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헨리 쿠퍼 경(Sir Henry Cooper, OBE대영제국 훈장 Officer영어 KSG성 그레고리오 대훈장 기사영어는 1934년 5월 3일 런던에서 태어나 2011년 5월 1일 서리주 림프스필드에서 76세로 사망한 영국의 헤비급 권투선수였다. 그는 12년 동안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무패를 기록했으며, 3년 동안 유럽 헤비급 타이틀을 보유했다. 특히 그는 1963년 젊은 캐시어스 클레이(이후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에서 4라운드에 클레이를 다운시킨 것으로 유명하며, 1966년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재대결을 펼쳤다.
쿠퍼는 두 차례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을 수상했으며, 1971년 조 버그너와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패배 이후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대중적인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는 기사작위를 받은 유일한 영국 복싱 선수로 평가받으며, 그의 스포츠맨십과 대중적인 매력으로 인해 "우리의 헨리(Our Henry영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경력
헨리 쿠퍼 경의 어린 시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보냈으며, 이는 그의 강인한 정신력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학업과 함께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책임감을 길렀고, 특히 축구와 크리켓 등 여러 스포츠에 재능을 보이며 운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이 경험들은 그가 복싱 선수로서 성공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1. 출생 및 가족 관계
헨리 쿠퍼는 1934년 5월 3일 목요일 런던 램버스에서 헨리 시니어와 릴리 쿠퍼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란성 쌍둥이 동생 조지 쿠퍼(1934~2010)와 형 번과 함께 런던 남동부 벨링엄 지역의 팜스테드 로드에 있는 시영 주택에서 자랐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제2차 세계대전 중 쿠퍼 가족은 웨스트 서식스 해안의 랜싱으로 피난을 가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 후반기 런던의 삶은 특히 블랙아웃 기간 동안 많은 위험을 동반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쿠퍼는 학교 가기 전 신문 배달을 하는 등 여러 직업을 가졌으며, 베크넘 골프 코스에서는 골프공을 재활용하여 돈을 벌기도 했다. 세 명의 쿠퍼 형제 모두 스포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조지와 헨리는 특히 축구와 크리켓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3. 아마추어 복싱 경력 및 올림픽 출전
쿠퍼는 1949년 앨버트 콜리가 설립하고 운영하던 벨링엄 복싱 클럽에서 아마추어 복싱 경력을 시작했으며, 84번의 시합 중 73번을 승리했다. 17세의 나이에 그는 두 번의 ABA 라이트헤비급 타이틀 중 첫 번째를 획득했다. 이후 그는 왕립 육군 보급대에서 사병(군번 22486464)으로 국가 복무를 수행했다.
1952년, 쿠퍼는 헬싱키 올림픽에 라이트헤비급 복싱 선수로 영국을 대표하여 출전했다. 그는 32강전에서 부전승으로 올라갔지만, 16강전에서 소련의 아나톨리 페로프에게 1-2 판정패를 당해 탈락했다. 아마추어 경력 동안 그는 1952년과 1953년에 런던에서 열린 잉글랜드 선수권 대회 라이트헤비급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3. 프로 복싱 경력
헨리 쿠퍼 경의 프로 복싱 경력은 영국 복싱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특유의 강력한 왼손 훅으로 많은 팬들을 열광시켰으며, 특히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으로 남아 있다. 비록 세계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끊임없는 도전과 뛰어난 스포츠맨십으로 영국 헤비급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3.1. 복싱 스타일
쿠퍼는 왼손잡이였지만, 왼손잡이 복서들이 흔히 채택하는 사우스포 자세 대신 오른손잡이 자세인 오소독스 스탠스를 취했다. 이로 인해 그는 상대방에게 가장 가까운 앞손인 왼손으로 강력한 펀치를 날릴 수 있었다. 그의 훅은 가장 효과적일 때 어퍼컷과 유사한 상향 궤적을 그리며, "엔리즈 해머(Enry's 'Ammer영어", 헨리의 망치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강력한 왼손 잽은 그가 빠르게 훅을 날릴 수 있게 해주며 그의 공격 기술을 완성했다. 쿠퍼는 컷에 취약하고 수비 기술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경기에서 공격적인 플레이를 강요함으로써 이러한 약점을 보완했다. 경력 후반에 왼쪽 어깨 문제로 고통받은 후에는 오른손 펀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두도록 스타일을 조정했다.
