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渕 正信후치 마사노부일본어는 1954년 1월 14일에 태어난 일본의 프로레슬러로, 현재 전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이며 이사 및 공동 부킹 책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1974년 데뷔 이래 줄곧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만 활동하며 단체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보여주었고, 이는 특히 위기 상황 속에서 단체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309일이라는 최장기 세계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 통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09년 프리랜서로 전환했으나 2013년에 선수 및 이사로서 다시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정식 계약을 맺으며, 이 단체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2024년 현재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역 레슬러로서 꾸준히 활동하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2. 유년기와 배경
후치 마사노부는 1954년 1월 14일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도바타구에서 태어났다. 혈액형은 B형이다. 규슈 국제대학 부속 고등학교 (구 야하타 대학 부속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아마추어 레슬링과 육상 경기를 통해 몸을 단련했다. 이후 야하타 대학 (현 규슈 국제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했다. 그는 일본 프로레슬링 입문을 목표로 도쿄로 상경했지만, 기차 안에서 읽은 규슈 스포츠를 통해 일본 프로레슬링의 해체를 알게 되면서 일시적으로 규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자이언트 바바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훗날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스타로서의 격이 다르다고 언급하며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3. 프로레슬링 경력
후치 마사노부의 데뷔부터 현재 활동에 이르기까지 프로레슬러로서의 방대한 경력은 그의 끊임없는 헌신과 단체에 대한 충성심을 잘 보여준다. 그는 주니어 헤비급 스타로 부상했으며, 베테랑으로서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기둥 역할을 해왔다.
3.1. 데뷔와 초기 경력
후치 마사노부는 아마추어 레슬링 경력을 바탕으로 1974년 4월 10일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문했다. 입문한 지 불과 12일 만인 1974년 8월 22일 도쿠시마현 미요시시에서 아츠시 오니타를 상대로 프로레슬링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몇 년 동안 후치와 오니타는 개막전에서 태그팀과 대립을 번갈아 가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는 오니타, 소노다 하루와 함께 '젊은 세 마리 까마귀' 중 한 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3.2. 해외 원정과 북미 활동
1980년 후치 마사노부는 해외 수련을 위해 출국했으며, 푸에르토리코에서 오니타와 합류했다. 1981년 3월부터는 'Masa Fuchi영어'라는 링네임으로 테네시주 멤피스의 CWA에서 활동했다. 그는 토조 야마모토를 매니저로 두고 오니타와 태그팀을 이뤄 제리 롤러와 빌 던디, 그리고 록 앤 롤 익스프레스 (리키 모턴 & 로버트 깁슨)와 AWA 남부 태그팀 챔피언십을 놓고 경쟁하며 총 3차례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그의 출신지는 오니타의 출신지인 나가사키시에 맞춰 히로시마시 출신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81년 10월부터는 NWA의 플로리다 지역 (에디 그레이엄이 주최하는 CWF)으로 이동하여 오니타와 함께 잭 브리스코 & 제리 브리스코 형제, 부치 리드 & 스위트 브라운 슈가 등과 경기를 펼쳤다. 플로리다 체류 중 후치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소속 레슬러 중 드물게 칼 고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오니타가 일본으로 귀국한 후, 후치는 푸에르토리코를 거쳐 1982년 11월부터 단신으로 미드-아틀랜틱 지역 (MACW)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릭 플레어, 리키 스팀보트, 로디 파이퍼, 와후 맥다니엘, 밥 오턴 주니어, 마이크 로톤다 등 당시 최고의 스타들에게 지는 역할인 조버를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1983년 8월, 후치는 귀국하여 테리 펑크의 은퇴 경기가 열린 8월 31일 구라마에 국기관 대회에서 차보 게레로 시니어가 보유한 NWA 인터내셔널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에 도전했다.
