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 및 어린 시절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은 1966년 2월 5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주의 온다리비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골프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가 태어난 다음 날 가족의 집 바로 옆에 레알 골프 클럽 데 산 세바스티안 골프 코스가 개장했다. 그의 아버지 가스파르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골프 클럽의 그린 키퍼(코스 관리인)로 일했으며, 어머니 또한 그곳에서 근무했다.
올라사발은 2세 때 짧게 자른 클럽으로 골프공을 치기 시작했으며, 6세부터는 늦은 오후에 골프 코스에서 연습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골프를 접하고 재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 아마추어 경력
프로 데뷔 전 올라사발은 아마추어 선수로서 스페인을 대표하여 다양한 국제 대회에 참가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2.1. 스페인 국가대표 활동
올라사발은 아마추어 시절 모든 연령대에서 스페인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그는 16세의 나이에 1982년 아이젠하워 트로피에 스페인 대표로 처음 출전했으며, 2년 뒤인 1984년에도 다시 참가했다. 1983년과 1985년에는 유럽 아마추어 팀 챔피언십에 출전했으며, 특히 1985년 스웨덴 할름스타드에서 열린 대회 준결승전에서 콜린 몽고메리를 상대로 13번 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하며 3홀 남기고 2홀 차로 승리하기도 했다. 비록 스코틀랜드가 팀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또한 그는 1981년, 1982년, 1983년에 자크 레글리스 트로피에 유럽 대륙 대표로, 1982년과 1984년에는 유럽 유스 팀 챔피언십에 스페인 대표로 참가했다. 1984년에는 세인트 앤드류스 트로피에도 유럽 대륙 대표로 나섰다.
2.2. 주요 아마추어 대회 우승
올라사발은 아마추어 시절 여러 주요 타이틀을 획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83년 스코틀랜드 글렌버비 골프 클럽에서 열린 보이즈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같은 해 이탈리안 오픈 아마추어 챔피언십, 비아리츠 컵, 스페인 국제 아마추어 챔피언십, 스페인 아마추어 클로즈드 챔피언십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에는 잉글랜드 리버풀 폼비 골프 클럽에서 열린 디오픈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18세의 나이로 콜린 몽고메리를 5홀 차로 4홀 남기고 꺾고 우승했다. 같은 해 벨기에 국제 유스 챔피언십과 스페인 국제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도 우승을 추가했다. 이듬해인 1985년 잉글랜드 갠턴 골프 클럽에서 열린 브리티시 유스 오픈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브리티시 보이즈, 브리티시 유스, 브리티시 아마추어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브리티시 유스 타이틀을 획득하기 한 달 전, 그는 잉글랜드 샌드위치의 로열 세인트 조지스 골프 클럽에서 열린 1985년 디오픈 챔피언십에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공동 25위를 기록하며 아마추어 선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3. 프로 경력
3.1. 프로 데뷔 및 유럽 투어 성공
올라사발은 1985년 프로로 전향했다. 1986년 신인 시즌에 그는 20세의 나이로 유럽 투어 상금 순위 2위를 기록하며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 해에 그는 스위스에서 열린 에벨 유럽 마스터스 스위스 오픈에서 프로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어 산요 오픈에서도 우승하며 2승을 기록했다. 이후 9시즌 동안 두 해를 제외하고 매년 상금 순위 10위 안에 들었으며, 1989년에는 다시 2위를 기록했다. 그는 1996년 발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재기에 성공하여 1997년, 1999년, 2000년에도 상금 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그는 유럽 투어에서 통산 23승을 거두며 역대 9번째로 많은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300주 이상 세계 골프 랭킹 10위 안에 머물렀다. 만약 그가 1991년 마스터즈 토너먼트에서 이언 우스남을 이겼더라면 (그는 2위를 기록했다) 세계 랭킹 1위가 될 수도 있었다.