3.2. 초기 프로 경력 및 타이틀 도전
헨리 쿠퍼와 그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 조지(짐이라는 이름으로 복싱 활동)는 짐 윅스의 관리하에 함께 프로로 전향했다. 윅스는 복서들을 무리하게 경쟁시키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컷에 취약했던 쿠퍼는 잠재력을 발휘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초기 타이틀 도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는 서인도 제도의 조 바이그레이브스에게 코먼웰스 타이틀전에서 9라운드 KO로 패했고, 잉게마르 요한손에게 유럽 타이틀전에서 5라운드 KO로 패했으며, 체격은 작았지만 매우 기술적이었던 조 어스킨에게 영국 및 코먼웰스 타이틀전에서 15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 미국의 정상급 헤비급 선수 조라 폴리를 상대로 인상적인 판정승을 거두었으나, 약 3년 후 재대결에서는 2라운드 KO로 패했다.
3.3.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챔피언 등극
1959년은 쿠퍼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는 1월 12일 브라이언 런던을 15라운드 판정으로 꺾고 영국 및 코먼웰스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딕 리처드슨 (5라운드 KO), 조 어스킨 (5라운드 TKO, 12라운드 TKO, 9라운드 TKO), 조니 프레스콧 (10라운드 RTD)을 상대로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르며 마지막 9캐럿 골드 론즈데일 벨트를 영구 소유하게 되었다. 런던과의 또 다른 판정승 이후,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놓고 플로이드 패터슨과 대결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쿠퍼(또는 윅스)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1959년부터 1970년까지 12년 동안 이 타이틀들을 보유하며 영국 헤비급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3.4.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1963년, 무하마드 알리 (당시 캐시어스 클레이로 불리며 세계 헤비급 타이틀 도전자였음)는 런던에서 쿠퍼와의 경기를 앞두고 엄청난 홍보 효과를 창출했다. 많은 영국 팬들은 오만하고 젊은 미국인 클레이를 쿠퍼가 겸손하게 만들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복싱계에서는 알리가 미래의 세계 챔피언이 될 것이며 쿠퍼는 약자로 간주되었다. 경기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공식 계체량에 따르면 알리는 쿠퍼보다 9.5 kg (21 lb) 더 무거웠는데, 쿠퍼는 자신이 웨이트가 실린 옷을 입고 있었고 라이트헤비급 한계에 근접했다고 말했다. 쿠퍼는 자신만의 훈련 방식을 고안했으며, 체중은 덜 나갔지만 경력 중 최고의 컨디션이라고 느꼈다.
알리의 체구, 기동성, 빠른 반응 속도, 그리고 펀치를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젖히는 비정통적인 수비 전술은 그를 좌절감을 안겨주는 예측 불가능한 상대로 만들었다. 쿠퍼는 이후 알리의 진영으로부터 '브레이크 중 가격'을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3라운드 중반 알리의 강한 연결 펀치가 쿠퍼의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혔고, 왼쪽 눈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리는 상처 때문에 경기가 중단될 것이라고 감지하고, 공격 시도를 포기하고 대신 쿠퍼를 놀리고 조롱하며 가드를 내리고 턱을 영국인에게 노출시켰다. 알리의 조롱과 피로 가득한 왼쪽 눈에도 불구하고, 쿠퍼는 4라운드 마지막 몇 초 동안 자신의 상징적인 왼손 훅인 "엔리즈 해머"를 위로 치켜들듯이 날려 알리의 턱에 적중시켰고, 알리는 다운되었다. 알리는 부분적으로 로프에 걸려 머리가 캔버스에 닿는 것을 막았지만, 3카운트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코너에서 알리의 트레이너 안젤로 던디는 격분하여 알리의 다리를 때렸다. 알리는 이를 오해하여 스툴에서 일어나려 했다. 던디가 알리를 소생시키기 위해 암모니아 스멜링 솔트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확인된 바 없으며 영상도 불분명하다. 