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교육
홍덕영은 1926년 5월 5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당시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축구 선수로서의 기량을 갈고닦았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초기에 수비수로 뛰었으나, 이후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다. 그의 키는 1.76 m였다.
2. 선수 경력
홍덕영은 한국 축구사에서 중요한 시기인 광복 직후와 한국 전쟁 이후 혼란 속에서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한국 축구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2.1. 클럽 경력
홍덕영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1947년 서울 FC에서 활약했다. 이후 조선방직 축구단 소속으로 뛰면서, 팀의 주요 대회 성적에 공헌했다. 조선방직은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1952년, 1953년, 1954년에 연속으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당시 한국 축구의 강호로 이름을 알렸다.
2.2. 국가대표 경력
홍덕영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골키퍼로 총 17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한국 축구의 첫 국제 무대 데뷔를 함께하며 중요한 기록들을 남겼다.

Korea Football Association대한축구협회영어가 1946년 국가대표팀을 창단할 당시 홍덕영은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대표팀에 합류했다. 1947년 4월에는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임시 대표팀이었던 서울 FC의 일원으로 상하이 원정 경기에 참여하여 상하이 아마추어 팀들과 5경기를 치렀고, 홍덕영은 이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2.2.1. 1948 런던 올림픽
홍덕영은 1948년 하계 올림픽 축구 대회에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이 국제 축구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대회였다. 1라운드에서 당시 북중미의 강호인 멕시코를 5-3으로 꺾으며 대한민국 축구의 첫 국제 대회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8강전에서는 우승팀이었던 스웨덴을 만나 0-12로 패배하며 대량 실점을 기록했다. 이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국제 경기 최다 점수 차 패배로 기록되었다. 스웨덴의 48개 슈팅 세례 속에서 홍덕영은 고군분투했으며, 경기 후 가슴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2.2.2. 1954 FIFA 월드컵
한국 전쟁이 휴전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54년, 홍덕영은 1954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대한민국은 예선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1차전 5-1 승리, 2차전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1승 1무로 한국 축구 역사상 첫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홍덕영은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렸던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일본과의 경기를 자신의 선수 생활 중 가장 인상적인 경기로 기억하며, "일본 땅에 처음 펄럭이는 태극기와 애국가 연주를 들으면서 느꼈던 뭉클한 기억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준비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 선수단은 항공권 발급이 늦어져 첫 경기 시작 불과 10시간 전에 스위스에 도착했으며, 총 46시간의 비행으로 인해 심한 피로에 시달렸다. 첫 경기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헝가리의 '마법의 마자르'를 만나 0-9로 대패했다. 이 경기에서는 4명의 한국 선수들이 과도한 피로로 인해 경기 중 필드를 떠났으며, 당시에는 교체 시스템이 없어 대한민국은 7명의 선수만으로 경기를 마무리해야 했다. 홍덕영은 푸슈카시 페렌츠의 강력한 슈팅에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김용식 감독이 선수들의 체력 문제를 고려하여 7명의 선수를 교체했으나, 튀르키예에 0-7로 다시 한번 대패했다. 홍덕영은 이 두 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총 16골을 실점했는데, 이는 FIFA 월드컵 단일 대회에서 골키퍼가 기록한 최다 실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회 | 경기 수 | 실점 수 |
---|---|---|
친선 경기 | 7 | 0 |
아시안 게임 | 4 | 0 |
하계 올림픽 | 2 | 12 |
FIFA 월드컵 예선 | 2 | 3 |
FIFA 월드컵 본선 | 2 | 16 |
총계 | 17 | 31 |
2.2.3. 1954 아시안 게임
홍덕영은 195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1954년 아시안 게임 축구 대회에도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은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축구 역사상 아시안 게임 첫 메달을 기록하는 데 홍덕영이 크게 공헌했다.
3. 은퇴 이후 경력
홍덕영은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3.1. 심판 경력
선수 생활을 은퇴한 홍덕영은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약 10년간 국제 심판으로 활동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에는 FIFA로부터 심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2. 감독 경력
심판 활동과 병행하여 홍덕영은 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 축구팀의 감독을 맡아 후배들을 지도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당시 아마추어 팀이었던 서울은행 축구단의 감독을 역임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또한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아 국가대표팀을 이끌기도 했다.
3.3. 행정가 경력
홍덕영은 대한축구협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한국 축구 행정에도 기여했다. 그는 1960년, 1962년, 1967년, 그리고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대한축구협회 집행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발전에 공헌했다. 또한 자국에서 열린 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월드컵 4강 신화 달성에 이바지했다.
4. 개인사와 사망
홍덕영은 선수 생활 말년에 시력에 문제가 생겨 경기를 뛸 때 안경을 착용해야 할 정도였다. 말년에 당뇨병 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완전히 잃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는 등 힘겨운 투병 생활을 했다. 그는 2005년 9월 13일 서울에서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5. 수상 및 영예
홍덕영은 선수와 행정가로서 다양한 수상과 영예를 얻으며 한국 축구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 조선방직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준우승: 1952년, 1953년, 1954년
-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54년
- 개인
- FIFA 심판 특별상: 1974년
-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헌액: 2005년
6. 평가와 유산
홍덕영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국 축구의 첫 세대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선구자로서, 한국 축구가 국제 무대에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마다 중심에 있었다. 특히 1948년 런던 올림픽과 1954년 FIFA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비록 결과는 아쉬웠지만,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와 처음 만나며 경험을 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수 은퇴 후에도 그는 국제 심판, 대학 및 프로팀 감독, 그리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및 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축구의 행정 발전과 후진 양성에도 헌신했다. 2005년에는 김용식, 거스 히딩크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20세기 한국 축구의 '거목 7인' 중 한 명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이름은 한국 축구의 시작과 도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7. 외부 링크
- [https://worldreferee.com/referee/duk_young_hong/ WorldReferee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