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교육
험프리의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외할아버지인 험프리 드 보훈, 제7대 헤리퍼드 백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매우 가까운 형제들 중 가장 어린 넷째였다. 1413년3월 20일, 헨리 5세와 험프리는 임종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침대 곁에 있었다. 토머스, 존, 그리고 험프리는 모두 1399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00년에는 함께 가터 훈장에 가입했다.
헨리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험프리는 학자로서의 교육을 받았으며, 아마도 옥스퍼드의 밸리얼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형들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그는 학업에 전념했다. 아버지의 사망 후, 그는 1414년에 글로스터 공작으로 서임되었고, 잉글랜드 대시종이 되어 의회에 참석했다. 그는 1415년에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다.
2. 군사 및 외교 활동

험프리는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합류했다. 원정 출발 전, 군대는 사우샘프턴에 주둔했는데, 이곳에서 케임브리지 백작은 국왕 암살 음모인 사우샘프턴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했다. 험프리와 그의 형인 클래런스 공작은 8월 5일 케임브리지와 스크로프를 대역죄로 재판하기 위한 귀족 조사 위원회를 이끌었다.
원정 중 험프리는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고전 연구에서 얻은 공성전 지식은 옹플뢰르 함락에 기여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험프리는 부상을 입었고, 그가 쓰러지자 국왕 헨리 5세는 그를 보호하며 프랑스 기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냈다. 험프리는 이러한 공로로 도버 성주, 오항구 수장 (11월 27일), 국왕 대리인 등 여러 직책을 부여받았다. 그의 재임 기간은 평화롭고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는 지기스문트 황제의 평화 사절단 방문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중세 황제로는 유일하게 잉글랜드를 방문한 것이었다. 홀린셰드의 연대기에 따르면, 험프리는 상징적인 의식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1416년5월 1일 저녁, 칼을 들고 해안가에서 황제를 맞이했으며, 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 국왕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한 후에야 그가 상륙하는 것을 허락했다. 8월 15일 캔터베리에서 체결된 "영원한 우정" 조약은 프랑스와의 적대감 재개를 예고하는 것에 불과했다.
1422년 형 헨리 5세가 사망하자, 험프리는 어린 조카 헨리 6세의 호국경이 되었다. 그는 또한 1435년 형 존이 사망한 후 잉글랜드 섭정권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험프리의 주장은 국왕 자문회의 귀족들, 특히 그의 이복 삼촌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에 의해 강력히 반대되었다. 1978년이튼 칼리지에서 재발견된 헨리 5세의 유언장은 실제로 험프리의 주장을 지지했다.
1424년10월, 험프리는 아내 자클린의 권리를 주장하며 저지대 국가를 침공하여 잉글랜드의 동맹국이었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대립했다. 그는 1425년4월 패배하고 잉글랜드로 귀국할 때까지 저지대 국가를 전전했다. 이는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붕괴시킬 수 있는 행위였으며, 험프리의 독단적인 행동에 분노한 형의 권고를 거부하고 12월에 다시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부르고뉴군에게 격파당했다. 결국 1428년 교황 마르티노 5세로부터 자클린과의 결혼 무효를 받아들이고 저지대 국가 개입을 포기했다.
1436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칼레를 공격했다. 험프리 공작은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플랑드르군은 육지에서 공격했지만 잉글랜드의 저항은 완강했다. 험프리는 군대를 바일뢰이로 이끌어 잉글랜드군을 안전하게 피신시켰고, 생토메르를 위협한 후 본국으로 돌아왔다.
3. 정치 경력 및 섭정
험프리는 어린 조카 헨리 6세의 호국경으로서, 섭정 정부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헨리 6세를 보좌하는 자문회의는 험프리 공작의 권력을 제한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그의 삼촌인 베드퍼드 공작 존이 섭정이었고, 험프리 공작은 프랑스를 통치하는 형이 잉글랜드에 부재하는 동안의 대리인에 불과했으며, 정책 관여 또한 자문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또한, 이 결정에 삼촌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이 깊이 관여한 것이 원인이 되어, 두 사람은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험프리는 잉글랜드에서 보퍼트 추기경 일파를 제거하려 했고, 형의 중재로 1426년배트 의회에서 일단 화해했다. 그러나 형이 1427년 프랑스로 떠나자 추기경에 대한 비방과 보퍼트파의 해임을 시도했으나, 모두 자문회의의 반대로 실패했다. 1435년 형이 사망하고 1437년 헨리 6세가 친정을 선언하자,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추기경 등 보퍼트파가 잉글랜드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정쟁에서 패배한 험프리 공작은 백년전쟁의 대응을 놓고 항전파로서 요크 공작 리처드 등과 결탁하여 평화파인 보퍼트파와 대립했다.
