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출생과 어린 시절
훗날 고려 현종이 되는 왕순(王詢)은 992년 8월 1일(음력 7월 1일)에 아버지 안종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종의 가계는 매우 복잡한데, 아버지 왕욱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고려 경종의 네 번째 왕비였다. 즉,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 관계였으며, 정상적인 혼인이 아닌 불륜 관계였다.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 궁궐 밖 개경의 왕륜사(王輪寺) 근처 사저에서 살던 중, 이웃에 살던 왕욱과 자주 교류하며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때 헌정왕후가 곡령(鵠嶺)에 올라 소변을 누었더니 온 나라에 흘러넘쳐 모조리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를 해몽한 점쟁이는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과부인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당시 왕비는 왕과 사별했어도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경종의 왕비이자 당시 국왕 성종의 동생이었던 헌정왕후의 혼외 임신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헌정왕후의 집안 사람들은 왕욱과 헌정왕후가 함께 있을 때 왕욱의 집에 방화를 하여 이 임신 사실을 숨기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자 성종은 왕욱을 사수현(泗水縣, 현 사천시)으로 귀양 보냈다. 왕욱이 귀양 간 지 얼마 뒤인 992년 8월 1일, 헌정왕후는 왕순을 낳고 곧바로 사망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외삼촌인 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혹은 유모)에게 맡겨졌다가, 어느 날 성종의 명으로 궁에 들어와 성종과 대면하게 되었다. 이때 왕순이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며 '아비, 아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성종은 동생 헌정왕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인 사수현에서 함께 살았고, 왕욱이 사망한 이듬해인 997년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개경으로 돌아온 왕순은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2살 때인 목종 6년(1003년),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 그 아이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왕순은 천추태후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숭교사(崇敎寺)에 보내져 강제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에 신혈사(神穴寺, 현재 진관사)로 거처를 옮겼다.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는 왕순을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곳에 대피시킨 뒤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게 했다. 그의 이복 누나인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는 현화사(玄化寺)에서 부모를 위해 기도했다.
1.2. 즉위와 초기 통치
1009년(목종 12년) 3월 2일, 서북면도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김치양 일파를 모두 참수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강조는 폐위된 목종을 충주로 유배 보냈으며, 목종은 충주로 가는 도중 파주 적성현에서 강조의 명령을 받은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같은 날, 강조와 최항, 채충순 등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순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즉위 후 아버지 왕욱을 안종으로, 어머니 헌정왕후를 헌정왕태후로 추존하고, 두 사람을 원릉(元陵)에 합장했다. 또한 성종의 두 딸인 원정왕후 김씨와 원화왕후 최씨를 왕비로 맞이했다. 즉위 초기인 1009년 2월부터 이듬해 1010년 11월까지는 강조가 실권을 장악했다. 1010년에는 최항의 건의로 30년간 중단되었던 국가 불교 행사 팔관회가 부활했다.
현종 즉위 다음 해인 1010년,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고려를 침략했다. 그러나 실제 침략 이유는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전에 고려에 반환했던 강동 6주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요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현종은 양규를 도순검사로 삼아 흥화진(興化鎭)을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는 동주(東州)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우다 패하고 사로잡혔다. 강조는 요 성종에게 항복을 거부하여 처형되었고, 이현운은 항복했다. 거란군은 서경(西京, 현 평양)을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황주, 통주, 평주를 차례로 점령한 뒤 개경을 포위했다.
개경이 점령당하고 불타는 위기 상황이 되자, 현종은 강감찬의 권유에 따라 항복하지 않고 수도를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때의 피난은 고려 역사상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활을 쏘는 위협을 받았으며, 공주를 떠날 때는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 이 피난길에 공주에서 김은부를 만나 그의 딸들인 원성왕후 김씨, 원혜왕후 김씨, 원평왕후 김씨를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겨우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고려 중앙 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이 거란군에 맞서 싸웠다.

흥화진의 양규는 700명의 병력으로 곽주(郭州)를 탈환하고 거란군 6천 명을 물리쳤으며, 거란에 붙잡혀 있던 고려인 포로 7천 명을 구출하여 동주로 이주시켰다. 이후 양규는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의 퇴각로를 막고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거란군 6천5백 명을 섬멸하고 3만 명의 포로를 구출했다. 그러나 양규와 김숙흥은 계속된 전투에서 화살이 떨어져 전사했다. 요 성종은 고려의 항복 약속을 받고 1011년 2월에 철수했다. 현종은 개경으로 환도했으며, 피난길에 호종했던 지채문과 장연우 등 공신들을 포상했다. 천추태후는 황주로 돌아갔다.