스멜링 솔트 사용은 영국 복싱에서 금지되어 있었고, 만약 사실로 증명되었다면 알리는 실격패했을 것이다. 던디는 나중에 심판에게 알리의 권투 글러브의 작은 찢어진 부분을 보여주기 위해 손가락을 넣었으며, 교체가 필요하다고 심판에게 말했지만 이용 가능한 글러브가 없었다고 밝혔다. 쿠퍼는 이로 인해 라운드 사이의 규정 시간 외에 1분 이상의 지연이 발생했으며, 알리가 여전히 어지러워하는 동안 그를 끝낼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기 테이프는 단 6초의 추가 휴식 시간만을 보여주었다. 더 긴 지연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은 쿠퍼였으며, 현존하는 BBC 방송 테이프는 실제로 방송된 내용만을 담고 있어 더 긴 지연이 송출을 위해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테이프를 분석한 결과 중간에 끊김이 없었고 해설도 끊기지 않아 6초의 간격 연장이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다. 알리는 5라운드를 공격적으로 시작하며 5라운드 KO 예측을 실현하려고 했고, 쿠퍼의 눈 아래 심각한 상처를 냈다. 알리는 잇따른 강력한 오른손 펀치로 쿠퍼의 마우스 가드를 쳐냈고, 쿠퍼의 코너에서는 타월을 던졌다. 심판 토미 리틀은 경기를 중단시켰고, 알리는 이로써 TKO로 쿠퍼를 이겼다. 이후에는 항상 여분의 글러브가 링사이드에 준비되어야 했다. 경기의 40주년 기념일에는 알리가 쿠퍼에게 전화하여 옛날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1966년 쿠퍼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 알리와 두 번째 대결을 아스널 스타디움에서 펼쳤다. 그러나 알리는 이제 쿠퍼의 왼손 펀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전 경기보다 훨씬 더 신중했다. 그는 클린치 상황에서 쿠퍼를 꽉 붙잡았고, 떨어지라는 지시를 받으면 몇 피트 뒤로 뛰어넘어 거리를 벌렸다. 쿠퍼의 눈 주위에 축적된 흉터 조직은 그를 이전 만남보다 더 취약하게 만들었고, 알리에 의해 심각한 컷이 다시 열리면서 경기가 중단되었고, 쿠퍼는 다시 알리에게 TKO로 패했다.
3.5. 유럽 헤비급 챔피언 및 말년
1966년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에게 4라운드 KO패를 당한 후, 쿠퍼는 그의 마지막 경기를 제외하고는 패배하지 않았다. 독특하게 까다로운 잭 보델 (2라운드 TKO)과 미디어 친화적인 빌리 워커 (6라운드 TKO)를 상대로 영국 및 코먼웰스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쿠퍼는 세 개의 론즈데일 벨트를 완전히 획득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1968년 카를 밀덴베르거를 꺾고 유럽 타이틀을 추가했으며, 두 번의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렀다. 밀덴베르거는 이 경기에서 고의적인 박치기로 8라운드에 실격패를 당했으며,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1970년, 쿠퍼는 WBA 챔피언 지미 엘리스와의 경기를 주선하려 시도한 후 영국 헤비급 타이틀을 반납했다. 그러나 영국 복싱 관리 위원회는 동료 챔피언 조 프레이저와 랭킹에 드는 상대 간의 경기만을 인정하겠다며 이 경기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쿠퍼와 보델은 그해 재대결을 펼쳤고, 보델은 카를 기치로부터 반납된 타이틀을 획득하여 영국 타이틀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쿠퍼는 코먼웰스 타이틀을 방어하고 있었다. 쿠퍼는 15라운드 판정승으로 경기를 승리하여 영국 타이틀을 되찾았다.
1971년 5월, 36세의 쿠퍼는 21세의 조 버그너와 영국, 유럽, 코먼웰스 타이틀을 놓고 맞붙었다. 버그너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헤비급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심판 해리 깁스는 4분의 1점 차이로 버그너에게 승리를 주었다. 이 점수 시스템은 이후 논란 때문에 부분적으로 폐지되었다. 주로 쿠퍼 팬들로 구성된 관중들은 선천적으로 조심스러운 버그너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 판정은 야유를 받았다. 해설자 해리 카펜터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한 남자의 세 가지 타이틀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쿠퍼는 얼마 후 은퇴를 발표했다. 쿠퍼는 수년 동안 깁스와 대화를 거부했지만, 결국 자선 행사에서 그와 악수하는 데 동의했다.
