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길수(韓吉洙, Kilsoo Kenneth Haan영어, 1900년 5월 31일 ~ 1976년 7월 1일)는 한국 독립운동가이자 정보 요원, 그리고 이중 간첩으로 활동하며 복합적인 유산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일본의 전쟁 계획, 특히 진주만 공격 임박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미국 정부에 제공하였으나, 그의 경고는 당시 무시되었다. 또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재미 한국인들이 일본계 미국인들과 달리 강제 수용되지 않도록 성공적으로 로비 활동을 벌여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냉전 시기에는 소련의 활동과 한국 전쟁에 대한 정보를 미국 정부에 제공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보 활동에 참여했다. 그의 공적은 오랫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재평가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삶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중에게 알려졌다.
2. 초기 생애
한길수는 1900년 5월 31일 대한제국 경기도 장단군에서 태어났다.
2.1. 출생 및 하와이 이주
그는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하와이의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이주했다. 1910년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에 남아 교육을 계속했다. 그는 8학년까지 한국인 공동체 학교와 카이울라니 학교에 다녔다.
2.2. 교육 및 구세군 활동
1920년 8월, 한길수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구세군 훈련 학교에서 1년간 목회 준비를 위해 하와이를 떠났다. 하와이로 돌아온 후, 그는 카우아이섬에서 구세군 대표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6년간 계급이 상승하여 대위가 되었다.
2.3. 결혼
한길수의 종교 경력은 1926년 호놀룰루 출신의 한국 여성 윤스텔라와 결혼하면서 끝이 났다. 그는 새 아내의 종교적 신념이 구세군에서의 봉사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구세군에서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임 후 부부는 호놀룰루로 돌아갔다.
3. 독립운동 및 정보 활동 경력
한길수는 1930년대부터 한국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중요한 정보 활동을 수행했다.
3.1. 한국 민족 운동 참여
1930년대에 한길수는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3.2. 진주만 공격 정보 제공
1941년, 한길수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었고, 미국 정부에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다. 그는 공격 이틀 전 일본 대사관이 차량을 팔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미국 국무부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격이 발생한 후, 국무부는 한길수가 언론에 자신의 경고를 공개할 경우 구금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3.3. 재미 한국인 권익 보호
한길수는 재미 일본인 강제 수용 정책에서 한국인들을 제외시키기 위해 미국 법무부를 성공적으로 설득하는 로비 활동을 펼쳤다. 당시 한국은 법적으로 일본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으로 재미 한국인들은 일본계 미국인들과 동일하게 분류되어 강제 수용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콜로라도 수용소에서 일본인과 똑같이 분류되었던 재미 한국인들의 대한민국 국적과 재산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
3.4.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1942년 여름, 한길수는 일본 지도자 도조 히데키와 히로타 고키가 한국인 애국자 박수원에 의해 총상을 입었다는 "비밀 보고서"를 미국 신문사에 유포했다. 1942년 12월에는 조지 애치슨 주니어와 로렌스 E. 새리스버리 등 국무부 관계자들을 만나 전쟁 후 미국의 독립 한국 정부 수립 지원에 대한 서면 보증을 얻으려 했다. 그는 이러한 보증이 일본 영토 내 한국인 요원들의 활동을 장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3년 5월 5일, 한길수는 새뮤얼 딕스타인 의원이 이끄는 하원 이민 위원회에 출석하여 중국인 배척법 폐지에 대한 증언을 했다. 그는 동아시아에 있는 자신의 스파이 네트워크가 일본 정부가 중국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해군 자산을 재배치하여 10만 명 이상의 숙련된 병력을 수송하여 "크리스마스 전"에 캘리포니아주 크레센트시티를 침공할 계획을 발견했다고 증언했다.
3.5. 냉전 시기 정보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길수는 소련 공산주의 확장에 반대하는 활동으로 초점을 옮겼다. 그는 중소 동맹, 소련의 핵무기 개발 계획, 그리고 한국 전쟁에 대한 정보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는 등 냉전 시대에도 정보 활동에 기여했다.
4. 해방 이후 활동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 한국이 해방된 이후, 한길수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입장을 표명하고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4.1. 신탁통치 반대
한길수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한국의 신탁통치 및 분할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4.2. 미국에서의 생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길수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에서 복숭아 농장을 경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5. 사망
한길수는 1976년 7월 1일에 사망했다.
6. 평가 및 유산
한길수의 공적은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조명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삶은 문화적으로도 재조명되었다.
6.1. 공적의 재평가
한길수의 공적은 1976년 그가 사망한 한참 뒤에야 비로소 널리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뚜렷한 독립운동 공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 간첩 활동 이력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로부터 보류 인물로 분류되었다.
6.2. 문화적 조명
오랫동안 그의 공적과 생애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5년 개봉한 대한민국 첩보 스릴러 영화 《HAAN 한길수》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조명되었다. 이 영화는 한길수가 한국 최초의 주목할 만한 이중 간첩으로서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임박을 알게 되고 이를 미국에 경고하려 하지만 무시당하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6.3. 기록물 및 자료
한길수의 개인 문서들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기록 보관소에 소장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1933년부터 1973년까지의 서신, 신문 스크랩, 논평, 그리고 중한인민연맹 대표로서 한길수가 작성한 한국 지하 보고서 텍스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와이오밍 대학교 미국 유산 센터에는 1933년부터 1978년까지의 프레드 E. 캐닝스 진주만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진주만 공격과 한국 내 일본 활동에 관해 한길수와 캐닝스가 미국 정부 관리들과 주고받은 서신이 포함되어 있다.
7. 관련 저작 및 인물
한길수의 삶과 활동은 여러 중요한 저작 및 인물들과 연관되어 있다.
7.1. 번역 및 저술 활동
한길수는 마쓰오 기노아키의 일본어 서적 《삼국동맹과 일미전》을 영어로 번역하여 1942년 《How Japan Plans to Win영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7.2. 관련 인물 및 서적
- 마쓰오 기노아키(松尾 樹明, 松尾 樹明마쓰오 기노아키일본어): 흑룡회 출신의 일본 제국 해군 장교이자 전략가로, 1940년 태평양 전쟁을 염두에 둔 전략 서적 《삼국동맹과 일미전》을 저술했다.
- 모턴 그로진스(Morton Grodzins영어): 1949년 《Americans Betrayed: Politics and the Japanese Evacuation영어》을 저술했다.
- 리처드 S. 김(Richard S. Kim영어): 2011년 《The Quest for Statehood: Korean Immigrant Nationalism and U.S. Sovereignty, 1905-1945영어》를 저술했다.
- 이승만: 1941년 7월 일본 제국의 정체와 실상을 알리고 진주만 공격을 통한 태평양 전쟁을 예언한 영어 서적 《일본내막기》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