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회안대군은 격동의 고려 말과 조선 건국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 왕실의 일원으로서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있었다.
1.1. 출생 및 성장 배경
회안대군 이방간은 1364년 7월 2일 함경도 함흥부 귀주동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는 증(贈) 문하부사(門下府事) 한경 (안천부원군)의 딸이며, 외조모는 삭녕 신씨 삼한국대부인이다.
1.2. 초기 경력과 봉작
회안대군은 고려 말기에 군기시 소윤(少尹)을 역임하며 관직에 올랐다. 1392년 (고려 공양왕 4년) 7월,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그는 개국익찬공신 1등에 책록되고 현록대부(顯祿大夫)의 벼슬을 받았으며 마한공(馬韓公)에 봉작되었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회안군(懷安君)으로 봉군되었다. 이후 1398년에는 회안공(懷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를 역임했다. 1401년 (태종 1년)에는 유배 중에 회안대군으로 봉작이 개정되었다.
1.3. 왕자의 난과 정치적 활동
회안대군은 조선 건국 초기의 격동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 깊이 관여하며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다.
1.3.1.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태조 7년) 8월, 동생인 정안군 이방원이 정도전과 남은 등을 제거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도 이방간과 이방원 사이에 작은 갈등이 있었고, 이방원이 이방간을 제거하려 했다는 언급도 있다. 이 공로로 그는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 정변으로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났고, 이방원은 즉시 왕위에 오르지 않고 형인 이방과를 왕위에 추대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1399년 (정종 1년)에는 풍해도와 서북면의 병권을 관할하게 되었다.
1.3.2.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정종 2년), 회안대군은 왕위 계승에 대한 강한 야심을 품고 동생 정안군 이방원과 충돌하며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당시 형인 정종에게 적장자가 없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방간은 이방원의 유일한 왕위 계승 경쟁자였다. 당시 정종은 신중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적이 없었으나,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품은 회안대군과 정안군 이방원은 무인정사 이전의 동맹 관계에서 왕위 계승 경쟁자로 돌변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두 왕자는 비밀리에 사병을 양성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방간은 군사를 일으켜 개성으로 진군했으나, 이방원에게 패배하고 한양 서동(西洞)으로 퇴각하던 중 아들 의령군 이맹중과 함께 생포되었다. 이 사건은 '제2차 왕자의 난' 또는 '경진정사'로 불리며, 회안대군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함께 유배되었다. 이방원은 내란을 일으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왕세자의 지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당시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패배 후 회안대군은 아들 이맹중과 함께 황해도 토산현(兎山縣)에 처음 안치되었다. 이때 이방원은 그를 석방하려 했으나, 신하들은 그를 정죄할 것을 계속 청하였다. 처음 유배되었던 토산현이 과거 군사를 분령했던 곳이라는 이유로 그는 다시 경기도 안산군으로 이배되었다. 이후 익주, 전라도 순천성, 전주부 완산, 그리고 다시 황해도 토산 등으로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안산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는 전지(田地)와 식읍(食邑)을 받았으며, 매월 초하루에는 한양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받기도 했다. 그러나 의정부와 양사에서는 회안대군이 부당한 예우를 받고 있다며 끊임없이 탄핵을 이어갔다.
1.4. 유배 생활과 말년
1400년 9월, 정종은 문하부(門下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안대군을 익주로 유배 보냈다.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신하들은 계속해서 회안대군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탄핵했지만, 태종은 그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병석에 누웠을 때는 태종이 직접 의원을 보내 치료를 받게 하기도 했다. 1401년 (태종 1년)에는 유배 중에 그의 봉작이 회안대군으로 개정되었다. 같은 해 6월, 태종은 그를 다시 한양으로 소환하려 했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회안대군은 스스로 본관지인 전주로 내려갈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고, 전주부 동용진면(東用津面)에 내려와 약 20년간 거주했다. 1411년 (태종 11년), 본부인 여흥 민씨의 죽음을 전해 듣고 병마사를 지낸 춘천부 출신 박인간(朴仁幹)의 딸과 혼인했다고 알려져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박인간의 형 박도간(朴道幹)의 서녀를 첩으로 삼은 것이었다.
1416년 (태종 16년), 태종은 회안대군의 작위와 공신녹권, 직첩, 그리고 아들 의령군의 직첩을 모두 회수하였다. 회안대군은 한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며, 1418년 (세종 즉위년)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뒤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주문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이후 심종 등과 연락하며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421년 (세종 3년) 4월 10일 (음력 3월 9일), 회안대군은 홍주 (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병사했다. 태종의 권고로 와병 중에 상경하던 중 홍주군 은진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지관을 보내 시신은 전주부 동용진면 금상동 법사산(현 전주시 덕진구)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선원보략에서 퇴출된 상태였으며, 사망 당시 복권되지는 못했다.
2. 사후 평가 및 복권
회안대군 사망 이후 그의 후손들은 여러 차례 그의 신원(伸冤)과 왕족으로서의 복권(復權)을 상소하였다. 1513년 (중종 8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회안대군 후손들의 복권 요청을 중종에게 올렸으나 묵살되었다.
1605년 (선조 38년), 회안대군의 후손들이 선조에게 상소하여 선원록에 넣어줄 것을 청하자, 선조는 그가 태조의 후손임을 인정하여 선원록 수록을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1607년부터 그의 이름이 선원록에 포함되었다. 또한 적순부위(迪順副尉)를 지낸 4대손 이유(李愈한국어)의 상소로 선조는 그의 사당인 숭덕사(崇德祠한국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2호)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회안대군의 후손들은 여전히 군역(軍役)에 징집되었고, 1640년 (인조 18년) 상소를 올려 비로소 징역에서 면제되었다.