3.6. 현대 복싱에 대한 견해
쿠퍼는 말년에 "복싱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스포츠 해설에서 은퇴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의 "직설적이고, 빠르고, 강한 복싱"을 원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시대의 사람이고 오늘날 헤비급으로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헤비급 선수들이 덩치를 키우는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이 경기를 단조롭고 덜 재미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생애 마지막 해에 그는 복싱이 "예전만큼 좋지 않다"고 말하며, 조 칼자게, 리키 해튼, 아미르 칸을 "그들의 시대의 최고"라고 칭했지만, "만약 그들을 30년이나 40년 전의 챔피언들과 맞붙게 한다면 그들이 그만큼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4. 복싱 외 활동
헨리 쿠퍼 경은 복싱 경력 외에도 다양한 공공 활동과 미디어 출연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교통안전 캠페인 등 공익적인 목적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유명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결혼, 가족 관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재정적 어려움 등 여러 중요한 측면을 포함하며, 이는 그의 삶의 깊이를 더했다.
4.1. 대중 활동 및 미디어 출연
1960년대 쿠퍼는 얼룩말 건널목 사용을 장려하는 "엘시 빌링 이야기"와 같은 몇몇 공익 광고에 출연했다. 복싱에서 은퇴한 후에도 그는 BBC 퀴즈쇼 A Question of Sport 출연과 다양한 광고 활동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유지했으며, 그중에서도 브루트 애프터쉐이브 광고 모델로 가장 유명했다. 그는 또한 자선 기금 모금 행사의 단골 초청 연사였다. 1975년 영화 로얄 플래시에서는 복서 존 걸리 역으로 출연했으며, 말년에는 취약 계층에게 인플루엔자 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영국 공익 광고 시리즈 "먼저 주사를 맞아라!(Get your Jab in First!영어)"에 출연했다.
4.2. 개인 생활 및 재정 문제
쿠퍼는 로이즈 오브 런던(Lloyd's of London)의 "네임(Name영어)"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안전한 투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1990년대에 그는 무한 책임("네임"이 당시 책임져야 했던) 때문에 막대한 개인적 손실을 입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알려졌으며, 심지어 론즈데일 벨트까지 팔아야 했다. 이후 쿠퍼의 인기 있는 저녁 식사 후 연사 활동은 수입원이 되었고, 그는 아내 알비나 게네프리가 7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몇 년 동안은 다소 침착해졌지만 대부분의 면에서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쿠퍼는 1960년부터 2008년 알비나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아내의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했으며, 자신의 스포츠를 "싫어했지만" "복서에게 이상적인 아내"였다고 알비나를 묘사했다. 알비나는 큰 경기 전 쿠퍼의 긴 부재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경기 다음 날 쿠퍼가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자들을 차를 대접하며 기다리게 했다. 쿠퍼는 2011년 5월 1일, 77번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사망했다. 그는 슬하에 아들들과 두 명의 손주를 두었다. 쿠퍼는 평생 아스널의 열렬한 팬이었고, 켄트주 힐든버러에 거주하며 나이젤스 골프 클럽의 회장이었다. 건강 면에서는 "약간의 관절염"을 제외하고는 복싱과 관련된 건강상 손상이 거의 없었으며, 한 기자의 말에 따르면 "링사이드 좌석의 턱시도, 해리 카펜터의 해설, 스펀지 버킷, 그리고 '세컨즈 아웃' 시대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구현한 인물"로 남아 있었다.