3.2. PGA 투어 성과
1990년, 올라사발은 당시 드물게 PGA 투어에 참가하여 오하이오주 애크런의 파이어스톤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NEC 월드 시리즈 오브 골프에 초청 선수로 출전했다. 그는 첫 라운드에서 코스 레코드인 61타를 기록했으며, 매 라운드 후 합계 코스 및 토너먼트 기록을 경신하며 최종적으로 18언더파 262타로 2위 래니 워드킨스를 12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워드킨스는 올라사발에게 축하를 건네면서 그가 즉시 유럽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2001년부터 올라사발은 유럽 투어 회원 자격을 유지하면서 PGA 투어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PGA 투어에서 약 200.00 만 USD를 벌어들여 상금 순위 24위를 기록하는 등 견고한 한 해를 보냈다. 그는 PGA 투어에서 통산 6승을 거두었으며, 이 중 5승은 그가 정식 투어 회원이 되기 전에 달성한 것이다. 2006년에는 다시 세계 랭킹 15위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3.3. 메이저 대회 우승
올라사발의 두 차례 메이저 대회 우승은 모두 미국에서 열린 마스터즈 토너먼트에서 나왔다. 그는 1994년과 1999년에 마스터즈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그린 재킷을 입었다. 1994년 우승은 세베 발레스테로스에 이어 두 번째로 마스터즈에서 우승한 스페인 선수가 되었다. 이 두 번의 우승으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디오픈 아마추어 챔피언십 우승자 중 프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단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다른 여러 차례 마스터즈에서도 상위권을 기록했다. 또한 2000년 발할라 골프 클럽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 3라운드에서 63타를 기록하며 대회 최저 라운드 기록(공동)을 보유하고 있다.
| 연도 | 대회 | 54홀 성적 | 우승 스코어 | 우승 마진 | 2위 | 
|---|---|---|---|---|---|
| 1994 | 마스터즈 토너먼트 | 1타 뒤진 상황 | -9 (279) | 2타 | 톰 리먼 | 
| 1999 | 마스터즈 토너먼트 | 1타 앞선 상황 | -8 (280) | 2타 | 데이비스 러브 3세 | 
3.4. 라이더컵 선수 활동
올라사발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총 7차례 라이더컵 유럽 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동료 스페인 선수인 세베 발레스테로스와 수년간 유명한 파트너십을 형성했으며, 2006년에는 세르히오 가르시아와도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이루었다.
3.5. 라이더컵 주장
올라사발은 일리노이주 메디나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2012 라이더컵에서 유럽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유럽 팀은 둘째 날 10-4로 뒤지고 있었고, 마지막 날 경기를 시작할 때도 10-6으로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올라사발의 리더십 아래 유럽 팀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더컵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최종적으로 14.5 대 13.5로 승리했다.

올라사발은 이 승리에 대해 매우 감격스러워하며, 인터뷰에서 이것이 자신의 골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이 승리는 그의 늦은 친구 세베 발레스테로스에게 영감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그는 승리를 발레스테로스에게 바쳤다. 그는 이후 다음 라이더컵에서는 주장직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3.6. 부상 및 복귀
1995년 후반부터 올라사발은 발 질환으로 고통받기 시작했으며, 결국 류마티스성 다발성 관절염 진단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1996년 시즌에 전혀 경기를 뛸 수 없었으며, 투병 기간 동안 걷는 것조차 어려워 거의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1997년 3월 초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을 통해 18개월 만에 복귀한 그는 3월 23일 투레스파냐 마스터즈 오픈 데 카나리아에서 우승하며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다. 1999년 마스터즈 토너먼트에서 데이비스 러브 3세와 그레그 노먼의 추격을 뿌리치고 5년 만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보행조차 어려웠던 투병 생활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완성했다. 2006년 마스터즈에서 공동 3위를 기록한 후에도 그는 다시 부상에 시달리며 투어 대회 출전이 제한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3.7. 기타 프로 대회 우승
올라사발은 유럽 및 PGA 투어 외에도 다른 프로 대회에서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일본 골프 투어의 미쓰이 스미모토 VISA 태평양 마스터스에서 1989년과 1990년에 걸쳐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95년에는 세베 발레스테로스와 함께 투르누아 페리에 드 파리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또한 올라사발은 1999년 라이더컵 유럽 팀의 콩코드 항공편으로 미국으로 이동하던 중, 기내에서 세계 최장 거리 퍼트 기록을 세웠다. 그는 기내 전체 길이를 가로지르는 퍼트에 성공했으며, 공은 26.17초 동안 움직였다. 이 시간 동안 콩코드는 시속 2044 km/h (1270 mph)의 속도로 14857 m (9.232 mile)를 비행했으며, 이는 1997년 미국 골퍼 브래드 팩슨이 세운 이전 기록인 13679 m (8.5 mile)를 넘어선 것이다.