점차 평화파가 헨리 6세 주변을 에워싸게 되었고, 요크 공작 등이 대륙 파견 명령으로 멀어지면서 험프리는 고립되었다. 1440년, 평화파가 프랑스와의 협상 진전 작업으로 실행한 포로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석방에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41년에는 그의 두 번째 아내 엘리너 코범이 헨리 6세를 흑마술로 저주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큰 망신을 당했다.
험프리는 런던 시민과 서민들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가 많았다. 그는 또한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로서도 널리 명성을 얻었다. 그의 대중적 인기와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 덕분에 그는 사우스 웨일스의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4. 사상과 후원
험프리는 지적인 활동을 활발히 했으며, 특히 잉글랜드에서 인문주의의 중요한 첫 후원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학식 있고 박식하며 학구적인 접근 방식으로 초기 르네상스 문화 확장에 기여했다. 그는 이튼 칼리지의 모범이자 옥스퍼드 대학교의 귀감으로, 뛰어난 학문적 성취와 외교적,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험프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후원자이자 보호자로서, 280권 이상의 필사본을 대학에 기증했다. 이러한 방대한 도서관의 소유는 새로운 학문의 발전을 크게 자극했다. 오늘날 옥스퍼드 대학교 보들리 도서관의 일부인 험프리 공작 도서관과 그리니치 남쪽 블랙히스에 있는 험프리 공작 도로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그는 또한 문학, 특히 시인 존 리드게이트와 존 캡그레이브의 후원자였다. 그는 많은 이탈리아 주요 인문주의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그리스 고전의 라틴어 번역을 의뢰했다. 바요 주교인 자노 카스틸리오네와의 우정은 레오나르도 브루니, 피에트로 칸디도 데쳄브리오, 티토 리비오 프룰로비시 등 대륙의 많은 인물들과의 추가적인 인연으로 이어졌다. 험프리 공작은 또한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도 후원했다.
그는 두 번째 아내 엘리너와 함께 하나프라는 술잔을 의뢰했는데, 아마도 그들의 결혼 기념 잔이었을 것이다. "땋은 잔"(Wreathen Cup)으로 알려진 이 하나프는 그들이 라 플레장스(La Pleasaunce)와 런던 저택인 베이나드 성에서 만찬을 주최할 때 사용되었다. 이 잔은 그의 친척인 마거릿 보퍼트 여사의 소유가 되었고, 마거릿 여사는 이를 자신의 고해신부이자 오리얼 칼리지의 에드먼드 윌포드 박사에게 유증했다. 윌포드 박사는 이를 마거릿 여사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기증한 다른 은제품과 교환했고, 이 잔은 현재까지 그곳에 남아있다. 이 잔이 마거릿 여사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한 대학 연구원은 엘리너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녀를 감금하고 험프리의 재산 청산에 관여했던 그녀의 남편 토머스 스탠리를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험프리 공작과 식사하다"(to dine with Duke Humphrey)라는 문구는 식사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올드 세인트 폴 대성당의 한 통로인 "험프리 공작의 길"(Duke Humphrey's Walk)이 대중적으로 험프리 공작의 무덤으로 여겨졌기 때문인데, 실제로는 존 로드 보챔프 드 워릭(1360년 사망)의 기념비였다. 이 지역은 도둑과 거지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사키는 그의 단편 소설 "네메시스의 향연"에서 음식이 없는 피크닉을 "험프리 공작의 피크닉"이라고 언급하며 이 문구를 현대적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험프리의 무덤은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에 있으며,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하트퍼드셔 프리메이슨에 의해 복원되었다.
5. 개인사
험프리는 두 번 결혼했지만, 살아남은 적법한 자녀는 없었다.