5. 수상 및 영예
헨리 쿠퍼 경은 복싱 경력과 대중적 활동을 통해 수많은 수상과 영예를 얻었으며, 특히 영국 스포츠계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 미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5.1. 주요 수상 경력
쿠퍼는 1967년 무패 기록으로, 그리고 1970년 영국, 코먼웰스, 유럽 헤비급 챔피언이 되면서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을 두 번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세 개의 론즈데일 벨트를 완전히 획득한 유일한 영국 복싱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5.2. 명예 칭호
쿠퍼는 1969년 신년 서훈자 명단에서 복싱에 대한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 Officer(OBE영어)에 임명되었다. 1978년에는 교황 기사 작위인 성 그레고리오 대훈장 기사(Knight of St. GregoryKSG영어)를 수여받았으며, 2000년 신년 서훈자 명단에서는 다시 복싱에 대한 공로로 기사작위를 받아 "서"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레이 데이비스의 1998년 앨범 더 스토리텔러에 수록된 "런던 송(London Song영어)"에서 위대한 런던 시민 중 한 명으로 기념되었다. 1970년에는 템스 텔레비전의 유스턴 로드 스튜디오에서 이몬 앤드루스에게 깜짝 출연하여 이것이 당신의 인생이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6. 프로 복싱 전적
헨리 쿠퍼 경의 프로 복싱 전적은 다음과 같다.
번호 | 결과 | 전적 | 상대 | 유형 | 라운드, 시간 | 날짜 | 장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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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패 | 40-14-1 | 조 버그너 | 판정 | 15 | 1971년 3월 16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영국, 코먼웰스, 유럽 헤비급 타이틀 상실 |
54 | 승 | 40-13-1 | 호세 마누엘 우르타인 | 리타이어 | 9 (15) | 1970년 11월 10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유럽 헤비급 타이틀 획득 |
53 | 승 | 39-13-1 | 잭 보델 | 판정 | 15 | 1970년 3월 24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영국 헤비급 타이틀 획득 |
52 | 승 | 38-13-1 | 피에로 토마소니 | KO | 5 (15) | 1969년 3월 13일 | 이탈리아 로마 팔라체토 델로 스포르트 | 유럽 헤비급 타이틀 방어 |
51 | 승 | 37-13-1 | 카를 밀덴베르거 | 실격 | 8 (15) | 1968년 9월 18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유럽 헤비급 타이틀 획득; 밀덴베르거 고의적 박치기로 실격 |
50 | 승 | 36-13-1 | 빌리 워커 | TKO | 6 (15) | 1967년 11월 7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49 | 승 | 35-13-1 | 잭 보델 | TKO | 2 (15), 2:18 | 1967년 6월 13일 | 잉글랜드 울버햄프턴 몰리뉴 스타디움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48 | 승 | 34-13-1 | 보스턴 제이콥스 | 판정 | 10 | 1967년 4월 17일 | 잉글랜드 레스터 드 몽포르 홀 | |
47 | 패 | 33-13-1 | 플로이드 패터슨 | KO | 4 (10), 2:10 | 1966년 9월 20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46 | 패 | 33-12-1 | 무하마드 알리 | TKO | 6 (15), 1:38 | 1966년 5월 21일 | 잉글랜드 런던 아스널 스타디움 | WBC, NYSAC, 더 링 헤비급 타이틀전 |
45 | 승 | 33-11-1 | 제퍼슨 데이비스 | KO | 1 (10), 1:40 | 1966년 2월 16일 | 잉글랜드 울버햄프턴 시빅 홀 | |
44 | 승 | 32-11-1 | 휴버트 힐튼 | TKO | 2 (10), 1:20 | 1966년 1월 25일 | 잉글랜드 런던 런던 올림피아 | |
43 | 패 | 31-11-1 | 아모스 존슨 | 판정 | 10 | 1965년 10월 19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42 | 승 | 31-10-1 | 조니 프레스콧 | 리타이어 | 10 (15), 2:34 | 1965년 6월 15일 | 잉글랜드 버밍엄 세인트 앤드루스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41 | 승 | 30-10-1 | 매튜 존슨 | KO | 1 (10), 2:34 | 1965년 4월 20일 | 잉글랜드 울버햄프턴 울버햄프턴 시빅 홀 | |
