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효정현황후는 청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청 황실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1. 가문 및 출생
효정현황후의 본명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도광제 17년 음력 7월 12일(양력 1837년 8월 12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광시성에서 관리로 재직했으며, 사후 3등 승은공(三等承恩公)에 추증된 무양아(穆揚阿, 穆揚阿중국어)이다. 어머니는 기양기야(Giyanggiya) 씨로, 원래는 강(姜) 씨였으나 후에 만주족 성씨인 기양기야로 변경되었다. 그녀에게는 형제 광과(廣科)와 자매 뇨후루 씨(장후친왕 이인(奕仁)의 정실)가 있었다.
1.2. 조상 및 혈통
효정현황후는 청나라 건국자 누르하치를 섬긴 5대 장군 중 한 명인 에이두의 후손으로, 에이두의 셋째 아들 처얼거(車爾格, 1647년 사망)를 통해 혈통이 이어진다. 그녀의 고조부 푸커징아(福克精阿)는 시닝의 관리로 재직하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조부 처부탄(策布坦, 1794년 사망)은 산시성의 2등 지휘관으로 역시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무양아는 광시성의 관리였으며 3등 승은공 작위를 받았다. 무양아의 정실 부인 중 한 명은 누르하치의 증손자인 경항(慶恆, 1779년 사망)의 손녀였다.
뇨후루 씨 가문은 숙친왕, 정친왕, 장친왕 등 종실 왕부와 여러 차례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장친왕부와는 세 차례나 혼인하여 비범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녀가 황후로 간택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 황실 입궁 및 황후 시절
효정현황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빠르게 황후의 자리에 올랐으며, 황후로서 황실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1. 함풍제 후궁 입궁 및 황후 책봉
도광제가 1850년 2월 15일에 승하하고, 그의 넷째 아들 이주가 함풍제로 즉위했다. 함풍제의 정실 황후는 즉위 한 달 전 사망하여 사후 효덕현황후로 추증되었다. 도광제의 상중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실 황후를 간택하는 과정은 지연되었다.
1851년, 자금성에서 함풍제의 후궁 간택이 진행되었고, 뇨후루 씨는 당시 도광제의 최고위 후궁이었던 강자황태비가 최종 후보로 선정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뇨후루 씨는 1840년대 후반에 이미 자금성에 입궁하여 당시 넷째 왕자였던 함풍제의 첩이 되었다고도 한다.
뇨후루 씨는 궁중에서 빠르게 지위가 상승했다. 1852년 6월 14일, 그녀는 정빈(貞嬪)으로 책봉되었는데, '정(貞)'은 '정직함', '순결함', '덕행이 높음', 또는 '남편의 기억에 충실함'을 의미한다. 같은 해 6월 말 또는 7월 초에는 정귀비(貞貴妃)로 승격되었고, 1852년 7월 24일에는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로서 그녀는 황제의 후궁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일부 자료에서는 뇨후루 씨가 이미 전임 효덕현황후 사망 후 함풍제의 정실 배우자로 내정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2.2. 황후로서의 역할
황실 관례에 따라 황제는 한 달에 한 번 황후와 시간을 보냈다. 효정현황후는 자녀가 없었다. 1856년 4월 27일, 함풍제의 또 다른 후궁인 의빈(懿嬪, 훗날의 서태후)이 함풍제의 첫 아들인 재순(載淳, 훗날의 동치제)을 낳았다. 일부 전기 작가들은 효정현황후가 함풍제의 유일한 딸인 고륜영안공주를 낳았다고 언급했으나, 이는 실제로는 이비(麗妃) 소생이었다. 그러나 황후로서 뇨후루 씨는 함풍제의 모든 자녀들의 명목상 어머니였으며, 그들의 친모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었다. 따라서 함풍제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그들이 불복종할 경우 처벌을 결정하는 것은 황후의 역할이었다. 의빈은 자신의 아들 양육에 거의 관여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때 "나는 (황후와) 꽤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3. 황태후 및 섭정
함풍제 승하 후 효정현황후는 황태후가 되어 동치제와 광서제의 섭정을 맡으며 청나라의 중요한 정치적 시기를 이끌었다.