1.3. 거란의 침입과 국난 극복
고려는 거란의 요구(북방 영토 반환, 현종의 입조)를 거부하며 10년간 대치했다. 이 기간 동안 고려와 거란 양측은 전쟁 준비에 힘썼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6개의 성곽을 쌓았고, 천리장성을 건설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천리장성은 의주,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덕, 영삭, 정융, 영원, 평로, 삭주, 맹주, 운주, 청새, 안수, 영흥, 요덕, 정변, 화주 등을 연결하는 약 400 km에 달하는 거대한 방어 시설이었다.
1018년 여름,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략하기 위해 압록강에 다리를 건설했다.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명의 거란군이 이 다리를 건너 고려 영토로 진입했으나, 고려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현종은 대신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는데, 많은 신하들이 지난 전쟁의 피해가 너무 커서 평화 협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71세의 노장 강감찬은 적의 수가 이전보다 훨씬 적으므로 전쟁을 주장하며 병부시랑(兵部侍郎) 직을 자원했다. 현종은 강감찬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민첨과 함께 약 20만 8천 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거란군에 맞서게 했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 근처의 작은 계곡에 둑을 쌓아 물을 막아두었다. 거란군이 절반쯤 건너왔을 때 둑을 터뜨려 거란군을 수장시켰다. 이어서 강감찬과 강민첨은 1만 2천 명의 기병으로 거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퇴각로를 차단했다. 거란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하하여 서경을 지나 황주에 이르렀다. 황주에서는 천추태후가 이끄는 고려 민병대가 밤낮으로 거란군을 괴롭혔다. 거란군은 개경까지 진격했으나, 강화된 개경의 방어선과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소배압은 보급선이 끊기고 계속되는 고려군의 공격에 지쳐 철수를 결정했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귀주(龜州)를 지나 철수할 것을 예상하고, 1019년 3월 10일 귀주성 근처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기다렸다. 강감찬과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龜州)에서 퇴각하는 거란군 9만 명을 총공격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소배압은 수천 명의 병력만 이끌고 겨우 탈출했다. 이 전투가 바로 귀주대첩이다. 귀주대첩은 살수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귀주대첩 이후 강감찬은 개경으로 돌아와 영웅 대접을 받았다.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으며, 고려와 요나라는 평화 시대를 맞이하며 문화적으로도 번영했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군 포로들은 고려 각지에 분리된 공동체에 정착하여 백정(白丁)이라는 최하층 계급으로 발전했다.
1029년, 요 성종이 발해 유민들에게 세금을 늘리려 하자, 발해의 7대손인 대연림이 요동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흥료국(興遼國)을 세우고 고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현종은 일부 고려군을 북쪽으로 보내 요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요나라 장수 야율복노에게 격퇴당했다. 현종은 이후 요나라와의 추가적인 군사적 대립을 포기하고, 흥료국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흥료국은 1030년에 요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피난 왔다.
1030년, 현종은 81세의 노장 강감찬을 고려의 승상으로 임명했다. 1031년, 현종은 4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宣陵)이다. 그의 장남인 태자 왕흠이 왕위를 계승했다.
1.4. 국내 정치 및 제도 정비
현종 즉위 초 강조의 군사 정권이 실권을 장악했으나, 거란과의 전쟁 이후 현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국내 정치 및 제도 정비에 힘썼다.
1014년 11월, 제2차 고려-거란 전쟁으로 군비가 크게 증가하여 관리들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지자, 현종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경군(京軍) 무신들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았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과 김훈 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정책을 실행한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붙잡아 대궐로 난입했다. 이들은 현종 앞에서 장연우와 황보유의에게 매질을 하고,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현종은 일단 이들의 요구를 수락했다.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서경에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자 이들을 주살했다. 이 사건으로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를 통해 문치주의가 확고해졌다.
현종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며 지방 세력을 규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1022년에는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으로,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켰다.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비했다. 또한 성종 이후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1029년 8월, 재위 20년에는 23 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羅城)을 쌓아올렸다. 1011년 8월, 재위 2년째에는 개경의 황성을 증축하고 고려 태조의 뜻을 받들어 장락궁에 새로 황성을 쌓았다.