40 | 승 | 29-10-1 | 딕 위퍼만 | TKO | 5 (10) | 1965년 1월 12일 | 잉글랜드 런던 로열 앨버트 홀 | |
39 | 패 | 28-10-1 | 로저 리셔 | 판정 | 10 | 1964년 11월 16일 | 잉글랜드 런던 로열 앨버트 홀 | |
38 | 승 | 28-9-1 | 브라이언 런던 | 판정 | 15 | 1964년 2월 24일 | 잉글랜드 맨체스터 킹스 홀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유럽 헤비급 타이틀 획득 |
37 | 패 | 27-9-1 | 무하마드 알리 | TKO | 5 (10), 2:15 | 1963년 6월 18일 | 잉글랜드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 |
36 | 승 | 27-8-1 | 딕 리처드슨 | KO | 5 (15) | 1963년 3월 26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35 | 승 | 26-8-1 | 조 어스킨 | TKO | 9 (15) | 1962년 4월 2일 | 잉글랜드 노팅엄 노팅엄 아이스 스타디움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34 | 승 | 25-8-1 | 웨인 베티아 | 판정 | 10 | 1962년 2월 26일 | 잉글랜드 맨체스터 킹스 홀 | |
33 | 승 | 24-8-1 | 토니 휴스 | 리타이어 | 5 (10) | 1962년 1월 23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32 | 패 | 23-8-1 | 조라 폴리 | KO | 2 (10), 1:06 | 1961년 12월 5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31 | 승 | 23-7-1 | 조 어스킨 | TKO | 5 (15) | 1961년 3월 21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30 | 승 | 22-7-1 | 알렉스 미테프 | 판정 | 10 | 1960년 12월 6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29 | 승 | 21-7-1 | 로이 해리스 | 판정 | 10 | 1960년 9월 13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28 | 승 | 20-7-1 | 조 어스킨 | TKO | 12 (15) | 1959년 11월 17일 | 잉글랜드 런던 얼스 코트 아레나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27 | 승 | 19-7-1 | 가위 드 클레르크 | TKO | 5 (15) | 1959년 8월 26일 | 웨일스 브리지엔드 코니 비치 플레이저 파크 |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방어 |
26 | 승 | 18-7-1 | 브라이언 런던 | 판정 | 15 | 1959년 1월 12일 | 잉글랜드 런던 얼스 코트 아레나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 획득 |
25 | 승 | 17-7-1 | 조라 폴리 | 판정 | 10 | 1958년 10월 14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24 | 승 | 16-7-1 | 딕 리처드슨 | TKO | 5 (10) | 1958년 9월 3일 | 웨일스 브리지엔드 코니 비치 플레이저 파크 | |
23 | 패 | 15-7-1 | 에리히 쇼프너 | 실격 | 6 (10) | 1958년 4월 19일 | 독일 프랑크푸르트 페스트할레 프랑크푸르트 | 쿠퍼, 쇼프너의 목 가격으로 실격 |
22 | 무 | 15-6-1 | 하인츠 노이하우스 | 판정 | 10 | 1958년 1월 11일 | 독일 도르트문트 베스트팔렌할렌 | |
21 | 승 | 15-6 | 한스 칼브펠 | 판정 | 10 | 1957년 11월 16일 | 독일 도르트문트 베스트팔렌할렌 | |
20 | 패 | 14-6 | 조 어스킨 | 판정 | 15 | 1957년 9월 17일 |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아레나 | 영국 및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전 |
19 | 패 | 14-5 | 잉게마르 요한손 | KO | 5 (15), 2:57 | 1957년 5월 19일 | 스웨덴 스톡홀름 요한네스호브스 이스스타디온 | 유럽 헤비급 타이틀전 |
18 | 패 | 14-4 | 조 바이그레이브스 | KO | 9 (15) | 1957년 2월 19일 | 잉글랜드 런던 얼스 코트 아레나 | 코먼웰스 헤비급 타이틀전 |
17 | 패 | 14-3 | 피터 베이츠 | TKO | 5 (10), 1:01 | 1956년 9월 7일 | 잉글랜드 맨체스터 벨 뷰 동물원 정원 | |
16 | 승 | 14-2 | 지아니노 올랜도 루이세 | TKO | 7 (10) | 1956년 6월 26일 | 잉글랜드 런던 엠파이어 풀 | |
