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해군 경력
하세가와 기요시는 후쿠이현 아스와군 야시로촌(현 후쿠이시)에서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해군에 대한 열망을 품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병학교에 입학하여 해군 장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하세가와 기요시는 1883년 5월 7일 후쿠이현 아스와군 야시로촌(현 후쿠이시)에서 의사 하세가와 쓰구스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후쿠이현립 후쿠이 중학교 4학년 재학 중 해군을 지망하게 되었고, 학교를 중퇴한 후 세이소쿠 영어학교로 전학했다. 1900년 12월 17일 해군병학교 31기로 입학했으며, 입학 당시 196명 중 7등, 졸업 시에는 173명 중 6등을 차지했다. 후쿠이 중학교 시절부터 동급생이었던 쓰다 시즈에 해군 중장과 히가시바야시 이와지로 해군 소장이 그의 동기였다.
1.2. 해군사관학교 및 초기 복무
1903년 12월 14일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마쓰시마 순양함에 승선했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에 졸업했기 때문에, 그의 기수는 통상적인 장거리 항해 훈련을 경험하지 못했다. 1904년 1월 4일 야시마 전함으로 전속되었고, 같은 해 5월 23일에는 미카사 전함으로 옮겨 승선했다.
1.3. 러일전쟁 및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하세가와 기요시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1904년 8월 10일 황해 해전에서 경미한 부상을 입었고, 9월 10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1905년 5월 27일 결정적인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으며, 8월 5일 해군 중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9월 11일 미카사 전함이 사세보에서 폭발하여 침몰했을 때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이후 이쓰쿠시마 순양함에 배속되어 1906년 2월 15일부터 8월 25일까지 훈련 항해에 참여했다. 1907년 2월 23일 시로타에 구축함에 배속되었고, 1908년 9월 25일 해군 대위로 진급했다.
1909년 5월 25일 해군대학 을종 학생으로 입학했으며, 11월 24일에는 해군 수뢰학교 고등과정에 입학했다. 1910년 5월 23일 과정을 수료한 후, 5월 25일 아사마 장갑순양함의 분대장으로 배속되었고, 6월 24일에는 가사기 순양함으로 전속되었다. 10월 16일부터 1911년 3월 6일까지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아카풀코 등을 방문하는 항해에 참여했다. 3월 11일 제2함대 참모로 임명되었고, 12월 1일에는 해군 수뢰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12월 1일 해군대학 갑종 12기 학생으로 입학하여 1913년 12월 1일 해군 소좌로 진급했다. 1914년 5월 27일 해군대학을 16명 중 2등으로 졸업한 후, 잠시 미카즈키 구축함 함장을 역임하다가 제2함대 사령장관 부관으로 배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10월 칭다오 공략전에 참전했다. 1915년 2월 해군성 인사국에 배속되었고, 1916년 4월 1일에는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대신(이후 총리)의 비서관 겸 해군성 차석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2. 해군 경력 발전
하세가와 기요시는 해군 장교로서 다양한 주요 보직을 수행하며 경력을 발전시켰다. 특히 해외 무관 경험과 함대 사령관으로서의 리더십은 그의 해군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2.1. 워싱턴 해군 무관
1917년 12월 1일 워싱턴 D.C. 주재 주미 일본 대사관 해군 주재 무관 보좌관보로 임명되었고, 1년 후 해군 중좌로 진급했다. 당시 미국 내 반일 감정과 황화론이 고조되면서 스파이 활동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대사관 직원들은 대사관 내에서 일본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영어만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하세가와는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느꼈다. 그는 자신의 후임으로 해군 무관이 된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깊은 친분을 쌓았고, 이를 계기로 대미 중시 입장을 더욱 분명히 했다. 1919년 3월 20일 워싱턴 주재 해군 무관으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일본으로 귀국하여 해군성 인사국에서 다시 근무했다.
2.2. 함장 및 참모 경력
1922년 12월 1일 해군 대좌로 진급하여 해군성 인사국 제1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11월 1일 군령부에 배속되었다. 하세가와는 당시 상사인 가토 간지 제독과 사상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지키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모든 자격을 갖춘 후보자들이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는 동료 대좌이자 미래의 해군 중장인 데라시마 겐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두 사람은 하세가와가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1923년 11월 10일 다시 워싱턴 주재 해군 무관으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5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5월 1일 닛신 해방함(구 순양함) 함장으로 임명되었고, 12월 1일에는 나가토 전함 함장직을 맡았다.