5.1. 첫 번째 결혼: 에노 여백작 자클린

1422년경 험프리는 에노 여백작이자 홀란트 여백작 자클린(1436년 사망)과 결혼했다. 자클린은 빌헬름 6세, 에노 백작의 딸이었다. 이 결혼을 통해 험프리는 "홀란트 백작, 제이랜드 백작 및 에노 백작"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자클린의 사촌인 필리프가 이 칭호에 이의를 제기하자 잠시 이 칭호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홀란트 계승 전쟁 참조). 그들은 1424년에 사산아를 낳았다. 이 결혼은 1428년에 무효화되었고, 자클린은 1436년에 (상속권을 박탈당한 채) 사망했다. 자클린은 전 남편인 브라반트 공작 장 4세와 이혼 후 험프리와 재혼했지만, 1428년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칙령으로 전 남편과의 결혼이 유효하며 글로스터 공작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5.2. 두 번째 결혼: 엘리너 코범

1428년 험프리는 그의 애인이었던 엘리너 코범과 두 번째로 결혼했다. 엘리너는 1441년 국왕에게 마법을 행하여 남편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공개 참회 후 유배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너는 1452년 사망할 때까지 석방되지 않았다.
5.3. 사생아
험프리는 알려지지 않은 애인들로부터 두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엘리너 코범이 결혼 전에 이들 중 한 명 또는 두 명 모두의 어머니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사생아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사생아는 다음과 같다.
- 아서 플랜태저넷 (1447년 이후 사망)
- 안티고네 플랜태저넷 (생몰년 미상) - 첫 번째로 헨리 그레이, 제2대 탠커빌 백작 (약 1419년~1450년)과 결혼했고, 두 번째로 존 다망시에와 결혼했다.
6. 몰락과 죽음
프랑스에서의 패배 이후, 험프리는 점차 정치 공동체와 헨리 6세로부터 신임을 잃었다. 1441년 그의 두 번째 아내 엘리너 코범이 마법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험프리의 정치적 영향력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마거릿 왕비와 보퍼트 추기경,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 등 평화파의 공작으로 1447년2월 20일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3일 후인 2월 23일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의 서퍽에서 급사했다. 일부는 그가 독살되었다고 의심했지만,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일본어 문헌에서는 평화파에 의해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언급된다. 같은 해 4월 보퍼트 추기경도 사망하면서, 정계는 서퍽 공작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는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세인트 올번 성인의 묘지 옆에 위치한다. 그의 무덤은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하트퍼드셔 프리메이슨에 의해 복원되었다.
7. 유산과 평가
매년 의회에 '선량공 험프리'의 복권을 청원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세기 말에는 그의 명성이 회복되었다.
7.1. 문학에서의 묘사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에서 험프리의 묘사는 가장 분명하게 호의적인 인물 중 하나로 주목받는다. 장미 전쟁 사부작에서 그는 일관되게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된 소수의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헨리 4세 2부와 헨리 5세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다른 두 작품에서는 주요 인물로 나온다. 헨리 6세 1부에서는 보퍼트 추기경과의 갈등이 묘사되고, 헨리 6세 2부에서는 아내의 마법 혐의 이후 그의 불명예와 죽음이 그려진다. 셰익스피어는 험프리의 죽음을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과 마거릿 왕비가 지시한 살인으로 묘사한다.
앰브로즈 필립스의 1723년 희곡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글로스터의 삶을 다룬다. 드루리 레인 초연에서는 바턴 부스가 그를 연기했다.
마거릿 프레이저의 2003년 역사 미스터리 소설 사생아 이야기는 글로스터의 체포와 죽음을 둘러싼 사건들을 다룬다.
8. 작위, 영예 및 문장

- 글로스터 공작: 1414년 서임 (두 번째 작위 수여)
- 펨브로크 백작: 1414년 서임 (다섯 번째 작위 수여). 이 작위는 이후 세습되었으나, 윌리엄 드 라 폴에게 넘어갔다.
- 오항구 수장: 1415년
- 순회 재판관: 트렌트강 이남 관할 (1416년 ~ 1447년)
- 잉글랜드의 호국경: 헨리 6세를 위한 (1422년 ~ 1429년), 존과 공동
9. 가계
험프리는 헨리 4세와 메리 드 보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모는 존 오브 곤트, 제1대 랭커스터 공작과 랭커스터의 블랑슈였으며, 외조부모는 험프리 드 보훈, 제7대 헤리퍼드 백작과 조앤 피츠앨런이었다.
험프리의 증조부모는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였으며, 다른 증조부모로는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 제1대 랭커스터 공작과 이사벨 드 보몽이 있다. 외증조부모는 윌리엄 드 보훈, 제1대 노샘프턴 백작과 엘리자베스 드 배들스미어였고, 다른 외증조부모로는 리처드 피츠앨런, 제10대 애런델 백작과 랭커스터의 엘리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