3.1. 함풍제 승하와 황태후 책봉
1861년 8월 22일, 제2차 아편 전쟁의 여파로 함풍제는 베이징에서 북동쪽으로 230 km 떨어진 열하행궁에서 승하했다. 그는 당시 5세였던 유일한 생존 아들 재순(載淳)에게 제위를 물려주었으며, 재순은 동치제로 즉위했다. 재순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누가 섭정을 맡을 것인가를 두고 두 파벌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함풍제는 임종 시 자신의 측근인 숙순과 7명의 대신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동치제의 생모인 의귀비(懿貴妃, 훗날의 서태후) 또한 섭정을 맡기를 원했다. 효정현황후는 처음에는 숙순과 7명의 섭정 대신들과 협력하기로 동의했지만, 의귀비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1861년 11월, 함풍제의 여섯째 동생인 공친왕 이신과 일곱째 동생이자 의귀비의 여동생 완진의 남편인 순친왕 이환의 도움을 받아 효정현황후와 의귀비는 8명의 섭정 대신들에 대항하여 쿠데타(역사적으로 신유정변으로 알려짐)를 일으켜 그들을 권력에서 축출하고 섭정권을 확보했다.


의귀비는 황태후로 승격되어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의 존호를 받았고 '자희(慈禧)'라는 존칭을 얻었다. 반면 효정현황후는 선황의 정실 부인이자 현 황제의 명목상 어머니로서 황태후로 승격되어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의 존호를 받았는데, 이는 자희황태후보다 우위를 점하는 지위였다. 그녀는 '자안(慈安)'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그녀의 거처가 자금성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자안황태후는 비공식적으로 '동태후'로 불렸고, 서쪽에 거주했던 자희황태후는 '서태후'로 불렸다. 자안황태후는 대부분의 생애를 종수궁에서 보냈다. 1861년 4월 25일에는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로 존호가 부여되었고, 이후 1874년에는 '자안단유강경황태후'(慈安耑裕康慶皇太后), 1876년에는 '자안단유강경소화장경황태후'(慈安耑裕康慶昭和莊敬皇太后)로 존호가 추가되었다.
황실 기록에는 뇨후루 황후와 의귀비가 동일한 황태후 지위로 승격되는 시점 사이에 24시간의 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토니 텅(Tony Teng)에 따르면, 의귀비와 숙순은 함풍제 사망 후 존호 수여를 두고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효정현황후는 의귀비를 지지하여 숙순이 양보하도록 강요했다고 여겨진다.
두 황태후는 동치제의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여성은 황실 조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린 황제와 함께 조회에 참석할 때 휘장 뒤에 앉아야 했다. 비록 원칙적으로는 효정현황후가 서태후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효정현황후는 실제로는 겸손한 성품으로 정치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반면 서태후는 실제적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효정현황후는 정치를 배워야 했고, 그래서 그녀와 서태후는 역사를 공부했다. 1861년 11월, 황실 관례에 따라 그들은 만주족 선조들의 기록을 참고하기 시작했다. 1863년 6월에는 건륭제의 명령으로 편찬된 『통감집람(通鑑輯覽)』의 내용을 설명받았다. 약 1년 전에는 한림원 학자들이 편찬한 『치평보감(治平寶鑑)』이 학자들과 관리들이 황태후들에게 강의하는 교재가 되었고, 이 강의는 2년 이상 지속되어 1866년 11월에 마지막 강의가 이루어졌다.
많은 전기 작가들은 서태후가 실제적인 권력의 배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정 초기 20년 동안 서태후는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모든 칙령은 두 섭정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효정현황후와 동치제 모두에게 인장이 주어졌지만, 황제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동치제의 인장은 그의 생모인 서태후에게 주어졌다. 효정현황후의 인장에는 '어상(御賞)'이, 서태후의 인장에는 '동도당(同道堂)'이 새겨져 있었다.
3.2. 동치제 시대의 섭정
함풍제 사망 후의 시기는 동치중흥이라 불렸다. 이는 태평천국 운동과 영국과의 아편 전쟁이 종식된 평화로운 시기였다. 수십 년간 고갈되었던 국고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자안황태후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녀의 유일한 주목할 만한 정치 개입은 1869년에 있었다.

3.3. 광서제 시대의 섭정
동치제가 18세의 나이로 1875년 1월에 자녀 없이 사망하자, 서태후의 조카이자 순친왕의 아들인 재첨이 광서제로 즉위했다. 광서제 또한 즉위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두 황태후는 다시 섭정이 되었다.