1863년 (철종 14년)에는 판서 신석우(申錫憂한국어)의 상소로 양희공(良僖公)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869년 (고종 6년)에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내려졌다. 1872년 (고종 9년)에는 고종에 의해 영종정경부사(領宗正卿府事)의 증직(贈職)이 추가되었다. 현재 그의 묘소는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23호인 회안대군묘로 지정되어 있다.
회안대군의 첫 부인 여흥 민씨의 묘소는 여주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실전되었다. 둘째 부인 밀양 황씨의 묘소는 서산군 사현리 갑좌에 있으며, 셋째 부인 김포 금씨의 묘소는 전주부에 회안대군과 상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3. 가족 관계
회안대군은 여러 배우자와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가족 관계는 조선 왕실의 복잡한 계보를 보여준다.
3.1. 부모 및 형제
- 조부: 환조 이자춘(李子春한국어)
- 조모: 의혜왕후 최씨(崔氏한국어)
- 아버지: 태조 이성계(李成桂한국어)
-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韓氏한국어)
- 외조부: 안천부원군 한경(韓卿한국어)
- 외조모: 삭녕 신씨 삼한국대부인(朔寧 申氏 三韓國大夫人한국어)
- 형: 진안대군 이방우(李芳雨한국어)
- 형: 영안대군 이방과(李芳果한국어) (→ 조선 정종)
- 형: 익안대군 이방의(李芳毅한국어)
- 동생: 정안대군 이방원(李芳遠한국어) (→ 조선 태종)
- 동생: 덕안대군 이방연(李芳衍한국어)
- 동생: 경신공주
- 동생: 경선공주
3.2. 배우자 및 자녀
- 정부인 :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한국어, ? ~ 1407년)
- 아버지 : 판서 증(贈)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민선(閔璿한국어)
- 장남 : 의령군 이맹중(李孟衆한국어, 1385년 2월 15일 ~ 1423년 7월 11일)
- 며느리 :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개성 왕씨 왕균(王均한국어)의 딸
- 며느리 : 주부(主簿) 한기(韓綺한국어)의 딸 청주 한씨
- 손자 : 영평정(永平正) 이온(李瑥한국어)
- 손자며느리 : 동래 정씨
- 1계부인 :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密陽黃氏한국어)
- 아버지 : 판서 황형(黃亨한국어)
- 차남 : 창녕군 이태(李泰한국어, 1389년 ~ 1451년 10월 15일)
- 며느리 : 판관(判官) 박무현(朴武賢한국어)의 딸 밀양부인
- 손자 : 덕림정(德林正) 이백(李伯한국어)
- 손자며느리 : 장성 노씨
- 손자 : 호산정(壺山正) 이회(李會한국어)
- 손자며느리 : 장성 노씨
- 며느리 : 판관(判官) 박무현(朴武賢한국어)의 딸 밀양부인
- 장녀 : 성혜옹주(誠惠翁主한국어, ? ~ 1431년)
- 사위 : 상호군(上護軍) 조신언(趙愼언한국어)
- 외손자 : 조묵(趙默한국어)
- 사위 : 상호군(上護軍) 조신언(趙愼언한국어)
- 차녀 : 신혜옹주(信惠翁主한국어)
- 사위 : 군수(郡수) 이대생(李大生한국어)
- 삼녀 : 양혜옹주(良惠翁主한국어)
- 사위 : 부사(府使) 박경무(朴景武한국어)
- 2계부인 :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金浦琴氏한국어, 1388년 7월 19일 ~ 1458년 4월 18일)
- 아버지 : 정랑(正郎) 금인배(琴仁排한국어)
- 삼남 : 금성군 이선(李善한국어, 1409년 ~ ?)
- 며느리 : 장흥 조씨
- 손자 : 장산정(長山正) 이형(李衡한국어)
- 손자며느리 : 문화 유씨
- 손자 : 평산정(平山正) 이말(李末한국어)
- 손자며느리 : 장수 황씨
- 며느리 : 장흥 조씨
- 사남 : 금산군 이중군(李重軍한국어, 1413년 2월 9일 ~ 1478년 9월 18일)
- 며느리 : 예조정랑(禮曹正郎) 조연(趙連한국어)의 딸 장흥 조씨
- 손자 : 정안정(定安正) 이분(李奮한국어)
- 손자며느리 : 동래 정씨
- 손자 : 정평군 이종동(李從同한국어)
- 손자며느리 : 남양 홍씨
- 손자며느리 : 김해 김씨
- 손녀 : 전주 이씨
- 손녀사위 : 진사(進士) 신석정(申碩鼎한국어)
- 며느리 : 예조정랑(禮曹正郎) 조연(趙連한국어)의 딸 장흥 조씨
- 딸 : 이름 미상
- 첩부인 : 춘천 박씨(朴氏한국어)
- 아버지 : 충주목사(忠州牧使) 박도간(朴道幹한국어)의 서녀
- 첩부인 : 백종(白種한국어)
4. 대중문화 속 묘사
회안대군은 여러 한국의 역사 드라마에서 비중 있게 묘사되었다.
- 김주영: MBC 드라마 《추동궁 마마》(1983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1996년 ~ 1998년)
- 강신효: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2015년 ~ 2016년) (아역: 김상우)
- 이현균: JTBC 드라마 《나의 나라》(2019년)
- 조순창: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2021년 ~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