2.3. 군축 회의 및 해군 차관
1927년 12월 1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요코스카 진수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 9월 1일 제3수뢰전대 사령관, 11월 30일 제2잠수전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이듬해 해군성 함정본부 제5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1년 12월 1일 구레 해군 공창장이 되었다. 1932년 10월 군령부에 재배속된 하세가와는 1933년 4월부터 10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군축 회의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1933년 12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34년 5월 해군 차관 겸 장관회의 의원이 되었다.
2.4. 함대 사령관
1936년 12월 1일에는 제3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37년 10월 20일에는 지나 방면 함대 사령장관 겸 제3함대 사령장관이 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파나이호 사건이 발생했다. 하세가와는 지나 방면 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여러 중국 해군 및 육군 수뇌부와 회담을 가졌는데, 많은 중국 장성들이 그의 예의 바른 태도에 감복하여 중일전쟁에서 대적했던 제독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난하는 이가 적었다고 전해진다. 파나이호 사건 당시 일본 해군기가 미국 포함 '파나이'를 오폭하여 격침시키고, 육군이 영국 포함 '레이디버드'를 포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세가와는 사태를 인지하자마자 즉시 미영 양국의 주재 기관에 유감과 사과를 표명했다. 이러한 신속하고 성실한 대응은 전후 도쿄 재판에서 그가 전범으로 기소되었을 때 연합국 측에 깊은 인상을 주어 무죄 석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8년 4월 25일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1939년 4월 1일 해군대장으로 진급했다.
3. 대만 총독

하세가와 기요시는 대만 총독으로 임명된 후, 재임 기간 동안 대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을 시행했다. 특히 그의 정책은 식민 통치 하에서의 사회적 변화와 주민들의 삶에 대한 영향을 중심으로 평가된다.
3.1. 총독 임명 및 재임
1940년 5월 1일 군사 참의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27일 제18대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총독은 퇴역 군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으나, 해군 대신 오이카와 고시로는 하세가와가 현역으로 남아 총독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해군이 추진하던 남진 정책의 중요성 때문이었으며, 해군병학교 동기인 하세가와를 현역에 남겨두고 싶어 하는 오이카와 개인의 의향도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다. 하세가와는 12월 16일 타이베이에 도착하여 총독직에 취임했다. 취임식 후 환영 리셉션에서 상기된 기분으로 시중을 들던 여종업원을 들어 무릎에 앉히고 환영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당시에도 취재진이 경악할 정도로 노골적인 행동이었으며, 현대적 관점에서는 명백한 성희롱으로 간주될 수 있다.
3.2. 대만 통치 정책 및 영향
하세가와 총독 재임 기간 동안 타이베이 제국대학 예과가 설치되었고, 초등 의무 교육이 강화되는 등 교육 보급에 힘써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전임 총독 고바야시 세이조가 추진했던 급진적인 황민화 운동을 완화하는 정책을 폈다. 고바야시 총독은 대만 민간 신앙을 일본의 신토로 대체하려 했으나, 하세가와는 이러한 급진적인 동화 정책을 누그러뜨렸다. 이러한 정책은 식민 통치 하에서 대만 사회의 문화적,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주민들의 권리와 복지에 대한 고려가 일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1944년 12월 30일 총독직을 사임하고 군사 참의관으로 전출되었으며, 후임 총독으로는 대만 군사령관이었던 안도 리키치 육군대장이 겸임하는 형태로 취임했다.
4. 후기 해군 경력 및 전후
하세가와 기요시는 종전 직전까지 해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본의 항복 이후에는 전범 혐의로 구금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전후에는 새로운 일본 해군 재건에 기여하기도 했다.