1870년대 후반, 서태후가 간 문제로 병이 들자 자안황태후는 단독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이 시기 그녀는 러시아 제국과의 이리 분쟁을 처리해야 했다. 1871년 신장에서 회족의 난이 발발했고, 청나라는 곧 통제력을 잃었으며 러시아는 이리 분지를 점령했다. 청 정부는 1877년에 신장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1879년 러시아는 이 지역에 강력한 주둔을 유지할 것을 제안했지만, 청 정부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분쟁은 1881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체결로 끝이 났다.
자안황태후는 자금성을 거의 떠나지 않았지만, 남편과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청동릉을 방문하기도 했다. 1880년 청동릉에 있을 때, 자안은 아마도 공친왕 이신의 권유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모든 의식에서 선두에 섰다. 함풍제의 능묘에서 자안과 서태후 사이에 소동이 벌어졌다. 자안은 사망한 황제의 정실 부인으로서 중앙 위치를 차지했다. 그녀는 서태후에게 오른쪽에 서라고 말하며 함풍제 생전에는 서태후가 첩에 불과했음을 상기시켰다. 왼쪽의 빈자리는 함풍제의 첫 번째 황후인 효덕현황후를 상징적으로 위해 비워두었다. 서태후가 이 사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4. 정치적 활동 및 주요 결정
황태후로서 효정현황후는 여러 중요한 정치적 결정과 사건에 개입하며 국정에 영향을 미쳤다.
4.1. 안덕해 사건
동치중흥 시기, 자안황태후의 유일한 주목할 만한 정치 개입은 1869년에 있었다. 환관 안덕해는 자희황태후의 측근으로, 자희황태후를 위한 용포를 구매하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 중이었다. 산둥성을 여행하면서 그는 권한을 남용하여 사람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산둥성 순무 정보정은 안덕해의 행위를 조정에 보고했다. 자안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칙령을 초안했다.
"정보정이 산둥성에서 환관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보고했다. 덕주(德州)의 현령에 따르면, 안씨 성을 가진 환관과 그의 추종자들이 두 척의 용선을 타고 황실 운하를 통해 그곳을 지나갔는데, 많은 화려함과 위용을 과시했다. 그는 용포를 조달하기 위한 황실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고 발표했다. 그의 배에는 검은 깃발이 나부꼈는데, 중앙에는 태양의 세 가지 황실 상징이 그려져 있었고, 양쪽 배에는 용과 봉황 깃발이 나부꼈다.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수행원들이 이 사람을 수행했으며,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에 능숙한 여성 음악가들도 있었다. 운하 둑에는 구경꾼들이 줄지어 서서 그의 행진을 놀라움과 감탄으로 지켜보았다. 지난달 21일은 이 환관의 생일이었는데, 그는 용포를 입고 배의 앞 갑판에 서서 수행원들의 경의를 받았다. 현지 현령이 막 그를 체포하려 할 때 배들은 돛을 올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순무는 이미 즉시 체포 명령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의 보고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허락 없이 베이징을 떠나 이러한 불법 행위를 저지른 이 건방진 환관을 본보기로 삼지 않는다면, 어떻게 궁궐 내의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고 악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산둥, 허난, 장쑤성 세 성의 순무들은 우리가 이전에 6품 관직과 공작 깃털 장식을 수여했던 환관 안을 찾아 즉시 체포하도록 명령받았다. 그의 동료들에 의해 적절히 신원이 확인되면, 더 이상의 절차 없이 즉시 참수해야 하며, 그가 시도할 수 있는 어떤 교활한 설명에도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해당 순무들은 체포에 실패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안덕해는 1869년 9월 12일에 참수되었다. 이는 자안황태후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반응이었으며, 안덕해의 처형은 자희황태후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자료에서는 공친왕 이신이 자안에게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했다고 말한다. 체포 며칠 후 자안은 다음과 같은 칙령을 발표했다.
"정보정이 이제 환관이 태안부에서 체포되어 즉시 참수되었다고 보고한다. 우리 왕조의 가법은 환관의 적절한 기율에 대해 매우 엄격하며, 그들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범죄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지방으로 원정을 가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덕해는 실제로 이 법을 위반하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며, 그의 범죄에 대한 처형은 단지 합당한 보상일 뿐이다. 앞으로 모든 환관들은 그의 사례를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추가적인 불만을 제기할 경우, 실제 범죄자뿐만 아니라 궁내 여러 부서의 수석 환관들도 처벌받을 것이다. 앞으로 황실 업무로 지방에 파견되었다고 가장하는 환관은 즉시 쇠사슬에 묶여 처벌을 위해 베이징으로 보내질 것이다."