경제 정책으로는 농상(農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세력 기반이 취약했던 현종은 자신의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을 중용하여 요직에 발탁했다. 거란과 변방 야인들의 침입에 대응하여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취약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했다.
1.5. 문화 및 불교 진흥
현종은 국가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 진흥에도 힘썼다. 1018년에는 초조대장경의 간행을 명했다. 이는 6천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불경으로, 부처의 도움을 빌려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 대장경은 불교 교리의 가장 중요하고 완전한 편집본이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교종 대사찰인 현화사 건립을 지시했다. 불교 진흥과 더불어 유교 진흥에도 힘써 설총과 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게 했다. 오랜 여요전쟁의 여파로 소실된 고려실록을 재편찬하는 작업도 지시했다.
2. 가족 관계
고려 제8대 국왕 | 현종 원문대왕 顯宗 元文大王 | 출생 |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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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년 8월 1일 (음력 7월 1일) 고려 개성부 헌정왕후 사저 | 1031년 6월 17일 (음력 5월 25일) (38세) 고려 중경 정궁 중광전 |
2.1. 직계 조상 및 부모
생몰년 | 부모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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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안종 安宗 | 미상 - 996년 | 태조 신성왕후 김씨 | 추존 국왕 |
모 | 헌정왕후 황보씨 獻貞王后 皇甫氏 효숙왕태후 孝肅王太后 | 960년 이전 - 992년 | 대종 선의왕후 유씨 | 제5대 경종의 왕비 경종 사후 안종과 사통 |
2.2. 왕후 및 후궁
시호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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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비 | 원정왕후 김씨 元貞王后 金氏 | 선산 | 미상 - 1018년 | 성종 문화왕후 김씨 | 현종 원년(1009년) 왕비 책봉 |
제2비 | 원화왕후 최씨 元和王后 崔氏 | 경주 | 미상 | 성종 연창궁부인 최씨 | 원정왕후의 이복 자매 |
제3비 | 원성왕후 김씨 元成王后 金氏 원성왕태후 元成王太后 | 안산 | 미상 - 1028년 | 김은부 안산군대부인 이씨 | 덕종과 정종의 생모 |
제4비 | 원혜왕후 김씨 元惠王后 金氏 원혜태후 元惠太后 | 안산 | 미상 - 1022년 | 김은부 안산군대부인 이씨 | 문종의 생모 현종 16년(1025년) 추존 |
제5비 | 원용왕후 유씨 元容王后 柳氏 | 정주 | 생몰년 미상 | 경장태자 미상 | 현종 4년(1013년) 왕비 책봉 원정왕후 · 원화왕후의 친사촌 |
제6비 | 원목왕후 서씨 元穆王后 徐氏 | 이천 | 미상 - 1057년 | 서눌 이천군대부인 최씨 | 현종 13년(1022년) 왕비 책봉 서희의 손녀 |
제7비 | 원평왕후 김씨 元平王后 金氏 | 안산 | 미상 - 1028년 | 김은부 안산군대부인 이씨 | 원성왕후 · 원혜왕후의 동생 |
작호 | 이름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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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비 | 원순숙비 김씨 元順淑妃 金氏 | 경주 | 미상 - 1055년 | 김인위 미상 | 덕종 제1비 경성왕후의 생모 | |
귀비 | 원질귀비 왕씨 元質貴妃 王氏 | 개성 | 미상 | 왕가도 개성군부인 김씨 | 덕종 제2비 경목현비의 언니 | |
귀비 | 귀비 유씨 貴妃 庾氏 | 미상 | 미상 | 미상 | ||
궁인 | 궁인 한씨 宮人 韓氏 | 훤영 萱英 | 양주 | 미상 | 한인경 미상 | |
궁인 | 궁인 이씨 宮人 李氏 | 미상 | 미상 | 이언술 미상 | ||
궁인 | 궁인 박씨 宮人 朴氏 | 미상 | 미상 | 박온기 미상 |
2.3. 자녀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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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덕종 德宗 연경군 延慶君 | 흠 欽 | 1016년 - 1034년 | 원성왕후 김씨 | 경성왕후 김씨 경목현비 김씨 효사왕후 김씨 | 제9대 국왕 |
2 | 향춘전군 恒春殿君 | 수 秀 | 1016년 - 미상 | 원화왕후 최씨 | ||
3 | 정종 靖宗 평양군 平壤君 | 형 亨 | 1018년 - 1046년 | 원성왕후 김씨 | 용신왕후 한씨 용의왕후 한씨 용목왕후 이씨 | 제10대 국왕 |