4.1. 종전 직전 및 예비역 편입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수립될 때 이노우에 시게미 해군 차관과 함께 해군 대신의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이노우에와 다카기 소키치 등이 요나이 미쓰마사의 유임을 추진했고, 하세가와 본인도 요나이의 유임을 지지하여 대신에 취임하지 않았다. 1945년 2월, 군사 참의관이었던 하세가와는 해군 특명 전력 사찰사로 임명되어 화약창, 진수부, 수중 및 수상 특공 관련 시설을 사찰했다. 같은 해 6월 12일, 해군 전비는 사기는 높지만 물자 부족으로 불비하다는 내용을 쇼와 천황에게 보고했다. 그는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직전까지 해군 전력 사찰사로서 첨단 해군 기술 연구를 담당하는 부서를 이끌었다. 11월 30일 해군성이 폐지되면서 40년이 넘는 복무를 마치고 모든 제국 해군 장교들과 함께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4.2. 전후 구금 및 재판
1946년 말, 하세가와는 다른 많은 주요 정치인 및 군 지휘관들과 함께 미국 점령 당국에 의해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는 파나이호 사건 당시 중국 해군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GHQ 장교들의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미국과 영국 장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했고, 그의 성실한 태도는 재판부에 깊은 인상을 주어 무죄로 석방되었다. 1947년 1월 14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1947년 11월 28일 공직 추방 가 지정 대상이 되었다.
4.3. 해상자위대 창설 기여
스가모 구치소에서 석방된 후, 1951년에는 구 일본 제국 해군 장교들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에 참여하여 해상자위대 창설을 감독하는 데 기여했다. 1952년 11월 1일에는 스이코카이 고문으로 활동했다.
5. 개인 생활
하세가와 기요시는 온화하고 포용력 있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가족 관계와 인간관계는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5.1. 가족 관계
하세가와 기요시는 하세가와 스마코와 결혼했다. 슬하에 장남 하세가와 하지메(미쓰이 물산 근무)와 차녀 하세가와 야스코를 두었다. 그의 손자는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인 짓소지 아키오이다. 짓소지 아키오는 자신의 저서 '괴수 나날'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이 만든 첫 장편 극영화 '무상'을 본 후였기에 "할아버지에게는 자극이 너무 강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5.2. 성격 및 인간관계
하세가와는 온화하고 포용력이 깊으며 도량이 넓은 인물로 전해진다. 결단력이 빠르고 한번 마음먹으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모토로 삼았지만, 동시에 대화를 중시하고 적대적인 상대에게도 철저히 대화를 시도하며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미 협조 조약파와 영미 강경 함대파 간의 대립이 잦았고, 대외적으로는 영국, 중국, 미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던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세가와에 대한 비방이나 중상이 거의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두터운 인망을 엿볼 수 있다. 이노우에 시게미는 역대 대부분의 해군대장들을 무능하다고 혹평하며 3류 취급을 했지만, 하세가와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평가하여 2류 대장으로 분류했다. 스즈키 내각 조각 당시 요나이 미쓰마사를 해군 대신으로 추천한 하세가와의 언행을 "역시 하세가와 씨답다. 지금의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세가와 씨 같은 태도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6. 훈장 및 표창
하세가와 기요시는 그의 오랜 해군 복무와 공적을 인정받아 다양한 훈장과 표창을 수여받았다.
- 정8위 (1904년 10월 10일)
- 정5위 (1927년 12월 28일)
- 종4위 (1932년 12월 15일)
- 정4위 (1936년 12월 15일)
- 종3위 (1939년 4월 15일)
- 훈1등 서보장 (1934년 4월 29일)
- 훈1등 욱일대수장 (1938년 8월 13일)
- 공1급 금치훈장 (1942년 4월 4일)
-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 (독일국, 1937년 11월 22일)
- 특급 동광훈장 (중화민국 정부, 1944년 7월 20일)
7. 사망 및 유산
하세가와 기요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25주년이 되는 날에 사망했으며, 그의 삶은 후대에 다양한 평가와 영향을 남겼다.
7.1. 사망
하세가와 기요시는 1970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25주년이 되는 날, 가마쿠라시의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87세였다. 그의 장례식은 같은 해 9월 9일 아오야마 장의소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묘소는 가마쿠라시의 가마쿠라 영원에 안장되어 있다.
7.2. 유산 및 영향
하세가와 기요시는 해군 장교로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친분을 쌓는 등 대미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다. 특히 파나이호 사건 당시 보여준 신속하고 성실한 사과와 대응은 전후 A급 전범 혐의에서 무죄로 석방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대만 총독 재임 시에는 급진적인 황민화 운동을 완화하고 교육을 강화하는 등, 식민 통치 하의 대만 주민들에게 일정 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미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후에는 해상자위대 창설 자문 위원회에 참여하여 일본 해군 재건에 기여하는 등, 그의 업적은 일본 해군 역사와 전후 일본의 재건 과정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그의 손자인 영화감독 짓소지 아키오와의 관계 또한 그의 개인적인 유산의 한 부분으로 언급된다.