이 사건은 동치제와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얻으며 자안황태후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민간에서는 "동궁이 우연히 한 가지 일을 행하니, 천하가 모두 손을 들어 칭송한다"는 속담이 돌 정도로 그녀의 영향력과 국정 운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무형의 형태로 자희황태후와의 불화를 야기하기도 했다.
4.2. 동치제의 혼인과 황후 간택

1872년, 자안과 자희 두 황태후는 동치제가 혼인할 때가 되었다는 데 동의했다. 자금성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자안은 동치제의 새 황후와 후궁들을 선택하는 일을 맡았다. 몽골 아루트 씨족의 소녀(훗날의 효철의황후)가 새 황후가 되기로 결정되었다. 아루트 씨족의 어머니는 자안황태후의 아버지 쪽 사촌이었다. 혼례 후 두 황태후는 공동 섭정직에서 물러났지만, 동치제의 병환 중인 1874년 12월에 다시 섭정을 재개했다.
1872년 초, 황후 간택이 진행되었을 때 자안황태후는 아루트 씨를 추천하여 간택에 참여시켰다. 반면 서태후는 명문 푸차(富察) 씨족 출신인 풍수(鳳秀)의 딸인 숙신황귀비를 강력히 지지하며 자안황태후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구체적인 과정은 공개된 기록이 부족하지만, 결국 동치제는 아루트 씨를 황후로 선택했고, 이는 서태후의 큰 불만을 샀다. 푸차 씨는 혜비(慧妃)가 되었다.
황후 아루트 씨는 서태후의 외조부인 정친왕 단화의 손녀였는데, 단화는 신유정변 때 처형당한 인물로 서태후가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아루트 씨는 자안황태후의 고모의 손녀였기 때문에 자안의 친척으로 간주되어 서태후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동치제는 자안황태후와 매우 친밀했고 아루트 씨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황제의 의사는 자안황태후 편에 섰고, 이는 서태후에게 배신감과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서태후가 자안황태후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4.3. 대외 관계 및 정책
1870년대 후반, 서태후가 간 질환으로 병이 들자 자안황태후는 단독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이 시기 그녀는 러시아 제국과의 이리 분쟁을 처리해야 했다. 1871년 신장에서 회족의 난이 발발했고, 청나라는 곧 통제력을 잃었으며 러시아는 이리 분지를 점령했다. 청 정부는 1877년에 신장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1879년 러시아는 이 지역에 강력한 주둔을 유지할 것을 제안했지만, 청 정부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분쟁은 1881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체결로 끝이 났다.

자안황태후는 공친왕 이신과 함께 양무운동을 주도했다. 양무운동은 서양과 교류하고 서양 문물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청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한 중요한 정책이었다. 자안황태후는 이 운동의 주요 주창자 중 한 명으로,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 한족 관료들을 태평천국 운동 진압에 중요한 지위에 임명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당시 만주족 중심의 관료 체제에서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청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5. 개인적인 삶과 성격
효정현황후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황실 내에서 긍정적인 대인 관계를 유지했다.

5.1. 성품 및 대인 관계
자안황태후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는 그녀가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항상 조용하며 성급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매우 잘 대했으며, 함풍제에게도 깊이 존경받았다는 것이다. 동치제와 광서제 모두 서태후보다 자안을 더 선호했다. 그녀의 선량한 성격은 순진하고 솔직한 자안황태후를 제쳐두고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의 성격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는 여전히 중국에서 널리 퍼진 견해이며, 조용한 자안황태후의 이미지는 그녀의 존호의 의미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매우 다른 현실을 그렸는데, 주로 자안황태후가 자기 탐닉적이고 게을렀으며, 국정 운영과 힘든 일보다는 자금성 내의 쾌락과 안락한 삶에 더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반면 서태후는 최고 권력을 얻기 위해 희생하고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당시 중국을 괴롭히던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했던 영리하고 지적인 여성이었다. 종종 현실은 이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을 수 있으며, 일부는 자안이 성격과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자안이 착하고 단순한 소녀라는 대중적인 견해는 개혁가 강유위와 전기 작가 존 블랜드, 에드먼드 백하우스에 의해 그녀와 서태후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되었다. 서태후와 달리 자안은 1900년 이후 많은 외국인들을 만났지만, 외국인과의 만남이 문서로 기록된 적은 없다.