3.3. 주니어 헤비급 스타로의 부상
아츠시 오니타의 1985년 은퇴와 타이거 마스크 2세의 1986년 헤비급 전향 이후, 후치 마사노부는 주니어 헤비급의 최고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1987년 코바야시 쿠니아키로부터 세계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을 처음으로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총 5차례 이 타이틀을 차지하며 11년 이상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으로서 군림했다. 특히 그의 세 번째 통치 기간은 4년 (1989년 ~ 1993년)에 걸쳐 무려 1,309일 동안 이어졌는데, 이는 역대 최장기 통치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 전일본 프로레슬링이 외부 경쟁에 비교적 폐쇄적이었던 점도 그의 장기 집권에 크게 작용했다. 10대 세계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시절에는 14회 방어라는 기록을 세웠으나, 이는 훗날 카즈 하야시에 의해 경신되었다.
3.4. 베테랑 역할과 전일본에 대한 충성심
1996년 마지막으로 챔피언십을 잃은 후, 후치는 주로 나가 하루카 에이겐과 팀을 이뤄 자이언트 바바와 러셔 키무라에 맞서는 '레전드' 경기에 출전했다. 이 시기 그는 악역상회 (프로레슬링)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바바의 패밀리 군단과 대립하기도 했다. 또한, 1989년 1월 28일 점보 츠루타와 야츠 요시아키 팀의 일원으로 텐류 겐이치로, 카와다 토시아키, 사무손 후유키 팀과의 경기에서 첫 5성 경기를 기록했으며, 1990년 10월 19일, 1991년 4월 20일, 1992년 5월 22일에는 점보 츠루타, 타우에 아키라와 함께 미사와 미츠하루, 카와다 토시아키, 켄타 코바시 팀을 상대로 연이어 5성 경기에 참여했다. 1992년 7월 5일에는 오가와 요시나리와 함께 켄타 코바시, 키쿠치 츠요시 팀과의 경기에서, 1994년 2월 13일에는 카와다 토시아키, 타우에 아키라와 함께 켄타 코바시, 미사와 미츠하루, 자이언트 바바 팀과의 경기에서도 5성 경기를 펼치는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명경기를 만들어냈다.
2000년 미사와 미츠하루가 프로레슬링 노아를 창설하며 대규모 선수 이탈 사태가 발생했을 때, 후치는 카와다 토시아키와 함께 단체에 잔류한 단 두 명의 일본인 레슬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은퇴를 결심했으나, 바바 모토코의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서 바바 씨의 3주기를 치르고 싶다"는 발언을 듣고 현역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태로 인해 후치는 한동안 상위권 경기에 출전하며 카와다 토시아키와 팀을 이뤄 세계 태그팀 챔피언십의 주요 도전자 위치에 올랐다. 2000년 12월 14일에는 카와다 토시아키와 팀을 이뤄 이이즈카 타카시 및 나가타 유지 팀과의 경기를 통해 또다시 5성 경기에 이름을 올렸다. 8년 만에 얻은 그의 첫 번째 타이틀은 2004년 텐류 겐이치로와 함께 획득한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십이었다.
케이지 무토의 영입 이후 후치는 단체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이 직책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전일제로 활동하지만, 주로 젊은 헤비급 및 주니어 헤비급 선수들과의 코믹한 오프닝 경기에서 모습을 보인다. 2006년 8월 20일, 후치는 '아카오니'라는 붉은 마스크를 쓰고 부두 머더즈 스테이블의 일원이 되었으나, 이는 단 하루만 지속되었다. 그는 메인 이벤트 후 마스크를 벗고 동료 전일본 선수들과 함께 스테이블을 공격했다. 2007년 11월 23일부터 12월 9일까지는 니시무라 오사무와 팀을 이뤄 세계 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에 참가하여 7점 (2승 2패 3무)으로 종합 5위를 기록했다.