4 | 문종 文宗 낙랑군 樂浪君 | 휘 徽 | 1019년 - 1083년 | 원혜왕후 김씨 | 인평왕후 김씨 인예왕후 이씨 | 제11대 국왕 |
5 | 정간왕 靖簡王 평양공 平壤公 개성국공 開城國公 | 기 基 | 1021년 - 1069년 | 원혜왕후 김씨 | 미상 | 추존 제후왕 |
6 | 검교태사 檢校太師 | 충 忠 | 미상 | 궁인 한씨 | 덕종의 딸 |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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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효정공주 孝靜公主 | 미상 - 1030년 | 원화왕후 최씨 | 미상 | ||
2 | 천수전주 天壽殿主 | 미상 | 원화왕후 최씨 | 미상 | ||
3 | 인평왕후 仁平王后 | 미상 | 원성왕후 김씨 | 문종 | 문종의 제1비 | |
4 | 경숙공주 景肅公主 | 미상 | 원성왕후 김씨 | 미상 | ||
5 | 효사왕후 孝思王后 | 미상 | 원혜왕후 김씨 | 덕종 | 덕종의 제3비 | |
6 | 효경공주 孝敬公主 | 미상 | 원평왕후 김씨 | 미상 | ||
7 | 경성왕후 敬成王后 | 미상 - 1086년 | 원순숙비 김씨 | 덕종 | 덕종의 제1비 | |
8 | 아지 阿志 | 미상 | 궁인 박씨 | 정민상 |
3. 평가 및 영향
3.1. 역사적 평가
현종은 고려 역사상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였던 거란의 침입을 두 차례나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국가를 안정시킨 군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귀주대첩은 고려의 국방력을 과시하고 거란의 재침 야욕을 꺾은 결정적인 승리였다. 그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고, 강감찬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또한 현종은 전후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고려 왕조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의 통치 기간은 고려가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고 문화적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2. 사회 및 문화적 영향
현종의 통치 기간은 고려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염원을 담아 간행된 초조대장경은 고려 불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이후 팔만대장경 간행의 초석이 되었다. 현화사 건립 또한 불교 진흥에 대한 현종의 의지를 보여준다.
국가적 위기 극복은 고려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사회 통합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외세 침략에 맞서 싸우며 형성된 민족적 정체성은 고려의 안정과 발전에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또한 연등회와 팔관회의 부활은 고려의 전통 문화와 불교적 가치를 재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 진흥을 위해 설총과 최치원을 문묘에 모신 것은 유교가 고려 사회의 통치 이념으로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3.3. 비판 및 논란
현종의 생애는 복잡한 출생 배경과 즉위 과정에서 여러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의 부모인 안종과 헌정왕후의 불륜 관계는 당시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며, 어린 시절 그가 겪어야 했던 생명의 위협과 강제 출가는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현종의 즉위는 강조의 정변이라는 무력 쿠데타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강조가 전 왕인 목종을 폐위하고 암살하는 과정에서 현종이 옹립되었기 때문이다. 즉위 후에는 김훈·최질의 난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신들을 잔인하게 주살하는 등 국내 갈등 처리 방식에 대한 논란도 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국가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고려의 기틀을 다진 군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4. 대중 문화 속 현종
현종의 생애와 업적은 여러 대중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 드라마:
- 《천추태후》(KBS 2TV, 2009년, 배우: 김지훈, 김진우, 강수한, 최수한)
- 《고려거란전쟁》(KBS 2TV, 2023년~2024년, 배우: 김동준, 유지완)
- 다큐멘터리:
- 《평화전쟁 1019》(JTBC, 2019년, 배우: 권영민)
5. 관련 항목
- 고려의 역사
- 한국의 군주 목록
- 제2차 고려-거란 전쟁
- 제3차 고려-거란 전쟁
- 초조대장경
- 팔만대장경
- 강감찬
- 강조의 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