림분경은 자안에 대해 또 다른 견해를 썼다. 아름다운 예허나라는 하갈처럼 주인을 위해 아들을 낳아야 할 하녀와 같았다. 자안은 자신의 불임에 대한 불안감을 보충하기 위해 남편이 하녀에게 호의를 보이도록 격려했던 사라와 같았다고 한다. 아마도 함풍제는 격려가 필요 없었겠지만, 자안은 황제의 아들과 후계자가 될 예비 어머니로서 의귀비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서태후는 성미가 급했고 아마도 황후를 질투했을 것이다. 동치제 출생 직전, 서태후는 나쁜 성미와 무례함 때문에 거의 강등될 뻔했다. 자안은 그녀를 위해 개입했다. 하갈과 달리 서태후는 자신의 주인을 공개적으로 경멸하지 않았다. 그녀는 양처럼 온순했으며, 수년 동안 그들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5.2. 문학적 관심
캐서린 칼은 1903년 서태후와 9개월을 보낸 후, 비록 자안황태후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문학 황후"라고 묘사했다. 서태후가 모든 국정 업무를 처리하는 동안, 자안은 문학적 취미에 몰두하며 학생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때로는 베이징 대학에서 최고의 문학적 영예를 얻으려는 지망생들의 논문을 직접 심사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저명한 작가이기도 했다. 자안과 서태후는 화목하게 지냈고, 서로의 장점을 인정했으며, 오랜 관계 동안 결코 약해지지 않는 진심 어린 애정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우호적인 관계는 1881년 자안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6. 죽음과 사후 평가
효정현황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 원인에 대한 논란과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6.1. 사망

1881년 4월 8일, 자안황태후는 황실 조회에 참석하던 중 병이 들어 개인 거처로 옮겨졌고,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광서제의 스승이었던 옹동화에 따르면, 그녀는 건강했지만 이전에 최소 세 번 심각한 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녀는 뇌졸중으로 보이는 병력이 있었다. 옹동화는 자신의 일기에 1863년 3월 첫 번째 뇌졸중을 기록했는데, 이때 자안은 갑자기 쓰러져 거의 한 달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조회 시 '느리고 어렵게 말하는' 그녀의 평판은 뇌졸중의 후유증이었을 수 있다. 두 번째 뇌졸중은 1870년 1월에 기록되었다.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발생한 그녀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갑작스러운 뇌졸중이었다. 그녀의 의무 기록을 연구한 의사들은 그녀가 대뇌 출혈로 사망했다고 거의 확신한다.
그녀의 죽음 30년 후, 서태후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결코 입증되지 않았고, 수년이 지난 후에도 새로운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서태후 자신도 궁정에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들었기 때문에, 자안의 죽음에 그녀가 관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가장 널리 퍼진 소문 중 하나는 함풍제가 죽기 전에 비밀 칙령을 작성하여 자안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함풍제는 서태후가 자안을 제치고 궁정을 지배하려 할 것을 예견하고, 필요한 경우 자안이 서태후를 제거할 권한을 부여하는 칙령을 작성했다고 한다. 자안은 서태후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서태후에게 비밀 칙령을 보여주고 공동 섭정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 불태웠다. 그녀는 그날 늦게 의문의 상황에서 사망했다. 이 이야기는 『숭릉전신록(崇陵傳信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후대에는 여러 이본이 존재하지만 모두 '서태후가 자안을 죽였다'는 결론에 동의한다. 또한 문정식의 『문진우기(聞塵偶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언급되는데, 이는 자안황태후가 서태후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며, 서태후가 이를 은폐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자안을 죽였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가설과 수많은 이야기는 문학 작품이나 서태후를 비방하려는 정치적 동기에 영향을 받은 민간 문학에 불과하며, 대부분 근거 없는 추측이다.
실제로 자안황태후의 병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징후가 있었다. 옹동화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863년 3월 26세의 나이에 갑자기 실신하여 약 한 달간 실어증을 겪는 등 뇌졸중과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 이러한 증상은 1870년 1월에도 다시 나타났다. 또한 『술암비록(述庵秘錄)』에는 그녀의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간양상항(肝陽上亢)'으로 고혈압의 가능성이 높으며, 뇌졸중이나 뇌출혈을 유발할 수 있는 증상이다.