무토 케이지, 코지마 사토시 등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이적하고 소속 선수들이 점차 늘어나며 단체가 활력을 되찾자, 후치는 다시 중견 베테랑 레슬러로서 단체의 기둥 역할을 굳건히 다졌고, 링 밖에서는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2016년 11월 27일 료고쿠 국기관 대회에서 동기인 아츠시 오니타와 태그를 이뤄 당시 챔피언이었던 사토 히카루 & 아오키 아츠시 팀을 꺾고 제100대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62세 10개월의 나이로 타이틀을 획득하며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 중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이 승리는 후치에게 12년 만의 타이틀 획득이자, 후치와 오니타가 1981년 멤피스에서 세 번째 AWA 남부 태그팀 타이틀을 잃은 이후 35년 만의 공동 타이틀 획득이었다. 그들은 2017년 6월 20일 아오키와 사토에게 다시 타이틀을 내줬다. 후치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이 사라진다면 은퇴하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단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전일본 사랑을 보여주었다.
3.5. 후기 경력과 경영 역할
후치 마사노부는 케이지 무토의 영입 직후 단체의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이 직책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는 2009년부터 전일본 프로레슬링 소속 계약을 하지 않고 이사직도 사임하여 프리랜서 신분이 되었으나, 여전히 전일본 프로레슬링 경기에만 출전하며 단체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였다. (단, 2013년 5월 11일 코바시 켄타의 은퇴 경기에는 코바시 본인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출전한 예외가 있다.) 그러나 2013년 7월 14일, 무토 케이지 시대 이후의 전일본 프로레슬링 출범 행사에서 후치는 다시 단체와 정식 계약을 맺고 선수이자 이사로 복귀한다고 발표하며 프리랜서 생활을 마쳤다. 그 직후 그는 아키야마 준과 함께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공동 부킹 책임자가 되었다.
2014년 1월에는 환갑 기념 특별 경기를, 3월에는 데뷔 40주년 기념 특별 경기를 치렀다. 2014년 12월 14일 고라쿠엔 홀에서 열린 전일본 프로레슬링 '와다 쿄헤이 레프리 40주년 & 환갑 기념 대회'에서는 아오키 아츠시가 보유한 세계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에 5년 만에 도전하여 20분 이상 혈투를 벌였지만, 아오키의 어깨 굳히기에 서브미션 패배를 당했다. 그는 2023년 1월 2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망막 박리 때문에 장기 결장했지만, 2023년 9월 8일 8개월 만에 링에 복귀했다. 2024년 현재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열정을 입증하고 있다.
4. 시그니처 기술과 레슬링 스타일
후치 마사노부는 강력하고 독특한 기술들을 바탕으로 오랜 경력 동안 자신만의 레슬링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는 기술적인 기량과 함께 관객을 자극하는 거친 스타일을 겸비하여 주니어급뿐만 아니라 헤비급 선수들과도 대등하게 겨루며 '아카오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4.1. 피니시 홀드
- 백드롭
후치의 주특기이다. 해외 원정에서 귀국한 초창기에는 쵸슈 리키처럼 점프하며 높은 각도로 비틀어 던지는 '점핑 백드롭'을 사용했다. 그러나 루 테즈로부터 "백드롭에서 중요한 것은 내리찍는 스피드이지, 높이는 크게 관계없다"는 조언을 받은 후, 현재의 낮은 자세에서 고속으로 브리지를 견고히 하여 던지는 형태로 변경했다. 한때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점보 츠루타, 스티브 윌리엄스, 오가와 요시나리와 함께 후치가 백드롭의 4대 명수 중 한 명으로 불렸다. 중요한 경기에서는 연속으로 백드롭을 퍼부으며 12회 이상 연발하기도 했다. 특히 10대 세계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시절 키쿠치 타케시에게 사용한 10연발 백드롭은 전설로 남아있다.
- 엔즈이키리
일련의 콤비네이션 중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한다. 후치의 엔즈이키리는 원조인 안토니오 이노키처럼 크게 뒤로 젖혔다가 큰 호를 그리듯이 차는 것이 특징이다. 숨겨진 명수로도 알려져 있으며, 한 방으로 대니 크로팻을 기절시킨 적도 있다. 장기 집권을 이룬 10대 세계 주니어 챔피언 시절에는 백드롭에 이은 후치의 피니시 기술로도 사용되었다.