올라사발은 스페인 내 다수의 골프 코스 설계에도 참여했다. 2004년 EMC 월드컵 개최지로 사용된 세비야의 레알 클럽 데 골프 데 세비야는 그가 설계한 코스이다.
4. 팀 대회 참가
올라사발은 아마추어 및 프로 시절에 걸쳐 다양한 국가 대항전 및 팀 대회에 참가했다.
4.1. 아마추어 팀 대회
- 아이젠하워 트로피 (스페인 대표): 1982년, 1984년
- 자크 레글리스 트로피 (유럽 대륙 대표): 1981년, 1982년, 1983년
- 유럽 아마추어 팀 챔피언십 (스페인 대표): 1983년, 1985년
- 유럽 유스 팀 챔피언십 (스페인 대표): 1982년, 1984년
- 세인트 앤드류스 트로피 (유럽 대륙 대표): 1984년
4.2. 프로 팀 대회
- 알프레드 던힐 컵 (스페인 대표):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2년, 1993년, 1998년, 1999년 (우승), 2000년 (우승)
- 포 투어스 월드 챔피언십 (유럽 대표): 1987년, 1989년
- 라이더컵 (유럽 대표):- 선수: 1987년 (우승), 1989년 (무승부; 트로피 유지), 1991년, 1993년, 1997년 (우승), 1999년, 2006년 (우승)
- 비(非)경기 주장: 2012년 (우승)
 
- 월드컵 (스페인 대표): 1989년, 2000년
- 세베 트로피 (유럽 대륙 대표): 2000년 (우승), 2002년, 2003년, 2005년 (경기 주장), 2013년 (우승, 비(非)경기 주장)
- 로열 트로피 (유럽 대표): 2009년 (비(非)경기 주장), 2012년 (경기 주장), 2013년 (비(非)경기 주장)
5. 수상 및 영예
5.1.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헌액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은 2009년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국제 투표에서 56%의 득표율을 얻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그의 뛰어난 선수 경력과 골프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은 결과이다.
5.2. 주요 수상 경력
- 헨리 코튼 경 신인상 (Sir Henry Cotton Rookie of the Year): 1986년
- 아스투리아스 공주상 (Prince of Asturias Award): 2013년- 2013년 6월 19일, 올라사발은 선수로서의 업적과 2012년 라이더컵 팀의 리더로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페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스포츠 명예인 아스투리아스 공주상을 수상했다. 1987년 시상식이 시작된 이래 골프 선수로는 세베 발레스테로스(1989년 수상)에 이어 두 번째로 이 상을 받았다.
 
6. 평가 및 영향력
6.1. 부상 극복과 재기
올라사발의 경력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는 심각한 류마티스성 다발성 관절염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스토리이다. 1996년 한 해를 통째로 쉬어야 할 정도로 심각했던 그의 발 질환은 그를 거의 침대에 누워 지내게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투지로 이를 이겨냈고, 1997년 투어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승을 차지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특히 1999년 마스터즈 토너먼트에서의 두 번째 우승은 이러한 부상 극복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불굴의 의지와 투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는 단순히 스포츠적 성과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역경을 이겨내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6.2. 라이더컵 주장으로서의 영향력
2012년 라이더컵에서 올라사발이 보여준 리더십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이다. 유럽 팀이 미국 팀에 10-6으로 크게 뒤진 상황에서 마지막 날 싱글 매치 플레이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팀원들에게 세베 발레스테로스의 정신을 불어넣으며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그의 감성적이고 강력한 동기 부여는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이는 14.5 대 13.5라는 믿기 어려운 승리로 이어졌다. 이 승리는 '메디나의 기적'으로 불리며 라이더컵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올라사발의 리더십은 단순히 전술적 지시를 넘어 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선수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었다.
6.3. 골프계에 미친 영향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은 그의 뛰어난 플레이 스타일, 특히 정교한 쇼트 게임과 퍼팅으로 유명했다. 그는 세베 발레스테로스와 함께 스페인 골프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그들의 파트너십은 라이더컵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조합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올라사발은 스페인 골프의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골프 코스를 설계하며 후대에까지 그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그의 부상 극복 스토리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정신력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라이더컵 주장으로서의 리더십은 팀 스포츠에서 동기 부여와 단결의 힘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되었다. 그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아스투리아스 공주상을 수상하며 골프계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선수이자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7. 관련 항목
- 골프
- 마스터즈 토너먼트
- 라이더컵
- 세베 발레스테로스
-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