6.2. 시호 및 능묘
자안황태후에게 내려진 시호는 생전에 얻은 존호와 사후에 추가된 새로운 이름들을 결합한 것으로, 효정자안유경화경성정의천조성현황후(孝貞慈安裕慶和敬誠靖儀天祚聖顯皇后, 孝貞慈安裕慶和敬誠靖儀天祚聖顯皇后중국어)이다. 이 긴 이름은 오늘날 자안의 능묘에서도 볼 수 있다. 그녀의 짧은 시호는 효정현황후(孝貞顯皇后, 孝貞顯皇后중국어)이다.
자안황태후는 베이징 동쪽으로 125 km 떨어진 청동릉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남편 함풍제의 능묘인 정릉(定陵) 옆에 안장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자희황태후와 함께 정동릉(定東陵, 定東陵중국어) 능묘 단지에 안장되었다. 보다 정확히는 자안황태후는 보상유정동릉(普祥峪定東陵, 普祥峪定東陵중국어)에, 자희는 훨씬 더 큰 보타유정동릉(菩陀峪定東陵, 菩陀峪定東陵중국어)을 건설하여 안장되었다.
7. 역사적 평가
자안황태후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동치제와 광서제에게 깊은 애정을 받았으며, 그녀의 이러한 인품은 백성들에게도 널리 칭송받았다.
7.1. 긍정적 평가
자안황태후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는 그녀가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항상 조용하며 성급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매우 잘 대했으며, 함풍제에게도 깊이 존경받았다는 것이다. 동치제와 광서제 모두 서태후보다 자안을 더 선호했다. 그녀의 선량한 성격은 순진하고 솔직한 자안황태후를 제쳐두고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의 성격과는 대조적이었다. 특히 환관 안덕해 사건에서 보여준 그녀의 단호한 결정은 황실의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온화한 인물에 머무르지 않고, 필요할 때는 단호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7.2. 비판 및 논란
일부 역사가들은 자안황태후가 자기 탐닉적이고 게을렀으며, 국정 운영과 힘든 일보다는 자금성 내의 쾌락과 안락한 삶에 더 신경을 썼다고 비판한다. 그녀가 정치에 무관심하고 나태했으며, 이로 인해 서태후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러한 비판과 논란은 그녀의 온화한 성품 뒤에 가려진 정치적 한계나 서태후와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7.3. 영향력
자안황태후는 비록 정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로 서태후의 권력을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동치제와의 긍정적인 관계와 양무운동에 대한 지지는 청나라의 개혁과 안정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그녀의 삶과 행동은 후대에 서태후와의 대비를 통해 청말 황실 정치의 복잡한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8. 대중 문화
효정현황후는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양한 배우들에 의해 묘사되었다.
연도 | 제목 | 배우 |
---|---|---|
1964 | 서태후와 진비 (西太后與珍妃) | 임정 (林靜) |
1981 | 쌍인전기 (雙印傳奇) | 윤보련 (尹寶蓮) |
1983 | 화소원명원 (火燒圓明園) | 진엽 (陳燁) |
1983 | 수렴청정 (垂簾聽政) | |
1983 | 소녀자희 (少女慈禧) | 막취한 (麥翠嫻) |
1986 | 자희외전 (慈禧外傳) | 윤보련 (尹寶蓮) |
1987 | 양궁황태후 (兩宮皇太后) | 유동 (劉冬) |
1989 | 일대요후 (一代妖后) | 진엽 (陳燁) |
1990 | 청궁십삼황조지혈염자금성 (滿清十三皇朝之血染紫禁城) | 삼삼 (森森) |
1993 | 희설자희 (戲說慈禧) | 하청 (何晴) |
2005 | 함풍왕조지일렴유몽 (咸豐王朝之一簾幽夢) | 고단단 (高丹丹) |
2005 | 일생위노 (一生为奴) | 송가 (宋佳) |
2012 | 여인화 (女人花) | 임위군 (林韦君) |
2012 | 홍장록와 (红墙绿瓦) | 진리나 (陳莉娜) |
2012 | 대태감 (大太監) | 소미기 (邵美琪), 양려영 (梁麗瑩) |
2015 | 영환지시 (瀛寰之志) | 진려 (秦丽) |
9. 관련 항목
- 함풍제
- 동치제
- 광서제
- 서태후
- 신유정변
- 청동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