- 피스트 드롭
탑 로프에서의 다이빙 피스트 드롭은 중요한 순간에 사용되거나, 10대 세계 주니어 챔피언 시절에는 숨겨진 피니시 기술로 사용되었다. 악역 유닛인 부두 머더즈와 일시적으로 공조하여 아카오니로 활동할 때는 주 피니시 홀드로 사용했다.
- 스몰 패키지 홀드 (목 조르기)
후치의 경우 4회, 5회 연속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기술에 포기하고 폴을 당한 선수들이 많다.
4.2. 타격 기술
- 저공 드롭킥
후치가 개발한 기술로 상대방의 무릎 관절이나 발목을 노리는 드롭킥이다. 초세대군과의 대립 중 무릎 부상을 안고 있던 미사와 미츠하루에게 처음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프로레슬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기술이 되었다.
- 프론트 하이킥
후치의 프론트 하이킥은 상대방의 얼굴을 링 슈즈 바닥으로 인정사정없이 걷어찬다. 상대방과의 거리 조절이 절묘하다.
- 너클 파트
이노키의 너클 애로처럼 크게 휘둘러 힘을 모아 단숨에 머리를 주먹으로 가격한다. 원래는 반칙 기술이다.
- 헤드록 펀치
상대방을 헤드록에 잡은 채 심판에게 보이지 않게 반칙성 얼굴 펀치를 날린다. 상대방이 후치의 반칙을 심판에게 호소하면, 후치는 반칙이 아닌 장저타를 어필하는 것이 정해진 패턴이다. 이때 관객들은 후치의 어필에 맞춰 "파~"라고 외치기도 한다.
4.3. 던지기 기술
- 보디슬램
체공 시간이 긴 하이 앵글식 보디슬램이다. 기술을 사용한 후 관객의 호응에 맞춰 허리 통증을 참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다시 기술을 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초세대군과의 대립 시에는 코너에 얼굴을 박는 형태 (스턴 건)나, 탑 로프나 철책에 목을 부딪치는 형태 (길로틴 휘프)도 사용했다.
- 더블 암 수플렉스 홀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후치의 피니시 기술로 자주 사용되었다. 앞서 언급된 백드롭과 엔즈이키리와 함께 결정적인 기술로, 10대 세계 주니어 챔피언 시절 방어전에서도 수차례 결정적인 기술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 빈도가 줄어들며 점차 사용할 기회가 없어졌다.
- 카프 브랜딩 (송아지 낙인찍기)
1985년경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다이너마이트 키드 등에게 자주 시도했지만, 후치가 '아카오니'라는 별명을 얻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기술을 피하게 되어 봉인되었다.
- 점핑식 드릴 어 홀 파일드라이버
전성기 시절 중요한 순간에 선보이곤 했으며, 장기 집권을 이룬 10대 세계 주니어 챔피언 시절에는 피니시 기술로 사용되기도 했다.
- 저먼 수플렉스
후치가 해외 원정에서 귀국했을 때 주특기로 삼았던 기술이다. 특히 칼 고치 직전 기술임을 어필하듯 '독일식 경례를 한 상태로 브리지를 취한 다리 모양'이 특징이다.
4.4. 서브미션 홀드와 핀 폴 콤비네이션
- 페이스록
미사와 미츠하루가 즐겨 사용하는 스텝-오버 방식으로, 앉아있는 상대의 뒤에서 한 발을 상대의 한 팔 앞에 내밀어 올라타듯이 조이는 얼굴 조르기이다. 사실은 미사와와의 연습 중에 두 사람이 함께 고안한 형태이다.
- 얼굴 밟기
엎드린 상대방의 얼굴을 한 발로 짓밟는다. 도발의 의미가 강한 기술이다.
