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한산후 왕윤의 생애는 주로 그의 가계와 외숙 이자의의 왕위 찬탈 시도에 휘말린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가계 및 출생
한산후 왕윤은 고려의 제13대 국왕인 선종과 선종의 제3비인 원신궁주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다. 그의 성은 왕(왕王한국어), 이름은 윤(윤昀한국어) 또는 균(균균한국어)이다. 그는 문종의 손자이자 인예왕후의 손자이기도 하다. 또한, 순종과 숙종 등의 조카이며, 헌종과는 이복 형제 관계이자 외가로는 육촌 관계에 해당한다. 왕윤의 생모인 원신궁주는 인천 이씨 출신으로, 이자연의 손녀이자 이정의 딸이며, 이자의와는 남매 지간이다. 또한, 문종의 비이자 선종의 어머니인 인예왕후는 원신궁주의 시어머니이자 고모이기도 하다.
1.2. 왕자 시절 및 관직
왕윤은 왕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1094년(헌종 즉위년) 음력 6월 30일, 그의 이복 형제인 헌종이 즉위하자 왕유와 왕영 등과 함께 수사도(수사도守司徒한국어)의 관직을 받았다.
1.3. 왕위 찬탈 시도와 유배
당시 헌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모후인 사숙왕후가 정사를 대신 처리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한산후 왕윤의 외숙인 이자의는 헌종이 병약한 틈을 타 자신의 유일한 조카인 왕윤을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를 계획했다. 이자의는 무뢰배들을 모아 "지금의 임금(헌종)은 병이 있어 궁궐 바깥에서 왕위를 엿보는 자가 있으니, 너희들은 한산후를 받들어 신기(神器, 왕위를 의미)를 다른 이에게 가지 못하게 하라"고 선동하며 궁궐에 군사를 모아 거사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자의의 이러한 계획은 왕윤의 숙부이자 선종의 아들인 계림공(훗날의 숙종)에게 발각되었다. 계림공은 이 사실을 소태보에게 알렸고, 소태보는 왕국모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했다. 1095년, 계림공 일파는 이자의를 살해하며 그의 세력을 숙청하였고, 계림공은 조카인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숙종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산후 왕윤과 그의 어머니 원신궁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원군(지금의 인천광역시)으로 유배되었다.
1.4. 말년 및 기록의 부재
경원군으로 유배된 이후 한산후 왕윤의 삶에 대해서는 《고려사》를 비롯한 어떠한 역사적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그의 자세한 행적이나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2. 가족 관계
한산후 왕윤의 직계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조부: 제11대 문종(文宗, 1019~1083, 재위:1046~1083)
- 조모: 문종 제2비 인예왕후(仁睿王后, ?~1092)
- 아버지: 제13대 선종(宣宗, 1049~1094, 재위:1083~1094)
- 외조부: 이정(李頲, 1025~1077)
- 어머니: 선종 제3비 원신궁주(元信宮主, 생몰년 미상)
- 외숙부: 이자의(李資義, ?~1095)
3. 문화적 연관성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보물 제93호 용미리 석불입상에는 한산후 왕윤의 출생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왕윤의 어머니 원신궁주는 입궁 초기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배가 몹시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꿈에서 깬 원신궁주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선종에게 아뢰었고, 선종은 즉시 장지산 쪽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했다. 사람을 보낸 결과 "장지산 아래쪽에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선종은 두 바위에 원신궁주의 꿈에 나타났던 두 도승의 모습을 새겨 넣게 하고, 그 인근에 사찰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신궁주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때 태어난 아들이 바로 왕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술적인 분석에 따르면, 용미리 석불입상은 실제로는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뒷받침하는 1471년(조선 성종 2년)에 쓰여진 조성문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에 대해 동국대학교 이한성 교수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조선의 세조의 이야기를, 역시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던 고려 숙종의 이야기에 빗대어 그 속내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흥미로운 추측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후대 사람들이 왕윤과 관련된 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