15 | 승 | 13-2 | 브라이언 런던 | TKO | 1 (10) | 1956년 5월 1일 | 잉글랜드 런던 엠프레스 홀, 얼스 코트 | |
14 | 승 | 12-2 | 모리스 몰스 | TKO | 4 (10) | 1956년 2월 28일 | 잉글랜드 런던 로열 앨버트 홀 | |
13 | 패 | 11-2 | 조 어스킨 | 판정 | 10 | 1955년 11월 15일 |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아레나 | 영국 헤비급 타이틀 도전자 결정전 |
12 | 승 | 11-1 | 우버 바실리에리 | KO | 7 (10) | 1955년 9월 13일 | 잉글랜드 런던 화이트 시티 스타디움 | |
11 | 승 | 10-1 | 론 하만 | TKO | 7 (8) | 1955년 6월 6일 | 잉글랜드 노팅엄 노팅엄 아이스 스타디움 | |
10 | 패 | 9-1 | 우버 바실리에리 | TKO | 5 (8) | 1955년 4월 26일 |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아레나 | |
9 | 승 | 9-0 | 조 바이그레이브스 | 판정 | 8 | 1955년 4월 18일 | 잉글랜드 런던 매너 플레이스 배스 | |
8 | 승 | 8-0 | 조 크리크마 | TKO | 5 (8) | 1955년 3월 29일 | 잉글랜드 런던 얼스 코트 아레나 | |
7 | 승 | 7-0 | 휴 펀스 | 실격 | 2 (6) | 1955년 3월 8일 | 잉글랜드 런던 얼스 코트 아레나 | |
6 | 승 | 6-0 | 클리프 퍼넬 | 판정 | 6 | 1955년 2월 8일 |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아레나 | |
5 | 승 | 5-0 | 콜린 스트라우치 | TKO | 1 (6) | 1955년 1월 27일 | 잉글랜드 런던 로열 앨버트 홀 | |
4 | 승 | 4-0 | 데니 볼 | KO | 3 (6) | 1954년 12월 7일 |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아레나 | |
3 | 승 | 3-0 | 에디 키스 | TKO | 1 (6) | 1954년 11월 23일 | 잉글랜드 런던 매너 플레이스 배스 | |
2 | 승 | 2-0 | 디니 파월 | TKO | 4 (6) | 1954년 10월 19일 |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아레나 | |
1 | 승 | 1-0 | 해리 페인터 | KO | 1 (6) | 1954년 9월 14일 |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아레나 |
총 전적은 55전 40승 (27KO) 14패 1무이다.
7. 유산 및 평가
헨리 쿠퍼 경은 영국 사회에서 단순한 복싱 챔피언을 넘어선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유산은 뛰어난 스포츠맨십, 겸손한 태도, 그리고 대중과의 깊은 유대감에 기반한다. 그는 세계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영국 복싱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쿠퍼는 "우리의 헨리(Our Henry영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영국 대중에게 깊이 각인된 인물이었다. 그의 매력은 링 위에서의 강력한 왼손 훅 ("엔리즈 해머")뿐만 아니라, 링 밖에서의 정직하고 겸손한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스포츠맨십의 모범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경기 방식은 언제나 팬들을 열광시켰다. 무하마드 알리에게 두 번 패배했지만, 첫 번째 경기에서 알리를 다운시킨 순간은 여전히 영국 복싱 팬들에게 회자되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는 그가 당대의 위대한 복서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던 실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언더독'으로서 보여준 투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복싱 은퇴 후에도 그는 교통안전 캠페인, 자선 행사, 광고 출연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특히 로이즈 오브 런던 투자 실패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2000년 기사작위를 수여받은 유일한 영국 복서라는 점은 그의 사회적 기여와 영국 내에서의 독보적인 위상을 보여준다. 그는 젊은 세대의 복서들에게 과거의 강력하고 정직한 복싱 스타일을 강조하며 스포츠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헨리 쿠퍼는 단순히 많은 타이틀을 획득한 챔피언이 아니라, 역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스포츠맨십을 실천하며 대중과 소통한 진정한 '인민의 챔피언'으로 영국 사회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