- 자이언트 백브레이커
코브라 클러치와 백브레이커를 결합한 스트레칭 기술로, 후치의 스승인 바바의 오리지널 기술이었다.
- 각종 고문 관절기
후치가 젊은 시절 지도를 받았던 칼 고치 직전 기술로, 그 수는 48가지 (실제로는 불분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코너 위로 상대방을 눕힌 후 그 위에 올라타 한 발로 상대의 턱을 밟고, 다른 발로 상대의 한쪽 다리를 밟아 올라타듯이 하여 상대방을 코너 포스트를 지점으로 활처럼 젖혀 고통을 주는 기술이 있다.
- 겨드랑이 굳히기
- 샅바 찢기 (레그 스플릿)
- 치킨윙 암록
그라운드에서 엎드린 상대에게 리버스 자세로 거는 것을 잘 사용했다.
- 스탠딩 클러치 (무릎 꺾어 굳히기)
앉아있는 상대의 뒤에 서서 상대의 양어깨를 넘어 상대의 목 뒤에 앉는다. 그 상태에서 상대의 한쪽 다리를 잡고 자신 쪽으로 당기면서 조인다. 무릎과 사타구니 외에도 목에도 손상을 입힌다. 1990년대 초반에 고통을 주는 기술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세계 주니어 챔피언 시절에는 피니시 기술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후치의 고문 관절기 중 대표적인 기술이었다.
- 각종 누르기 기술
앞서 언급된 스몰 패키지 홀드 외에도, 후치는 잭나이프식 새우 굳히기, 삼손 클러치, 뒤집어 누르기, 회전 새우 굳히기, 후방 회전 새우 굳히기 등 다양한 굳히기 기술을 잘 사용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스몰 패키지 홀드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5. 챔피언십과 업적
후치 마사노부는 그의 오랜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수많은 챔피언십과 상을 획득하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 전일본 프로레슬링
- 올 아시아 태그팀 챔피언십 (2회) - 텐류 겐이치로 (1회), 아츠시 오니타 (1회)
- 세계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 (5회)
- 제10대 챔피언 시절 1,309일 동안의 통치 기간은 역대 최장 기록이며, 14회 방어 기록은 훗날 카즈 하야시 (17회)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최다 기록이었다.
- CWA
- AWA 남부 태그팀 챔피언십 (3회) - 아츠시 오니타와 함께
- NWA
- NWA 세계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십 (1회, 비공인)
- 프로레슬링 일러스트레이티드
- 2003년 "PWI 역사"에서 선정한 최고의 싱글 레슬러 500인 중 323위에 랭크되었다.
- 도쿄 스포츠
- 노력상 (1976년, 1983년)
6. 개인 생활과 대중 이미지
후치 마사노부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혼인 이력이 없으며, 주간 고ング나 주간 프로레슬링의 독자 코너에는 그의 독신 생활에 대한 유머 글이 자주 게재되었고, 러셔 키무라 또한 이를 소재로 삼았다. 나가 하루카 에이겐은 그가 '마마보이'여서 결혼하지 않는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는 시무라 켄과 절친한 사이였다.
후치는 기본적으로 공적인 발언을 많이 하지 않아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인상을 주었지만, 2000년 8월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G1 클라이맥스 경기에서 관객들을 향한 마이크 어필과 쵸노 마사히로에 대한 퍼포먼스는 그의 기존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으며, 경기장의 신일본 팬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때 전일본 프로레슬링 중계의 해설을 맡기도 했으며 (1991년 ~ 1992년경), 2007년 1월 4일 신일본 돔 대회에서는 아나운서로부터 '전일본 최후의 양심'과 '색정적인 댄디즘'이라는 그전까지 들어본 적 없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헬로 키티를 매우 좋아하며, 한때 전일본의 스폰서인 아스나로샤에서 특별 제작한 세상에 하나뿐인 키티 가운을 입고 입장하기도 했다. 이 가운은 키티의 얼굴에 뱀 모양의 몸통이 등에 그려진 블루종 디자인이었다.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는 "후치~ (짝짝짝) 후치~ (짝짝짝)" 콜은 그의 상징적인 응원 구호이다.
