거듭 승진하였다. 신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이 중에는 훗날 황제가 되는 연안군왕(延안郡王) 조용(趙傭, 철종)과 초왕(楚王) 조사(趙似), 그리고 서국공주(徐國公主)가 있었다.
3. 철종 재위 시기 역할
1085년(원풍 8년), 신종이 위독해지자 황태자가 책봉되었고, 신종의 여섯째 아들인 연안군왕 조용이 황태자로 책봉되어 조후(趙煦)로 개명하였다. 신종이 붕어한 후 조후가 즉위하여 철종이 되었다. 철종은 즉위 직후 조모인 고태후를 태황태후로, 적모인 향황후를 황태후로 존숭하였고, 생모인 주덕비는 황태비(皇태妃)로 존숭되었다. 이는 당시 신종의 정후인 향황후와 시어머니인 선인태황태후가 모두 황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088년(원우 3년), 선인태황태후는 《춘추》의 '모이자귀(母以子貴, 어머니는 아들로 인해 귀해진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조칙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황태비 주씨가 궁중을 출입할 때 사용하는 수레의 덮개나 의복, 전위(前衛) 등은 황후의 의례에 맞게 격상되었다. 1094년부터 1098년 사이 소성(紹聖) 연간에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생모인 주태비의 대우를 더욱 높였다. 그녀의 거처는 성서궁(聖瑞宮)으로 명명되었고, 그녀의 가마는 선덕동문(宣德東門)을 통해 출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백관들은 그녀를 '전하(殿下)'라고 칭하게 되었다. 또한 철종은 생부 최걸에게 태사(太師)를, 계부 주사안에게 태보(太保)를, 양부 임정화에게도 태보의 직책을 추서하여 세 부계 모두에게 관작을 내렸다.
4. 계승 위기 및 휘종 즉위
1100년(원부 3년), 철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황위 계승에 위기가 발생했다. 재상 장돈은 철종의 동복동생이자 주태후의 둘째 아들인 초왕 조사(趙似)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황태후 상씨는 주태후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염려하여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대신들을 규합한 상태후는 장돈의 주장을 물리치고, 이미 생모가 사망한 신종의 11남 단왕(端王) 조길(趙佶)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휘종이다. 휘종은 즉위 후 생모인 귀의 진씨(陳氏)를 황태비로 존숭하면서, 주태비의 칭호를 성서황태비(聖瑞皇태妃)로 변경하여 구분하였다.
5. 사망 및 사후 추존
1102년(숭녕 원년) 3월 6일(舊曆음력중국어 2월 16일), 성서황태비 주씨는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사망 직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흠성(欽成)'이라는 시호가 올려졌고, 영유릉(永裕陵)에 부장되었다. 6월에는 그녀의 신주(神主)가 태묘(太廟)에 부묘(祔廟)되었다.
6. 가족 관계
흠성황후 주씨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부모
- 친부: 숭국공(崇國公) 최걸(崔傑)
- 계부: 주사안(朱士안)
- 양부: 강국공(康國公) 임정화(任廷和)
- 모: 초국태부인(楚國태夫人) 이씨(李氏)
- 남편
- 신종(神宗, 1048년 ~ 1085년): 북송의 제6대 황제
- 자녀
구분 이름 (생몰년) 주요 정보 황자 철종(哲宗) 조후(趙煦) (1077년 ~ 1100년) 북송의 제7대 황제, 신종의 여섯째 아들. 황자 초왕(楚王) 조사(趙似) (1083년 ~ 1106년) 신종의 13남. 원풍 6년에 태어나 원풍 7년에 화국공(和國公)에 봉해졌다. 철종 즉위 후 진녕군왕(普寧郡王)으로 개봉되었고, 소성 5년(1098년)에는 간왕(簡王)으로 개봉되었다. 철종 붕어 시 재상 장돈에 의해 황위 계승자로 추천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숭녕 5년(1106년)에 한왕(韓王)으로 봉해졌으며, 사망 후 초왕(楚王)으로 추봉되고 시호는 영헌(榮憲)이 내려져 초영헌왕(楚榮憲王)이라 불렸다. 황녀 서국공주(徐國公主) (1085년 ~ 1115년) 신종의 열째 딸. 신종 사후 몇 개월 뒤에 태어났다. 초기에는 경국공주(慶國公主)로 봉해졌다가 익국(益國), 기국(冀國), 촉국(蜀國) 삼국장공주(三國長公主)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국장공주(徐國長公主)가 되었다. 숭녕 3년(1104년)에 반미의 증손자인 반의(潘意)에게 하가하였다. 정화 3년(1113년)에 휘종의 제도 개편으로 유혜제희(柔惠帝姬)로 개봉되었으며, 사망 후 시호는 현정장제희(賢靜長帝姬)이다.
7. 칭호
흠성황후 주씨에게 생애 동안 및 사후에 부여된 칭호는 다음과 같다.
재위 기간 | 칭호 | 시기 |
---|---|---|
인종 재위 기간 (1022년 ~ 1063년) | 주씨(朱氏) | |
신종 재위 기간 (1067년 ~ 1085년) | 어시(御侍) | 1068년부터 |
재인(才人) | 1075년부터 | |
첩여(婕妤) | 1076년부터 | |
소용(昭容) | 1079년부터 | |
현비(賢妃) | 1082년부터 | |
덕비(德妃) | 1084년부터 | |
철종 재위 기간 (1085년 ~ 1100년) | 성서황태비(聖瑞皇태妃) | 1085년부터 |
휘종 재위 기간 (1100년 ~ 1126년) | 흠성황후(欽成皇后) | 1102년부터 (사후 추존) |
8. 유산 및 평가
흠성황후 주씨는 북송 시대 황실의 중요한 인물로, 철종의 생모로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녀는 신종의 후궁으로서 여러 직위를 거쳐 덕비에 이르렀고, 아들 철종이 즉위하면서 황태비로 존숭되었다. 특히 철종 재위 시기, 선인태황태후의 '모이자귀' 원칙에 따라 황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며, 이후 철종의 친정 하에 생부, 계부, 양부 모두가 높은 관직에 추서되는 등 그녀의 지위는 크게 격상되었다.
1100년 철종이 후사 없이 붕어했을 때, 그녀의 둘째 아들 조사(趙似)가 황위 계승 후보로 거론되면서 잠시나마 황실의 계승 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비록 황태후 상씨의 반대로 조사는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이는 주씨의 아들들이 황실 내에서 지녔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후 흠성황후로 추존되고 영유릉에 안장되었으며 태묘에 부묘됨으로써, 그녀는 북송 황실의 정식 황후로서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