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어린 시절과 가족
헨리 테일러는 1885년 3월 17일 랭커셔주 올덤의 홀린우드에서 탄광촌 광부였던 제임스 테일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형 빌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1.2. 수영 입문 및 초기 훈련
테일러는 홀린우드 운하에서 수영을 배웠으며, 목욕탕, 개울, 운하, 호수 등 찾을 수 있는 모든 수역에서 훈련했다. 여기에는 홀린우드 운하와 올덤의 알렉산드라 공원 보트 호수도 포함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훗날 아마추어 수영 협회 회장이 된 오스틴 롤린슨은 테일러가 "삶의 다른 어떤 것보다 수영을 사랑했다"고 회상했다. 테일러는 7세에 첫 수영 경기에 참가했다.
형 빌은 그의 코치가 되었고, 테일러는 올덤 수영장에서 훈련했으며, 1894년부터는 채더턴 수영장에서 훈련했다. 그는 종종 입장료가 더 저렴한 "더러운 물의 날"에 훈련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운하에서 계속 훈련했으며, 방직 공장에서 일하게 된 후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하에서 수영했다. 그의 키는 1.65 m였고, 몸무게는 약 66 kg였다. 그는 약 0.0 kg (1 oz) 무게의 손으로 짠 실크 수영복을 입고 경기에 임했다.
2. 선수 경력
테일러는 채더턴 수영 클럽에서 성공을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1. 1906년 아테네 중간 대회
테일러는 1906년 아테네 중간 대회에 영국 대표로 선발되었다. 당시에는 메달 획득이 기대되지 않았지만, 그는 1마일 자유형에서 금메달, 400m 자유형에서 은메달, 4×250m 자유형 계영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총 3개의 메달을 따냈다. 그해 말, 테일러는 자유형 880야드(약 805 m) 세계 신기록을 경신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1908년 런던 올림픽에 자동 선발되었다.
2.2. 1908년 런던 올림픽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테일러는 참가한 세 종목 모두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삼관왕을 달성했다. 그 종목들은 400m 자유형, 4×200m 자유형 계영, 그리고 1500m 자유형이었다. 그는 대회에서 참가한 모든 레이스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400m 자유형 준결승에서 1906년 중간 대회에서 같은 종목을 우승했던 오스트리아의 오토 셰프에게 2위를 기록한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그러나 결승에서는 테일러가 셰프보다 10초 앞서며 금메달을 차지했고, 셰프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영국 언론은 테일러를 "영국 최고의 아마추어 수영 선수"라고 칭송했다. 그는 1908년 7월 25일 런던에서 22분 48.4초의 기록으로 1500m 자유형 세계 기록을 보유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가 획득한 3개의 금메달은 올림픽에서 영국인이 획득한 가장 많은 금메달 수였으며, 이 기록은 100년 후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사이클 선수 크리스 호이가 세 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동률을 이룰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테일러는 미국의 멜 셰퍼드와 함께 1908년 올림픽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수로 기록되었다. 영국 수영 역사상 한 올림픽에서 삼관왕을 달성한 선수는 2021년 현재까지 헨리 테일러가 유일하다.
2.3.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4년 후, 테일러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선발되었다. 그는 4×200m 자유형 계영에서 팀이 3회 연속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400m 자유형에서는 준결승에서 탈락했고, 1500m 자유형에서는 준결승 도중 기권했다.
2.4. 제1차 세계 대전 복무

1916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올림픽이 개최되지 않았다. 테일러는 1914년 영국 왕립 해군에 입대했으며, 그의 배가 스캐파 플로에 정박해 있을 때 배 주변을 수영하며 체력을 유지했다. 그는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배인 HMS 세인트 빈센트 (1908)가 침몰하여 생존자들이 2시간 동안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테일러가 주변을 헤엄치며 동료들을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HMS 세인트 빈센트가 유틀란트 해전에서 침몰하지 않았으므로 이 이야기는 아마도 신화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이후 HMS 라밀리에스 (07)로 전속되어 제대할 때까지 복무했다.
2.5.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전쟁 후, 테일러는 수영으로 복귀했다. 그는 1920년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마지막으로 참가하여 4×200m 자유형 계영 팀이 4회 연속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400m 자유형에서는 예선에서 탈락했고, 1500m 자유형에서는 예선 도중 기권했다.
2.6. 기타 주요 대회 및 활동
테일러는 전쟁 후에도 수영을 계속했다. 그는 모어컴베이 만 경주에 참가하여 20년 동안 8차례 우승했으며 한때 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다. 그는 매튜 웹처럼 영국 해협을 횡단하려 시도했지만 악천후로 실패했다. 또한 매년 템스강과 센강에서 프랑스 챔피언과 대결하여 매번 승리했다. 선수 경력 동안 그는 35개가 넘는 트로피와 300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또한 수구 선수로도 활동하며 잉글랜드 대표로 뛰었다.
3. 은퇴 후 삶과 죽음
3.1. 은퇴와 재정적 어려움

테일러는 40대까지 경쟁적인 수영을 계속하다가 1926년 은퇴했다. 그는 돕크로스에 '더 너저'라는 펍을 소유했으나 재정난으로 문을 닫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그는 채더턴 수영장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테일러는 대부분의 상을 팔아야 했다.
3.2. 죽음
그는 1951년 2월 28일, 65세의 나이로 채더턴 브라이어리 스트리트의 하숙집에서 무일푼의 미혼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로치데일 묘지에 뿌려졌다.
4. 유산 및 평가
4.1. 사후 명예 및 기념
테일러가 획득했던 트로피들은 수집되어 채더턴 수영장에 임시로 전시되었다. 1969년, 그는 사후에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2년에는 그의 수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채더턴 수영장에 블루 플라크가 설치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레베카 애들링턴은 1908년 테일러가 세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이래 처음으로 한 올림픽에서 두 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한 영국 수영 선수가 되었다.
4.2. 역사적 영향 및 비교
그가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획득한 3개의 금메달은 100년 동안 영국인 올림픽 최다 금메달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멜 셰퍼드와 함께 1908년 올림픽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수로 평가받으며, 그의 업적은 영국 수영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 개인사
헨리 테일러는 미혼으로 사망했으며, 생의 마지막을 빈곤 속에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