후치는 가슴 피부가 약하여 코지마 사토시나 카즈 하야시의 수평 촙에 가슴팍이 자주 새빨갛게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의 별명인 '아카오니'(붉은 도깨비)도 여기서 유래했다. 스와마는 후치를 가장 어렵고 강한 상대로 꼽는데, 그 이유는 그가 경기의 모든 하이라이트를 가져갈 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2019년 5월 3일, 그는 사이타마현 가조시의 관광대사로 임명되었다.
2023년 테리 펑크의 사망 소식에 후치는 "나의 반세기 레슬러 인생에서 가장 신세 진 외국인 레슬러는 더 디스트로이어와 테리 펑크였다. 1981년 3월 (미국 텍사스) 아마릴로에서 한 달 이상 그의 집에 신세를 졌고, 오니타 (아츠시) 군과 함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추억이 너무나 많다"고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7. 유산과 영향
후치 마사노부는 프로레슬링, 특히 주니어 헤비급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개발한 저공 드롭킥은 수많은 프로레슬러, 특히 주니어 헤비급 선수들의 파이팅 스타일에 극히 큰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 프로레슬링의 필수 기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저공 드롭킥은 초세대군과의 대결에서 크게 부각되었지만, 그 원형은 왼쪽 슬개골 분쇄 골절로 인한 부상에서 복귀한 아츠시 오니타와 매일 태그팀 경기를 치르던 시기에 형성되었다. 당시 이 공격에 대해 "불쌍하다", "(모처럼 복귀했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공격을 가하는 후치와 공격을 받는 오니타 모두 "프로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저공 드롭킥과 무수한 관절기 및 스트레칭 기술, 너클 파트, 얼굴 킥, 아토믹 드롭 자세에서의 급소 공격 등 테크닉과 거친 플레이를 겸비한 관객을 강하게 자극하는 파이팅 스타일을 확립하여 주니어급뿐만 아니라 미사와 등 헤비급 선수들과도 당당히 겨루었으며, 이후 '아카오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후치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입문 전후로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에 거주하며 도장으로 통학했다. 그가 아마추어 레슬링 출신이었기에, 같은 아마추어 레슬링 출신으로 후치보다 먼저 입문했던 점보 츠루타와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초기에 자주 스파링을 했다고 회상한다. 후치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출신으로서 칼 고치의 지도를 받은 몇 안 되는 레슬러 중 한 명인데, 고치는 "목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브리지 훈련을 시켰다고 회상했다.
그의 스승인 바바와 아츠시 오니타와의 스시 식사 일화도 유명하다. 오니타는 바바에게 신경 써서 바바보다 한 등급 낮은 스시를 주문했지만, 후치는 무례를 무릅쓰고 성게, 연어알, 참치 뱃살 등을 거리낌 없이 계속 주문했다. 이에 바바는 식사 후 "야, 오니타, 후치는 다시는 (초밥집에) 데려가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질려버린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8. 미디어 출연 및 저서
후치 마사노부는 프로레슬링 활동 외에도 다양한 미디어에 출연하고 저서를 출간했다.
- 저서
- 『王道ブルース오도 블루스일본어』 (도쿠마 쇼텐, 2022년 3월 29일)
- 텔레비전
- 바이탈TV 『渕正信の幸せ昭和食堂후치 마사노부의 행복한 쇼와 식당일본어』 (BS-TBS, 2018년 5월 17일 ~ 10월 11일)
- 『クイズ!脳ベルSHOW퀴즈! 노우 벨 쇼일본어』 제597회, 제598회 (BS 후지, 2019년 1월 9일, 1월 10일)
9. 입장곡
후치 마사노부의 입장곡은 다음과 같다.
- DANGER ZONE (영화 『탑건』 테마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