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황인성(黃寅性, 1926년 1월 9일 ~ 2010년 10월 11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김영삼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전라북도 무주군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 4기 출신이며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조달청장, 전라북도지사,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등 주요 행정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입법 활동에도 참여했다. 1993년 문민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우루과이 라운드 농산물 협상 과정에서 발생한 쌀 시장 개방 논란의 책임을 지고 10개월 만에 사퇴했다. 총리직 사퇴 후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고문 및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장 등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생애는 군인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관료와 정치인으로서 대한민국 발전 과정에 기여했으나, 군사정권과의 연관성 및 쌀 개방 파문 등 비판적 평가도 함께 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황인성은 1926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창원 황씨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4기로 졸업했으며, 이후 국방대학교 대학원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또한, 미국 육군전략대학과 피츠버그 대학교에서도 수학하며 전문성을 길렀다.
3. 군 경력
황인성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58년 육군중앙경리단 단장을 맡았고, 1959년에는 육군경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60년에는 육군본부 경리감으로 재직했으며, 1961년에는 초대 조달청장으로 임명되어 군인 신분으로 공직을 겸임했다. 1963년에는 국방부 재정국장을 지냈고, 1968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며 20여 년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4. 공직 경력
황인성은 군 예편 이후 본격적으로 공직에 입문하여 다양한 행정 및 관료직을 수행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4.1. 주요 관직 수행
그는 1961년 초대 조달청장을 시작으로 공직 생활을 이어갔다. 1970년에는 무임소장관실 보좌관을 지냈고, 1973년에는 국무총리비서실장으로 재직했다. 같은 해 관선 전라북도지사로 임명되어 1978년까지 5년간 전라북도정을 이끌었다. 1978년에는 제24대 교통부 장관에 취임하여 1979년까지 재임했다. 이후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85년에는 제37대 농수산부 장관에 임명되어 1986년까지 재직했다. 1987년 농수산부가 농림수산부로 개편되면서 초대 농림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5. 정치 경력
황인성은 공직 경력과 함께 국회의원 및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5.1. 국회의원 활동
그는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제11대, 제12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3선 의원의 경력을 쌓았다.

- 제11대 국회의원 (1981년):**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북도 진안군·무주군·장수군 지역구에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49,690표(56.61%)를 득표하며 1위로 당선되었다.
- 제12대 국회의원 (1985년):**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국구(비례대표)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의 전국 득표율 35.2%에 힘입어 전국구 10번으로 당선되었다.
- 제14대 국회의원 (1992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라북도 진안군·무주군·장수군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여 32,280표(51.05%)를 얻어 1위로 당선되었다.
5.2. 정당 활동
황인성은 군사정변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정의당에 참여했으며, 민주정의당 전북지역위원장을 지냈다. 국회에서는 교통체신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1992년 5월 21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 민주자유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6. 국무총리 재임
황인성은 김영삼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문민정부의 시작을 함께했다.
6.1. 재임 및 사퇴
황인성은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제25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문민정부의 첫 국무총리로서 개혁과 변화의 시대를 이끄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논란은 우루과이 라운드 농산물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쌀 시장 개방 문제였다. 정부는 쌀 시장 개방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국제적인 압력과 협상 결과로 인해 부분적인 개방이 불가피해졌다. 이로 인해 농민들과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큰 반발이 일어났고, 사회 전반에 걸쳐 격렬한 논란이 확산되었다. 황인성 총리는 이 파문의 책임을 지고 1993년 12월 16일, 취임 10개월 만에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했다. 그의 사퇴는 문민정부 초기 국정 운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쌀 개방 문제는 이후로도 한국 사회의 주요 쟁점으로 남았다.
7. 정치 활동 이후 및 말년
총리직 사퇴 이후 황인성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기업 고문 및 사회 활동에 전념하며 말년을 보냈다.
7.1. 기업 고문 및 사회 활동
총리직 사퇴 후 민주자유당 총재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1996년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상임고문을 역임하며 재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2002년부터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는 데 힘썼다. 2008년부터는 숭모회 명예이사장을 맡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기업 고문을 넘어, 국가 정체성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는 의미 있는 행보로 평가된다.
8. 평가 및 영향
황인성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 시기와 문민정부 초기를 아우르는 격동의 시기에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는 군인으로서 국가 안보에 기여했으며, 관료와 정치인으로서 국가 행정과 입법 활동에 참여하며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발전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8.1. 비판 및 논란
그러나 그의 공직 생활에는 비판적인 시각과 논란도 존재한다. 특히 5·16 군사정변 이후 민주정의당에 참여하며 군사정권과 연관된 경력은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또한, 국무총리 재임 시 발생한 쌀 시장 개방 파문은 그의 정치적 책임과 함께 당시 정부의 농업 정책에 대한 비판을 야기했다. 이 사건은 농업 강국을 지향하던 대한민국의 농업 정책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와 직결되어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피하기 어렵다.
9. 사망
황인성은 2010년 10월 11일 서울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