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및 배경
훌리안 루에테는 선수이자 감독, 심판, 그리고 행정가로서 스페인 축구계에 평생에 걸쳐 기여했다.
1.1. 출생과 유년
훌리안 루에테는 1887년 1월 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3월 15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1.2. 축구와의 첫 인연
루에테는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당시 마드리드 FC로 불리던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이자 이사회 구성원, 그리고 비서로 활동하며 축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뛰었으나,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레알 마드리드가 4회 연속으로 우승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리저브 팀 주장으로 활동했다.
2. 주요 활동 및 경력
훌리안 루에테는 선수 생활을 시작으로 구단 회장, 심판, 감독, 그리고 축구 행정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축구의 여러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1. 선수 경력
루에테는 1904년부터 1910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이후 1910년에는 아틀레틱 마드리드에서 뛰었으며, 아틀레틱 빌바오에서도 활약하여 1909년과 1911년에 코파 델 레이 경기에 출전했다. 특히 1910-11 시즌에는 아틀레틱 빌바오 소속으로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2.2. 구단 회장 활동
1912년, 루에테는 아틀레틱 마드리드 (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처음 선출되어 1919년까지 직책을 수행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913년 캄포 데 오도넬이라는 새로운 구장 건설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 이전을 감독한 것이었다.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2년 후인 1921년, 그는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어 1923년까지 재임했다. 이 두 번째 임기 동안 클럽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더 현대적인 새 경기장인 에스타디오 메트로폴리타노 건설에 참여했으며, 모기업이었던 아틀레틱 빌바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여 성공시켰다. 또한 1920-21 시즌에는 처음으로 중부 지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코파 델 레이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자격을 얻었다.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우니온을 예상치 못하게 압도적으로 꺾었으나, 결승전에서는 빌바오의 '사촌 클럽'에게 패배했다.
2.3. 심판 경력
루에테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관계를 넘어 스페인 축구 심판 분야에서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914년 4월 15일, 그는 스페인 최초의 심판 협회인 중앙 지역 연맹 심판단 (College of Referees of the Central Regional Federation)을 설립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루에테는 마누엘 프라스트와 호세 마누엘 킨델란과 함께 이 심판단의 첫 구성원이었으며, 초대 비서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몇 주 후인 5월 19일 비서직에서 사임하고 1군 심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심판으로서 그는 스페인 지역 대표팀 간의 공식 축구 대회인 아스투리아스 공컵의 첫 경기를 주관했다. 1915년 5월 10일 캄포 데 오도넬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중부와 카탈루냐 팀이 맞붙었으며, 카탈루냐가 2대1로 승리했다.
그는 또한 1917년 아스투리아스 공컵의 결승전 심판을 맡았는데, 이 경기는 마드리드와 카탈루냐 간의 대결로 2대0으로 마드리드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에는 코너킥으로 직접 득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경기 70분에 카탈루냐 팀의 득점이 이 규칙에 따라 취소되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루에테는 카탈루냐 선수 한 명을 퇴장시켰고, 이에 카탈루냐 팀은 항의의 의미로 경기를 중단하고 경기장을 떠났다.
2.4. 감독 경력
루에테는 감독으로도 활동하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CD 카스테욘을 지휘했다. 그는 또한 CD 카스테욘의 기술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지휘한 4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은 1922년과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두 차례 역임했다.
2.5. 축구 행정가로서의 기타 역할
훌리안 루에테는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의 이사로도 활동하며 스페인 축구 행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다재다능한 역할은 스페인 축구의 초기 현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3. 사망
훌리안 루에테는 1939년 3월 1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4. 유산 및 평가
훌리안 루에테는 스페인 축구의 초기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4.1. 스페인 축구에 대한 기여
그는 선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단 경영, 심판 활동, 감독직, 그리고 축구 행정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축구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회장으로서 경기장 건설을 주도하고 클럽의 독립을 추진하여 현재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은 그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또한 스페인 최초의 심판 협회 설립에 참여하고 초대 비서를 맡는 등 스페인 축구의 시스템과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활동은 스페인 축구의 전문화와 제도화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성공적인 기록 또한 그의 역량을 보여준다.
4.2. 비판 및 논란
훌리안 루에테의 심판 경력 중 가장 큰 논란은 1917년 아스투리아스 공컵 결승전에서 불거졌다. 이 경기에서 그가 내린 판정(코너킥 직접 득점 불인정 및 선수 퇴장)은 카탈루냐 팀의 강력한 항의와 경기 중단으로 이어질 정도로 당시 축구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그의 심판 경력에 있어 비판적인 시각을 불러일으킨 주요 지점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